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때 중국을 선택한 21명 미군포로의 운명은...?
글: 지식도학잡료(知識都學雜了)
1953년말에서 1954년초의 겨울에 21명의 한국전쟁때 중국군대에 포로로 잡힌 미군전쟁포로가 미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중국에 거주하기를 선택했다. 그들의 행위는 당시에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고, 많은 미국인들은 그들을 배신자라고 비난했으며, 그들의 가족조차 이해하지 못했다. 이제 반세기 이상 흘렀는데, 그들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까?
이들 전쟁포로는 대부분 가난한 가정에서 자랐다. 윌슨은 남부의 작은 마을에서 자랐는데, 집안에 아이가 8명이었고, 그가 장남이었다. 현지인들은 대부분 농사를 짓거나 혹은 현지의 제분공장에서 일했다.
그뿐 아니라, 이들 21명 중에서 대다수는 부모가 이혼한 결손가정 출신이다. 당시에는 이혼이 그다지 흔하지 않았는데, 이런 가정배경은 그들의 성격에 영향을 주었고, 나아가 그들이 중국에 남도록 결정하게 만들었다.
일등병 알리 페이트는 중국을 선택한 이유에 대하여 "평화를 찾아서"라고 말했다. 그는 가족들에게 보낸 서신에서 이렇게 썼다. 미국에서는 평화를 위해 싸울 수 없다. 평화를 위해 싸우고자 하는 사람은 모두 고발당하고 결국은 죽임을 당한다. 스카트 라스는 더욱 분명하게 얘기했다. "나는 평화를 위해 싸우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중국은 유일하게 내가 자유롭게 평화를 위해 싸울 수 있는 곳이다."
모리스 윌스는 자서전에서 그가 중국에 대해 이해하는 바를 설명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포로로 잡히기 전에, 나는 중국이 무서운 폭정국가라고 여겼다. 그러나 내가 포로수용소에서 접촉한 것은 전혀 달랐다. 모든 것이 아주 좋았다. 그들은 우리를 함께 거처하게 하고, 매우 주도면밀하게 대해주었다. 그래서 나는 생각했다. 만일 기회가 된다면, 나는 반드시 중국으로 갈 것이다." 그리고 나중에 그는 원하는대로 중국으로 갔다.

1953년 6월 27일, 한국전쟁이 끝난다. 당시의 미국대통령 트루먼은 하나의 새 정책을 발표한다. 그것은 바로 전쟁포로의 "자신의 의사에 따른 귀국"이다. 이는 제네바협정과 다른 것이다. 제네바협정에 따르면, 전쟁이 끝난 후, 교전쌍방은 전쟁포로를 모두 교환해야 한다.
트루먼의 신정책은 전쟁포로가 "90일의 냉각기"에 자신의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귀국을 선택할 수도 있고, 전쟁소재국에 남을 수도 있고, 그중 어느 교전국을 선택할 수도 있다. 그 결과 21명의 미군포로는 중국을 선택하고, 미국으로 돌아가는 것을 거부한다. 그들의 행동은 미국에서 격렬한 논쟁을 불러 일으켰고, 많은 사람들은 그들을 배반자라고 욕했다.
처음에 4,300명의 미군포로중 23명이 중국으로 가기로 결정했었다. 그외에 영국인 1명, 벨기에인 몇명, 그리고 북한인 350명도 공산주의국가로 가기를 선택했었다. 당시의 미군포로 호킨스는 이렇게 회고한다: "그들은 나에게 얘기했다. 만일 내가 원하면 중국으로 갈 수 있다고. 나는 그 말을 듣고 바로 말했다. 아, 그거 멋진데."
1953년 겨울, 윌스, 윌슨, 호킨스와 다른 중국으로 가기를 원하는 전쟁포로는 트럭에 실려 판문점 부군의 한 막사로 간다. 그들은 거기에서 <국제가>를 불렀고, 그곳에 있던 미국사병들은 구호로 이들을 대했다. 이들 사명은 "하느님은 미국을 보우한다!"
그러나 중국으로 가기를 원했던 전쟁포로들은 즉시 중국으로 보내어지지 않았다. 미국정부는 그들에게 "냉각기"를 두고 다시 생각하게 했다. 그 기간동안 생각을 바꿀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에드워드 디킨슨과 클라우드 배첼러가 생각을 바꾸어 미국으로 돌아간다.
유감스럽게도 이 두 사람의 운명은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비참했다. 그들은 미국으로 돌아가자마자 군사법원에서 재판을 받는다. 그중 디킨슨은 10년형을 받았는데, 죄명은 "적과 내통했다"는 것과 전쟁포로로서 부적절한 행위를 한 것이다. 배첼러의 죄명도 "적과 내통했다"는 것으로 무기징역형을 받았고, 나중에 20년형으로 감형된다. 그러나 나중에 그들 두 사람은 3년간 감옥에 있다가 석방된다.
1954년 2월 24일 새벽 4시, 날씨는 차갑고 어두웠다. 열차 한대가 21명의 미군포로를 태우고 압록강을 건너 중국국내로 진입한다. 그들은 먼저 태원(太原)으로 갔고, 그후 일부는 중국인민대학에서 언어와 정치를 공부한다. 또 다른 일부는 공장 혹은 농장으로 들어간다.
초기의 신기한 느낌이 지나간 후, 언어가 통하지 않아, 그들중 일부는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한다. 그리하여 그들은 여러 경로를 거쳐 전후로 미국에 돌아간다.
당시 도대체 무슨 이유로 이들 전쟁포로들은 그런 선택을 했을까?
어떤 미국인은 이렇게 생각한다. 그들이 갇혀 있는 동안에 중국군대가 그들을 세뇌시켰다고. 다만 대부분이 중국으로 가기를 선택한 진정한 원인은 당시 미국국내의 농후한 매카시즘과 냉전분위기이다. 매카시즘은 공화당 상원의원 매카시가 1951년에서 1954년 사이에 일으킨 반공 및 민주진보역량에 을 박해하는 파시스트행동을 가리킨다.
어떤 사람이 이 21명은 중국군대에 의해 세뇌당했다고 하는데 대하여, 윌스는 그의 회고록에서 이렇게 말한다: "그들은 우리의 머리에 전기자극을 주지도 않았고, 우리를 기계처럼 그들의 명령에 따르도록 요구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서서히, 한걸음 한걸음, 하나의 관념 하나의 관념으로 우리를 감화시켰고, 우리로 하여금 중국공산당이 인류행복의 비밀을 열 수 있다고 믿게 만들었다."
지금 이 21명중 이미 12명이 사망했다. 생존한 사람은 인터뷰를 원치 않는다. 그리고 모두 그들이 현재 거주하는 곳을 공개하기를 원치 않았다. 그들의 유일한 희망은 말년을 편안히 보내는 것이다.
- Clarence Adams
아담스는 아프리카계 미국인이다. 그가 중국으로 가기로 선택한 진정한 원인은 미국의 인종차별에 혐오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사실상 그가 1947년 미국 육군에 들어간 원인은 경찰의 그에 대한 괴롭힘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한 백인남자와 싸움이 있었고, 미국경찰에게 불공정한 대우를 받았다.
중국으로 온 후, 그는 무한대학에서 공부했고, 거기에서 나중에 그의 처가 되는 임(林)씨를 만난다. 중국에 거주하는 동안 아담스는 통역을 맡았고, 여러 곳을 여행다녔다. 1966년, 중국에 문화대혁명이 발발했고, 그에 대한 정치적 박해는 갈수록 심해진다. 그와 처는 할 수 없이 몰래 미국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다만 그의 미국에서의 생활은 아주 힘들었다. 그는 배반자라는 악명을 뒤집어 쓰고 살아야 했다. 일자리를 찾지 못했고, 자주 정부관리들에게 심문을 받았다. 1970년, 그는 고향인 멤피스에서 중국식당을 연다. 그후 생활이 나아졌고, 1999년 사망한다.
2. Howard Adams
하워드 아담스의 고향은 텍사스주이다. 그는 중국에 온 후 한 공장에서 일했다. 그와 제임스 베네리스는 "문혁"이 지난 후에도 중국에 남은 단 두명의 전쟁포로이다. 1990년대까지, 그는 여전히 중국에 살았다. 그러나, 그는 인터뷰를 거절한다.
3. Otho Bell
1954년, 벨과 루이스 그릭스, 윌리엄 코워트는 중국의 한 구석진 곳의 집체농장에서 일하도록 보내어진다. 그들은 나중에 북경으로 갔고, 중국에서 1년반을 생활한 후 미국으로 간다. 이들은 21명의 미국포로중에서 가장 먼저 미국으로 돌아간 사람들이다.
1955년 7월, 그들은 함께 미국으로 돌아갔고, 미국 육군에 체포되어 3개월간 갇혀 있다가, 나중에 무죄석방된다. 벨은 미국에 돌아간 후 음주문제로 2001년 7월 사망한다.
4. Samuel David Hawkins
호킨스는 오클라호마주에서 왔다. 중국에 있는 동안 북경의 중국인민대학에서 공부했다., 졸업후에는 무한자동차부품공장에서 일했다. 중국이 그에게 준 기억은 아름다웠다. 다만 2년반이후, 그는 미국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한다. 그의 친구와 가족들은 미국군대가 그에게 '밀고자'라는 레테르를 붙였다는 것을 몰랐다. NBC의 앵커 마이크 윌리스는 그에게 스파이인지 물어보기도 했다. 몇년전에 그는 미국의 디스커버리채널의 다큐멘터리 <그들은 중국을 선택했다>를 찍기 위해 다시 중국으로 왔다.
5. Richard Corden
코든은 1958년 중국에서 미국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공산주의를 좋아한다고 말했고, 공산주의중국이 결국 미국을 따라잡을 것이라고 말했다.
6. William Cowart
그외 벨, 그릭스는 함께 중국의 집단농장에서 미국으로 돌아갔고, 미군에 체포된다. 나중에 무죄석방된다. 그후 그는 모든 사람들과 연락이 끊겼다.
7. Rufus Elbert Douglas
텍사스인이고 중국에 도착한 후 몇 달 후에 사망했다. 비록 그의 사인에 대하여 여러가지 견해가 있지만, 대부분 그가 병사했다고 생각한다.
8. John Roedel Dunn
던은 중국에서 생활하는 동안 한 체코슬로바키아 여자와 결혼했다. 나중에 두 사람은 함께 체코슬로바키아로 간다.
9. Lewis Griggs
그릭스는 벨, 코워트와 함께 중국농장에서 미국으로 돌아온 후에 괜찮게 살았다. 1959년, 그는 스티븐 오스틴대학에서 공부하고 사회학을 전공했으며, 1984년 사망한다.
10. Scott Leonard Rush
그는 나중에 한 중국여자와 결혼하고, 나중에 두 사람은 아이를 데리고 미국으로 돌아온다. 지금은 은퇴하여 집에서 지낸다. 2002년 AP와의 인터뷰때 그는 자신이 잘 살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상세한 인터뷰는 거절했다. 그의 친구와 이웃이 그의 과거를 알게 될까봐 우려했고, 다시 그가 배반자라고 욕을 먹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11. Lowell D. Skinner
스킨너는 오하이오주의 애크런시의 한 노동자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중국에서 10년간 거주했고, 제남(濟南)의 한 제지공장에서 일했다. 1956년에는 중국의 중학교 교사와 결혼하고, 1963년 귀국한다. 그러나 자신의 고향에서 그는 적대시되었고, 1년내에 3번이나 체포당한다. 그는 심각한 술꾼이 된다. 1995년에 사망했다.
12. James Veneris
베네리스는 중국으로 온 후 제남에서 거주하고, 제지공장에서 10년간 일했다. 1963년, 그는 중국인민대학에 입학하여 공부하고, 1966년 졸업후에는 충성스러운 모택동주의자가 된다. "문혁"때 그는 집회,시위에 참가했고, 대자보를 붙였다.
비록 그가 열정적으로 "문화대혁명"에 참가했지만, 홍위병들은 그를 미국스파이로 지목한다. 그의 노동자동료들이 그를 보호해주었고, 주은래 총리도 베네리스는 '국제주의평화전사'라고 선언해주어서 피해를 입지 않을 수 있었다.
중국에 있는 동안, 베네리스는 전후로 3명의 중국여자들과 결혼했고, 2명의 자식을 낳았다. 그는 아마도 중국에 남은 21명의 전쟁포로중에서 중국을 가장 좋아했던 사람일 것이다. 공장에서 은퇴한 후, 그는 산동대학에서 영어를 가르쳤다. 그는 또한 21명중 유일하게 끝까지 중국에 거주한 사람이다. 2004년 중국에서 사망한다.
13. Morris Wills
1951년 5월 포로가 된다. 그가 1966년에 출판한 자서전을 보면, 그가 귀국을 거절한 이유는 트루먼 대통령이 그의 우상인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의 직위를 박탈한 것에 대한 불만때문이었다고 한다.
포로로 지낸 2년동안 그는 갈수록 미국정부에 의해 버려졌다는 느낌을 받는다. 1954년, 그는 북경으로 가서 거주했고, 7년후 한 중국여자와 결혼한다. 1965년, 그는 미국으로 돌아온다. 중국에 있는 동안, 그는 통역을 맡았다. 미국으로 돌아온 후, 그는 하버드대학 동아시아연구센터에서 일했고, 뉴욕 유티카대학의 도서관리원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