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사회/중국의 과학

"사대발명"은 역사신화: 동아시아의 기술은 선진적이었던 적이 없다

중은우시 2025. 5. 20. 14:20

글: 유중경(劉仲敬)

사대발명중 오직 제지술만이 진짜이고, 나머지는 모두 만들어낸 이야기이다. 그리고 제지술이 나온 시간도 만들어낸 이야기보다 훨씬 늦다. 채륜(蔡倫)의 이야기같은 것은 모두 허무맹랑한 헛소리이다. 다만 오대(五代)이후의 오월(吳越), 감남(贛南, 강서성 남부)일대에서 대나무로 종이를 대량으로 만드는 방법이 확실히 존재했다. 나머지 3가지는 모두 만들어낸 이야기일 뿐이다.

근본적으로 말해서, "사대발명"이라는 것은 일종의 역사신화이다. 동아시아의 기술은 한번도 선진적이었던 적이 없다. 기본적으로 모든 시대에 수입한 것이 많았고, 수출한 것은 적었다. 당연히 이것도 상대적으로 보아야 한다. 비록 서아시아와 비교하여, 동아시아는 수입지였지만, 주변의 일부 작은 지방 예를 들어, 베트남, 한국, 그리고 일본에 대하여는 수출하는 작용을 하긴 했었다. 인도 혹은 중아시아의 각도에서 보자면 발명은 그들에게서 동아시아로 흘러들어간 것이다. 다만, 동아시아대륙에서는 확실히 조선, 일본 그리고 베트남에 일부를 수출한 적이 있다. 사대발명은 엄격히 말해서 그 어느 것도 진짜라고 볼 수가 없다.

예륻 들어, 나침반을 보면 사서에 기록된 전설일 뿐이다. 지금까지 한번도 실물을 발견하지 못했다. 정말 사서에서 묘사한 것처럼 그런 방식으로 제조해보면 아무 것도 만들어낼 수가 없다. 왜냐하면 나침반은 자석이 있어야 자동으로 방향을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설사 가장 기본적인 나반(羅盤)이라고 하더라도, 고도로 정밀한 기계공법이 필요하다. 그래야 그 자석이 각종 진동에 방향을 잘못 가리키는 일이 없게 된다. 나침반은 그저 상상소긔 물건이고, 제대로 다룰 방법이 없었다.

우리가 지금 사용하고 있는 진정으로 풍랑중에서도 여전히 방향을 가리킬 수 있는 나침반은 역시 서구에서 왔다. 이전에 기실 자석의 작용을 발견한 문명은 아주 많다. 다만 대다수의 공법기술은 안정적인 나침반을 만들 정도로 발전하지 못했다. 큰 바람이나 파도를 만나거나 혹은 사막과 같은 상황하에서도 여전히 안정적으로 방향을 가리킬 수가 없었던 것이다. 만일 조용하고 비바람이 없는 경우에만 실내에서 나침반이 정확하게 방향을 가리킨다면, 기본적으로 쓸모가 없는 것이다. 실내에서는 방향을 굳이 알아볼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방향을 알아볼 필요가 있을 때 그것이 제대로 역할을 하지 못한다. 이런 물건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그래서 이 발명은 실제로 쓸모가 없었던 것이다.

화약은 여러가지 서로 다른 기원이 있다. 누가 더 먼저 만들었고, 누가 나중에 만들었는지는 의미가 없다. 현대인들이 진정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는 화약은 유럽에서 근대에 만들어졌다. 고대 동아시아에서 만든 그런 화약은 폭죽을 만드는 이외에 별다른 쓸모가 없었다. 군사적으로 말하자면, 비잔틴사람들이 일찌기 사용한 적이 있는 그리스의 불만도 못하다. 그런 그리스의 불은 유황과 기름을 적당한 비율로 배합하여 바다 위에서 불타게 만들어, 아랍인과 다른 적들의 전함을 파괴할 수 있었다. 동아시아 고대의 화약은 그런 작용을 할 수 없었다. 근대의 화학화약은 19세기 중엽 독일의 화학자들이 배합하여 만든 것이고, 실제 사용된 기간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짧다. 근대이전에 이런 서로 다른 배합의 화약은 군사적인 용도로 쓰이는데 한계가 있었다.

조판인쇄술은 현대의 한문화민족주의자들이 독창적인 기술이라고 자랑하는 것이다. 다만 실제로 파촉에서 조판인쇄술이 성행하기 수백년전에 이미 이란과 외이란에서 이미 목각화예술이 성행했었다. 목각화예술은 처음에 책을 인쇄하는데 쓰인 것이 아니고 먼저 상층의 상인, 내아시아 사마르칸트의 부유한 고관대작들이 예술작품을 인쇄하는데 쓰였다. 하층에서는 배화교, 불교와 각종 종교에서 종교전단과 소책자를 인쇄하는데 쓰였다. 즉 그림설화이야기를 보는데 쓰였다.

예를 들어, 이란인도문화지역의 많은 하층민중은 무슨 문화랄 것이 없었다. 불경을 이해하는 방법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스님들의 강연을 듣는 것이다. 기독교의 목사가 설교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구전이다. 다른 하나는 전단화를 보는 것이다. 목각화로 인쇄해낸 각양각색의 종교전단이 있다. 어떤 것은 위대한 Tishtria가 악마와 싸우는 이야기이고, 어떤 것은 '목련구모(目連救母)'의 이야기이며, 그외에 부처 자체의 이야기도 있다. 이런 전단은 수량에서 모든 인쇄물의 9할이상을 차지한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도화이다. 다만 어떤 때에는 도화에 아이들이 보는 동화책처럼 글자 몇 개가 추가된다. 이것이 바로 조판인쇄술의 기원이다. 그것은 이란인도문화에서 이미 오래 전부터 사용된 것이다.

먼저 그것을 파촉(巴蜀)으로 가져온 것은 배화교의 상인과 교단이다. 그후에는 불교의 상인과 교단이다. 그후 파촉은 이란문화지역을 대표하고, 육조이후 대량으로 그런 종교전단을 인쇄했다. 당나라중기, 그들은 파촉은 대나무가 많이 나오는 지방이니, 종이에 인쇄하는 것이 아주 쌌다. 이는 파촉이 인도나 이란보다 유리한 점이다. 인도인은 자주 나뭇잎을 이용했고, 이란인은 이집트의 파피루스를 수입했다. 다만 파촉은 대나무가 무성한 곳이고, 대나무가 바다처럼 많았다. 그래서 종이를 생산하는데 비용이 아주 쌌다. 종이가 아주 싸다보니, 과거의 이란인도의 판화를 종이에 인쇄하는 것이 아주 쌌다. 종이가 싼 것이기 때문에 그림을 인쇄하는 외에 글자 몇개를 추가하는 것도 가능했다. 가장 좋은 것은 부처의 모든 가르침을 인쇄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부처의 이야기가 담긴 이야기와 대량의 불경이 파촉에서 인쇄되게 된 것이다.

파촉과 돈황은 선비제국주의자들의 두곳 인쇄중심지였다. 여기에서 한 마디 추가하자면, 소위 채후지(蔡侯紙)는 먼저 오늘날 신강과 감숙에서 출토된다. 낙양(洛陽)이 아니라. 그래서 그것은 기실 내아시아에서 생산되어 동아시아에 전래된 것이다. 단지 동아시아의 인건비와 원재료가격이 싸기때문에, 이후에 대규모로 생산할 수 있었던 것이다. 조판인쇄술이 파촉에서 성행한지 1백여년후에 당나라말기와 오대때 장안과 낙양으로 전해진다. 우리가 주의해야할 점은 당나라중기의 인쇄품, 주로 불교인쇄품을 보려면, 파촉과 돈황으로 가야 한다.

조정에서 역법을 인쇄하는 것은 조정의 합법성과 관련이 있다. 그런데도 파촉의 상인들은 감히 개인적으로 역법을 인쇄했다. 그것도 조정보다 훨씬 더 정교하게. 이치는 아주 간단하다. 역법, 천간지지를 포함한 것들은 모두 이란문화지역에서 발명한 것이고, 동아시아는 그저 수입한 것이다. 그들의 역법도 조정의 역법보다 훨씬 정교하고 선진적이었다. 그리하여 그들이 인쇄한 역법은 민간에서 널리 보급되고, 조정이 금지시켜도 막을 수가 없었다. 불경은 더 말할 것도 없다. 불경은 가장 먼저 파촉에서 인쇄된다. 그후에 오월로 전해진다. 당나라말기와 오대초기에 이르러 파촉, 강회(江淮)와 오월에서 생산된 불경이 대량으로 중원에 유입된다. 이때 중앙조정은 가만히 있지 못하고 풍영왕(馮瀛王)을 시켜 구경(九經)을 인쇄하게 한다. 그리하여 비로소 공식적으로 파촉과 오월의 인쇄술을 도입한 것이다.

전파순서를 보면, 파촉은 이란문화지역의 일부분이었고, 그들이 가장 먼저 이란의 조판술을 도입했고, 조판인쇄술로 바꾸었다. 파촉의 조판인쇄술이 이미 어느 정도 형태를 갖춘 후, 당나라말기에 오월에 전해진다. 그후 오대시기에 중원으로 전파된다. 이상의 순서는 분명하게 일본승려의 여행기에 기록되어 있다. 일본승려가 당나라때 견당사로 중국에 온다. 그는 주로 이란문화를 찾았다. 소외 일본에서 도입한 중화문화는 기실 선비를 거쳐 전해진 이란문화일 뿐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불경을 구하기 위해 파촉으로 간다. 장안이나 낙양으로 간 것이 아니라.

동아시아는 오대이후, 주로 송나라에 이르러 인쇄술이 가장 번성한다. 그리고 이 인쇄술은 많은 정도로 여전히 내아시아상인에 의존했다. 예를 들어 전성상 활자인쇄술을 발명한 필승(畢昇)은 근대의 중국주의민족발명가들이 중국기술의 선진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하지만, 기실 그들의 집안 묘장을 살펴보면, 필승은 대체로 이란인이었다. 그리고 아마도 배화교신도였을 것이다. 그는 개봉 혹은 다른 지방에서 지냈는데, 기본적으로 하세호(何細胡, 수서에 따르면 서역인이다) 일가가 육조와 수당에서 겪은 경력과 같다. 또한 로버트 하트경(赫德)이 대청제국에서 해관세무사를 맡았던 경력과 별 차이가 없다. 모두 선진국가와 선진문화의 교민들의 역할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