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륭제(乾隆帝) 생모의 역사문제
글: 최애역사(最愛歷史)
건륭42년(1777년), 86세의 숭경황태후(崇慶皇太后)가 사망했다.
건륭제의 생모로서, 그녀의 일생은 부귀영화를 모두 누렸다고 말할 수 있다. 젊었을 때는 옹정제(雍正帝)의 시첩(侍妾)이었으나, 나중에 모빙자귀(母凴子貴)로 자녕궁(慈寧宮)을 차지하여 황태후로 42년간 지냈다. 건륭제는 즉위한 날로부터 천하에 생모에 효를 다하겠다고 맹세했고, 매번 강남(江南), 오대산(五臺山)으로 순행(巡行)을 가거나, 혹은 요동으로 조상의 제사를 지내러 가거나, 목란추선(木蘭秋獮)에 나설 때도 항상 황태후를 모시고 함께 갔다. 이는 숭경황태후를 중국역사상 출순횟수가 가장 많은 황태후로 만들었다.
모친이 사망하였다는 비보를 들은 후, 당시 나이 67세의 건륭제는 비통해 마지 않았다. 사서의 기록에 따르면, 황태후를 염할 때, 건륭제는 "애통해 소리지르며, 가슴을 치며 몸부림쳤다." 완전히 일국지군의 위엄은 잃어버린 모습이었다.
그후, 건륭제는 모친의 생전 유언에 따라, 옹정제의 태릉(泰陵) 동북 약 1,500미터 위치의 태동릉(泰東陵)에 매장한다. 그리고 효성헌황후(孝聖憲皇后)라는 시호를 내린다.
그러나 효성헌황후가 입토위안(入土爲安)한 후, 항간에는 그녀와 건륭제는 친모자가 아니라는 소문이 계속하여 나돌기 시작한다. 이건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1
건륭제의 신세내력에 대한 소문은 전체 "건륭성세"를 관통하며 멈춘 적이 없었다. 그중, 가장 그럴 듯한 판본은 건륭제가 해녕진씨(海寧陳氏) 진세관(陳世倌)의 적자(嫡子)라는 소문이다.
이 소문에 따르면, 진세관은 강희제(康熙帝)때 조정에 들어가 관리가 되고, 옹친왕(雍親王, 나중의 옹정제) 일가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한 해는 진세관의 부인과 옹친왕부의 푸진(福晋, 만주어로 부인을 가리킴)이 동시에 아이를 낳는다. 당시는 "구자탈적(九子奪嫡)"의 관건시기였고, 옹친왕부의 신생하는 여아였으나, 진세관의 집안에서 태어난 아이는 남아였다. "탈적"에서 선기를 점하기 위하여, 옹친왕은 진세관으로 하여금 아이를 게리고 옹친왕부로 오게 하여 옹친왕부의 '소격격'과 정혼을 하도록 하여 양가의 관계를 더욱 강화한다.
진세관은 옹친왕의 뜻을 의심하지 않고, 아이를 데리고 옹친왕부로 간다. 그러나 진세관이 술과 음식을 잘 먹고 집으로 돌아와서 보니 강보에 쌓여있는 아이는 여아였다. 진세관은 관료사회에서 오래 생활했고, 이 일은 목숨과 관련된다는 것을 잘 알았다. 그리하여 남에게 얘기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옹친왕부로 들어간 남아는 이름을 애신각라(愛新覺羅) 홍력(弘曆)으로 고치고 나중에 모든 사람의 존경을 받는 건륭제가 된다.
즉위후 건륭제는 자신의 신세내력을 알게 된다. 그리하여 6차례에 걸쳐 강남으로 순행가는 때 4차례나 해녕진가의 우원(隅園)으로 가서 가족들과 만나본다. 그리고 진씨집안에 대한 고마움으로 건륭제는 우원을 안란원(安瀾園)으로 개명하게 하고, 진씨집안에 "춘휘당(春暉堂)"이라는 편액을 내린다. 이를 통해 자신이 친부모에 대한 효도의 뜻을 전한다. 북경으로 돌아온 후, 그는 원명원의 "사의서옥(四宜書屋)"을 허물고 안란원의 모양대로 새로 짓는다. 짓고난 후에 이름을 안란원(安瀾園)으로 고친다. 이를 통해 자신의 천리 밖에서 항상 '가(家)'의 따스함을 느끼고자 했다.
이 역사소문에 따라, 김용(金庸)이 창작한 최초의 무협소설 <서검은구록(書劍恩仇錄)>을 쓸 때, 건륭제가 한인이라는 견해를 받아들여 책에서 그의 동생을 그린다. 홍화회(紅花會) 총타주(總舵主) 진가락(陳家洛). 진가락은 양심으로 건륭제를 설득하여 반청복명하고자 했으나, 결국 건륭제에게 배신을 당하고, 이로 인해 간접적으로 향향공주(香香公主) 객사려(喀紗麗)를 죽게 만든다.
이에 대하여 김용은 이렇게 말한 바 있다. 해녕 일대에 건륭제가 진씨집안의 적자라는 것은 모두 알고 있었다. 그가 어렸을 때 보이스카우트를 하면서 해녕에서 건륭제가 만든 석당(石塘)의 옆에서 캠핑을 한 적이 있다고 한다. 그때의 캠핑은 그에게 강호의 꿈을 꾸게 만들었고, 이립(而立)의 나이로 옛날의 일을 다시 떠올릴 때, <서검은구록>을 시작으로 강호를 질타하는 무협인생을 열게 되었다.
그렇다면, 역사소문과 김용소설은 건륭제가 해녕진가의 적자라는 것을 말해준다고 할 수 있을까?
2
우리는 먼저 이 소문 속에 나오는 "건륭의 생부"인 진세관이 도대체 어떤 사람인지 알아보기로 하자.
역사기록에 따르면, 진세관은 절강 해녕 염관(鹽官) 사람이다. 청나라때의 명신(名臣)으로 강희제때 공부상서(工部尙書)를 지낸 진선(陳詵)의 아들이다. 그의 사람됨은 "염검순독(廉儉純篤)"했고, 강희제, 옹정제 두 황제의 신임을 크게 받았다. 강희연간에 과거시험에 합격하여 진사가 된 후, 향시의 고관(考官, 시험관)을 많이 맡았고, 지방의 독무(총독, 순무)가 되었다. 옹정2년(1724년), 산동경내에서 황재(蝗災, 메뚜기때의 피해)가 돌발했고, 막 산동순무(山東巡撫)에 취임한 그는 즉시 각지를 다니면서 재해상황을 살폈고, 관리들을 감찰했으며, 재해구조작업이 일단락되자 비로소 제남(濟南)으로 가서 정식으로 취임했다. 임기동안 그는 상벌이 분명했고, 백성들을 잘 살폈으며, 근검절약하며 지방방어업무를 중시했다. 그리하여 그가 순무로 오자 산동백성들이 그를 좋아했을 뿐아니라, 옹정제도 그의 능력에 좋은 인상을 가진다.
그렇지만, 진세관은 옹정제때 내각에 순조롭게 진입하지 못했다. 건륭6년(1741년)에 이르러 호부시랑, 좌도어사등의 요직을 거친 후, 나이가 들어 비로소 문연각대학사(文淵閣大學士)가 되어, 사실상의 "진각로(陳閣老)"가 된다.
만일, 건륭제가 항간의 소문처럼 진씨집안의 아들이라면, 옹정초기에 겨우 산동순무가 된 진세관은 왜 강희연간에 옹정제의 라인을 타지 않았을까? 크게 양보하여 두 사람간에 정말 교류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진세관이 "아들을 바친" 공로가 있는데, 옹친왕은 즉위후에 마땅히 그의 관직과 작위를 올려주었어야 했다. 그러나 정사에 그런 내용은 전혀 기록되어 있지 않다.
이 소문을 믿는 사람들을 더욱 실망하게 만드는 것은 진세관이 비록 강희제때 관직이 올라가긴 했지만, 건륭제는 이 "진각로"를 그다지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낭세녕(郞世寧)이 그린 <평안춘신도(平安春信圖)>의 일부. 이 그림에 대하여는 두 가지 설이 있다. 첫째, 그림의 왼쪽이 옹정제이고, 오른쪽이 건륭제라는 것이다. 이는 부자간의 정을 나타내고 있다고 본다. 둘째, 이는 건륭제의 서로 다른 시기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현재 고궁박물원에서 소장하고 있다.
진세관의 관직은 계속 올라가는 동시에 그는 여러 차례에 걸쳐 건륭제로부터 훈계를 받고 처벌을 받는다. 예를 들어, 진세관은 건륭6년(1741년) 강남으로 가서 수재대응방안을 조사한다. 그때, 건륭제가 이런 말을 한다: "진세관이 떠날 때 보고하기를 올해 내로 강의 준설작업을 마치겠다고 하였는데, 이제 다시 상소를 올려 내년 2,3월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말한다. 그가 기획하는 것은 고빈(高斌), 주학건(周學健)이 정한대로 하는 것이고 달리 대단한 계획을 내놓은 것도 아닌데, 왜 여러 차례 오간단 말인가?"
나중에 건륭13년(1748년), 운남순무(雲南巡撫) 도이병아(圖爾炳阿)가 조주지주(趙州知州) 번광덕(樊廣德)이 재정을 파탄냈다고 탄핵하였는데, 이 일은 진세관도 관련이 되어 건륭제로부터 욕을 한바탕 얻어먹는다. 관례에 따르면, 이런 상소는 내각에 올린 후, 운귀총독(雲貴總督)에게 내려보내 심의하게 하여 공정하게 처리했다는 것을 보여야 했다. 그러나 당시 문연각대학사이던 진세관과 사이직(史貽直)은 그 절차를 밟지 않고, 상소문을 직접 운남순무에게 돌려보내어 그에게 규정대로 처리하도록 한다. 이 일을 알게 된 건륭제는 대노하여, 대학사 진세관, 사이직등을 형부로 보내 엄하게 조사, 처벌하게 한다. 동시에 진세관에게 조서를 내려 그가 대학사의 직위를 받은 이래, "참찬지능(參贊之能)도 없고, 비쇄지절(卑瑣之節)은 많다. 중요한 요직에 앉아 있지만, 실로 그 직위에 걸맞지 않는다."
그뿐 아니라, 건륭제는 조조(早朝)떄 진세관의 사람됨에 대하여 "비쇄지절이 많다"는 점을 더욱 구체적으로 말하기도 했다. 진세관은 산동순무로 있을 때, 일찌기 공부(孔府)와 합의를 달성했는데, 공부의 사람이 그를 도와 전답과 재산을 더욱 많이 구매하게 도와달라고 했다는 것이다. 건륭제는 이렇게 말했다. 진세관은 절강(浙江) 사람인데, "연주(兖州)에 전답과 재산을 구매하여, 그 이득을 취하려 했다"고 하면서 이는 고위관리가 해야할 올바른 일은 아니라고 했다. 당시 건륭제는 조서를 내려 진세관의 모든 직위를 면직시키는 동시에, 그가 산동으로 옮겨가 거주하는 것을 금지했고, 그로 하여금 절강을 돌아가 깊이 반성하고 있으라고 했었다.
통상적인 이치대로라면, 만일 진세관과 건륭제간에 정말 혈연관계가 있다면, 계속 "효치천하(孝治天下)"를 내세우며 자랑스러워한 건륭제가 자신의 "친생부친"을 이렇게 가혹하게 대하고 엄하게 처벌했단 말인가? 하물며, 진세관이 관직을 면직당하고 산동에 거주하지 못하게 금지한 것을 보면, 문무백관들이 모두 모여있는 조당에서 건륭제가 이처럼 전혀 체면을 봐주지 않고, 자신의 "친생부친"의 추문을 까발렸을까? 설마 조정의 어떤 호사가가 이를 근거로 황제의 효심을 폄훼하는 것도 겁내지 않았단 말인가?
그러나, 어떻게 말하더라도, 어떤 사람은 여전히 건륭제가 6차례에 걸쳐 강남을 순행하고, 4차례에 걸쳐 안란원에 투숙한 사실을 가지고, 건륭제와 진세관 간에 남다른 관계가 있다고 말한다.
확실히, 건륭제가 강남으로 순행을 갔던 기간중 일찌기 건륭27년(1762년), 건륭30년(1765년), 건륭45년(1780년), 건륭49년(1784년)에 4차례에 걸쳐 안란원에 머물렀다. 그러나 재미있는 점은 건륭제가 이전의 두 차례 남순때는 안란원에 머물지 않고, 양주(揚州), 진강(鎭江), 무석(無錫), 항주(杭州)등지에 머무르면서, 조운(漕運)을 시찰하고, 공림(孔林)을 방문했었다. 제3차 남순때 건륭제는 비로소 해녕에 머무는 것을 선택한다. 그리고 이때는 진세관이 건륭23년(1758년) 세상을 떠난지 이미 4년이나 지난 때였다. 만일 건륭제가 정말 효심이 있었다면 어찌 "생부"가 사망한지 이렇게 오래 지난 후에야 비로소 해녕을 찾아갔을까?
그렇다면, 건륭제가 제3차 남순때 해녕 진가에 머무르게 된 것은 도대체 무엇때문이었을까?
사료기재에 따르면, "제3차 남순" 이전에 절강, 안휘, 강소 3개성은 황하의 수로가 바뀌면서 홍수의 피해를 입는다. 그리고 건륭25년(1760년)부터 강소절강일대의 큰 강인 전당강(錢塘江)에 해조(海潮)가 북으로 밀려가는 예고가 있었다. 전당강의 해조가 북으로 밀려가면 큰 확률로 전당강이 바다로 들어가는 입구에 있는 절강 해녕 및 부근의 항가호평원(杭嘉湖平原)이 피해를 입게 된다. 이 일대는 자고 이래로 "소호숙(蘇湖熟), 천하족(天下足)"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청나라때 가장 부유하고, 가장 중요한 세금원이었다. 일단 강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해 바닷물의 피해를 입게 된다면, 그로 인한 손실은 천하백성과 국고에 있어서 치명적인 타격이 될 터였다.
해녕의 염관진(鹽官鎭)은 바로 전당조(錢塘潮)를 관찰하기 가장 좋은 장소이다. 강과 바다를 따라 만들어진 제방, 석당은 전당조가 북으로 옮겨가면 가장 쉽게 파괴될 수 있는 구간이다. 건륭제가 강남으로 가면서 해녕을 선택한 것은 바로 해당공정(海塘工程)을 시찰하기 위함이고, 이는 공무를 위한 것이지 사적인 일은 아니었던 것이다.
이에 상응하게, 건륭제가 강남으로 가는 과정에서, 강남의 명문집안에서 황실이 먹고 거처하는 것을 책임지는 것이 관례로 형성되어 있었다. 해녕염관진의 최고 명문집안인 해녕진씨가 황제가 머무는 일을 책임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과도하게 해석할 필요는 없는 일이었다.
3
건륭제가 진세관의 아들일 가능성은 없지만, 그의 신세내력에 관한 소문은 그래도 끊이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면서 계속하여 새로운 주장이 나타난다. 어떤 사람은 그가 옹친왕부의 전격격(錢格格)의 소생이라고 말하고, 또 어떤 사람은 한녀(漢女) 이금계(李金桂)의 소생이라고 말하며, 또 어떤 사람은 열하(熱河)의 사대저(傻大姐, '사'는 바보라는 의미임)의 소생이라고 하기도 한다.
건륭의 생모가 한녀 이금계라는 소문이 문자기록으로 가장 먼저 남아 있는 것은 1944년 <고금문사(古今文史)>의 반월간에 기재된 <청조건륭의 출생>이라는 글이다. 작자는 당시 상해에서 유명한 잡문작가 주려암(周黎庵)이다.
주려암은 이렇게 말했다. 그가 근대의 저명한 학자 모광생(冒廣生)과 한담을 나눌 때, 상대방이 무의식중에 털어놓은 것이라고 했다. 모씨에 따르면, 건륭의 생모는 성이 이씨이고, 이름은 금계이다. 그녀는 피서산장 근처에 살았다. 한 해는 옹친왕 윤진(胤禛)이 강희제를 따라 열하로 사냥하러 왔다가 매화록(梅花鹿)을 한 마리 잡았다. 옹친왕은 기분이 좋아 사람을 시켜 그 사슴을 죽여서, 사슴피를 마셨다. 사슴피는 욕정을 불러일으킨다. 그리하여 참지 못하게 되었는데, 주변에 비빈이 없어서 수하를 시켜 피서산장 근처에서 여자를 구하게 한다.
마침 이씨가 땔감을 구하러 바깥에 나왔다가 돌아가는 길이었다. 윤진은 이것 저것 따지지 않고 그녀를 데리고 침상을 오른다. 그후 사냥을 마치고 돌아간 옹친왕은 이 일을 까마득히 잊고 있었는데, 이씨가 배가 불러 피서산장으로 와서 호소한다. 옹친왕은 이 일을 알게 된 강희제에게 한바탕 혼이 났다.
이씨의 신분과 황실혈통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강희제의 주재하에 이씨는 피서산장의 마굿간에서 건륭제를 낳은 후, 궁에서 쫓겨난다. 그리고 어린 황자는 옹친왕의 시첩인 뉴호록씨(钮祜祿氏, 즉 나중의 숭경황태후)가 거두어 기르게 된다. 건륭제가 등극한 후, 생모가 궁안에 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매년 돈을 들여 피서산장의 마굿간을 수리했다. 이 일은 청나라가 멸망할 때까지 지속되었고, 거기에는 여전히 건륭시대의 유적이 남아 있었다.
사실상 이 소문은 기본적으로 "열하의 사대저가 건륭의 생모이다"라는 소문의 2.0 버전이다.
모광생은 청나라말기에 열하도통(熱河都統)의 막료로 있었다. 그때는 청나라조정이 이미 지는 해였고, 열하의 관리들과 피서산장의 노태감들은 할 일이 없으면 옛 일을 추억하면서, 일부 문학창작을 하곤 했다. 청나라의 국력이 날로 쇠락하였고, 건륭제 시기는 바로 전성기에서 쇠퇴기로 넘어가는 전환점이었다. 그러다보니 그 자체가 이야기거리가 되었다. 그의 생모의 신분에 대해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것은 눈길을 끌기 위한 소설을 창작하는데 좋은 주제가 된다. 또한 건륭제시대 및 건륭제를 폄하하려는 의도도 내포하고 있다. 건륭제 생모의 별명은 '사대저'이며, 열하의 한 공장(工匠)의 딸이고, 수녀선발때 끌려가서 수를 채우려 했는데, 운좋게도 뽑혀서 옹왕부로 갔다. 이런 이야기가 나오게 된 것이다. 다만 이는 믿을만한 역사가 아니다.
피서산장 이금계의 판본도 마찬가지로 이렇게 만들어진 이야기이고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이다.
4
그러나, 건륭제가 옹친왕부 전격격의 소생이라는 소문은 아무렇게나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옹정조한문유지회편>의 기록에 따르면, 옹정원년 책비대전(冊妃大典)에 이런 성지가 반포된 적이 있다: "옹정원년 이월 십사일, 상유를 받들어: 태후성모가 유지에 따라, 측푸진(側福晋) 연씨(年氏)를 귀비(貴妃)로 봉하고, 측푸진 이씨(李氏)를 제비(齊妃)로 봉하고, 격격 전씨(錢氏)를 희비(熹妃)로 봉하며, 격격 송씨(宋氏)를 유빈(裕嬪)에 봉하고, 격격 경씨(耿氏)를 무빈(懋嬪)에 봉한다."
건륭6년에 편찬된 <청세종실록>에서는 같은 때 반포된 유지를 이렇게 적는다: "갑자(옹정원년 이월 십사일을 가리킴)일에 예부에 내리기를: 황태후성모의 의지를 받들어: 측비 연씨를 귀비에 봉하고, 측비 이씨를 제비에 봉하고, 격격 뉴호록씨를 희비에 봉하고, 격격 송씨를 무빈에 봉하고, 격격 경씨를 유빈에 봉한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이 두 개의 성지에서 경씨와 송씨의 호칭이 서로 바뀐 것을 제외하고, 가장 큰 변화는 바로 "격격전씨를 희비에 봉한다"가 "격격 뉴호록씨를 희비에 봉한다"로 바뀐 것이다. 이를 근거로, 청나라때 황가족보인 <옥첩(玉牒)>에서는 "세종헌황제(옹정제를 가리킴)의 제4자 고종순황제(건륭제를 가리킴)는 건륭50년 신묘 팔월 십삼일, 효성헌황후 뉴호록씨인 능주(凌柱)의 딸에 의해 옹화궁에서 탄생했다."
다만, <옥첩>의 황제신분에 관한 기술에 관하여, 청사학자(淸史學者) 곽성강(郭成康)은 이렇게 생각한다. 이건 후세에 건륭의 신세내력을 편찬할 때, 고의로 그 내용을 고친 혐의를 배제할 수 없다고.
그리하여 그는 세 가지 추측을 한다: 첫째, 격격 전씨와 격격 뉴호록씨는 동일인이고, 단지 공식기록상의 오류일 뿐이다; 둘째, 격격 전씨와 격격 뉴호록씨는 동일인이 아니다. 격격 전씨가 홍력(弘曆, 나중의 건륭제)을 낳았지만, 신분지위가 높지 않고, 게다가 보통 한족여자이기 때문에 옹정이 비밀입저(秘密立儲)할 때, 누군가 후임 군주에 대하여 쓸데없는 이야기를 할까봐 만주명문집안 출신인 희비 뉴호록씨의 후손이라고 하였다; 셋째, 한족여자 전씨는 모종의 원인으로 사품전의(四品典儀) 능주(凌柱)에 의해 황궁에 바쳐졌고, 홍력을 낳았다. 옹정은 그녀를 희비로 봉할 때 여전히 원래의 성씨를 썼으나, 나중에 홍력을 비밀입저하면서, 전씨가 뉴호록씨로 성을 바꾸게 되었고, 그리하여 "뉴호록씨를 희비로 봉했다"고 기록하게 된 것이다.
그외에, 곽성강등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옹정제때 비를 책봉한 성지(聖旨)의 글씨는 한림 황지준(黃之隽)이 썼다. 이 성지의 원고를 보면, 황지준도 희비를 "전씨(錢氏)"라고 적었다. 마치 관방의 기록이 확실히 문제있는 것처럼.
청사학자 두가기(杜家驥)는 황지준이 쓴 희비책문의 원고에서 핵심정보를 발견한다: "자이전씨(諮爾錢氏), 육질명문(毓質名門), 양휴령문(揚休令問), 유가무착(柔嘉懋著), 숙효순어중위(夙效順於中闈), 예교극한(禮敎克嫻), 익근수어내직(益勤修於內職). 자앙승황태후자유(玆仰皇太后慈諭), 이책인봉이위희비(以冊印封爾爲熹妃)...." 그는 성지원고에 전씨는 명문집안 출신이라고 하였다면 당시 한족여자가 입궁하여 시침하는 전통이 있던 청나라에서 전씨는 뉴호록씨로 성을 고칠 필요가 없었을 것이라고 한다. 하물며, <옹정조한문유지회편>과 <청세종실록>의 기술을 보면, 뉴호록씨와 전씨는 비로 봉해지기 전에 모두 "격격"이었다. 격격은 청나라때 황족여자의 전용용어가 아니었다. 만주어로 "소저, 언니, 아가씨"를 음역한 것이다. 그러므로, 후원의 등급이 삼엄한 왕부에서 격격은 단지 왕부의 보통시첩을 부르는 말이다. 전씨가 뉴호록씨로 성을 고쳤지만, 그녀의 신분지위에는 무슨 특별한 영향이 없었던 것이다.
다음으로, 두가기는 이런 지적도 한다. 옹정2년의 책봉상유를 받은 후, 홍력의 생모는 이미 "희비"의 위치에 앉는다. 그녀가 설사 만주족이 아니라 할지라도, 신분지위가 낮아서 성을 고칠 필요는 없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청나라때 황태후 혹은 황후가 되기만 하면 그녀의 일족은 "대기(擡旗)"의 영예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가장 전형적인 경우는 서태후(자희태후)이다. 함풍제가 붕어하고, 그녀의 아들 재순(載淳)이 동치제로 등극한 후, 청나라조정은 원래 '하오기(下五旗)'임 만주 상남기(鑲藍旗)에 속해 있던 예허나라(葉赫那拉) 일족을 "상삼기(上三旗)"에 속하는 만주 상황기(鑲黃旗)로 올려준 바 있다.
이를 보면 아들이 황제가 되기만 하면, 이전 황제때 후비의 출신이 어떠하든지간에 그녀의 가족이 청나라에서 명문집안의 대우를 받는다는데에는 아무런 영향이 없다. 또 다른 한편으로, 강희제의 생모인 퉁가씨(佟佳氏), 옹정제의 생모인 우야씨(烏雅氏)는 원래 후비들 가운데 지위가 높지 않았지만, 그녀들의 신분은 아들이 후임황제가 되는데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본다. 옹정제가 홍력을 후임황제로 정하면서, "전씨"를 "뉴호록씨"로 바꾼 것은 쓸데없는 일을 한 것이라고.
후임황제가 <옥첩>의 내용을 고쳤을 가능성에 관하여, 두가기는 이렇게 본다: 정치적인 목적을 가지고 "성"을 바꾸는 것은 광명정대한 행위가 아니다. 만일 단순히 책문을 고쳐쓰는 것이라면, 사람들의 입을 완전히 막기는 매우 어려울 것이다. 설사 잘 고친다고 하더라도 소문이 퍼지는 것을 막기는 어렵다. 이는 건륭제 본인의 명예에 관련될 뿐아니라, 더더욱 옹정제, 강희제등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니, 실로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많은 행위라 할 것이다.
희비가 큰 확률로 바로 뉴호록씨일 것이다. 그렇다면 옹정제 성지의 "희비전씨"는 어떻게 된 것일까?
두가기는 이렇게 본다. 이건 아마도 만주인들이 자신의 성씨를 간략하게 적기 좋아하는 것과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 예를 들어, 애신각라(愛新覺羅)는 만주어로 황금이라는 뜻이다. 그들은 한자로 성을 쓸 때 "금(金)"자를 앞에 쓰길 좋아한다. 혹은 같은 음의 "애(愛)", "애(艾)"로 쓴다. 그리고, 뉴호록은 만주어로 "낭(狼)"과 관련이 있다. 그들은 한자로 적을 때 "낭(郞)" 혹은 "뉴(鈕)"로 쓴다. 옹정2년의 이 성지는 당시의 이군왕(履郡王) 윤도(允祹)가 옹정제가 입으로 비를 봉하는 것에 관해 말한 내용을 받아적을 때, 아마도 습관적으로 비(妃)의 성씨를 간략하게 적었을 것이다. 그리고 옹정2년의 책비대전에서는 비로 봉해진 여자들 중에서 뉴호록씨를 제외하고는 모두 한성(漢姓)이다. 황지준이 윤도의 뜻에 따라 옹정제의 지시를 글로 적을 때, 전혀 조화롭지 않은 "뉴씨(鈕氏)"를 보았고, 자연스럽게 이는 윤도의 오기라고 생각해서 "전씨(錢氏)"라고 적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한자상의 사소한 착오가 수백년간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가 되어버렸을 것이다.
5
재미있는 점은 후세학자들이 죽어라 건륭제의 생모는 "희비 뉴호록씨"라고 논증하고 있는데, 건륭제의 아들인 "가경제(嘉慶帝)"는 딴 말을 하고 있다.
가경원젼(1796년) 건륭제는 "태상황"의 신분으로 피서산장에서 생일을 보낸다. 부황이 시를 짓기 좋아한다는 것을 알아서, 가경제는 <만만수절솔왕공대신등행경하예공기(萬萬壽節率王公大臣等行慶賀禮恭記)>를 써서 건륭제에게 바친다:
조건산상신묘년(肇建山莊辛卯年), 수동무량경인연(壽同無量慶因緣)
여정남극주전견(麗丁南極珠躔見), 어병북진화갑선(御丙北辰花甲旋)
옥전휘황등서욱(玉殿輝煌騰瑞旭), 금로복욱뇨상연(金爐馥郁裊祥煙)
자신경헌승항축(子臣敬獻昇恒祝), 강건순상억사금(康健純常億祀錦)
그는 대신들이 건륭제가 출생할 당시 강희제가 피서산장의 편액을 썼다는 것을 모를까봐 우려하여, 가경제는 특별히 어제시의 앞 두 구에 이런 문구를 추가했다: "강희신묘조건산장(康熙辛卯肇建山莊), 황부이시년탄생도복지정(皇父以是年誕生都福之庭). 산부인수(山符仁壽), 경해억자(京垓億秭), 면산순환(綿算循環), 이호모혁사(以怙冒奕祀). 차중인연(此中因緣), 불가사의(不可思議)"
가경제가 추가한 주석에 따르면, 건륭제는 "도복지정(都福之庭)"에서 태어났다는 것이고, 피서산장을 지을 때, 건륭제가 마침 경성에서 출생했다고 해석할 수밖에 없다. 다만, 가경제는 시를 짓는 재능이 부친만 못해서인지, 아니면 그가 고의로 무슨 궁중비밀을 공개하려는 것인지, 가경2년(1797년) 건륭제가 다시 피서산장에서 생일을 지낼 때, 가경제는 다시 부친을 위해 <만만수절솔왕공대신등행경하예공지>와 내용이 비슷한 시를 지었다. 그리고 시문의 아래에 다음과 같은 주석을 달았다: "경유황부이신묘세탄생어산장도복지정(敬惟皇父以辛卯歲誕生於山莊都福之庭), 약룡흥경(躍龍興慶), 집서종상(集瑞鍾祥)"
이렇게 되니, "산장도복지정"은 마치 건륭제의 탄생지가 피서산장이라는 뜻인 것을오 보인다.
궁은 큰 난리가 난다. 건륭제는 아들이 자신의 출생지조차 혼동하는데 분노하여, 특별히 자신이 건륭47년에 쓴 <인일옹화궁첨례(人日雍和宮瞻禮)>라는 시를 꺼내서 가경제에게 실수를 고치라고 요구한다. 이 시에서 건륭제는 스스로 이런 주석을 달아놓았다: "여실강희신묘생어시궁야(余實康熙辛卯生於是宮也)"(나는 실제 강희 신묘년에 이 궁(옹화궁)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가경제는 여전히 피서산장에서 태어났다는 것을 깊이 믿어 의심치 않았다.
가경4년(1799년), 건륭제가 붕어하고, 가경제는 그의 묘호를 "청고종(淸高宗)"으로 올린다. 당국에서는 건륭제 생전의 기거주(起居注), 주소(奏疏)등을 가지고 <청고종실록>을 편찬하기 시작한다. 건륭제가 생전에 명확히 자신은 옹화궁에서 태어났다고 하였기 때문에, 사서를 편찬하는 대신들은 감히 태상황의 뜻을 어길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건륭제가 태어난 것에 대하여 "탄어옹화궁저(誕於雍和宮邸)"(옹화궁저에서 태어났다)고 적었다. 그러나, 이 책이 나오자 가경제가 화를 낸다. 대신들에게 건륭제는 피서산장에게 태어났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고 훈계하고 그들에게 기한을 정해주면서 시정하도록 요구한다.
<청고종실록>을 편찬하던 동고(董誥), 유봉호(劉鳳浩), 조진용(曹振鏞)등은 대부분 강희제때의 노신들이다. 그들은 직접 건륭제의 어제시를 꺼내서, 태상황이 옹화궁에서 태어났다고 언급한 부분을 표시한 다음 가경제에게 올린다. 그리고, 가경제에게 직접 보신 후에 어떻게 적을지를 하문해달라고 요청한다. 그리하여, 가경제는 비로소 <실록>에 건륭제는 옹화궁에서 태어났다고 기술하도록 허락한다.
그러나, 가경제의 고집은 만만치 않았다. 가경25년(1820년) 칠월, 가경제가 피서산장에서 붕어한다. 유조(遺詔)에 이렇게 적는다: "옛날에 천자가 사냥하는 곳에서 생을 마치는 경우가 있었다. 하물며 난양행궁(灤陽行宮, 피서산장의 별칭)은 매년 가던 곳이고, 나의 황고(皇考, 즉 건륭제)께서 피서산장에서 태어나셨으니, 더 이상 무슨 유감이 있겠는가(我皇考即降生避暑山莊, 于復何憾)?"
가경제의 이 유조에 대하여, 새로 등극한 도광제(道光帝)는 처음에 부적절한 부분이 있다고 느끼지 못했다. 그리하여 관례에 따라, 선황의 유조를 천하에 반포하면서, 사람을 시켜 안남(安南, 월남), 곽이객(廓爾喀, 네팔), 두란니제국(杜蘭尼帝國, 아프가니스탄)등 번속국에도 보낸다. 이들 국가들은 한자를 쓰지 않기 때문에, 청나라조정의 번약관이 성지를 번역하게 되는데, 그때 이 오류를 발견한다. 그리하여 적시에 도광제에게 보고한다. 이때, 이미 가경제의 유조를 조선, 유구등 국가에는 미리 사신을 보낸 상태였다. 도광제는 할 수 없이 다시 사신을 불러 모두 회수한다.
황제의 유조를 내보낸 후에 다시 회수한다는 것은 전체 중국봉건시대에 보기 드문 일이다. 도광제의 이런 "소읽고 외양간고치는" 조치는 사람들로 하여금 건륭제의 신세내력의 특수성에 대해 더욱 억측을 하도록 만들었다.
도광제가 새로 고친 가경제의 유조에서는 건륭제의 출생지에 관한 부분을 다르기 기술하게 된다. 즉, 가경제의 유조에서 원래 있던 "나의 황고께서 피서산장에서 태어나셨으니, 더 이상 무슨 유감이 있겠는가(我皇考即降生避暑山莊, 于復何憾)"라는 부분을 "나의 할아버지, 아버지의 신위가 있는 곳이니, 더 이상 무슨 유감이 있겠는가(我祖考神御在焉, 于復何憾),"로 바꾸어 겨우 말이 통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의미는 이상하게 되었다.
가경제의 유조를 회수하고 수정하면서 제국내에서 건륭제의 탄생지에 대한 공식입장을 통일시켰다. 이렇게 하여 양대의 황제를 곤혹스럽게 만들었던 건륭제의 생모에 관한 수수께끼는 청나라조정내부에서는 인식을 통일하게 된다.
다만, 문제는 잠복되어 있었고, 적절한 순간에 더욱 많은 수수께끼를 만들어내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역사의 반작용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