"백련교(白蓮敎)": 중국에 수백년간 해를 끼친 조직
글: 불교헌화야(佛敎獻花也)
백련교를 얘기하면, 많은 사람의 머리 속에 떠오르는 생각은 아마도 영화속의 장면일 것이다: 한 무리의 흑포(黑袍)를 입은 사람들이 몰래 숨어서 일을 꾸미면서 음모궤계를 일삼는 말그대로 사교(邪敎) 조직의 모습이다. 영화드라마 속에서, 백련교는 무공이 고강한 악역이거나, 강호를 혼란시키는 막후의 검은 손으로, 신비감과 부정적인 색채로 충만하다. 그러나, 현실의 백련교가 정말 그러했을까?
백련교의 역사는 짧지 않다. 남송에서부터 청나라까지, 심지어 근대에도 그 그림자가 어른거려, 여러 왕조에 걸쳐서 내려왔다. 단순한 종교단체도 아니고, 무슨 강호방파도 아니며, 신앙, 반항과 사회혼란이 섞여있는 복잡한 산물이다. 백련교를 잘 이해하려면 그 기원부터 얘기해야 한다. 그리고 나서 그 변화과정을 살펴보고, 다시 어떻게 역대통치자들의 골치거리가 되었는지를 살펴봐야 한다.
- 백련교는 어디에서 왔는가? 남송부터 얘기해야 한다.
백련교의 최초의 뿌리는 남송 소흥(紹興)3년 즉 1133년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이때 모자원(茅子元)이라는 승려가 나타나서 백련교를 창립한다. 당시의 남송은 사회갈등이 아주 첨예해져 있었다. 농민들은 살기 힘들었고, 관청의 압박도 심했다. 그리하여 하층백성들에게는 정신적으로 의지할 것이 필요했다. 모자원은 그 기회를 잡아 불교정토종(佛敎淨土宗)의 종교조직을 이용하여 핵심은 아미타불을 숭배하고, 신도들로 하여금 염불하고 계율을 지켜, 사후 서방극락세계에서 왕생하는 것을 얻어내는 것이다.
이 교의는 언뜻 듣기에 매우 간단하고, 무슨 고심막측한 이론은 없는 것같다. 그리고 신도들에게 출가하도록 요구하지도 않고, 집안에서 수행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니, 백성들에게 문턱이 매우 낮은 것이다. 그래서, 백련교가 나오자마자 매우 인기를 끈다. 특히 가난한 농민과 하층노동자들 사이에서 놀라운 속도로 전파되었다. 초기의 백련교는 매우 착실한 편이었다. 주로 사람들에게 좋은 일을 하도록 권하고, 종교활동을 했을 뿐, 무슨 큰 일을 벌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백련교가 항상 그렇게 조용히 지낸 것은 아니었다. 원(元)나라에 이르러 성격이 바뀌기 시작한다. 원나라때, 몽골인들이 중원을 통치했고, 한인은 지위가 맞았으며 사회갈등도 격화된다. 백련교의 교의도 업그레이드된다. 염불뿐아니라, "미륵불하생(彌勒佛下生)", "명왕출세(明王出世)"를 선전하기 시작한다. 이게 무슨 뜻인가? 세계가 혼란에 빠졌다는 것이고, 미륵불이 내려와 중생을 구하여 새로운 세계를 건립한다는 것이다. 이런 말세론이 나오자 흡인력은 배가 된다. 특히 난세에 백성들은 그런 주장에 끌리는 법이다.
원나라조정의 백련교에 대한 태도는 비교적 관용적이었다. 심지어 한때는 관방에서 인정을 해주기도 했고, 공개적으로 전도할 수 있게 했다. 그러나 원나라말기에 이르러, 사회가 철저히 혼란에 빠지자, 백련교는 "염불회"에서 "조반방(造反幇, 반란무리)"로 바뀌게 된다. 이때의 백련교는 이미 단순한 종교조직이 아니고, 반항색채를 지닌 민간역량이 되었다.
3. 원말청초: 백련교의 제1차 전성기
백련교가 이름을 떨치게 된 것은 원나라말기의 홍건적(紅巾賊)의 난이다. 이 사건은 1351년에 발생했고, 우두머리는 한산동(韓山童)과 유복통(劉福通)이다. 이 두 사람은 모두 백련교의 신도였고, "미륵불하생"의 구호를 내걸면서 "천하가 대란에 빠졌고, 미륵이 내려왔다"는 구호를 내세운다. 그들은 이런 이야기도 만들어낸다. 한산동이 바로 송휘종의 후손이라고 하면서 모두 힘을 합쳐 원나라를 무너뜨리자고 한다.
그때의 원나라는 이미 엉망진창이었다. 각종 잡세를 가혹하게 구더우가고, 전염병과 홍수가 빈발하여, 백성들은 살아갈 수가 없었다. 백련교의 이런 주장은 불씨와 같이 한번 불이 붙자 금방 퍼져나간다. 한산동은 자신들의 표지로 붉은두건(紅頭巾)을 맨다. 반란군은 그리하여 "홍건군"이라고 부르게 된다. 반란규모는 적지 않았다. 하남부터 시작하여 여러 개의 성을 석권하고, 원나라통치를 위기일발로 몰아넣는다.
그러나, 한산동은 운이 좋지 못했다. 거사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체포되어 죽임을 당한다. 유복통이 그를 이어 계속했지만 결국 홍건군은 신정권을 건립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원나라는 확실히 그들 때문에 아주 고생했다. 주원장(朱元璋)이 명나라를 건립할 수 있었던 것은 홍건군이 원나라를 혼란시킨 국면과 간접적인 관계가 있다.
명나라가 건립되자, 주원장은 이 백련교의 '위력'을 잊지 않았다. 그 자신이 하층출신으로 하층백성들이 선동당하면 얼마나 무서운지 잘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백련교에 대해 전혀 호감이 없었고, 직접 엄중하게 단속하도록 명한다. 백련교를 금교(禁敎)로 규정하고, 붙잡으면 죽여버렸다. 전혀 봐주는 법없이. 다만 백련교는 생명력이 아주 질겼다. 금지해도 소멸하지 않았고, 오히려 지하에서 활동하게 된다.
3. 청왕조: 백련교가 다시 일어나다.
청나라에 이르러, 백련교는 제2의 전성기를 맞이한다. 이때의 청나라는 비록 전반기에 매우 강성했지만, 중기에 이르러 토지겸병, 관리부패, 세수가중으로 백성들이 살기 힘들어진다. 백련교는 그 틈을 타서 권토중래한다. 교의에 민간색채를 더욱 추가시킨다. 에를 들어, "무생노모(無生老母)", "진공가향(眞空家鄕)"같은 것들이다. 그 뜻은 신도들이 죽은 후에 노모의 곁으로 가서 잘 산다는 것이다.
청나라의 가장 유명한 백련교의 난은 가경(嘉慶)연간의 천초(川楚, 사천, 호북)백련교의 난이다. 이 사건은 1796년에 일어나 9년간 지속되었으며, 사천, 호북, 섬서, 하남, 감숙의 5개성으로 파급되어 규모가 엄청나게 컸다. 우두머리는 왕삼괴(王三槐), 서천덕(徐天德)같은 사람들이다. 그들은 백련교의 명의로 수십만 농민을 모아서 반란을 일으킨다. 청정부는 남은 힘을 모두 짜내고, 백만냥이상의 은자를 들여, 겨우 이 난을 진압할 수 있었다.
비록 반란이 실패했지만, 청나라도 원기를 크게 상한다. 백련교의 파괴력은 여기에서도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사회혼란, 경제마비, 수십만명의 사망. 청나라정부는 그때부터 백련교를 뼛속까지 미워하고, 백련교를 최대의 위협으로 보아 소탕을 벌인다.
4. 백련교는 어떤 조직인가?
그렇다면, 백련교는 어떤 조직인가? 간단히 말해서, 그것은 종교신앙과 반항정신이 섞인 민간단체라는 것이다. 핵심은 교의(敎義)인데, 초기에는 불교정토종의 노선이었는데, 나중에는 도교, 민간신앙이 섞여 들어오고, 심지어 말세 유토피아의 의미도 갖게 된다. 조직에서 등급이 분명했다. 교주(敎主), 향주(香主)같은 두목이 있고, 그 아래에는 많은 하층신도가 있었다. 주로 농민, 수공업자같은 힘들게 살아가는 백성들이었다.
백련교의 신도는 왜 이렇게 많았을까? 그것은 백련교가 백성들이 아픈 점을 잘 장악했기 때문이다. 매번 사회가 혼란될 때마다 관청의 압박은 더욱 심해진다. 그러면 백련교가 나타나서 '구세'하겠다고 하여, 절망에 빠진 사람들에게 한줄기 희망이 되었다. 특히 "미륵불하생"의 이야기는 난세의 강심제였다. 그러나 그것은 무슨 적극적인 조직이 아니었고, 반란은 비록 압박에 항거하는 것이지만, 매번 피가 강물처럼 흘렀고, 사회는 더욱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백련교의 활동방식은 아주 특별했다. 정규군같이 규율이 있지 않았고, 더 많은 경우에 종교식 동원이었고, 어느 정도 무리가 모이면 반란을 일으켰다. 내부에는 비밀결사의 특성도 있었다. 예를 들어, 암호사용, 부주(符呪)같은 것으로 연락하여 신비로운 색채가 있었다. 이는 통치자들이 말만 들어도 골치아파하는 이유였고, 실제로 통제하기 너무나 어려웠다.
백련교를 얘기하면 사람들이 가지는 첫번째 인상은 영화속에서 본 것이다. 예를 들어, 홍콩의 옛날 영화를 보면, 백련교도는 걸핏하면 방화살인약탈을 저지른다. 교주는 음험하고 교활하며, 악역을 맡는다. 이런 고정된 이미지는 눈길을 끄는데는 좋지만 역사의 진상과는 큰 차이가 있다.
진실한 백련교는 그렇게 과장되지 않았다. 그들은 무슨 무공고수로 조직된 사교도 아니고, 순수한 범죄집단도 아니다. 초기에 그것은 단지 종교조직이었다. 나중에 사회의 압박으로 반란의 역량으로 된 것이다. 영화속에 나오는 신비한 의식, 악독한 수단은 대부분 예술적 가공이며, 현실속에서 백련교는 신앙과 구호로 사람을 모았고, 영화에서처럼 화려하고 요란하지 않았다.
그러나, 영화가 전혀 근거없는 것은 아니다. 백련교는 확실히 적지 않은 파괴적인 일을 벌였다. 예를 들어, 반란으로 인한 사상자와 혼란이다. 확실히 역사상 적지 않은 책임이 있다. 그래서 영화드라마에서 과장한 것도 그들의 부정적인 일면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백련교는 중국에서 수백년간 존속하면서, 위해가 정말 적지 않았다. 먼저 직접적인 것을 말하자면, 매번 반란때마다 사회는 대동란에 빠진다. 혼건적의 난은 원나라를 혼란에 빠트렸고, 천초백련교의 난은 청나라를 초조하게 만들었다. 이런 사건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고, 얼마나 많은 집안이 망했는지는 계산조차 하기 어렵다. 경제적으로도 손실이 컸다. 전투를 벌이는 지방은 전답이 망가지고, 세수도 사라지며, 정부도 돈을 들여 진압해야 했다. 그렇게 악순환이 지속되었다.
간접적인 것을 말하자면, 백련교의 교의에 적지 않은 미신과 극단사상이 포함되어 있다. 예를 들어, "말세구원"이라는 말이다. 듣기에 사람을 흥분시키지만, 손쉽게 주화입마에 빠질 수 있고, 비이성적인 일을 저지를 수 있다. 신도들 중에 세뇌된 사람이 적지 않았다. "무생노모"같은 신비한 개념은 비록 사람들에게 정신적인 위안을 주지만, 적지 않은 사람으로 하여금 현실의 노력을 포기하고, 그저 부처에게 빌기만 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백련교는 사회안정에도 영향을 주었다. 그들이 난을 일으키면, 정부에서는 병력을 모아서 보내야 했고, 백성들은 힘들어져서 함께 재앙에 빠진다. 청나라의 천초백련교의 난에서 군비만 억냥이상을 쓴다. 이는 몇년간의 재정수입에 상당한다. 이런 돈은 원래 도로를 닦고, 재해를 구제하며, 민생을 개선하는데 쓰일 돈이었다.
당연히 백련교가 모두 잘못된 것은 아니다. 반란은 어느 정도 하층백성의 고통을 반영한. 원말, 청중기는 관료가 부패하고, 지주는 착취하여, 농민들이 살 방법이 없어졌다. 백련교가 들고 일어난 것은 어떻게 보더라도 백성들을 위해 깃발을 든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백련교는 인원동원능력이 아주 강했고, 확실히 백성들의 마음을 잡고 있었으며, 절망에 빠진 사람들에게는 한줄기 희망이었다.
다만, 이런 "진보적"인 성격은 그의 "파괴적"인 성격과 비교하면 실제로 한계가 있다. 압박에 반항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니다. 그러나 매번 반란은 무슨 장기적인 결과를 가져오지 못했고, 오히려 사회를 더욱 혼란하게 만들었고, 백성을 더욱 힘들게 만들었다. 백련교는 무슨 건설적인 주장을 하지 못했고, 구호만으로는 아무 일도 이룰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결국은 담화일현(曇花一現)한 것이다.
백련교는 명,청 두 왕조에 의해 심하게 탄압받았지만, 그 질긴 생명력은 깜짝 놀랄 정도였다. 청나라후기, 백련교는 해체되어 민간으로 흩어진다. 어떤 사람은 명칭을 바꾸어 지방교파가 되고, 어떤 사람은 다른 신앙과 섞여서 살아간다. 근대에 이르러, 백련교의 영향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어떤 분파는 의료, 교육같은 제대로 된 일을 하면서, 사회에 융합되어갔다. 그러나 어떤 분파는 극단으로 향해서, 치안을 교란시키는 소집단이 된다.
이것이 설명하는 것은 무엇인가? 백련교는 적응력이 아주 강하다는 것이다. 사회에 어떤 불공정한 점이 있으면, 그들은 생존공간을 찾아낼 수 있다. 그 역사는 하나의 거울과 같다. 중국고대하층인민의 고통을 반영하고, 통치자의 무능을 반영한다.
백련교를 사교라고 부른다면, 그것은 종교적 기반이 있고, 또한 확실히 적지 않은 사람들의 마음을 구원해주었다; 그러나 그것을 영웅이라고 부른다면, 사회를 교란시키고, 무수한 사람을 해쳤다. 그래서 백련교를 평가하는 것은 간단하게 레테르를 붙일 것이 아니고, 전면적으로 보아야 한다.
백련교에 압박에 대한 반항의 일면이 있다. 이건 인정해야 한다. 백성들은 핍박을 받아 어쩔 수 없이 목소리를 냈고, 최소한 통치자로 하여금 백성들의 원망이 얼마나 깊은지를 알게 했다. 다만 그 수단은 너무 거칠었고, 조직은 너무 느슨했으며, 교의는 너무 엉성했다. 그리하여 최종적으로 아무 것도 바꾸지 못했고, 오히려 설상가상이 되게 만들었다. 이렇게 보면, 백련교는 무슨 구세주가 아니고, 무슨 순수한 악당도 아니다. 복잡한 산물이다. 당시의 사회환경과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가 있다.
백련교는 중국에서 수백년간 큰 일을 벌이기도 했고, 악명을 남기기도 했다. 영화속에서는 그것을 사교로 그렸지만, 현실속에서는 그렇지는 않았다. 그저 신앙에 의지하여 사람들이 모인 조직이었다. 난세에 생겨났고, 난세를 더욱 혼란으로 만들었다. 하층인민의 그림자일 뿐아니라, 혼란세월의 흔적이다. 백련교를 이해하려면 영화드라마의 틀에서 벗어나 역사로 돌아가서 답안을 찾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