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명)

탈문지변(奪門之變): 전임황제를 복위시킨 명나라의 정변

중은우시 2025. 5. 20. 14:56

글: 아시애공자(我是艾公子)

정월 십칠일, 하늘이 밝아오고 있었다. 대명황제 주기옥(朱祁鈺)은 신하들과의 약속에 따라, 이날 조조(早朝)에 다시 참석하기 시작할 예정이었다.

신하들은 일찌감치 오문(午門)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종루의 종과 고루의 북이 동시에 올리면서, 그들은 줄줄이 봉천문(奉天門)으로 들어간다. 그들은 눈앞의 황제를 보고 멍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자신의 눈이 잘못된 것인지 다시 비비곤 했다.

용상에 앉아 있는 사람은 경태제(景泰帝) 주기옥이 아니라, 6년여동안 연금되어 있던 태상황(太上皇) 주기진(朱祁鎭)이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서로 얼굴을 보면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을 때, 서유정(徐有貞)이 일어나서 큰 소리로 외쳤다: "상황(上皇)께서 복벽(復辟)하셨다!"

주기진은 그의 말을 받아 신하들에게 말한다: "경태제는 병이 위중하여, 여러 신하들이 짐을 맞이하여 다시 황위에 올랐다. 여러분들은 여전히 원래의 관직을 그대로 맡으라!"

신하들은 무릎을 꿇고 만세를 부를 수밖에 없었다.

바로 전날 저녁인 정월 십육일의 깊은 밤, 대명제국에서는 궤이한 한 차례의 정변이 발생했다. 사건주모자는 천여명을 모아서, 하룻밤만에 대명의 황제를 갈아치운 것이다. 그 과정은 너무나 조용하기 이루어져서 아무런 유혈충돌도 발발하지 않았다.

다음 날 황위에 앉은 주기진이 만일 회고록을 출판한다면, 책의 제목은 분명히 <나의 성공은 복제될 수 없다>일 것이다.

  1. 황제가 붙잡혀 가다

당연히, 주기진이 만일 자신의 감추고 싶은 점까지 그대로 얘기한다면, 그의 실패도 마찬가지로 다시는 복제될 수 없는 것이다.

황제가 이민족에게 생포당해 끌려가다니, 기나긴 중국역사상, 극소수의 망국지군을 제외하고, 주기진은 파천황의 재수없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반대로 황족이 이민족에게 끌려갔지만, 그대로 나라가 망하지 않고, 마지막에 다시 생환하였으니, 그는 파천황의 행운아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정통14년(1449년) 칠월, 몽골 오이라트부(瓦剌部)의 수령 예센(也先)이 군대를 이끌고 명나라를 침입한다. 23살의 명영종(明英宗) 주기진은 대태감 왕진(王振)의 종용하에, 흥분제를 마신 것처럼 평생 후회할 결정을 내린다: 어가친정(御駕親征)

50만 명나라 정예군의 호위를 받으면서 주기진은 출발한다.

대군이 대동(大同)에 도착하고나서야, 왕진은 상황이 좋지 않게 돌아간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하여 주기진에게 회군을 건의한다. 주기진은 그저 변방으로 가서 위문이나 하려는 것이었으니, 바로 북경으로 되돌아갈 준비를 한다. 그런데, 여기서 왕진은 다시 장난을 친다. 그는 하북(河北) 울현(蔚縣) 사람이어서, 회군하는 길에 황제를 그의 고향으로 우회하게 했다. 그렇게 하여 고향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능력을 뽐내고 싶었던 것이다. 그 결과 일정이 늦어지게 되면서, 토목보(土木堡, 지금의 하북성 회래)에서 예센의 오이라트군에게 추격당하고 만다.

명군은 기습을 당했다. 역사기록에 따르면, 50만 명나라군대는 절반이 사상당하고, 갑옷과 무기를 모조리 빼앗긴다. 관건은 주기진 조차 오이라트군에 포로로 잡히게 된 것이다.

이런 일을 초래하게 만든 왕진은 전투중에 호위장군 번충(樊忠)의 추(錘)에 격살당한다.

소식이 북경에 전해지고, 전체 조정과 황궁은 혼란에 빠진다.

예센은 주기진을 명나라에 대하여 정치적으로 압박하고, 경제적으로 이득을 취하는 카드로 여긴다. 수시로 주기진은 대동성의 성문앞에 나타나서, 주기진의 명의로 성지를 내려 이것 저것 요구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상당한 재물을 받아서 돌아가곤 했다.

주기진의 모친 손태후(孫太后)는 돈을 주고 황제를 되돌아오게 하고 싶었다. 그리하여 그는 전황후(錢皇后)와 함께 궁중의 금은보석을 끌어모아 8필의 말에 실어 모든 가치있는 물건을 오이라트 군영으로 보낸다. 예센은 이를 모조리 받았지만, 주기진을 돌려보내겠다는 말은 한 마디도 꺼내지 않는다.

이로 인하여 명나라는 군주가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된다.

주기진이 포로로 잡힌지 4일 후에, 그의 동부이모 동생인 성왕(郕王) 주기옥을 섭정감국(攝政監國)으로 세워 황권을 대행하도록 한다.

그리고 다시 4일이 지난 후, 주기옥은 임조청정(臨朝聽政)하며, 여러 신하들도 이전과 마찬가지로 조회에 참석한다. 어떤 대신은 대전에서 왕진의 죄행을 까발리면서, 비록 왕진이 죽었지만, 그 잔당이 여전히 남아 있으니, 구족을 멸하여 천하의 기대에 부응해야 한다고 말했다.

여러 신하들은 모두 함께 바닥에 꿇어 앉는다.

주기옥은 그리하여 명을 내려, 금의위지휘사 마순(馬順)으로 하여금 왕진의 가산을 수색, 몰수하도록 명한다.

그의 말이 떨어지자 마자, 급사중 왕굉(王竤)이 돌연 마순을 바닥에 쓰러뜨리면서, 마구 두들겨 팬다. 다른 신하들도 속속 가담하였고, 결국 마순은 조정에서 맞아죽는다.

원래, 조정의 문무대신들은 다 알고 있었다. 마순은 왕진의 충실한 심복이었다. 그러나 사정을 모르던 주기옥은 마순으로 하여금 왕진의 가산을 수색, 몰수하게 명했던 것이다. 그러자 신하들이 분노했고, 마순을 두들겨패서 죽음에 이르게 만든 것이다. 이때 함께 두들겨 맞아 죽은 사람은 왕진의 심복이었던 모귀(毛貴)와 왕장수(王長隨)도 있다.

주기옥의 제1차 청정은 사상 보기 드문 조정집단구타사건을 초래한다. 눈앞에서 3명이 맞아죽는 것을 보고, 그는 태감의 부축을 받아 조용히 그 자리를 떠난다.

2. 거저 주운 황위

개략 10일후, 신하들은 주기진의 아들인 태자의 나이가 너무 어리다는 것과 오이라트이 침입을 막는 것을 이끌어줄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을 이유로 손태후에게 주기옥을 황제로 세울 것을 건의한다.

손태후는 주기옥을 황위에 앉힐 생각은 없었다. 그녀는 자신의 아들 주기진의 황위를 죽음으로 지킬 생각이었다 .일찌감치 주기옥을 감국에 임명하는 칙서에서 그녀는 특별히 강조한 바 있다. 황제(주기진)가 지금 군대를 이끌고 아직 되돌아오지 않았다(今尙未班師). 그러니 너 주기옥은 단지 "잠정적으로 백관을 총괄하고, 그 일을 처리하라(暫總百官, 理其事)" 그러나, 서서히 현실과 여론의 변화에 따라, 그녀는 부득이 신하들의 주기옥을 황제로 세우게 해달라는 요구를 받아들이게 된다.

주기옥은 황제가 되고 싶지 않다는 의사를 표시한다.

사서에 따르면, 그는 "재삼 사양했고", 신하들은 그러나 물러나지 않았다. 급한 나머지 그는 이렇게 소리쳤다: "황태자(주기진의 아들인 태자 주견심(朱見深))가 있는데, 경등은 감히 법도를 어지럽히려 하는가?" 그러자 신하들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오직 우겸(于謙)만이 큰 소리로 말한다: "신등은 실로 국가를 우려하는 것이지, 개인적인 생각때문에 이러는 것이 아닙니다. 원컨대 전하께서 어려움을 이겨내서 종사를 안정시켜주시고, 그렇게 함으로써 인심을 달래주시길 바랍니다."

우겸의 말을 듣고, 주기옥은 비로소 안심하고 황제에 오른다. 만일 토목보의 변이라는 돌발사건이 없었더라면, 주기옥은 평생 황제의 자리에 오르는 것을 꿈도 꿀 수 없었을 것이다. 현재, 그는 용상에 앉았다. 이 국가를 이끌어 이민족의 침략에서 지켜내야 한다. 이건 아마도 천명일지 모르겠다. 명나라때 두 명의 황제가 황위를 그저 주웠다. 주기진이 바로 그 중의 한 명이다.

다만, 주기옥의 황제자리는 공짜로 주운 것은 아니다. 어쨌든 왕조의 위기순간에, 그는 사명을 욕되게 하지 않고, 전쟁을 이끈 황제로서 적격이었기 때문이다. 전통적인 견해에 따르면, 우겸은 위기의 순간에 흔들리지 않고, 북경보위전을 조직하고 승리로 이끌었으며, 이를 통해 명나라의 국조가 계속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그 배후를 보지 못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신황제 주기옥의 수권과 지지이다. 주기옥의 신임이 없었다면, 우겸이 한마음으로 오이라트와의 전쟁을 조직하여 대항할 수 없었을 것이다.

당시 시강(侍講) 서정(徐珵)등은 북경을 포기하고 남쪽으로 수도를 이전하다고 주장했다. 만일 이 주장이 실행되었다면, 토목보의 변은 명나라버전의 정강지역이 되었을 것이다.

우겸은 그의 주장을 듣고 크게 화를 내면서 소리높여 말한다: "남천을 주장하는 자는 참할 것이다. 경사는 천하의 근본이니, 한번 움직이면 대사를 그르친다. 송나라가 남으로 옮겨간 일을 그대는 보지 못한단 말인가?"

주기옥은 우겸을 극력 지지했고, 그는 송고종(宋高宗) 조구(趙構)가 되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남천을 하지 않으면 오이라트와 싸워야 한다.

예센은 명나라가 새 황제를 세운 것을 듣는다. 이제 그가 붙잡아 놓은 주기진은 태상황이 되었으니, 이용가치가 크게 줄어든다. 그리하여 그해 십월 병력을 이끌고 북경을 공격한다. 그러나 패배하여 철수한다. 다음 해(1450년) 봄에 그는 다시 침입하지만, 대동총병관 곽등(郭登)에게 격패당한다.

우겸과 주기진의 항전의지가 굳건한 상황하에서, 예센은 계속하여 주기진을 붙잡고 있어야 별다른 이득을 얻어내기 힘들다고 여긴다. 차라리 그를 돌려보내서 명나라조정에서 두 용간에 싸움을 벌이면서, 스스로 무너지게 만드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한다.

명나라쪽을 보면, 주기옥은 예센이 태상황 주기진을 석방하겠다고 의사를 표시하는데 대하여 냉담한 반응을 보인다. 그러나 신하들은 흥분한다. 대신 왕직(王直)등은 어떻게 태상황을 맞이할 것인지를 논의했다. 그러자, 주기옥은 불쾌해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짐은 원래 황위에 오르고 싶지 않았는데, 당시에 떠밀려서 황제에 올랐고, 바로 그대들이 그렇게 한 것이 아니냐" 신하들이 당초 그를 황위에 앉으라고 밀어부쳐놓고는 이제 와서 다시 '정식황제'를 맞이하자고 하니, 주기진을 모셔오고 나면, 나를 어떻게 하겠다는 것이냐는 것이다.

이때 다시 우겸이 나선다. 그는 이렇게 담담하게 말한다: "황위는 이미 정해졌습니다. 어찌 달라질 수 있겠습니까!" 황위가 이미 결정되었으니 안심하시라는 뜻이다. 그러나 이치대로라면 마땅히 태상황으로 모셔오면 된다는 것이다.

우겸의 말을 듣고 안심한 주기옥은 그제서야 이렇게 말한다: "그대의 의견대로 해라."

오이라트인들은 주기진을 돌려보낼 때, 한 마디 덧붙이는 것을 잊지 않는다. 명나라조정내부에서 내분을 일으키도록. 지원(知院) 보얀테무르(伯顔帖木兒)는 좌우를 물리친 다음, 통역을 통해 주기진에게 이렇게 말한다: "황제가 돌아가면, 지금 그대의 형제가 황제에 앉아 있다. 황제의 자리는 원래 당신의 것이다. 돌아가면 대소신료들을 겁내지 말고, 황제의 자리에 앉도록 해라."

진심인지 아니면 가식인지, 1년가량 포로로 있던 주기진은 이렇게 말한다: "그저 조상의 능침을 지키겠다. 백성들이 좋다면 나도 좋다."

권력에 대한 욕망에 대해 대명으로 돌아온 주기진은 담담한 태도를 보인다. 그러나 황제의 자리에 앉아 있던 주기옥은 더더욱 권력에 대한 욕망이 강해진다.

3. 금고(禁錮)와 역저(易儲)

경태원년(1450년) 팔월, 태상황 주기진은 북경으로 되돌아온다. 주기옥은 그를 남궁(南宮)내에서 생활하도록 조치한다. 그리고 군대를 파견하여 그를 지키게 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주기진이 주기옥에게 연금당했다는 것이다.

어쨌든 주기옥은 위기의 순간에 등극했을 때, 주기진은 이미 십여년간 황제로 지냈다. 이는 기반이 탄탄하지 못했던 주기옥으로서는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조정신하들이 태상황을 서서히 잊도록 만들어야 했다.

그는 신하들이 주기진을 알현하는 것을 금지한다. 그는 단지 손태후만이 자신의 아들을 만나볼 수 있도록 허락한다. 그리고 그를 모시는 태감들은 남궁을 출입할 수 있도록 하용하여, 최소한의 존엄은 지킬 수 있도록 했다.

그는 시간의 힘을 믿었다. 견고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시간이 흐르면 약해지고 흩어지는 것이다. 살아있는 전황제의 영향력도 마찬가지이다.

주기옥의 본심이 나쁘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권력의 단맛은 그를 권력욕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게 만든다. 그는 스스로 황제가 되려고 했을 뿐아니라, 자신의 아들, 아들의 아들까지 모두 황제가 되도록 만들려 했다. 권력은 부자간에 넘어가는 것이다. 이는 부계사회의 기본인식이다. 이 점에서 그는 사상의 한계를 초월하지 못한다.

당시의 상황은 이러했다. 주기옥이 대명의 황제인다. 황태자는 주기진의 아들인 주견심이었다. 즉, 주기옥이 죽으면, 제국의 황위는 다시 주기진의 일맥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건 주기옥의 걱정거리였다.

어떤 시대이건 황상의 뜻을 헤아려서 큰 이득을 취하려는 자들이 있기 마련이다. 금방 광서의 한 지휘사가 토관을 죽인 혐의로 체포된다. 그는 급히 사람을 시켜 "황태자를 바꾸소서"라는 상소를 올린다. 이를 통해 스스로의 목숨을 구하고자 한 것이다.

주기옥은 그 상소문을 보고, 속으로 크게 기뻐한다. 그는 급히 예부로 하여금 이 일을 논의하게 명한다. 신하들은 감히 반대하지 못했고, 황제의 뜻대로 황태자를 바꾸는데 동의한다.

경태3년(1452년) 오월, 6살짜리 주견심은 기왕(沂王)으로 강급되고, 주기옥은 자신의 5살짜리 아들 주견제(朱見濟)를 황태자에 앉힌다.

그러나, 황태자를 교체한 일은 일부 사람들의 불만을 산다. 주기옥의 황후 왕씨(汪氏)는 명확히 반대하다가, 주기옥에 의해 폐위당한다. 그리고 주견제의 생모인 항씨(杭氏)를 황후에 앉힌다.

겨우 1년반이 지난 경태4년(1453년) 십일월, 황태자 주견제가 요절한다. 이건 아마도 주기옥의 일생에서 가장 비통한 일이었을 것이다. 주견제의 죽음은 어느 정도 후속의 일련의 사건을 일으키는 도화선이 되었다.

주견제가 죽은 후, 주기옥은 황태자에 앉힐 다른 아들이 없었다. 일부 대신들은 그리하여 주견심을 황태자로 복위시키자고 주장한다. 주기옥은 분노를 참지 못했다. 자신의 나이가 겨우 26,7세이고, 정력이 왕성하여, 다시 아들을 낳는 것이 아무런 문제도 없는데, 이들 대신들은 왜 이렇게 급히 주기진의 아들을 다시 황태자에 앉히자고 말하는가? 그는 한편으로 주견심을 동궁으로 복위시키자고 주장한 대신들을 감옥에 가두고, 다른 한편으로 후계자를 낳기 위해 애를 쓴다. 그는 아들을 낳기 위해 여러가지 노력을 다했으며, 심지어 당시 최고명기(名妓) 이석아(李惜兒)를 내궁으로 부르기까지 했다.

점점 사람들에게 잊혀져가던 태상황 주기진은 황태자교체의 풍파 속에서 다시 한번 사람들에 의해 거명되기 시작한다. 주기진의 일상생활을 책임지고 있던 태감 완랑(阮浪)은 주기진으로부터 금수대(金繡袋)와 도금도(鍍金刀)를 하사받은 바 있다. 완랑은 이 두 개의 신물을 그의 친구인 왕요(王堯)에게 준다. 어찌된 일인지 이 일이 들통난다. 그리고 이 일은 주기진이 복벽을 도모하는 음모라고 인식된다. 완랑과 왕요는 모두 감옥에 갇힌다. 다행히 완랑은 죽을 때까지도 주기진에게 복벽의 의도가 있다고 진술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주기진은 사건에 연루되지 않을 수 있었다.

경태6년(1455년) 칠월, 서정(徐正)이라는 형과급사중(刑科給事中)이 주기옥을 만나서, 좌우를 물리쳐 줄 것을 청한다. 그리고 주기옥에게 비밀스럽게 이렇게 말한다: "상황(주기진)이 돌아온지 오래 되었고, 기왕(주견심)은 황태자의 지위에 있었다. 천하의 신민들이 이들을 받든다. 마땅히 봉지로 보내어 사람들의 기대를 끊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다른 친왕의 아들을 궁으로 데려와 양육하는 것이 좋겠다."

역사기록에 따르면, 주기옥은 그의 말을 들은 후, 경악하고 대노한다. 서정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죽어 마땅하다. 죽어 마땅하다!"고 소리쳤다고 한다.

서정은 원래 위험을 무릎쓰고 부귀를 추구한 것이며, 주기옥이 태상황가족의 잠재적인 위협을 제거하도록 건의함으로써 부귀를 얻어내려고 했다. 그러나 생각지도 못하게 그의 직설적인 건의는 주기옥의 기휘(忌諱)를 범한 것이었다.

주기옥은 서정을 유배보낸다. 그러나 그의 내심은 서정의 의견에 동의하고 있었다.

주기옥은 주기진에 대한 연급을 업그레이드시킨다. 그는 주기진과 외부의 연락을 철저히 차단한다. 그가 외부사람들과 '모의'할 수 없게 만든다. 그는 명을 내려 남궁의 자물쇠에 철물을 부어 버리고, 궁의 담장을 높이며, 담장주변의 큰 나무들을 베어버린다. 주기진에게 제공하는 일상음식은 벽에 뚫은 구멍을 통해서 넣어주었다.지필묵의 공급도 엄격히 제한한다.

당시는 여름이었는데, 주기진은 평소에 그늘에서 시원하게 지내던 큰 나무들이 잘려나가자, 마음 속으로 크게 두려워했다는 말이 전해진다.

다만, 주기진은 그래도 크게 나쁜 놈은 아니었다.

그는 태상황 주기진을 연금시켰지만, 직접 그의 목숨을 거둘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비록 6,7년의 시간동안 그가 조그만치라도 주기진이 살아있는 것이 불안하다는 뜻만 내비쳤더라면, 수하의 누군가 즉시 그 뜻을 눈치채고 깔끔하게 주기진의 목숨을 거두었을 것이다. 나중에 주기진이 주기옥에게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러나, 주기진은 시종 잘 살았다. 그래서 복벽할 기회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4. 궤이한 정변

경태7년(1456년) 연말, 주기옥은 여전히 아들을 낳지 못했는데, 그의 몸이 먼저 망가져버린다.

그는 병을 앓기 시작했고, 일부 의식활동에 참가할 수 없었다.

다음 해(1457년) 정월 십이일, 그는 병이 심하여 조회에 참석할 수 없었다. 신하들은 좌순문(左順門)에 모여 문안인사를 했다. 환관 흥안(興安)이 나와서 너희는 조정의 고굉대신이다. "사직을 위해서 생각하지 않고, 할일없이 문안만 하면 무슨 이점이 있겠는가?"라고 말한다.

신하들은 뭐라고 할 말이 없어, 물러나게 된다.

신하들이 모여서 어떻게 할 지를 논의하는데, 그들은 흥안의 말 속에 뼈가 있다고 여긴다. 혹시 대신들로 하여금 급히 후계자문제를 논의하라는 것이 아닐까?

그리하여 후계자를 누구로 할 것인지를 놓고 논의를 한다. 최종적으로, 당시 병부좌시랑 겸 좌춘방대학사로 있던 상로(商輅)가 앞장서서 <복저소(復儲疏)>를 초안하는데, 특별히 우겸의 건의에 따라 두 마디를 추가한다: "하루빨리 후계자를 선택해 주셔서, 사람들이 안심하고 일하게 해주시기를 바랍니다. 폐하(주기옥을 가리킴)는 의종장황제의 아들이니, 마땅히 장황제의 자손을 세워야 합니다." 그후 대신들이 모두 서명한다. 명선종 주첨기(朱瞻基)의 적손(嫡孫)은 주견심 한명밖에 없다. 이 상소문은 주견심을 황태자로 복위시키자는 것을 공개화한 것이다.

이틀후인 정월 십사일, 상소문이 올라간다.

주기옥은 바로 유령(諭令)을 내린다: "청하는 바를 허락하지 않는다." 신하들과 의견이 달랐던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짐은 단지 감기에 걸린 것이다. 정월 십칠일에는 조회에 나가겠다.

신하들은 이를 황제의 몸이 호전되었다는 신호로 받아들인다. 그리하여 각자 물러나서 3일후를 기다린다. 즉 정월 십칠일에 다시 논의하기로 한다.

정월 십오일, 관례에 따르면, 황제가 직접 하늘과 땅에 제사를 지내야 한다. 주기옥은 가고 싶었지만, 제대로 설 수조차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총병관, 태자태사, 무청후(武淸侯) 석형(石亨)으로 하여금 자신을 대신하여 가도록 한다.

석형은 황제의 병상 앞으로 불려간다. 그는 주기옥의 실제 병세를 알 수 있었다. 나온 후에 그는 즉시 사설감태감(司設監太監) 조길상(曹吉祥), 도독(都督) 장월(張軏) 두 사람과 연락하여, 몰래 그들에게 얘기한다: 황제는 이미 희망이 없다.

석형은 이렇게 말한다: 경태제의 병이 이미 심각하다. 만일 불측의 일이 생기면 황태자도 없다. 차라리 이 틈을 타서 태상황을 복위시키면 불세의 공을 세우는 것이 될 것이다.

세 사람은 그 자리에서 의견을 일치시킨다. 급박하게 이루어진 음모가 이렇게 서막을 열게 된다.

업무분담에 따라, 조길상은 입궁하여 손태후를 만난다. 그리고 손태후의 지지를 받아낸다. 손태후는 조길상에게 의지(懿旨)를 써준다: "천자(주기옥을 가리킴)의 병이 크게 심해져서, 다시 회복되기 힘들다. 황위를 오래 비워둘 수 없다. 상황(주기진을 가리킴)은 남궁내에서 8년을 거주했고, 성덕이 사라지지 않았고, 하늘의 뜻이 있는 것이다. 간신들이 음모로 가두어 놓았으며, 번왕을 세워서 대통을 잇게하고자 했다. 이는 국가에 불리하다. 석형등이 병사를 이끌고 태상황을 맞이하라."

명나라의 일부 사료에서는 이를 조길상, 석형등이 위조한 의지라고 말한다. 그러나 손태후가 자신의 아들이 황제의 자리에 복위할 것을 갈망했다는 것을 보면 이 의지는 진실일 가능성이 크다.

석형과 장월은 밤을 세워 천상(天象)을 잘 읽고, 지모가 뛰어난 서유정(徐有貞)을 찾아간다. 서유정은 토목보의 변 이후 남천을 주장했다가 명성이 나빠져서 오랫동안 승진을 하지 못한 서정이다. 그는 고인의 건의를 받아 이름을 서유정을 고명했다. 나중에 황하의 치수에 공을 세워 좌부도어사로 승진한다. 그는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지만, 공리심이 너무 컸고, 항상 개세의 공을 세우고자 했다.

석형등이 온 뜻을 듣고, 서유정은 크게 흥분한다. 그는 그 자리에서 밤에 천상을 살피고는 이렇게 말한다: "제성(帝星)이 이미 자리를 옮겼다. 이 일은 늦춰서는 안된다. 하루빨리 손을 써야겠다."

상세한 계획을 논의한 후, 그들은 거사일자를 다음 날인 정월 십율일 밤으로 정한다.

정월 십육일 밤에 서유정은 조복(朝服)으로 갈아입고, 문앞에서 가족들에게 말한다: "나는 큰 일을 하러 간다. 성공하면 나라의 복이고, 실패하면 우리 집안은 패망한다. 너희는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어라."

가는 도중에 서유정은 좌도어사 양선(楊善), 노장 왕기(王驥)도 가담시킨다. 왕기는 당시 이미 70여세였다. 그런데 스스로 갑옷을 입고 말에 올랐을 뿐아니라, 아들과 손자도 데리고 간다. 석형숙질, 조길상숙질과 회합한 후, 장월도 경영병(京營兵)을 이끌도 나타난다.

그들을 모두 합쳐도 천여명에 불과했다. 이들은 함께 황성으로 출발한다.

장월이 병력을 이끌고 성안으로 들어가는 핑계는 오이라트군이 변방을 침범하여 경성의 안전을 호위해야한다는 것이었다. 석형은 황성의 열쇠를 장악하고 있어서 직접 대문을 열어, 이들 부귀를 탐하는 망명지도들이 순조롭게 자금성으로 들어갈 수 있게 해준다. 황성에 들어간 후, 세심한 서유정은 다시 대문을 걸어잡근다. 외부의 지원병이 들어올 수 없도록.

사람들은 순조롭게 남궁에 도착한다. 도중에 황성의 수비군을 만나지만, 아무도 그들에게 무슨 일인지 묻지 못했다.

남성의 궁문은 주기옥이 강화시킨 후에 어떻게 해도 열리지 않았다. 석형은 사람을 시켜 큰 나무를 가져와 부딛쳤지만, 그래도 열리지 않았다. 오히려 성벽에 큰 구멍을 낼 수 있었다. 사람들은 담장의 구멍을 통해 몰려 들어간다.

태상황 주기진은 이떄 아직 잠들지 못하고 있었다. 깜깜한 속에서 사람들이 몰려오자, 그는 죽을 날이 되었다고 여긴다. 그런데, 이들은 그의 앞에 와서 바닥에 무릎을 꿇고 만세를 외친다.

주기진이 물었다: "너희는 나를 복위시키려 온 것이냐. 그 일은 신중해야 한다."

사람들은 주기진을 모시고 대내로 직접 쳐들어간다. 도중에 주기진은 하나하나 이름을 묻고, 그대들의 공로를 잊지 않겠다고 말한다.

동화문(東華門)에 이르자, 수비병사들이 길을 막는다. 주기진이 나서서 소리치자 수비병사들이 물러난다. 사람들은 칼에 피한방울 묻히지 않고 황궁으로 진입한다. 또 다른 사료에 따르면, 동화문의 수비병이 석형, 장월의 병사들과 소규모 충돌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주기진이 그날 밤 봉천전의 용상에 오르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정월 십칠일, 하늘이 밝아오고 있었다. 대명황제 주기옥(朱祁鈺)은 신하들과의 약속에 따라, 이날 조조(早朝)에 다시 참석하기 시작할 예정이었다.

신하들은 일찌감치 오문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종루의 종과 고루의 북이 동시에 올리면서, 그들은 줄줄이 봉천문으로 들어간다. 그들은 눈앞의 황제를 보고 멍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자신의 눈이 잘못된 것인지 다시 비비곤 했다.

용상에 앉아 있는 사람은 경태제 주기옥이 아니라, 6년여동안 연금되어 있던 태상황 주기진이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서로 얼굴을 보면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을 때, 서유정이 일어나서 큰 소리로 외쳤다: "상황(上皇)께서 복벽(復辟)하셨다!"

주기진은 그의 말을 받아 신하들에게 말한다: "경태제는 병이 위중하여, 여러 신하들이 짐을 맞이하여 다시 황위에 올랐다. 여러분들은 여전히 원래의 관직을 그대로 맡으라!"

신하들은 무릎을 꿇고 만세를 부를 수밖에 없었다.

역사상 저명한 궁정정변인 탈문지변은 이렇게 궤이하게 성공하게 된다.

주기진이 다시 황위에 올랐을 때, 주기옥은 세수를 하며, 조회에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종소리와 북소리가 울리자 그는 좌우에 묻는다: "설마 우겸이 반란을 일으키기라고 했단 말인가?" 주기옥의 마음 속에 군대를 장악하고 있던 병부상서 우겸에 대한 우려가 숨어 있었던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수하가 와서 보고한다. 우겸이 아니라 태상황이 복위했다는 것이다.

주기옥은 "좋다. 좋다. 좋다."고 세마디를 연발하고, 다시 병상에 눕는다. 그리고 벽을 향해서 잠이 든다. 아무도 그의 이때 심경이 어떨지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우겸은 이때 이미 죽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주기옥의 집권초기, 제국은 전시상태였고, 병정합일(兵政合一)이었다. 병부상서 우겸은 아무런 의문의 여지없는 제국의 2인자였다. 나중에 우겸은 소보(少保) 겸 병부상서이고, 총독군무가 되어, 권력이 커지게 된다. 그는 여러번 일부 직위를 사임했지만, 주기옥은 "국가의 중대한 임무를 그대가 맡아달라"고 하면서 사임을 허락하지 않았다.

탈문지변이 발생했을 때, 심지어 주기진이 다시 황제에 올라 여러 신하들로부터 절을 받을 때, 병력을 장악하고 있던 우겸이 만일 정변을 막고자 했더라면, 그건 아주 쉬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가 만일 원했다면, 주기진을 다시 태상황으로 되돌릴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그러나 탈문지변이 발생했을 때이건 발생한 후이건, 우겸은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는다. 이는 그가 탈문지변의 결과를 묵인하였다는 것을 말해준다.

명나라의 역사학자들의 분석에 따르면, 서유정, 석형이 탈문지변을 꾸밀 때, 우겸이 몰랐을 리 없다는 것이다. 다만 그는 만일 무력으로 대항하면 자신의 목숨을 지킬 수 있지만, 명영종, 명경제의 권위는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서유정, 석형이 병력을 이끌고 밤에 남궁으로 들어가는 것을 알면서도 방임하고, 앉아서 죽기를 기다렸다. "공(우겸을 가리킴)은 죽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죽음으로 사직을 보전하려 하였다."

5 우겸의 죽음

우겸이 죽을 날이 과연 다가왔다.

황제의 자리로 되돌아온 주기진은 내심으로 복수심이 충만했다. 옛빚을 청산해야만 그가 6년여간 연금당해있던 생활에 대한 댓가를 얻어낼 수 있는 것처럼. 그리고 가장 먼저 표젹이 된 것은 바로 주기옥이 중용한 "구시재상(救時宰相)" 우겸이다.

탈문지변 다음 날인 정월십팔일, 우겸은 체포되어 하옥된다. 죄명은 막수유의 "의욕영립외번(意欲迎立外藩)" 즉 또 다른 후계자를 세우려 했다는 것이다.

정월 십구일, 주기진은 삼사구경으로 하여금 우겸건을 신속히 심리하도록 명한다.

정월 이십일, 20여명의 관리들이 대리시(大理寺)에서 우겸에 대한 심리를 진행한다. 우겸은 혹형을 당했지만, 시종 침묵을 지킨다.

정월 이십일일, 우겸이 사형당한다.

사건입건에서 처형까지, 겨우 3일이 걸린다. 이런 비정상적인 사형집행방식은 누군가 우겸이 하루빨리 죽기를 원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사서의 기록에 따르면, 주기진은 우겸을 죽일지 말지를 놓고 매우 망설였다고 한다. "우겸은 실로 대명에 공이 많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유정은 곁에서 참언했다: "우겸을 죽이지 않으면, 이번 거사는 명분이 없어집니다." 그의 뜻은 우겸을 죽이지 않으면 주기진의 황위에 정통성이 없어지고 합법성이 없어진다는 말이다. 그리하여 "황제가 결국 결정을 내렸고" 우겸을 처형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우겸을 처형하는 날, 주기진은 천하에 대사면령을 내린다. 그리고 경태8년을 천순원년으로 고친다. 며칠 후, 연금된 경태제 주기옥은 다시 폐위되어 다시 성왕이 된다.

주기진은 조서에서, 주기옥이 당시 황위를 찬탈하여 등극한 것을 질책하고, 그의 8년간의 정치를 모조리 부정하며, 주기옥에 대하여 "불효불제(不孝不悌), 불인불의(不仁不義), 예덕창문(穢德彰聞), 신인공노(神人共怒)"했다고까지 욕한다. 심지어 주기옥에 대하여 "기절기자(旣絶其子), 우앙기신(又殃其身)"이라고까지 저주했다.

주기진의 말살로, 일찌기 오이라트에 견결히 저항하고, 명나라의 수명을 연장시킨 주기옥, 우겸 군신 2명중 한명은 일거에 "신인공노"할 혼군폭군으로 오명을 뒤집어 쓰고 한명은 나쁜 흑심을 품은 간신야심가로 오명을 뒤집어쓰게 되었다.

개략 탈문지변이 일어난지 한달쯤 뒤에 주기옥이 죽는다. 나이 겨우 30살이었다. <명영종실록>에 따르면 주기옥은 병사이다. 다만 이건 아마도 주기진이 진상을 가리기 위해 사관에게 지시하여 쓰게 한 것일 것이다. 야사의 주장에 따르면, 주기옥은 주기진이 파견한 태감에 의해 목이 졸려 죽었다.

주기옥이 죽은 후, 주기진은 그에게 나쁜 시호를 내린다. "려왕(戾王)". 그후 다시 주기옥이 생전에 자신이 묻히기 위해 만든 능묘를 파헤치고, 별도로 북경의 서쪽 교외에 대충 묻어버리게 한다.

명나라의 여러 황제들 중에서 오직 2명이 황릉에 들어가지 못했다. 한명은 행방불명된 건문제(建文帝) 주윤문(朱允炆)이고, 다른 한명이 바로 경태제 주기옥이다. 이 두 사람의 운명 배후에는 명나라 건국이래 백년도 되지 않은 기간에 발생한 두 건의 천하를 뒤흔든 궁중정변과 관련이 있다. 황권쟁탈은 이렇게 적나라하다. 친정(親情)과 혈연은 아무 것도 아니다.

상대적으로 말해서, 주기진의 수단은 황위를 거저 얻은 주기옥보다 훨씬 악독했다. 주기진은 아마도 오직 한 가지 생각만 했을 것이다: 나는 그저 원래 나의 것을 되찾은 것이다. 다른 사람이 나에게 빚진 것이지, 내가 다른 사람에게 빚진 것은 없다.

이렇게 "빚지지 않았다"는 심리는 인간의 본성에 따른 것이다. 설사 황제라는 고귀한 자리에 있더라도 그는 역시 사람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신하로서, 석형, 서유정등은 목숨을 내걸고 위를 향해 기어올라갔다. 사람은 항상 이기적인 생각이 행동을 이끈다. 어쨌든 세상에 우겸같은 사람은 백년에 한번 볼까말까하다고 할 수 있다.

탈문지변이 성공한 후, 위험을 무릅쓰고 부귀를 꿈꾸던 망명지도들은 하나하나 관직과 작위를 얻는다. 여기에서 그들이 어떻게 되었는지까지 일일이 설명하기는 귀찮다. 단지 한 가지 기억할 것은 그들도 최종적인 승자는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단지 황권교체의 도구로 이용되었을 뿐이다.

이들은 결국 좋지 않은 최후를 맞이한다. 명영종 주기진은 자신의 권력이 공고해지자, 옛날의 탈문공신을 하나하나 난신적자로 내몬다. 석형, 조길상등은 모두 모역죄로 하옥되거나 주살된다. 비록 석형모반사건은 아마도 주기진이 엮은 억울한 사건이겠지만. 그리고 서유정은 정쟁에서 패배한 후 유배를 가고, 그가 원했던 부귀공명은 시종 얻어내지 못한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서유정은 석방되어 고향으로 돌아간 후, 매번 술을 마시면 집주위를 뛰면서 소리쳤다고 한다: "사람들이 나를 몰라준다!" 아마도 미친 것일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그들도 우겸과 마찬가지로 모두 황권다툼의 희생자들이다. 단지 그들의 죽음은 아무런 의미가 없을 뿐이다. 그러나, 우겸은 고귀한 인품으로, 죽은 후에도 민족과 국가가 모두 숭배하는 비정영웅이 되었다.

역사의 긴 흐름에서 보자면, 우리가 느끼는 것은 물이 흐르는 방향이다. 그리고 여하한 궁중정변이든 기실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음모와 권모술수를 증가시켜 세상사람들에게 나쁜 가르침을 주는 것 외에 근본적으로 물이 흐르는 방향을 바꾸지 못했다. 탈문지변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주기진과 주기옥 형제의 생사 혹은 탈문공신의 운명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 그들은 스스로 그 길을 선택했고, 죽어도 아쉬울 것이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은 모두 권력을 장악하고자 했고, 한명의 예외도 없이 모두 권력의 노예였으나 스스로 깨닫지 못했다. 시인이 말한 것처럼 비열함은 비열한 자의 통행증이다. 그뿐이다.

필자가 아무런 의미도 없는 궁중정변에 대하여 이렇게 긴 글을 쓰게된 것은 단지 그것이 우겸의 피살이라는 비극을 불러왔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시인의 다음 싯구를 확인시켜 주었다: 고상함은 고상한 사람의 묘지명이다.

숙청사건에서 무수한 사람들이 오고 가지만, 그것은 역사의 흐름이 씻겨지나간다. 오직 우겸의 처지와 정신만이 시대를 초월한다. 권력을 가지고 있으면서 최종적으로 권력을 사용하지 않은 비정한 영웅이야말로 아마도 유일하게 영혼이 있는 인물일 것이다. 그는 이 역사에서 반복하여 기억해야햘 가치가 있고, 영원히 기억할 가치가 있는 사람이다.

让朱祁镇复位的夺门之变_澎湃号·湃客_澎湃新闻-The Pap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