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백년근대사(百年近代史)는 백년치욕사(百年恥辱史)인가?
글: 궁장패점랑(弓張貝占郞)
1840년 영국군함이 중국의 대문을 대포로 열어제꼈다. "제1차아편전쟁"으로 중국은 반식민지반봉건사회의 근대사를 시작한다.
그러나, 우리는 "백년국치"라고 여기는데, 많은 외국인들은 헛소리라고 여긴다. 왜 중국의 근대역사인식은 외국인들의 공감을 얻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중국의 역사교과서는 모두 많은 페이지를 근대사를 이야기하는데 할애한다. 그래서 대부분의 독자들은 이 역사를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는 상세하게 묘사하지는 않고, 단지 필요한 역사수치만 보여줌으로써, 이 역사를 더욱 구체적으로 보여주도록 하겠다.
1842년의 <남경조약>부터 1901년의 <신축조약>까지 중국은 343개의 불평등조약을 강제로 체결해야 했다. 그중 <시모노세키조약(馬關條約)>으로 3.4억냥백은(현재의 인민폐 3,200억위안에 상당함)을 배상해야 했는데, 이는 당시 일본의 4년간 재정수입에 상당했다. <신축조약>으로 원금이자합계 9.8억냥백은을 배상했는데, 모든 중국인들이 2냥의 '벌금'을 짊어진 셈이었다.
1860년 영불연합군은 원명원(圓明園)을 불지르고, 문화재 150만건 이상을 약탈해갔다. 제정러시아는 <아이훈조약> <베이징조약>등을 통하여 중국의 동북, 서북의 영토 144만평방킬로미터(영국본토면적의 7배)를 빼앗아갔다.
1931-1945년의 항일전쟁으로 중국의 군인과 민간인 3,500만명이 사망했고, 직접적인 경제손실만 5000억달러에 달한다. 남경대학살로 30만의 원혼이 죽었고, 731부대의 생체실헙, 중경대폭격으로 인한 5년간의 연옥은 민족기억속에서 가장 참혹한 상처로 남아 있다.
이 모든 것들은 중국인이 보기에 '치욕'이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그렇다면, 외국인들은 왜 그렇게 보지 않을까? 주로 다음의 몇 가지 원인때문이다:
첫번째 원인
중국의 5천년역사에서 4천-5천회의 전쟁이 있었다. 이는 전세계전쟁총수의 약 3분의 1에 상당한다. 거기에는 봉랑거서(封狼居胥), 연연늑석(燕然勒石), "우리 강한 한을 침범하는 자는 아무리 멀리 있더라도 반드시 주살하겠다(犯我强漢者雖遠必誅)"라는 호언장담은 중국에서 '무덕충패(武德充沛)'의 최고조에 달했을 때이다.
설사 비바람에 시달리던 청나라말기에도 여전히 풍자재(馮子材)가 모집한 '췌군(萃軍)'은 진남관대첩(鎭南關大捷)을 거두어, 프랑스 쥘 페리내각을 붕괴시켰다. 좌종당(左宗棠)은 스스로 군비를 마련하여, 관을 들고 서정하여 신강을 수복할 때 강력했던 제정러시아도 그저 두눈 멀거니 뜨고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1차대전과 2차대전때, 과정이 어떠하든간에 결과는 항상 중국이 전승국이었다. 관건은 농업국의 기반으로 공업열강에 된 일본제국의 최고 90%의 병력을 막아냈다는 것이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일본은 항복한다.
건국초기, 가난하기 그지없는 상황하에서도, 한반도에서 미국을 위시한 '연합군'과 맞서 싸우고, 결국 세계최강국을 몰아내고 판문점에서 정전협정을 하기에 이른다.
그 이후에는 소련이 변경에 백만대군을 집결시키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고, 흑할자도(黑瞎子島)에서 홍색제국과 싸움을 벌여서 주권을 지켜냈다. 그리고 내외봉쇄의 곤경속에서도 '양탄일성(兩彈一星, 원자폭탄, 수소폭탄과 인공위성)'의 장거를 이루어냈다.
마지막으로 잠시 시간을 내서 주력부대가 참전하지 않은 상황하에서, 변방군으로 '제3세계최강국'이라는 인도로 하여금 천도를 준비하도록 만들기까지 했다.
이런 놀라운 전적이 있는데, 어떻게 외국인들에게 중국인들이 백년간이나 치욕을 당했다고 설득할 수 있겠는가?
두번째 원인
외국인들은 자주 중국인들처럼 유구한 역사를 주목하지 않고, 그들은 습관적으로 현재의 수치를 가지고 비교판단한다. 그럼 수치를 가지고 상황을 비교해보도록 하자(이하의 수치는 대비의 편의를 위하여 모두 당시의 비율로 백은으로 환산해서 계량했으니, 일정한 오차는 있을 것이다):
전후조약규정에 따르면, 독일은 1,645억냥백은을 배상해야 했고;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은 414억냥백은을 배상해야 했으며; 불가리아는 75억냥백은을 배상해야 했다....그런데, 중국의 <시모노세키조약>은 3.4억냥백은을 배상했고, <신축조약>은 배상원리금합계가 9.8억냥백은이다.
이상의 전쟁배상금수치를 보면, 확실히 상대가 되지 않는다. 감탄해마지 않을 수 없다. 서방열강은 같은 '해적문화'를 지닌 동료들에 대하여도 전혀 사정을 봐주지 않았던 것이다.
다시, 영토손실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자. 독일은 패전후에 해외의 식민지를 모두 잃었을 뿐만아니라, 본토도 할양해야 했다. 독일의 '용흥지지(龍興之地)'인 동프로이센의 옛땅과 공업, 자원중심도시인 알사스-로렌등을 포함한 비옥한 영토가 포함된다. 전성기에 비하여 영토는 41.5% 줄어든다. 유라시아와 아프리카대륙에 걸쳐 6세기여동안 존속했던 오스만투르크제국은 전후에 갈래갈래 찢어져서 겨우 14%의 영토만 남아, 소아시아반도의 터키로 축소된다. 강성하기 그지없었던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은 심지어 역사단어로 전락해버리고 만다.
이들과 비교하면, 비록 낡은 만청이 외동북, 외서북을 잃었고, 중화민국때 외몽골을 잃었지만, 외국인이 보기에, 이건 모두 중국영토의 중요부분이 아니다. 현재의 중국은 여전히 완전한 천산남북, 청장고원을 보유하고 있고, 장강과 황하를 온전하게 보유하고 있다.
외국인들의 인식 속에서, 중국은 망국하지도 않았고, 분열되지도 않았으며, 영토를 기본적으로 완전하게 보존했다. 단지 열강들과의 전쟁에서 몇 차례 패배했을 뿐이고, 마지막에 돈을 약간 배상했다. 참혹한 정도를 따지자면 중국은 전혀 랭킹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거대한 인식의 차이가 발생했을까?
월왕 구천의 "와신상담"에서 임칙서의 "구리국가생사이(苟利國家生死以, 진실로 국가를 위한다면 생사를 걸어야 한다)", 범중엄의 "선천하지우이우, 후천하지락이락(先天下之憂而憂, 後天下之樂而樂, 세상사람들이 걱정하기에 앞서서 걱정하고, 세상사람들이 즐거워한 후에 즐거워하겠다)"부터 태아장전투전 중국병사들이 소리높여 외친 "영주전사귀, 불주망국노(寧做戰死鬼, 不做亡國奴, 차라리 전쟁에서 죽은 귀신이 될지언정, 나라 망한 노예는 되지 않겠다)"는 것까지, 수천년에 걸친 화하문명은 역사의 상처를 집단의 책임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 이는 가국정회(家國情懷, 조국과 고향, 가족을 사랑하는 마음)의 연속이고, 민족정신의 전승이다.
만일 산정상에 우뚝 서보지 않은 사람이라면, 어떻게 구름층위에 찬란한 햇살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겠는가. 19세기이전에 항상 인류농경문명의 최고봉에 서 있던 화하민족이 근대의 대변국과정에서 꼭대기에서 골짜기로 추락하는 씁쓸함을 철저히 맛보았다. 더더욱 '농경문명'을 수천년간 만들어온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또한 문명이 견선리포(堅船利砲) 앞에서 무너져내리고 마는 치욕도 맛보았다.
비교하자면, 외국인은 대부분 비교적 짧은 역사만을 지니고 있다. 그리하여 그들은 중국인들처럼 강력한 국가적 영예감이나 민족적 치욕감같은 개념이 없다. 큰 물결이 일지 않는 시냇물만 보았을 뿐이지, 장강의 파도가 용솟음치는 것이나, 큰 바다의 경도해랑(驚濤海浪)은 보지 못한 것이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공감할 수가 없다.
아마도, 이런 차이의 원인을 이해하려면 더욱 간단한 방식이 있을지 모르겠다: 중국역사교과서는 개략 23%의 분량을 근대사에 쓴다. 그러나 구미교재는 평균적으로 4%를 점할 뿐이다.
영국수상 카멜론이 2013년 중국을 방문했을 때 이런 말을 했다: "과거의 역사가 오늘의 부담이 될 필요는 없다." 다만 같은 해에 중국은 12월 13일 남경대학살피해자국가공동추도일을 정한다. 이런 역사인식의 차이는 마치 하나의 거울을 볼 때, 중국인들은 깨진 유리를 보고, 서양인들은 거울틀의 멋진 꽃조각을 보는 것과 같다.
우리는 외국인이 공감하지 않는다고 하여 이들 역사의 "백년치욕"을 부정할 필요는 없다. 중국근대사의 영욕은 민족의 상처이고, 문명의 상흔이다. 우리는 이 역사를 기억해야 하지만 그것은 원한을 기억하기 위함이 아니라, 역사에서 교훈을 얻기 위함이다. 상처받은 역사를 영원해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