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여우샤(張友俠)와 쉬치량(許其亮), 왕샤오쥔(王少軍), 허홍쥔(何宏軍)의 죽음...
글: 호해(胡亥)
해외여론의 쉬치량(許其亮) 죽음이 가진 정치적인 의미에 대한 해석은 비교적 수박겉핡기식이고, 깊이 있는 분석이나 정곡을 찌르는 통찰력은 결핍되어 있다. 그들은 쉬치량의 죽음의 막후원인에 대해 정확히 판단할 수 없어서, 유체고별식에서 외부적으로 드러난 모습을 살피는데 머물 뿐이고, 모호하게 책임을 시진핑(習近平)에게 돌리고 있으며, 아마도 그가 막후조종자라고 추측하고 있다. 그러나, 쉬치량의 죽음이 중국공산당에 끼치는 영향에 대하여는 깊이있게 검토한 사람이 드물다. 필자의 생각에, 쉬치량의 죽음은 장여우샤가 주도하는 왕조교체의 선언이다. "나를 따르면 살고, 나를 거스르면 죽는다(順我者昌, 逆我者亡)"는 신호를 내보낸 것이다. 비록 당내기구의 방해와 원로파의 분열에 직면해 있지만, 장여우샤는 그 어떤 댓가를 치르고서라도 시진핑 제5대지도자의 통치를 끝장내고, 권력교체를 하겠다고 준비하는 것같다. 더욱 명확히 말하자면, 만일 당내기구와 원로파가 내부분열로 결단을 내릴 수 없다면, 군대에서 필요한 모든 수단을 취하여 강제로 현재정부의 집정방향을 바꿀 것이라는 것이다.
첫째, 쉬치량에 대하여 한때 시진핑과 장여우샤가 손을 잡고 군권을 박탈했다.
모두 알고 있다시피, 19대때 장쩌민의 군대내 심복인 여우시꾸이(由喜貴), 자팅안(賈廷安)이 군대직위를 사직한 것은 장쩌민(江澤民)이 최종적으로 군대에 대한 장악을 포기한 것을 의미했고, 시진핑이 쉬치량 상장을 우두머리로 하는 공군을 군대를 장악하는 발판으로 삼아, 군대에 대한 절대적인 권력을 장악했고, 수도방위를 핵심으로 하는 임시군대장악노선을 취하여, 베이징에 대해 군사봉쇄와 통제를 실시했다. 이 놀라운 조치는 일련의 중대한 영향을 발생시킨다.
이샤오광(乙曉光) 공군상장이 중부전구사령관을 맡아, 30만육군야전군을 베이징으로 진입시키고, 안으로는 중남해부터, 밖으로는 텐진지저우구(天津薊州區)까자, 9개 라인의 방어선으로 베이징을 단단히 포위했다. 최우선 임무는 바로 중앙경위국(中央警衛局)의 정치기능을 박탈하고, 베이징 도시방어를 접수하고, 모든 도시내의 전략거점을 점거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중남해와 서산의 경위방어임무, 모든 지하통로의 방어 및 사용권, 그리고 기타 군사전력시설까지. 그렇게 베이징성을 중부전구 야전부대의 통제하에 둔다. 동시에 중앙국가영도기관을 군대의 감시하에 둔다.
중앙경위국의 파산은 중공지도층과 무장역량간의 유대를 끊어버렸고, "당이 총부리를 지휘한다"는 말은 헛말이 되어버렸다. 군대는 시진핑을 제외하하고, 그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권력핵심이 되어 버렸고, 당정기관의 위에 군림하게 되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시진핑이 처음 실권을 장악했을 때, 빌린 역량은 공군이다. 그리고 의지한 것은 쉬치량, 이샤오광등 공군장군으로 구성된 군내 엘리트였다. 그때 이런 말이 유행했다: "시자쥔(習家軍)이 바로 공군이다. 공군이 바로 시자쥔이다." 결국 근본적으로 시진핑의 권력기반을 다지고, 시진핑이 양회기간동안 헌법수정을 하고, 나아가 대권을 독점하는 군사적 기초가 되었다.
토사구팽의 제왕술에 비추어 보면, 시진핑은 권력을 안정화시킨 후 점차 군대의 일상업무를 주관하는 공군집단에 대해 경계심을 갖게 되고, 공군을 몰아고, 푸젠의 제31군의 사람으로 대체하려는 생각을 갖게 된다. 그리하여 겨우 63세의 공군상장 이샤오광은 조용히 퇴역하고, 전인대에서 말년의 보내게 된다. 2021년 9월, 중부전구사령관은 푸젠31군출신의 젊은 장군 린샹양(林向陽)이 맡는다. 그후 무경정위(武警政委) 안자오칭(安兆慶), 북부전구정위 판샤오쥔(范驍駿), 공군사령관 딩라이항(丁來杭)등 궁군장군들도 차례로 퇴역한다. 이렇게 공군시대는 끝이 난다. 쉬치량은 1인사령관이 되어, 권위와 지위가 크게 약화된다. 이 과정에서 장여우샤의 역할이 점점 두드러졌고, 그는 시진핑이 가장 믿는 심복이 된다.
둘째, 장여우샤의 굴기는 저우홍쥐(周洪許)가 8341부대의 수뇌를 맡은 것이 표지로 된다.
시진핑이 공군장군들을 억압하는 과정에서 중앙군사위 층면에서 장여우샤의 적극적인 협조를 받았다. 이를 보면 두 사람의 관계가 신속히 가까워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시진핑의 생각 속에서 중앙경위국에 대하여는 그다지 좋은 인상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리하여 항상 야전군에서 전투형의 인물이 8341부대의 병권을 장악하기를 원했다. 그리하여 말을 잘 듣던 장여우샤는 시진핑의 요청하에 전 40군 포병단 단장이자 당시 북부전구 육군부참모장으로 있던 저우홍쉬 소장을 추천한다. 이샤오광이 퇴역하는 것과 거의 동시에, 2021년 7월, 저우홍쉬는 정식으로 중앙경위국 국장의 직위를 맡는다. 저우홍쉬가 등장한 것은 당시 시진핑의 장여우샤에 대한 고도의 신뢰와 중시를 엿볼 수 있다. 두 사람의 관계는 이때 최고조에 달한다. 이어서 새로운 단계의 힘겨루기가 이어진다.
셋째, 왕샤오쥔(王少軍)의 비명횡사로 시진핑, 장여우샤의 갈등이 폭발한다.
등소평(鄧小平)이 사망한 후, 중앙경위국은 계속하여 장쩌민의 충실한 호위무사인 여우시꾸이가 통제하고 있었따. 여우시꾸이는 계속 승진하여, 2004년에는 상장으로 승진하고, 장쩌민의 수렴청정에 중류지주(中流砥柱)가 된다. 여우시꾸이는 1939년생으로 2007년에 이르러 그의 나이는 68세를 넘어가 일찌감치 은퇴연령에 도달했다. 장쩌민은 그가 계속하여 일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암도진창(暗渡陳倉)의 수법으로 여우시꾸이를 중앙경위국 당위제1서기로 임명하여, 명목상 은퇴했지만, 실제로는 서기의 신분으로 계속하여 중앙경위국의 실권을 장악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국장의 자리는 여우시꾸이의 오랜 부하이자 성실한 차오칭(曹淸)에게 맡겨, 자신의 허수아비로 계속하여 말을 듣게 하였다. 사람들의 이목을 가리기 위하여, 18대에 이르러, 차오칭은 이미 10년간 재직했고, 더 이상 기용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여우시꾸이는 차오칭을 내보내고, 다시 더욱 젊은 허수아비인 왕샤오쥔을 중장으로 승진시키고 새로운 지도자 시진핑의 안전과 경위를 책임지게 한다. 세월이 흘러 19대가 되자, 여우시꾸이는 마침내 장쩌민을 따라 하야하고, 왕샤오쥔도 나이가 차서 은퇴하고, 전국정협에서 한직을 맡는다.
저우홍쉬는 중앙경위국을 장악한 후, 분명 장여우샤와 적극적으로 협력했다. 시진핑은 그제서야 깨닫는다. 자신이 멍청해서 큰 실수를 저질렀다는 것을. 그리하여 급히 만회할 대책을 생각해낸다. 그리하여 시진핑은 이미 은퇴한 왕샤오쥔을 떠올렸고, 왕샤오쥔을 고문이라는 명목으로 다시 중앙경위국으로 불러, 저우홍쉬를 도와 경위국의 업무에 참여하게 한다. 우리는 알고 있다. 장쩌민이 말년에 가족의 안전을 시진핑에게 부탁하면서, 정치적으로 그를 발탁해주고, 시진핑을 위하여 정계의 각종 장애를 제거해주었다는 것을. 장쩌민의 심복과 부하들은 모두 장쩌민의 지시에 따라 시진핑을 주군으로 모셨고, 시진핑을 위해 힘을 바치고 목숨을 걸었다. 왕샤오쥔은 여우시꾸이의 심복이며 전형적인 장쩌민파의 고관이다. 그는 자연스럽게 시진핑에 충성을 다했다. 옛날 장쩌민에게 충성을 다바친 것과 마찬가지로. 여기서 지적해야 할 점은 이 수수께끼같은 국면을 이해하는 핵심은 반드시 시진핑과 장쩌민이 대립관계라는 신화를 깨버리는 것이다. 장쩌민과 시진핑간에는 대립관계가 아니라, 이익이 관련되는 사제관계라고 보아야 한다. 장쩌민과 시진핑은 한몸이고, 두 사람은 정치적으로 고도로 합체되어 있다. 이것이 현재의 중국정치를 파악하는 관건이다.
이미 2선으로 은퇴한 전 중앙경위국장 왕샤오쥔이 다시 중앙경위국으로 돌아와서 고문의 직위를 맡고, 공개적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그는 2022년 1월 11일 성부급(省部級, 성장, 장관급)주요간부전제연구검토반에서 중앙판공실 부주임 탕팡위(唐方裕)와 국무원신문판공실 주임 장젠궈(蔣建國)의 사이에 앉아 있었다. 왕샤오쥔의 재기용은 장여우샤와의 갈등을 격화시킨다. 결국 20대이후인 2023년 4월 파열국면이 나타나서 왕샤오쥔이 비명에 죽는다.
2023년 7월 24일의 관방보도에 따르면, 왕샤오쥔은 4월 26일 "병을 치료했으나 목숨을 구하지 못해" 베이징에서 사망했다. 만일 병사라면, 왜 3개월이나 지나서 장례식을 치렀을까? 사람들은 이로 인하여, 왕샤오쥔은 분명 돌연한 사변으로 사망했고, 비명횡사한 것이라고 본다. 민간의 소문에 따르면, 왕샤오쥔 중장은 시진핑의 통치에 불만을 품었고, 그리하여 각측과 연락하여 정변을 일으키고자 했다. 그러나 사전에 누설되어 시진핑에 의해 현장에서 즉결처형되었다고 한다. 사람들은 책임을 시진핑에게 넘겼다. 이건 충분히 이해가 된다. 어쨌든 군대내의 바부패로 죽은 사람은 수도 없이 많기 때문에. 그렇다면, 이 사건의 진상은 도대체 어떠할까? 지금까지도 하나의 수수께끼이다. 오늘날 장여우샤가 굴기한 배경을 보면, 그 내부사정을 다시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마치 우리에게 또 다른 장면을 보여주는 것같다. 전 중앙경위국 국장으로서 왕샤오쥔의 직접충성도는 매우 높았다. 그리하여 시진핑을 배반했을 가능성은 비교적 낮다. 그리고 그는 시진핑을 위해 일했고, 시진핑에 반대하는 활동을 했을 가능성이 없다. 정변설은 아무런 근거가 없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의심해볼 수밖에 없다. 장여우샤의 동기가 더욱 명백하다. 어쨌든 왕샤오쥔은 최고급의 정치투쟁에 말려들었고, 상대방의 앞길을 막았다. 그리하여 금기를 범하게 된 것이다. 왕샤오쥔이 죽은 후, 중앙경위국은 철저히 군대가 장악하게 된다.
넷째, 쉬치량의 죽음은 시진핑이 군권을 다시 장악할 마지막 한줄기 희망을 없애버렸다.
이상의 맥락을 보면, 쉬치량이 군권을 상실하는 과정에서, 장여우샤와 중대한 갈등을 겪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심지어 서로 원수가 되었을 것이다. 통상적인 이치대로라면, 은퇴후의 쉬치량이 그저 자신의 분수를 지키며 조용히 살아간다면, 생명의 위협은 없어야 한다. 그러나, 시진핑은 장여우샤에 의해 군대내의 권력을 빼앗기게 된 후, 마음이 급한 나머지, 중병에 든 환자가 마구잡이로 의사들을 찾아가는 것처럼, 쉬치량에게 군대내 인사들을 설득해달라고 부탁했을 것이다. 이를 통해 군권을 다시 회수하기 위해서. 쉬치량은 경력도 깊고, 명망도 있다. 그가 직접 나서게 되면 장여우샤에게 큰 위협이 된다. 그리하여, 장여우샤는 아마도 왕샤오쥔사건의 방식을 복제하여 극단적인 수단으로 쉬치량을 해결하고, 이를 통해 장애를 철저히 제거한 것이다. 비록 추측에 불과하지만, 군권쟁탈전의 논리에는 부합한다.
다섯째, 장여우샤의 반장쩌민성향은 현재 원로파의 분열을 조성했다.
앞에서 추론한 바와 같이, 시진핑은 장쩌민의 의발을 전면적으로 계승했고, 여러 장쩌민파의 인사들은 시진핑의 문하로 들어간다. 비교적 유명한 인물로는 왕후닝(王滬寧), 딩쉐샹(丁薛祥), 한정(韓正)등이 있다. 군대내에도 그런 사람이 있다. 예를 들어, 친셩샹(秦生祥), 허홍쥔(何宏軍), 왕샤오쥔, 그리고 쉬치량등이 모두 일찌기 장쩌민파의 군대내 심복이었다. 쉬치량은 비록 등소평의 비서 왕뤼린(王瑞林)이 발탁했지만, 장쩌민시대에 중용받아, 휘황한 시기를 보냈다. 그러니 장쩌민파의 골간이라고 해도 된다. 이를 보면 이상의 4명의 최고위급 장쩌민계장군들은 모두 최후가 좋지 못했다. 3명은 죽었고, 1명은 낙마했다. 우리는 장여우샤가 장쩌민세력에 대해 좋은 인상을 갖지 못하고 있고, 그리하여 독한 수법을 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장여우샤의 장쩌민파인사에 대한 반감을 가진 경형은 정부개조과정에서 반드시 반영될 것이다. 그는 후진타오, 원자바오, 왕양같은 옛날 장쩌민에 의해 주변으로 밀려났던 공청단파인사에 의존할지언정, 다수를 점하는 장쩌민파 인사들은 신임하지 않을 것이다. 이건 아마도 왕후닝, 딩쉐샹등 옛날의 장쩌민파, 그리고 쩡칭홍(曾慶紅), 자칭린(賈慶林), 장더장(張德江), 위정셩(兪正聲), 리잔슈(栗戰書), 리란칭(李嵐淸), 리창춘(李長春), 뤄간(羅幹), 허궈창(賀國强), 류윈산(劉雲山), 장가오리(張高麗)등 11명의 원로들은 마음이 떠날 것이고, 암중으로 제지하게 될 것이다; 나아가 시진핑이 장악하고 있는 당정기관은 행정대권을 장악하고 있어, 장여우샤가 중공의 신로교체를 주도하여 시진핑을 쫓아내려고 해도 난이도가 높다. 시진핑은 병을 핑계로 삼아 나서지 않고 있으면서 시간을 끈다. 강경한 수단 온화한 수단 등 온갖 수법을 다 쓰고 있다. 이는 중공정계내부의 혼란을 극도로 끌어올리고, 극단적으로 괴이한 모순된 현상들이 나타난다. 그리하여 외부에 인식상의 거대한 혼란을 가져온다. 장여우샤는 마침대 칼에 피를 묻히는 흉악한 진면목을 드러냈다. 이제 꿀통 속에서 자라고 한때 잘나갔던 중앙고위층들은 아무리 머리가 단단해도 총알을 이길 수는 없다는 이치를 깨달게 된다. 쉬치량의 죽음을 통해 군권은 동요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고, 동시에 중국정국을 주도할 결심을 드러냈다. 인내는 한도가 있다. 만일 너무 오래 끌게 되면, 군대는 부득이 필요한 모든 수단을 동원할 것이고, 일체의 댓가를 치르고서라도 중공의 현행지도체제문제를 철저히 해결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