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조조)

사서(史書)가 숨긴 사실: "조조는 원소의 개였다!"

중은우시 2025. 6. 6. 20:16

글: 유삼해(劉三解)

"조조(曹操)가 굴기할 때, 손조롭게 일들이 진행된다. 기실 이건 모두 그가 원소(袁紹)의 부하였기 때문이다. 만일 사서(史書)의 행간에서 이 점을 깨닫지 못한다면, 많은 일들은 해석이 되지 않고, 심지어 사람을 오도하게 된다. 조위(曹魏)의 사관(史官)이 숨긴 점들을 찾아내보면, 확연히 깨닫는 점이 있게 될 것이다."

<삼국지.무제기>는 조조의 본전(本傳)이다. 그러나 조조의 초기 경력에 대한 기재는 극히 간략하다.

초평원년(190년), 조조는 형양(滎陽)의 변수(汴水)에서 서영(徐榮)에게 격패당한 후, 양주(揚州)로 가서 병력을 모집한다. 그후 병사들의 반란을 당하고, 하내(河內)로 들어가 주둔하는데 구체적인 시간을 기록해놓지 않았다. 그후에 그는 유우(劉虞)가 칭제(稱帝)하는 것을 거절하고, 복양(濮陽)에서 흑산군(黑山軍) 백요(白繞)의 부대를 격패시킨다. 그리고 동군태수(東郡太守)가 되어 동무양현(東武陽縣)을 다스린다. 이때 비로소 확실한 시간이 기록된다. 초평2년(191년) 칠월.

고증에 따르면, 유우를 황제로 옹립하기로 논의한 시간은 초평2년 십이월이다. 이렇게 계산해보면, 조조는 7개월동안 행방이 묘연해진다. 만일 <삼국지>의 서사를 따르게 되면 동탁이 낙양을 불태운 때부터 약 1년반의 기간동안 조조의 행적은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사서의 행간의 정보를 통해 우리는 이 기간동안의 활동윤곽을 대체로 알아볼 수는 있다. 다만, 반드시 먼저 조위의 관방에서 선전한 선입견의 영향을 벗어나야 한다.

조조는 임준(任峻)을 거두는데, 임준과 장분(張奮)은 군(郡)을 바치면서 그에게 왔다. 그렇다면 중모(中牟)를 중심으로 한 10여개현도 자연히 조조의 간접적인 통제하에 놓이게 되고, 그의 상사인 사례교위(司隸校尉) 원소(袁紹)에 귀속된다. 조조 본인은 병력을 모집한 후에 4천여명을 이끌고 하내(河內)로 가서 원소와 회합한다.

그후에 최소한 2건의 사건이 발생하는데, 조조의 <본전>에는 빠져 있다:

첫째, 조조가 왕광(王匡)을 죽이다.

사승(謝承)의 <후한서>를 보면, 호무반(胡毋班)의 친척은 왕광에게 상당한 원한을 가지고 있었는데, 조조와 협력하여, 함께 왕광을 죽였다.

둘째, 주우(周㬂)가 예주자사(豫州刺史)가 되어, 병력을 이끌고 손견(孫堅)을 기습한다.

행분무장군 조조의 군사(軍師) 주우는 원소에 의해 예주자사에 임명된 후, 병력을 이끌고 손견의 본거지 노양(魯陽)을 기습하여, 그와 예주를 놓고 다툰다. 그리고 전투과정에서 공손찬(公孫瓚)의 종제(從弟) 공손월(公孫越)을 활로 쏘아 죽인다. 이를 보면 전투가 매우 치열했음을 알 수 있다.

먼저, 첫째 사건을 얘기해보면, 왕광은 동탁(董卓)이 임명하여 하내태수(河內太守)가 되었는데, 그는 원소의 편에 선다. 초평원년(190년) 하양진(河陽津)에 주둔하고 있으면서 낙양의 북쪽을 위협했다. 동탁은 의병(疑兵)을 보내 평음현(平陰縣)에서 황하를 건너는 것처럼 하여, 왕광이 증원오도록 유도한 후, 다시 정예병을 소평진(小平津)에서 황하를 건너게 한 후 우회하여 왕광의 부대의 북쪽으로 가서 왕광을 대파하고, "거의 모조리 죽었다."

그러나 기괴한 점은 이 전투가 발생한 시간이 수수께끼라는 것이다. <삼국지.동탁전>에서는 동탁이 천도하기 전에 발생했다고 한다. 즉 초평원년(190년) 2월이전이다; <후한서.동탁열전>은 천도이후 손견이 병력을 이끌고 서영과 양현에서 전투를 벌인 이후이면서, 다음 해 손견이 병력을 이끌고 양현 양인으로 들어가기 전이라고 한다. <자치통감>에서는 초평원년(190년) 겨울이라고 하였다.

어느 기록이 정확한지 확정하려면 다른 자료를 살펴보아야 한다. 채옹(蔡邕)은 표장을 쓴 바 있는데, <표하록환오상장사죄(表賀錄換誤上章謝罪)>라는 제목이다. 거기에 따르면, 그 달 십팔일, 상국 동탁이 하내태수 왕광을 격패시키고, 여러 신하들이 조당에서 축하했으며, 채옹은 하표(賀表)를 올렸다. 그때 두 관리의 정보를 잘못 적어서, 조정은 병진일에 조서를 내려 1달의 봉록을 벌금으로 몰수했고, 다시 상소를 올려 사죄했다.

즉, 동탁이 전승한 날이 십팔일이고, 병진일과 같은 달이고, 병진일보다 앞이다. 그렇다면 초평원년의 어느 달이 그 조건에 부합하는지 살펴보면 자연스럽게 전쟁이 일어난 시간을 확정할 수 있다. 결과는 구월, 십일월이 모두 부합한다. 구월의 병진일은 십구일이고, 십일월의 병진일을 이십일이다. 그렇다면, <삼국지.동탁전>의 기록이 잘못된 것이고, 동탁이 상국에 취임한 것은 초평원년 십일월 초하루이다. 이를 보면 이 일은 겨울 십일월 십팔일에 발생할 수밖에 없다.

왕광이 패전한 후, 태산병(泰山兵)은 거의 사망했다. 그는 다시 태산의 고향으로 돌아가 병사를 모집한다. 그리고 다시 정예병사 수천명을 모집하여, 장막(張邈)과 회합하고자 했으나, 조조와 호무반의 친척이 연합하여 죽이게 된다. 여기서 알아야 할 점은 그가 패전한 곳이 하양진(소평진)이고, 맹진(孟津)의 서쪽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맹진에 주둔하고 있던 사람은 종사(從事) 한호(韓浩)였다. <위서>에 따르면 한호는 왕광이 임명했으며, 맹진에 주둔하고, 동탁에 저항했다고 한다. 이 '종사'는 주(州)의 속관일 것이고, 군(郡)에는 이런 직위가 없다. 그를 임명한 것은 분명 사례교위 원소일 것이다. 다만 이러한 점을 숨겨버렸다.

당연히, 왕광이 그를 맹진에 주둔하도록 보낸 것은 이상할 것도 없다. 왜냐하면 그는 아마도 사례교위가 임명한 부군국의 종사일 것이고, 모든 군국(郡國)에는 1명씩 파견했을 것이다. 그래서, 한호는 원소의 속관 신분으로, 왕광의 명을 받아 맹진에 주둔했던 것이다. 그래야 동탁이 그의 외삼촌을 시켜 투항하게 하려 했으나, 거절한 것일 것이다. 동탁이 공격했으나 함락시키지 못했고, 그리하여 투항을 받아내려고 했다. 그러므로 위에서는 그를 장하게 여겨 그를 "기도위(騎都尉)"로 임명한다.

당연히 기록에 확실히 문제가 있다. 원문은 "원술(袁術)이 듣고 이를 장하게 여겨, 기도위로 삼았다"고 되어 있는데, 하내는 원술과 너무 거리가 멀다. 한호가 가까운 원소가 아니라 멀리 있는 원술의 속관일 수는 없다. 그러므로, 여기의 "원술"은 분명 "원소"의 오기일 것이다. 이후 행분무장군 조조의 사마(司馬) 하후돈(夏侯敦)은 한호의 대명을 오래 전부터 들어와서 스스로 나서서 만나뵙기를 청한다. 그리고, "크게 기이한 사람"이라고 여겨서, 그를 보내 병력을 이끌고 정벌에 따르게 한다.

이건 재미있는 기록이다. 녹봉이 2천석인 기도위가 녹봉이 천석인 군사마(軍司馬)에게 인정을 받았다? 여기에는 마땅히 조조가 한호를 자신의 지휘서열에 들어오도록 요청하는 과정이 있었을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조조가 왕광을 죽인 원인을 설명하는것이다.

왕광이 하내군에 있는 동안, 원소에 대하여 인의를 다했다고 할 수 있다. <삼국지.상림전>에 따르면, 왕광은 거병하여 동탁을 토벌한 후, 일찌기 한 무리의 선비를 각 속현에 보내 관민의 죄행을 비밀리에 조사하도록 시킨 바 있다. 그리고 죄행이 발견되면 사람을 체포하여, 상대방을 압박하여 돈과 양식을 내놓으면 죄를 사해주었다. 조금만 말을 듣지 않으면 일족을 모두 주살했다. 이를 보면 군대의 물자조달을 위해, 왕광은 후택이어(涸澤而漁, 연못의 물을 퍼내서 고기를 잡다)까지 마다하지 않았다.

그러나, 왕광은 원소의 지시를 받아 호무반등을 죽인 후, 그는 악명을 떠리게 되고, 다시 부곡을 모조리 친다. 방어지구마저도 외부인인 조조에게 접수당하게 되니, 그는 원소에게 헌신짝처럼 버림받은 셈이다. 그는 분노한 나머지, 고향으로 돌아가 병사를 모집했고, 한번 싸워보려고 한다. 그리하여 장막과 연락해서 협력하고자 한 것이다.

문제는, 상림(常林)의 이야기에 또 한명이 출현하는 것이다. 즉 왕광의 같은 고향사람인 호무표(胡毋彪)이다. 상림이 자신의 숙부의 억울한 사정을 얘기한 후, "호무표는 글을 써서 왕광을 책망하였고, 왕광은 상림의 숙부를 돌려보낸다." 이는 한편으로, 호무표가 하내군내에 있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다른 한편으로 호무표는 하내군내에 상당한 권력이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서신을 써서 왕광을 책망하고, 왕광은 그의 말을 듣고 상림의 숙부를 풀어주었으니까.

즉, 조조와 협력하여 왕광을 죽인 것은 아마도 호모표등 호모반의 일족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조조가 왕광을 죽인 것은 원소집단을 유지하고, 그가 배반하는 것을 막기 위함이다.

왕광의 죽음을 얘기했으니, 이제 둘째 사건으로 넘어가 주우가 손견을 공격한 일을 살펴보자.

주우가 예주자사를 맡아 손견을 공격한 것은 경위가 상당히 복잡하다. 여기에서는 이 사건과 조조의 관계를 주로 살펴보기로 한다.

손견은 동탁을 격패시키고, 여포가 도굴한 황릉을 다시 메운 후, 병력을 거두어 남양군 노양으로 돌아가 주둔한다. 그후 원술은 다시 손견을 파견하여 영천군 양성(陽城)에 주둔하게 했는데, 주우의 기습을 당한다. 그리하여 원술은 공손찬의 종제 공손월로 하여금 병력을 이끌고 손견을 증원하도록 보낸다. 양군이 힘을 합쳤지만, 이기지 못했고, 공손월은 전쟁에서 화살을 맞아 사망한다.

이 장면을 기록한 것은 <삼국지.공손찬전>이다. 거기에는 "주우(周㬂)"를 "주앙(周昻)"이라고 적었다. 최근 사람의 고증에 따르면, "우"와 "앙"은 기실 옮겨쓰는 과정에서의 오자로 두 형제가 아니라, 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전쟁의 승부에 관한 기록을 보면, <회계전록(會稽典錄)>에서는 "여러번 싸웠지만 이기지 못했다"고 하였다. 이를 보면, 주우가 예주로 서진하는 것이 파죽지세였던 것이 아니고, 승리도 있고, 패배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단양태수(丹陽太守) 주흔(周昕)은 주우의 형인데, 일찌기 조조가 거병한 후, 전후로 병력 만여명을 보냈다. 이 시간은 초평2년(191년) 이전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초평3년(192년)에는 서주, 양주, 심지어 시례의 주준(朱儁)까지 모두 원술의 편이 되었기 때문에, 단양병이 통과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시간대와 병력을 고려하면, 병력을 보낸 대상은 조조이지 주우가 아니다. 이는 명을 받아 손권과 예주를 다툰 군사지휘관은 분명 조조였을 것이다. 원소는 그에게 주우를 호송하여 예주로 가서 예주자사에 앉히도록 명령한 것이다.

이 점은 노선에서도 확인이 된다. <오록(吳錄)>을 보면, 주우는 예주로 "와서 기습하여 취했다(來襲取)"고 했다. 이는 예주의 경내를 한걸음 한걸음 잠식해 들어간 것이 아니라, 다른 주에서 직접 영천군 양성으로 쳐들어갔다는 것이다. 양성은 지금의 하남성 등봉(登封)으로 숭산(嵩山)지역이고, 북으로 원관(轅關)을 지나면 낙양에 도달할 수 있고, 동으로는 밀현(密縣)에 도달할 수 있어, 양면이 모두 하남윤(河南尹)의 관할지로 포위되어 있다. 밀현은 바로 임준과 장분이 조조에게 보낸 10여개현 중 하나이다. 그러므로 이곳을 기지로 하여 출정하였다. 조조가 장수로서 대병력을 이끌고 참여하지 않았을 가능성은 크지 않다. 가장 중요한 것은 초평2년 사월, 손견이 동탁을 몰아낸 후, 원소집단은 이미 하내군을 서서히 포기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병력을 연진(延津)으로 후퇴시켰따. 이는 한복(韓馥)의 일거일동과도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그것은 바로 종사 조부(趙浮), 정환(程渙)을 보내 1만의 강노병(强弩兵)을 이끌고 맹진에 주둔하게 하였다.

이 강력한 부대가 맹진에 주둔한 것은 한편으로 원소의 군량미의 수상운송허브를 통제하려는 것이다. 이는 원소가 말한 바와 같이 "한복이 신의 군량을 끊으면, 계속 싸울 수가 없다"는 원인이다. 다른 한편으로 이 군대는 원소와 낙양을 분리시켰다. 그리하여 원소는 동탁이 황급히 서쪽으로 도망칠 때, 아무 것도 하지 못했다. 그래서 <영웅기>에서 말하는 것처럼, 연주자사 유대(劉岱)가 일찌기 기주치중종사 유자혜(劉子惠)에게 서신을 써서, 동탁은 걱정할 것이 없다고 하면서 그가 죽은 후에 병력을 일으켜 한복을 토벌해야 한다고 말한다. "강병을 가지고, 역적행위를 하는데, 어찌 놔둘 수 있겠는가!" 그 말은 한복을 놀라자빠지게 만들었다. 그 원인은 바로 원소에 대한 포위에 있었던 것이다.

원소가 기주에서 출병할 때, 한복의 속관들은 속속 한복에게 간언하는데 그때도 항상 군량을 이유로 들었다. 원소는 젖을 먹는 아이와 같은데, 젖을 끊으면 즉시 굶어죽는다가고 말한다든지, 원소의 군대에는 군량이 전혀 없어 각자 흩어지려고 한다. 보름이 되지 않아 와해되어버릴 것이다라고 말한다. 이치대로라면, 원소의 대군이 이 정도로 참혹해서는 안된다. 어쨌든 하내군에도 하남윤의 10여개 현이 지지하고 있으며, 또한 연주가 뒤에서 받쳐주고 있다. 기주(冀州)에만 군량미공급을 의존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기주병은 맹진의 황하항행로를 막고 있고, 외부의 지원은 모두 끊겼다. 그리고 하내군과 하내윤의 동부각현은 1년동안의 전란을 거치면서 백성중 절반가까이 죽었기 때문에 원소의 병마를 먹여살리는 것이 불가능했다.

<후한서.군국지>의 기록에 따르면, 하내군에는 80여만 인구가 있다. 하남윤은 조금 많아서, 100먄여 인구가 있다. 그러나 절대다수는 낙양주변에 있다. <후한서.동탁열전>에는 이렇게 적고 있다. 동탁은 "낙양의 인구 수백만을 모조리 장안으로 옮겼다." 이 수량은 심지어 앞에서 말한 인구를 합한 것보다 많다. 다만 동한말기 은닉호구와 노비가 많았다는 점을 고려하면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원소의 관할구역은 백만명이 되지 않는데, 십만대군을 먹여살려야 한다. 외부로부터의 양식공급이 없으면 유지할 수가 없다. 한복의 거동은 그의 목숨줄을 끊는 것이다. 그래서 동탁이 장안으로 들어간 후, 원소는 병력을 이끌고 동쪽으로 연진으로 간다. 황하의 건너편은 연주이다. 이는 보급선을 재건한 셈이다. 이것이 바로 손견은 북상하면서 연전연승을 거두는데, 하내군의 원소대군은 여하한 전적도 얻어내지 못한 원인이다.

그러므로, 조조는 원소에 의패 파견나가, 주우와 협력하여 예주를 빼앗아오고자 했다. 이는 하남윤의 동부 10여개현의 세력범위를 확장하기 위함이고, 연주를 등에진 전략전초기지를 마련하는 것이며, 원술에 대해 공세적방어를 취하는 것이다. 목적은 주로 영토개척이다. 그후 공손찬을 안정시키기 위해, 발해군을 그에게 내준다. 그리고 장홍(臧洪)을 청주자사(靑州刺史)로 임명한다. 이는 모두 원소가 자신이 기주를 탈취하는 과정에서 외래세력의 간섭을 막기 위함이다.

초평2년(191년) 칠월에 이르러, 원소는 기주를 탈취한 후, 전체전략을 조정해야 했다. 그리고 기주를 중심으로 발전시킨다. 원래 한복을 향했던 몇 갈래의 무장세력이 이제는 그를 향하게 되었다. 여기에는 장양(張楊), 흑산군, 우부라(于夫羅)와 공손찬이 있다. 3개 부대의 진공시간은 서로 다르다. 그러나 아주 큰 군사적 압박이 된다.

연주자사 유대는 비록 인척이자 동맹이지만, 그는 공손찬의 핍박으로 오랫동안 논의만 하고 결정을 내리지 못했떤 것을 보면, 유대가 적극적으로 전쟁에 참여해, 원소를 지지할 생각은 거의 없다고 볼 수 있다. 그리하여, 원소는 속하장수 조조를 불러들여, 하남윤의 동부지구를 포기하면서 병력을 집중하여 각세력의 업성에 대한 공격을 막게 했다.

이런 조건하에서, 주우라는 예주자사는 진격하고 싶어도 진격할 수 없고, 후퇴하고 싶어도 후퇴할 수 없었다. 버려진 돌이 되어, 혼자서 병력을 이끌고 손권을 상대해야 했고, 연전연패당한다. 그리하여 할 수 없이 예주를 벗어나 도망친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원소가 예주를 잃었다는 것이다.

주우는 양주 구강군으로 간다. 만일 그가 주앙과 동일인이라면, 그는 이때부터 구강태수(九江太守)가 된다. 이곳은 양주의 치소이고, 중요성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래서 원소는 나중에 당형이자 산양태수인 원유(袁遺)를 보내 양주사사(揚州刺史)를 맡게 한다. 생각지도 못하게, 원유가 병력을 이끌고 구강으로 진격하다가 원술에게 격패당한다. 나중에 패국(沛國)으로 도망치는 도중에 병사들에게 사살당한가. 양주는 이렇게 원술에게 넘어간다.

전체적으로 보아, 이 단계에 원소집단은 사면초가에 처해 있었다. 조조는 부득이 같은 배를 타고 묶여 있어서, 함께 가라앉으면서 중원을 석권한 대난국을 직면해야 했다. 단지 이 단계에 그는 풍운을 일으킬 자격이 없었다. 단지 원소의 수중에 있는 하나의 돌에 불과했다. 그래서 조위의 공식 입장은 이 단계의 조조를 가볍게 언급하고 지나가는 것이다. 전체 시대의 역사서술조차도 상당히 삭제해버려서, 우리가 장안의 한헌제, 남양의 원술, 서주의 도겸, 유주의 유우, 공손찬, 청주의 유비, 공융이 모조리 참여하는 재미있는 장면을 그냥 지나치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