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소종(唐昭宗): 필사적 일해서 나라가 망하다.
글: 최애역사(最愛歷史)
888년, 대당(大唐)에 있어서 이 해는 숫자처럼 매우 길(吉)한 해였다.
이해의 4월 20일 나이 겨우 27살의 당희종(唐僖宗) 이현(李儇)이 붕어한다.

1
비록 매번 황제가 죽을 때마다 조정은 항상 관례에 따라 "거국애통(擧國哀痛)"하지만, 당희종이 죽어버리자, 사람들은 형식적으로 잠깐 슬퍼하는 척했지만, 마음 속으로는 매우 기뻐했다.
왜냐하면, 당희종은 황제로서 너무 형편없었기 때문이다.
이 황제는 12살때 대당의 용상에 오른다. 한창 놀기 좋아하는 나이였던 그는 여러가지 방법으로 노는데만 신경쓰면서, 황제의 본직은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그는 대신을 싫어했고, 환관들과 함께 지내는 것을 좋아했으며, 자신의 "보모환관(保姆宦官)"이라고 말하던 전령자(田令孜)를 "아부(阿父)"라고 불렀다. 제국의 조정은 자연스럽게 아부가 대신 관리했고, 어린 황제는 그저 놀기만 할 뿐이었다.
이현의 임기내에 저명한 황소(黃巢)의 난이 발생한다.
이쪽에서 황소의 난을 진압하자마자, 저쪽에서 주매(朱玫)의 반란이 일어난다. 이현의 인생에서 마지막 8년중, 6년반의 시간을 모두 외지로 도망쳐 있었다.
황제가 이런 수준인데, 제국이 잘 될 리가 있겠는가?
이제 마침내 이현이 죽었다. 대당은 전기를 맞이한 것이다. 새 황제의 이름은 이엽(李曄)인데, 이현의 동생이고, 역사에서 당소종(唐昭宗)으로 불리는 인물이다.
역사기록에 따르면, 이엽은 잘 생겼을 뿐아니라 기운도 넘쳤다. 그리고, 학문을 좋아하고 유학을 중시했다. 이현처럼 아침부터 저녁까지 놀기만 하는 것이 아니었고, 마구(馬球)도 할 줄 알았다.
정치적인 소양에서도 신황제는 "대신은 존중하고 예로 대했다" 일이 닥치면 대신들과 상의할 줄도 알았다. 환관들과 함께 앞장서서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가장 중요한 점은 신황제가 "선황제때 위무를 떨치지 못해 나라의 운명이 쇠퇴하자, 그는 옛날의 영광을 회복하고 확장하며, 천하를 호령하는데 뜻을 두었다."
즉 그는 이상도 있고, 포부도 있고, 정신수준도 그의 형보다 훨씬 뛰어났다.
이렇게 하여, 기대과 찬양을 받으면서 새로운 황제가 들어서자 대당은 국가부흥의 대로에 들어서게 된다.
그러나, 이엽이 만일 타임습립을 한다면, 그는 알았을 것이다. 1627년 한 목수황제가 사망하고, 대명왕조의 황위는 목수황제의 동생에게 넘어간다.
마찬가지의 형종제급(兄終弟及)이고, 마찬가지로 형은 멍청하고 동생은 부지런했지만, 또한 마찬가지로 왕조의 비극을 막지 못했다는 것을.
2
당소종이 직면한 것은 대당제국의 양대난제였다:
첫째, 묘당지고(廟堂之高), 중앙은 환관들이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다.
둘째, 강호지원(江湖之遠), 지방은 번진의 절도사가 장악하고 있었다.
당나라때 환관의 권력농단은 공전절후라 할 수 있었다.
당덕종(唐德宗)이 환관으로 하여금 금군(禁軍)을 장악하게 한 때로부터, 당나라의 역대황제는 모두 금군의 대권을 환관의 수중에서 빼앗아오지 못했다.
환관은 병권을 갖게 되니, 담량도 커지게 된다. 게다가 황제와 조정신하간의 의사전달은 환관이 책임졌다. 그리하여 제국의 크고 작은 사무, 심지어 대명황제를 누가 맡을 것인지까지 모두 환관들이 결정했다;
당목종(唐穆宗)이래 8대에 걸쳐 환관이 세운 황제가 7명에 이른다.
만일 대신들이 환관의 기분을 건드리면, 죽는다. 만일 황제가 환관의 기분을 건드리면, 역시 죽는다. "황제를 세우고, 황제를 죽이고, 황제를 폐위시키는 것을 무슨 애들 장난처럼 했다(立君弑君廢君, 有同兒戱)"
환관의 앞에서 중당,만당의 황제들은 연약하고 무력했다.
다른 한편으로, 번진의 화도 황제에게 고민이었다.
안사의 난이래, 당나라의 판도는 점점 번진이 난립하는 국면으로 바뀐다. 처음에는 대부분의 번진들이 그래도 중앙의 말을 들었다. 다만, 나중에 여러 차례의 전쟁으로 통치질서가 무너지자, 특히 황소의 난 이후에는 황소의 부하였다가 투항한 장수들과 황소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운 무신을 대표로 하는 새로운 번진들은 서서히 당나라의 심복대환이 된다.
이들 번진들은 지방을 장악하고, 서로간에 전쟁을 계속했으며, 걸핏하면 무력으로 황제를 위협했다. 요구하는 것을 주지 않으면 바로 반란을 일으켜, 황제로서는 골치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이런 위기하에서 새 황제는 움직이기 시작한다.
이런 말이 있다: "총부리에서 정권이 나온다." 자고이래로 정치분쟁은 누구의 주먹이 강한가로 결정된다. 등극하자마자 당소종은 서둘러 사람을 보내 경기(京畿)지구에서 군사를 모집한다. 이번 모집은 상당했다. 10만명을 모집한다.
10만군대가 당시에 어떤 의미일까?
907년, 주전충(朱全忠)과 이극용(李克用)이 노주(潞州)에서의 생사전을 벌인다. 주전충이 파견한 군대가 몇명이었을까? 8만이다.
그래서 인원수만 보면, 당소종이 10만을 모집한 것은 당시로서는 이미 상당히 방대한 규모라 할 수 있다.
비록 모집한 병사들을 환관이 장악한 금군의 휘하에 두었지만, 다행히도 당소종은 일부 군대의 지휘권을 가질 수 있었다.
병력을 갖게 되자, 자신감이 생긴다. 당소종은 자신감을 가졌을 뿐아니라, 포효한다. "무공으로 천하를 이기겠다."
비극의 씨는 이렇게 심어진다.
3
자고이래로 삭번(削藩)은 어려운 일이다.
전왕조때 한경제(漢景帝)의 삭번은 칠국지란(七國之亂)을 불러온다. 다행히 주아부(周亞夫)가 군대를 지휘하여 반란을 평정할 수 있었다. 후세의 명나라 건문제(建文帝)는 삭번하다가, 주체(朱棣)가 정난지역(靖難之役)을 일으켜 4년에 걸친 전쟁끝에 결국 황제가 바뀌고 만다.
이를 보면, 만전지책을 갖추고, 주도면밀한 준비를 하기 전에 성급히 삭번하려다가는 오히려 화를 초래하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당소종은 그런 자잘한 것들에 신경쓸 여유가 없었다. 손아귀에 병력을 갖게 되자, 사방을 평정할 수 있다는 낙관적인 정서에 빠져버린다.
889년, 즉위한지 겨우 1년이 된 당소종은 삭번계획을 내놓는다. 첫번째 목표는 여러번 당왕조의 피난처가 된 촉의 지방 사천(四川)이다.
엄격히 말해서 당시의 사천은 아직 조정의 통제를 완전히 벗어난 것이 아니었다.
당시 사천을 장악하고 있던 사람은 바로 당희종 이현의 아부인 전령자와 전령자의 형인 진경선(陳敬瑄)이었다.
당초, 이현은 아부의 종용하에, 진경선과 다른 몇몇 금군장수들간에 마구시합을 시켜서, 승리한 자를 서천절도사로 앉히기로 약속했다.
진경선은 출신이 한미했고, 아무런 명성도 없었지만, 마구실력과 전령자와의 관계를 배경으로 시합에서 승리를 거둔다.
마구시합으로 고위관직이 결정된다. 이런 일은 역사에 보기 드문 경우이다.
나중에 이현과 아부 전령자간의 관계가 결렬된다. 당희종,당소종간의 황위교체가 이루어진 후, 당소종은 그의 형보다도 더욱 전령자를 싫어했다.
전령자, 진경선 형제는 새로운 황제의 태도를 보고,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조정에서 파견한 "감서천군(監西川軍)"이 경내로 들어오는 것을 거부한다.
당소종은 원래 번진의 발호를 싫어했는데, 사천이 이렇게 반발하자 즉시 칼을 뽑는다. 그때 마침 전령자가 그의 양자 왕건(王建)과 반목했고, 쌍방이 성도(成都)에서 대치하고 있었다. 당소종은 왕건의 청을 받아들여, 신임 서천절도사 위소도(韋昭度)로 하여금 군대를 이끌고, 왕건과 함께 전령자, 진경선을 토벌하게 한다.
왕건이라는 인물은 아마도 잘 모를지 모르지만, 그에 대하여는 한 가지 사실만 알면 충분하다:
오대십국(五代十國)중 전촉(前蜀)의 개국군주이다.

조정의 군대가 사천에 들어간 후, 2년간 싸운다. 위소도는 군사를 잘 몰랐기 때문에, 국면은 점차 왕건이 장악한다. 왕건의 핍박하에 위소도는 혼자서 장안으로 도망쳐 돌아가고, 군대는 왕건이 거두게 된다.
마지막으로 조정의 도움으로 왕건이 성도를 점령하고, 전령자, 진경선 형제를 수습한 후, 왕건은 병력을 보내 검각(劍閣)을 막아 사천과 조정의 연결을 끊어버린다.
이렇게 하여 당소종의 첫번째 전투는 실패로 끝나버린다.
이전에 관중이 위기에 처하면, 대당황제는 촉으로 도망치곤 했었는데, 이제 촉을 잃었으니, 이후 당나라조정에 화가 닥치면 더 이상 도망칠 곳이 없어져버린 것이다.
4
고금전쟁에서 양선작전의 난이도는 아주 높다. 당소종은 그러나 그것을 추진한다.
촉을 정벌하는 전투를 진행하는 동시에, 또다른 삭번전투가 격렬하게 벌어지고 있었다.
890년, 사천의 전투가 아직 끝나기도 전에, 주전충, 이광위(李匡威), 혁련탁(爀連鐸)이라는 3명의 강력한 번이 공동으로 상소를 올려, 조정에 출병하여 함께 '국환(國患)'을 토벌하자고 건의한다.
'국환'은 누구를 가리키는가? 바로 하동(河東)의 이극용(李克用)이다.
그러나, 이 '국환'은 상대하기 아주 어려운 인물이다. 황소의 난을 평정할 당시 절반의 공로는 그의 것이다. 바로 그런 반란평정의 공이 있었기 때문에, 이극용은 진왕(晋王)에 봉해지고, 이당황족의 신분을 얻어, 하동에 장기간 할거하고 있었다.
당시의 형세로 보아, 이극용과 주전충이 라이벌이다. 쌍방은 계속하여 싸웠다. 나중의 역사가들은 모두 알고 있다: 주전충은 평생동안 이극용을 철저히 이기지 못했다. 그리고 이극용의 아들 이존욱(李存勖)은 최종적으로 주전충의 천하를 무너뜨린다.
당소종은 당연히 미래를 알 수가 없다. 그는 단지 자신이 이극용을 아주 싫어한다는 것만 생각했다. 서천의 전령자를 싫어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래서 3명의 강번이 밀어주면서 함께 이극용을 토벌하자고 권하자, 그는 마음이 움직이게 된다.
조정대신들은 속속 반대했다. 모두 홍시는 익은 것부터 따야 한다. 하필 강력한 악몽같은 난이도를 고른단 말인가?
서천의 전투와 비교하여, 이번 전투는 당나라에 더욱 큰 재난을 가져온다.
소위 "3개의 강번"이 뒤를 받쳐준다고 하였지만, 결국에는 패배할 자는 패배하고, 관망할 자는 관망했으며, 전쟁의 진전에 긍정적인 도움은 거의 주지 못했다. 그리고 장준(張俊)이 지휘하는 천자의 군대는 전공을 얻기 위해, 영토를 얻기 위해 계속 앞으로 전진했고, 직접 하동의 이존효(李存孝)를 만난다.

역사기록을 보면, 관군은 "한번 전투로 패배하고, 병력을 궤멸하여 흩어진다...부하들은 흩어지고 장수는 모두 죽는다." 군대를 잃었을 뿐아니라, 조정의 체면까지도 이 전투로 바닥에 떨어진다.
여기서 알아야 할 점은 당소종이 체면을 중시하는 인물이라는 것이다.
하동전투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기주(岐州)에 할거하고 있던 기왕(岐王) 이무정(李茂貞)이 당소종에게 편지를 쓰고, 편지에서 공개적으로 황제를 조롱한다:
앞으로 전투에서 패배하고 장안을 떠나면 어디로 도망칠 수 있겠는가?
당소종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재상 두양능(杜讓能)에게 명을 내려, 이무정을 토벌할 준비를 하도록 한다.
두양능은 황제의 말을 듣고 대경실색한다. 마음 속으로 금군이 하동에서 패배한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전투력을 회복하지도 못했는데, 이번에 만일 지척거리에 있는 이무정과 싸워서, 이긴다면 그래도 괜찮지만, 만일 진다면 칠국지란때 조착(晁錯)을 죽이는 것처럼 간단한 일이 아닌 것이다.
두양능이 말렸지만, 당소종은 듣지 않고, 기세등등하게 말한다:
짐이 앉아서 계속 능욕을 당하고 있을 수는 없다!
그러나, 이번에도 당소종은 패배한다.
그리고 이무정의 요구에 따라, 당소종은 분을 참으며 두양능을 사사(賜死)하고서야 겨우 전투를 끝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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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진을 토벌하는 전쟁에서 당소종은 모두 패배하고 모두 잃고 끝난다.
당초 삭번을 너무 소리높여 외쳤기 때문에, 그리고 가까이 있는 이무정과 사이가 나빠졌기 때문에, 나중에 당소종이 다시 병사를 모집하자, 이무정이 군대를 이끌고 공격해왔다. 새로 모집한 금군은 훈련한지 며칠이 되지 않아, 쳐들어온 기주병에 의해 산산조각난다.
그러나, 당시에 비록 번진세력이 아주 강하고, 조정세력은 아주 약했지만, 그렇다고 당왕조를 멸망시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당을 무너뜨린 마지막 지푸라기는 바로 "환관지화(宦官之禍)"였다.
비록 이전의 몇몇 황제들과 마찬가지로 환관들에 의해 옹립되었지만, 당소종은 환관들에게 이를 감사해 하지 않고, 오히려 환관의 통제를 벗어나려는 마음이 더욱 강해졌다.
조정에 이런 황제가 있으니, 조정신하들과 환관과의 투쟁이 날로 치열해질 수밖에 없었다.
당소종의 칼끝은 가장 먼저 자신을 옹립하여 황제에 등극하게 해준 대환관 양복공(楊復恭)을 향한다.
양복공은 신황제를 옹립한 공로를 내세우고 있었고, 또한 금군의 명목상 통령이었기 때문에 ,조정내에서 매우 발호하고 항상 조정의 권력을 농단했다. 심지어 당소종의 면전에서 전혀 신하로서의 예의를 갖추지 않았다.
이 모든 것에 당소종은 극히 불쾌해진다.
양복공에 대항하기 위해, 당소종은 먼저 양복공의 양자이며 용맹하고 힘이 강한 금군통령 양수립(楊守立)을 회유한다. 후한 상을 내리고, 이순절(李順節)이라는 이름을 내리고, 관직을 올려주면서 그로 하여금 양복공과 대립하게 만들고, 양복공의 세력을 약화시킨다.
이어서, 당소종은 기회를 잡아, 양복공의 권력을 빼앗고 관직을 박탈한다. 양복공은 대노하여, 양아들들을 이끌고 거병한다. 당소종도 군대를 이끌고 마주 싸워서, 쌍방은 장안에서 전투를 벌인다.
전투결과는 당소종의 승리였다.
이는 중당이래 황제가 환관과 싸워서 이긴 보기 드문 경우였다!
900년, 환관 유계술(劉季述), 왕중선(王仲先)등이 정변을 일으킨다. 그들은 태자를 모시고, 당소종을 폐위시킨 후, 당소종을 연금한다. 그러나 2달만에 당소종의 신하들이 정변을 평정하고 당소종을 복위시킨다.
그는 다시 한번 이긴 것이다.
이치대로라면, 이렇게 형세가 발전하면, 당나라의 환관의 화는 당소종의 주도하에 철저히 해결될 수 있었다. 그러나 불가사의하게도 당소종은 거기서 손을 멈춘다. 그는 마치 환관집단을 완전히 제거하는데 흥미가 없는 것같았다.
한편에서는 분노한 조정대신들이 환관을 모조리 죽여야겠다고 나서고 있고, 다른 한편으로 실세한 환관집단이 자신의 생사를 몰라 황공불안해하고 있었다.
쌍방은 모두 황제가 자신의 편에 서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당소종은 아무런 의사표시도 하지 않는다.
황제가 양파의 투쟁을 통제할 힘이 없어지게 되자, 양파는 부득이 자신들을 지켜줄 사람을 찾게 된다.
환관은 당소종의 극성인 이무정을 찾는다. 나중에는 아예 이무정이 병력을 보내 당소종을 붙잡아 봉상(鳳翔)으로 간다.
조정신하들은 황제가 붙납혀가는 것을 보고, 환관에 대해 더욱 이를 간다. 그리하여 이무정의 극성인 주전충을 찾는다.
조정의 투쟁이 번진세력까지 끌어들이게 된 것이다.
칼부림 속에서 대명의 운명은 위기일발이 된다.
6
903년, 주전충의 포위하에 이무정의 봉상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한다.
당시는 추위가 심했고 땅은 얼어 있었다. 봉상성내에는 장작과 음식이 모두 부족해서 매일 많은 사람들이 얼어죽고, 굶어죽었다. 인육을 먹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인육은 근당 백전이었고, 개고기는 근단 오백전이었다. 매일 황제에게 올리는 고기도 사람고기였다.
결국 이무정은 포기를 한다. 그는 당소종을 주전충에게 넘기고, 자신의 생존을 구한다.
그후, 주전충은 당소종을 데리고 장안으로 돌아온다. 거기에서 궁안의 모든 환관을 죽여버린다. 당나라를 근 백년간 괴롭혔던 환관의 화는 이런 방식으로 끝장나게 되었다.
189년, 십상시를 주살하기 위해, 원소, 하진은 동탁으로 하여금 군대를 이끌고 경사로 들어오게 했다. 그리고 십상시를 죽인 후, 동탁은 조정을 독점한다. 동한은 이렇게 마비되어 버린다.
역사는 매우 유사하다. 지금 대당제국의 묘를 판 삽은 이제 주전충의 손에 넘겨졌다.
904년, 주전충은 당소종을 핍박하여 낙양으로 천도한다. 어가가 화주(華州)를 지날 때, 민중들은 도로 양켠에서 만세를 소리높여 외친다. 이때의 당소종은 아마도 불길한 운명을 예감한 듯했다. 그리하여 울면서 말한다:
만세를 부르지 말라. 짐은 더 이상 그대들의 군주가 아니다!
과연 낙양으로 천도한 그 해에 당소종 이엽은 주전충에게 살해당한다.
당의종(唐懿宗), 당희종과 비교하면, 당소종은 열심히 일한 황제라고 할 수 있다. 대당의 위풍을 회복할 포부가 있었다. 그리고 그는 확실히 자신의 꿈을 실행한다. 그러나, 16년간 힘들게 버텼지만, 결과는 결국 이러했다.
905년, 주전충은 황하 가의 백마역에서 당나라의 조정요인을 모조리 살해하고, 시신을 황하에 버린다. 역사에서 "백마지변(白馬之變)"이라고 부른다. 이렇게 하여 당나라조정은 명존실망(名存實亡)하게 된다.
907년, 주온(朱溫)이 당애재(唐哀帝) 이축(李柷)의 '선양'을 받는다.
대당은 멸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