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인방체포" 소식은 어떻게 민간에 전파되었을까?
글: 풍수원(楓樹苑)
1976년 10월 6일 저녁 8시부터 8시 30분까지, 강청(江靑), 장춘교(張春橋), 요문원(姚文元), 왕홍문(王洪文)과 모원신(毛遠新)이 화국봉(華國鋒), 섭검영(葉劍英)을 비롯한 당중앙에 의해 "격리심사"를 받게 된다. 당중앙은 국면을 안정시키기 위해, 이후 반달여동안, 점진적으로 당의 고위층 내부에 "사인방이 타도되었다"는 소식을 전달하기 시작한다. 동시에 미디어에서 공개적으로 관련소식을 보도하지 못하도록 금지했다. 다만, "항간의 소문"은 신속히 전국으로 퍼져간다.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모두 처음에는 놀라고, 의심하다가, 그후에는 기뻐한다.
전달: 고위층에서 하위층으로, 당내에서 당외로...
10월 6일 저녁 10시경부터 다음 날 오전까지, 북경과 외지의 중공중앙 정치국위원은 각각 화국봉등이 소집한 긴급회의 그리고 그 후에 왕동흥(汪東興)의 전화를 받아, "사인방체포"사실을 알게 되고, 일치하여 사인방체포에 찬동한다.
10월 7일부터 14일까지, 중공중앙은 여러 차례에 걸쳐, 중앙당정군기관, 각 성,시,자치구, 각 대군구의 책임자들이 참가하는 회의를 개최한다. 그리고 사인방이 분쇄되었다는 상황을 전달한다. 동시에 일부 노간부에게도 개별적으로 통지한다. 예를 들어, 이선념(李先念)은 등영초(鄧潁超)와 약속을 잡아 얘기한다; 섭검영은 아들 섭선녕(葉選寧)을 호요방(胡耀邦)에게 보내어 알려준다. 7일에는 당중앙에서 베이징에 주재하는 당정군고위간부회의를 개최한다.
거기에는 상해의 마천수(馬天水), 주순린(周純麟), 강소의 팽충(彭冲), 허가둔(許家屯), 산동의 백여빙(白如氷), 호북의 조신초(趙辛初), 조수(趙修), 남경군구의 정성(丁盛), 요한생(廖漢生), 제남군구의 증사옥(曾思玉), 무한군구의 양득지(楊得志), 왕평(王平)등이 있었다.
화국봉은 장중하게 선언한다: 왕, 장, 강, 요는 당권을 찬탈하기로 음모를 꾸몄고, 당중앙은 "사인방"에 대해 강경한 조치를 취하여, 그들을 격리심사받도록 하여, 화근을 제거했다. 회의장에는 돌연 열렬한 박수소리가 폭발한다. 9일 당중앙이 결정한다. 오늘부터 14일까지, 북경시의 일부 단위 문화부, 인민일보사 및 전국각지의 당정군지도자간부들에게 중앙15호문건을 차례로 전달한다.
18일, 중공중앙은 16호문건을 하달한다: <왕홍문, 장춘교, 강청, 요문원 반당집단사건에 관한 통보>. 그리고 문건을 현,단급까지 하달하고, 전체 당원군중에게 전달하도록 한다. 문건에서는 또한 이렇게 말한다. 이 반당집단에 관한 자료를 "중앙은 계속하여 발송할 것이다". (12월 10일 및 1977년 3월 6일, 9월 23일, 당중앙은 전후로 <왕홍문, 장춘교, 강청, 요문원 반혁명집단의 죄증>의 자료의 1, 자료의 2, 자료의 3을 발송한다)
19일이후, 16호문건은 찰{로 당외군중에게까지 전달된다. 이제 사건발생후 12일이 지나서, 하층당원과 전국인민들까지 정식으로 "사인방"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10월 7일부터 21일사이의 당중앙의 신문보도에 대한 조치
10월 6일, "사인방"이 체포된 후, 화국봉, 섭검영은 즉시 오충(吳忠), 경표(耿飇)를 만난다.
섭검영은 오충에게 말한다: "현재, 가장 중요한 일은 신문매체를 엄밀히 통제하는 것이다. 당중앙은 이미 경표 동지가 선전부문을 접수하도록 결정했다. 너의 위수구(衛戍區)에서 능력있고, 믿을만한 간부를 골라서 경표 동지와 함께 방송국으로 가라."
화국봉은 경표에게 이렇게 말한다: "어떤 방식으로 어떻게 TV방송국, 라디오방송국을 장악할지는 자세히 생각해보지 못했다. 모든 것은 네가 알아서 처리해라. 큰 원칙은 '임표사건'을 처리한 방법으로 하는 것이다: 내부에 이미 변화가 발생했지만, 외부에서 사람들이 알지는 못하게 하라." 섭검영이 보충하여 말한다: "두 가지를 주의해라. 첫째, 내부혼란을 방지한다. 둘째, 기밀외부누설을 방지한다. 너는 이상현상이 일어나는 것을 방지해야 하고, '임표사건'의 처리방식을 취하라."
저녁 10시, 정치국 옥천산회의를 개최하는 것과 거의 동시에, 위수구 부사령원 및 경비1사 부사장의 수행하에, 경표는 화국봉의 지시문건을 가지고 중앙방송사업국으로 가서, 신속히 중앙라디오방송국 및 TV방송국을 장악한다. 화국봉은 그 소식을 들은 후, 기뻐하며 오충에게 말한다: "가장 핵심문제가 해결되었다." 그후, 지호전(遲浩田) 3인소조를 인민일보사에 진주시킨다. 어떻게 선전보도를 할 것인지는아주 중요한 문제이다.
방송국을 접수한 후, 경표는 지시를 하달한다: "주로 두 가지를 장악해야 한다. 첫째, 뉴스방송중에 사인방분쇄소식이 누설되어서는 안된다. 둘째, 프로그램중에 '기존방침에 따라 처리한다'는 말은 일률적으로 삭제한다. 그리고 일부 부적절한 프로그램은 교체한다."
오덕(吳德)은 이렇게 회고한다: "당시의 상황은 확실히 아주 복잡했다. 일부 "사인방"반혁명집단이 확실하게 장악하고 있던 단위와 오랫동안 경영해온 지역에서는 중앙에 대항하려는 조짐이 나타났다. 일부 "사인방"을 추종하는 자들은 공개적으로 당중앙지도자들이 "사인방"을 분쇄한 행동을 "우파정변", "군사정변"이라고 공격했다. 일부 지역에서는 심지어 반란의 조짐까지 나타났다.
10월 7일부터 21일까지, 전국의 신문잡지와 방송등 매체에서 강조된 것은 "가장 긴밀하게 화국봉 동지를 우두머리로 하는 당중앙 주위에 단결하자"이다. <해방군보>는 특별히 강조했다: "모든 것은 화국봉 동지를 우두머리로 하는 당중앙의 지휘를 따른다."
10일부터, <인민일보>는 "마르크스주의를 해야 하고, 수정주의를 해서는 안된다; 단결해야 하고, 분열해서는 안된다; 광명정대해야 하고, 음모궤계를 써서는 안된다"는 모택동어록을 내놓는다. 14일부터, "일체의 마르크스레닌주의, 모택동사상을 배반하는 것이나 모택동의 지시를 고치는 것, 수정주의를 추진하는 것, 분열을 꾀하는 것, 음모궤계를 꾀하는 사람들과 끝까지 투쟁하자"는 말을 내놓는다.
하북일보사의 당직인원은 여러가지 흔적에서 분위기가 변화했다는 것을 느꼈다: "받은 신화사의 기사원고가 돌연 과거 매일 4,5만자에서 만, 팔천자로 줄어들었다. 이건 무엇때문인가? 매일 큰 목소리를 내던 몇몇 '인물'들이 어찌 며칠간 전혀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가? 사람들은 머리를 맞대고 몰래 논의하기 시작한다. 갈수록 상황은 분명해졌다. 그러나 누구도 감히 무엇때문이라고 말을 꺼낼 수는 없었다."
21일 저녁, 중앙인민라디오방송국이 여러 날동안의 침묵을 깨고, 신화사가 보도한 북경시위상황을 보도한다: "많은 시위군중이 왕홍문, 장춘교, 강청, 요문원 반당집단을 분쇄한 위대한 승리를 열렬히 환호하며, '사인방'의 당권찬탈음모라는 도천죄행(滔天罪行)을 분노하여 성토하고 있다."
22일, <인민일보>는 붉은 글자로 제목을 달아 <수도의 150만 군민이 거대한 경축시위를 거행하여 "사인방"반당집단의 당권찬탈음모를 분쇄한 위대한 승리를 열렬히 경축했다>라고 신화사가 21일 밤에 보도한 북경군중의 경축활동을 실었다. 이때부터, 전국의 매체에서는 공개적으로 "사인방분쇄"소식을 보도하기 시작한다.
10월 7일부터 10일 사이, "항간의 소문"이 전파되다.
비록 엄밀하게 소식을 봉쇄했지만, 10월 6일저녁 "사인방"을 체포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항간의 소문"은 북경, 무한등 대도시에서 신속하게 전파되기 시작한다. 많은 사람들이 이 소식을 들은 후의 심리상태는: 처음에 의심하다가 나중에 미친듯이 기뻐했다.
당연히, 당시의 분위기 속에서, 사람들간의 이런 소식을 전달하는 것은 극히 조심스러웠고, 큰 리스크를 안는 일이었다. 호남 신녕현(新寧縣)의 한 사람은 소식이 봉쇄되어 있던 광서 자원현(資源縣)으로 친척을 만나러 갔다가, 사인방이 분쇄된 소식을 전한다. 그 결과 "현행반혁명"으로 공안국에 잡혀간다. 기쁜 심정을 표현하는 것은 대부분의 경우 시간이 흐르면서 조용히 하던 것에서 점점 대담해지기 시작한다.
6일 저녁에서 10일까지, "항간의 소문"이 북경에서 전파된 일부 상황을 보자:
6일, 가장 먼저, "근수루대(近水樓臺)"인 중앙방송사업국내의 인원이 저녁 10시 방송국이 접수된 후, 한명이 열명에게, 열명이 백명에게 신속히 전해진다. 중남해에 주재하고 있던 기자 두수현(杜修賢)도 비교적 일찌감치 소식을 들은 사람이다: "한밤중에, 침대머리맡에 놓아둔 전화가 나의 꿈을 깨웠다: '강청이 잡혔다. 그리고 장춘교, 왕홍문, 요문원...정말이다. 거짓말이 아니다.'" 그날 저녁, 당산(唐山)에서 북경으로 돌아오던 우광원(于光遠)은 처 맹소(孟蘇)에게서 소식을 듣는다. 그러나 쉽게 믿을 수가 없었다. 그는 여주(黎澍)를 만나고, 여주는 다시 이신(李新)을 만나서 같이 길거리를 산보한다. 4명이 분석해본 후 확실히 소식이 믿을만하다고 확인한다.
7일, "강청고발사건"으로 4월부터 정직반성중이던 신화사의 주목지(朱穆之), 목청(穆靑), 이금(李琴) 3명이 서로 다른 시간에 각각 소식을 듣게 된다. 새벽에 이금은 왕해용(王海容)의 목소리를 듣는다: "그 4명이 붙잡혔다!" 전화는 바로 끊겼다. 그녀는 "그 4명"이 도대체 누구인지를 생각했다.
6시, 우의의원(友誼醫院)에 입원중이던 요의림(姚依林)은 급히 달려온 딸에게서 소식을 전해듣는다. 흥분한 요의림은 즉시 퇴원해서 진운(陳雲)의 집으로 기쁜 소식을 전하러 간다.
7시경, 만수로(萬壽路) 간부휴식소에 있던 증지(曾志, 陶鑄의 처)도 소식을 듣는다. 그녀는 임월금(林月琴, 羅榮桓의 처)의 전화를 받는다: "좋은 소식을 하나 전해주겠다. 그 네명이 어제 밤에 체포되었다!" 그녀는 "그 네명"이 바로 강청, 장춘교, 왕홍문, 요문원이라는 것을 알고난 후, 흥분하여 손이 떨렸다: "하늘이여 땅이여 감사합니다. 세계에서 가장 좋은 소식을 전해줘서 고맙다!" 그녀는 전화를 내려놓고, 급히 이 소식을 딸과 사위에게 알렸다.
동죽군(董竹君)은 실내에서 청소를 하고 있었는데, 친구 이우란(李又蘭)이 그녀에게 전화를 해서 알려주었다: "밤중 0시에 "사인방"이 체포되었다. 동죽군은 이렇게 느낀다: "이건 정말 폭발적인 엄청나게 좋은 소식이다. 엄청난 좋은 일이다.... 나는 고개를 들고 숨을 두 번 내쉬었더니, 몸이 즉시 편안해졌다. 하늘이여, 정말 편안했고, 정말 기뻤다. 마치 27년전 상해가 해방될 때처럼 모든 것이 밝아졌다."
등소평도 이날 소식을 듣는다. 등소평의 인척이자, 등용(鄧榕)의 시아버지인 하표(賀彪)는 이 소식을 듣자마자, 즉시 마침 같은 직장에서 일하고 있던 아들이자 등용의 남편인 하평(賀平)으로 하여금 즉시 등씨집안에 알려주라고 한다. 등용은 이렇게 회고한다: "하평이 자전거를 타고, 날아갈 듯이 관가(寬街)로 돌아왔다. 그는 집으로 들어서자 마자 소리쳤다: "빨리 모여라, 빨리 모여라!" 일가족은 그가 땀을 뻘뻘 흘리면서 흥분한 모습을 보고, 분명히 큰 사건이 발생했다는 것을 알았다.
등소평 부부와 등림(鄧林), 등남(鄧楠), 등용은 문을 걸어잠근 화장실 안에서, 일부러 수도물을 틀어놓은 상태아에서 하평이 "전달"하는 말을 들었다. 등용은 이렇게 기술했다: "부친은 귀가 좋지 않았고, 물흐르는 소리가 너무 커서, 자주 확실히 듣지 못해서 다시 묻곤 했다. 사인방이 분쇄되었다니, 그게 정말인가. 우리는 이 사실을 감히 믿을 수가 없었다...일시간에 희노애락의 감정이 모두 마음 속에서 솟아났다. 부친은 아주 격동했고, 손에 쥐고 있던 담배가 가볍게 떨렸다."
7일 오후, "문혁"이 시작된 후, 주변으로 밀려나 있던 <인민일보> 부총편집장 이장(李莊)은 당시 책을 보고 있었는데, 전화기가 울렸다. 상대방은 통성명도 하지 않고 한마디만 말했다: 너 아직도 마오타이주 반병을 가지고 있느냐? 마셔라!" 이장은 더 이상 책을 읽을 마음이 들지 않았다. 퇴근하자마자 숙사로 달려가서 마오타이를 꺼내 다 마셔버렸다. 이장은 이렇게 회고한다: "전화는 군대에 있던 옛 전우에게서 걸려온 것이다. 이는 우리 두 사람이 특수한 상황하에서 화를 피하기 위해 정해두었던 은어였다. '사인방'이 무너졌다는 것을 의미했다."
8일, 소식이 북경주둔부대에 전달된다. 장교들은 자발적으로 반공개적인 소규모 경축행사를 열었고, 초대소의 술은 모조리 팔려버린다. 모순(茅盾)은 8일 해방군 정치학원에서 일하던 아들 위도(韋韜)에게서 소식을 듣는다. 위도도 우연히 알게 되었다. 새벽에 그는 동물원부근에서 통근차를 기다리고 있는데, 같은 학교의 잘 아는 사람을 만났다. 그녀의 부친은 군대의 고위간부였다. 그녀는 조용히 위도에게 알려준다: "좋은 소식을 알려주겠다. 4인방이 체포되었어." "너 뭐라고 했어?" 그는 자신의 귀를 믿을 수가 없었다. "확실해. 모두 잡혔어 그저께 밤에" "소식을 믿을만 해?" "절대로 믿을만해. 부친이 직접 말해준 거야. 모원신도 잡혔어."
10일, 소식은 북경의 시민들 사이에서 퍼져갔고 사람들은 반공개적으로 이야기했다. 시장에서 백주판매가 급증한다. 많은 사람은 "삼공일모(三公一母, 4인방이 남자 3명, 여자 1명이므로 숫게 3마리와 암게 1마리를 묶어서...그리고 털게는 상해를 상징하는 음식임)"를 한세트로 한 털게(螃蟹)를 샀다. 어떤 사람은 털게를 때리면서, "네가 그래도 횡행패도하는지 보자!"라고 소리쳤다. 이가염(李可染)은 길거리로 나갔다가 큰길 건너편에 여성시인 가암(柯巖)을 본다. 길을 건너 그녀의 앞에 서서 조용히 말했다: "하늘이 곧 밝아질 것이다!" 그후에 떠났다. 북경영화제작창의 엄기주(嚴寄洲)는 장거리전화를 걸려고 생산구로 갔는데, 부창장 유패연(劉沛然)이 건물안에서 덩실덩실 춤을 추고 있었다.
엄기주가 말했다: "약이라도 먹었냐? 무슨 춤이냐." 유패연이 말했다. 별 것 아니다. 청규계율(淸規戒律)이 없어질 것이다. 안심해라. 앞으로 영화를 만드는데 좋아질 것이다. 엄기주는 이렇게 회고한다: "나는 무슨 말인지 전혀 이해를 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더 이상 말을 하진 않았다. 내가 문앞까지 걸어갔을 때, 유부창장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모주석에게 맹세할 수 있느냐 절대로 말하지 않겠다고. 나는 좋다. 말하지 않겠다고 하자, 상해방이 체포되었다고 말했다."
소식이 전국으로 신속히 전파되다.
무한(武漢). 10월 8일, 황혼때, 주이복(周而復)은 <상해의 아침>을 수정하고 있었는데, 왕숙운(王淑耘)이 들어와서 급히 말했다: "사인방이 잡혔어" 그리고 말한다: "중앙에서 어제 소수의 성시위책임동지를 북경으로 불러 회의를 했고, 상하이시위서기 마천수도 갔고, 호북성위서기도 갔어. 섭검영이 회의에서 선포했어. 왕홍문, 장춘교, 강청과 요문원이 이미 체포되었고, 총한발 쏘지 않고 반혁명 '사인방'을 분쇄했다고..." 그녀는 이어서 말한다. 호북성위는 오늘 오후 긴급회의를 소집했고, 청,국장급간부들이 참석했고, 중앙의 회의내용을 전달했다고. 주이복은 말한다: "이 날이 마침내 왔구나."
주이복은 이렇게 회고한다: "나는 시중심 방향으로 걸어갔고, 무한시위 부근의 정(丁)자형 대로에 도착했는데, 나는 이전까지 보지 못했던 표어를 보았다: 왕홍문, 장춘교, 강청, 요문원 반혁명 '사인방'을 타도하자! 표어는 지나가는 행인들의 눈길을 끌었다. 어떤 사람은 서서 주목했고, 어떤 사람은 한번 보고 지나갔다. 의심을 품은 심정으로 혼자서 걸어갔다."
성도(成都). 당시 사천성위 선전부장으로 있던 마식도(馬識途)는 10월상순 북경으로 출장을 갔고, "사인방"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성도로 돌아와서 즉시 선전한다. 어떤 사람은 이를 근거로 <마식도 동지가 북경에서 돌아와 사인방이 분쇄된 상황을 얘기했다>는 자료를 썼고, 널리 전파된다. 나중에 필사본과 인쇄본의 형식으로 전성 각지 심지어 북경, 상해까지 전해진 후, 다시 성도로 전해진다.
복주(福州). 화동지구 혈액병회의가 복주에서 진행되고 있었다. 돌연 회의실 바깥의 대로에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멀데서 들리다가 가까워졌고, 갈수록 커졌다. 어떤 사람은 참지 못하고, 창문으로 가서 내다보았다. 원래 시위행렬이 지나가고 있었다. "사인방"이 체포된 것을 경축하는 시위라는 것을 알고난 후, 회의에 참석했던 전문가들은 모두 흥분하여 날뛰었고, 회의는 더 이상 진행되지 못했다. 모두 자발적으로 시위행렬에 가담한다. 저녁이 되어, 복주의 길거리에는 등불이 환하게 켜지고, 축포소리가 귀를 진동했다. 마치 축제때처럼.
상해(上海). 여기에서는 상해의 일을 좀 더 기술하기로 한다.
7일 북경으로 가서 회의에 참석한 마천수는 "사인방"체포건에 대해 이의를 가지고 있었고, 회의기율때문에 "사인방"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상해에 전화로 알릴 수가 없었다.
그날, 상해시 남경서로등지에 표어가 붙는다: "강청, 왕홍문, 장춘교, 요문원을 타도하자!" "강청, 왕홍문, 장춘교, 요문원 '사인방'이 이미 체포되었다." 경찰은 표어를 찢어버리고, 둘러싼 군중들에게 말했다: "이건 유언비어이다. 빨리 돌아가라. 함부로 떠들지 말고."
8일, 화국봉은 마천수에게 전화로 서경현(徐景賢), 왕수진(王秀珍)에게 북경으로 와서 회의에 참석하도록 말하라고 요구한다.
9일, <사해(辭海)> 편집소에서 소식이 전해진다: '사인방'이 3일전에 체포되었다. 이 소식은 교통대학의 한 학생이 그의 고위간부인 부친에게서 서신을 받은 후에 알린 것이다. 이 학생과 몇몇 표어를 쓴 친구들은 이미 공안국에 체포되었다. 그리고 편집소의 직공대회에서 책임자는 훈계를 한다: '일부 다른 의도를 가진 사람'들이 유언비어를 함부로 믿고, 함부로 전하지 말라고.
그는 말했다. "나는 반드시 끝까지 조사할 것이다." "중앙의 국면은 아주 안정되어 있고, 혁명형세는 아주 좋다. 4명의 수장은 원래와 마찬가지로 책임지고 일하고 있으며, 마로(마천수)는 부름을 받고 북경으로 갔으며, 어제 밤에는 경현(서경현), 수진(왕수진) 두 동지와 전화통화를 했다..."
10일, 중앙의 사태를 알기 위해 극력 노력하던 서경현, 왕수진이 북경에 도착한다. 그들은 중앙의 회의에 참석한 후, "사인방"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15일부터, 상해군중은 자발적으로 연일 시위, 집회를 거행하며 끊이지 않았다. 만명이 넘는 군중들이 강평로(康平路) 상해시위건물로 몰려들어가서, 상해시위에 왜 중앙의 상해가 '사인방'의 기지라는 지시를 전달하지 않느냐고 항의했다.
신문에 오래 종사해온 서주성(徐鑄成)은 이렇게 회고한다: "4인방"이 상해의 일당들과 '파리공사식'의 폭동을 일으키려고 준비하는 긴급한 순간에 각 기관, 각 단체 내지 각 골목의 부녀자와 노인 아이들까지 한꺼번에 길거리로 몰려나와 시위를 하며, 북과 징을 치면서, "만악의 '사인방'을 타도하자" "왕홍문, 장춘교, 강청, 요문원의 '사인방'의 도천죄행을 청산하자"등의 구호를 외쳤고, 하늘까지 울렸다.
농촌의 상황은 어떠했는가?
북경 연경현(延慶縣)에서 삽대(揷隊)했던 계사총(季思聰)은 이렇게 회고한다: "이날, 노당원 송장유(宋長有)가 와서 지청(知靑, 지식청년)들과 얘기했다. 어떻게 된 것인지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그는 막듣고 당원에게만 전달된 중앙문건을 얘기하기 시작했다. 그는 엄숙하게 말했다: "중앙에서 또 4명을 뽑아냈다""
"그는 '또'라고 한 것은 아주 분명하게 기억한다. 아마도 그는 '유등도(劉鄧陶)', '팽라육양(彭羅陸楊)', '왕관척(王關戚)', '양여부(楊余傅)'를 뽑아낸 것과 같은 일이라고 느꼈던 것같다" 그가 말한 첫번째 이름이 강청이라는 것을 듣고난 후, "나의 머리는 갑자기 횅해졌다. 놀란 것뿐만 아니라 이번에는 '또'의 문제가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이번에는 하늘이 뒤집힌 것이다."
몇몇 여학생들이 즉시 추궁한다: "또 누가 있어?" "요문원도 있어." 계사총이 말했다: "혹시 장춘교도 있어?" "맞아!" 비록 송장유가 네번째 사람의 이름은 기억하지 못했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다. 이 3명이 '뽑혔다'면 또 누가 뽑혀나갔건 그건 별 차이가 없을 것이다.
또 다른 농촌의 대대부(大隊部)에서 광서의 지청 전문군(錢文軍)이 몇몇 간부들과 한담을 나누고 있었다. 공사방송반의 최회우(崔會友)가 뛰어들어와 말한다: "북경에서 4명의 깡패들을 체포했어. 강청, 장춘교, 왕홍문, 요문원. 모조리 잡혔어! 화주석이 대단해. 정말 대단해. 아주 능력이 있어."
"정말?" 몇 사람이 동시에 물었다. 이어서 술을 마시며 경축했다. 전문군은 이렇게 회고한다: "술을 마시니 사람이 용감해졌다. 이어서 비판대회가 되었다. 모두 어느 해에 몇 사람이 굶어죽은 사람의 이야기였다. 최회우는 통곡을 했고, 몇시까지 마셨는지는 모르겠지만, 모두 대대부에서 잠이 들었다."
당연히 소식을 들은 후 "우파정변"같은 류로 의심하는 사람도 있었고, 심지어 "무장의거를 거행해야 한다", "산에 올라가 유격전을 벌여야 한다"고 말하는 경우도 있었다. 상해, 무한, 성도, 길림등지에 모두 있었다.
"문혁"의 피해를 깊이 입은 각계인사들은 미친 듯이 좋아했다.
서향전(徐向前)은 소식을 들은 후 연이어 말했다: "아주 좋다. 아주 좋다" 섭영진(聶榮臻)은 이렇게 말한다: "중국이 구원받았다!" 양용(楊勇)은 말했다: "정말 마음이 시원하구나!" 여추리(余秋里)는 이렇게 말한다: "내 병이 나았다. 이제 출근할 수 있겠다!" 담진림(譚震林)은 흥분하여 밤새도록 잠을 이루지 못했다. 새벽이 되어서야 잠이 들었다. 나중에 침대에서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는데도 깨닫지 못했다. 등영초는 즉시 채창(蔡暢), 강극청(康克淸)과 유백승(劉伯承)을 만나러 갔고, 그들과 함께 기뻐했다.
호요방은 섭선녕에게 말한다: 중흥위업(中興偉業), 인심위상(人心爲上). 나의 말 세 마디를 섭검영원수와 화국봉 주석에게 전해달라: 하나는 등소평비판을 그만두라는 것이다. 그래야 인심이 따를 것이다. 둘은 원안(寃案)을 해결하라는 것이다. 그래야 인심이 기뻐할 것이다. 셋은 생산을 확실히 잡아야 한다. 그래야 사람들이 즐거워할 것이다. 장애평(張愛萍)은 흥분해 마지 않았다. 그 자리에서 시를 한 수 짓는다: "홀보일야음매산(忽報一夜陰霾散), 뉴전건곤안국방(扭轉乾坤安國邦), 백골수수장정의(白骨授首張正義), 위재장거영류방(偉哉壯擧永流芳)"
곽말약(郭沫若)은 두 팔을 벌려 허덕형(許德珩)을 껴안으며 연이어 말했다: "정말 속시원한 일이다!" 허덕형은 이렇게 회고한다: "당시 우리의 기쁜 마음은 제2차 해방을 맞이한 것이라고 해도 인색하지 않았다. 절대로 언어문자로는 형용할 수 없는 것이다." 우수덕(于樹德)은 이렇게 말했다: "이건 선행은 좋은 보답을 받고, 악행은 나쁜 보응을 당한다는 것이다. 때가 되며 응보는 반드시 온다." 정사원(程思遠)은 이렇게 말한다: "나쁜 짓을 많이 하면 반드시 스스로 죽임을 당한다! 그들은 이 중국의 오래된 격언대로였다. 죄를 지으면 반드시 처벌받는다."
당시 지린성 석화국(石化局) 국장이던 홍학지(洪學智)는 말로 할 수 없는 감동, 희열을 느낀다. 그는 전체 국의 직원을 모은 다음, 북과 징을 치며 길거리로 나갔다. 당시 무한시혁명위원회 생산조 부조장을 맡고 있던 왕건(王健)은 격동하여 손이 떨렸고, 즉시 소식이 영통한 상사에게 물어봐서 확인한 후, 계속하여 전화를 돌렸다. 이 기쁜 소식을 그의 다른 전우와 동지들에게 알려주기 위해서.
문학예술가들은 더욱 그러했다.
황주(黃胄)는 뜨거운 눈물을 흘리면서 붉은 해가 머리 위에 뜨고 눈앞에 광명이 찾아오는 것같은 느낌을 받았다. 왕원화(王元化)는 한동안 기뻐 날뛴 후, 윗층의 가까운 친구 만도(滿濤)의 집으로 가서, 이 기쁜 소식을 그에게 전했다. 두 사람은 말을 하려고 해도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저 서로 마주보면서 눈물만 흘렸다.
애청(艾靑)은 친구 서용기(徐勇奇)에게 편지를 썼다: "'사인방'을 깨버렸다. 정말 마음 속으로 기쁜 일이다. 이들은 온갖 나쁜 짓을 했고, 이들의 통치하에 백색공포의 세월을 지내야 했다. 현재 이들 요마가 백일하(白日下)에 드러나게 되었으니, 백일간 경축해야할 일이다."
상해의 화가 당운(唐雲)은 황주를 한병 마신 후 밤을 새워 <착해도(捉蟹圖)>를 그렸다. 화면에, 큰 술독이 하나 있고, 3개의 술잔이 있다. 그리고 4마리의 밧줄로 묶인 털게가 있었다. 그는 칠언절구를 그림 위에 썼다: "삼웅착득우금자(三雄捉得又擒雌), 불허횡행방궐사(不許橫行放厥詞); 게개벽오제사해(揭蓋劈螯除四害), 인심대쾌경천치(人心大快慶千卮)."
서안의 화가 석로(石魯)는 친구 서행(徐行)과 연속 3잔의 태백주를 마신다. 서행은 시를 썼다: "신성광청야로정(晨星光淸夜路靜), 정만심서보리경(情滿心舒步履輕), 화봉시우수위초(花逢時雨誰爲俏), 서행회수견호명(西行回首見戶明)". 석로는 "화봉시우초"를 제목으로 그림을 그린다: 말라 비틀어진 월계가 가랑비를 맞으면서 소생하는 모습이다. 그리고 "춘도인간(春到人間)"이라는 족자를 썼다.
남경의 여성서예가 소한(蕭嫺)은 주방에서 좋은 술을 한병 찾아내서, 한잔을 따른 다음 스스로에게 말했다: "마시자. 천하가 이제 태평해지기를..." 한 입에 마셔버리고 대련을 쓴다: "명월천가만(明月千家滿), 춘풍일야래(春風一夜來)" 위극명(魏克明)은 시를 지었다: "환호사괴도대후(歡呼四怪倒臺後), 일월증광인증수(日月增光人增壽), 인활백세불희기(人活百歲不稀奇), 결심재전삼십추(决心再戰三十秋)!"
24일 오후, 중공중앙은 천안문광장에서 수도백만군민대회를 개최하여, 화국봉이 중공중앙주석, 중앙군사위주석을 맡은 것을 축하하고, '사인방'의 권력탈취음모를 분쇄한 것을 경하했다. 화국봉, 섭검영, 이선념등이 대회에 참석했다. 이와 동시에, 전국 29개성,시,자치구 및 해방군부대에서 성대한 집회와 시위를 거행한다.
진성감옥(秦城監獄)에서 석방되었지만 다시 동관(潼關)에 연금되어 있던 양헌진(楊獻珍)은 길거리를 천천히 걷다가 돌연 도처에 "사인방타도"의 표어가 붙어있고, 멀리서 폭죽소리와 북, 징소리가 들려오는 것을 들었다. 그는 즉시 주소로 돌아가 라디오를 켰다....오랫동안 온갖 고생을 겪은 이 팔순노인은 며칠 동안 수십년간 없었던 흥분과 기쁨에 빠져 있었다.
유해속(劉海粟)은 우연히 라디오에서 기쁜 소식을 듣는다. 그는 뜨거운 눈물을 흘리면서 처를 불렀다: "이교(伊喬), 이교, 그들이 잡혔어!" 그는 격정적으로 풍정만종(風情萬種), 신천홍포(身穿紅袍)의 종규(鍾馗)를 그린다. 제사(題詞)는 이렇게 적었다; "간관천년귀매(看慣千年鬼魅), 의연질억여구(依然嫉惡如仇). 오사포각경풍류(烏紗抛却更風流), 환기향료일두(換起香醪一斗), 세상귀다인한(世上鬼多人恨), 환구무귀군수(環球無鬼君愁), 존궁인파토호류(存弓忍把兎狐留), 즘감개전해구(怎敢皆塡海口)?"
하나의 시대가 마침내 끝났다. 당연히 극좌노선은 '사인방'의 붕괴로 즉시 소멸하지 않았다. 임무는 중하고 길은 멀다. 오직 다으이 11기 3중전회 및 그 이후에 해결하기를 기다려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