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청 후기)

"내무부(內務府)": 청나라의 가장 강력한 기구

중은우시 2025. 2. 27. 10:40

글: 한림냉지식(翰林冷知識)

청나라의 관제(官制)중에 이런 기구가 있다. 총관(總管)은 반드시 만주인이 맡아야 하며, 한번도 한인(漢人)이 맡은 바가 없다.

대명이 자자한 납란명주(納蘭明珠), 연희요(年希堯), 부항(傅恒), 복륭안(福隆安), 복장안(福長安), 화신(和珅), 풍신은덕(豊紳殷德), 숙순(肅順), 문상(文祥)같은 사람들, 그리고 심지어 장친왕(莊親王) 윤록(胤祿), 질친왕(質親王) 영용(永瑢), 공친왕(恭親王) 혁흔(奕訢)까지도 이 기구의 총관을 맡은 바 있다.

이런 것만 보더라도 이 기구가 절대로 단순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 있을 뿐아니라, 나중에는 심지어 황제를 기만하기까지 했다.

이 기구는 바로 내무부(內務府)이다. 전칭은 "총관내무부(總管內務府)"이다. 대청의 각종 황실업무를 관장하는 최고관리기구이다.

내무부는 비록 이름만 보면 건물관리회사같이 보이지만, 실제 기구의 설치는 극히 방대하여 관리의 수가 3천여명에 달했고, 자체적인 체계를 갖추고 있으며, 외정(外廷)의 신하들은 간섭할 권한이 없어, 권력이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정도라고 말할 수 있다.

내무부의 최고장관은 총관내무부대신(總管內務府大臣)이며, 처음에는 종이품(從二品)이었다가 건륭제이후에는 정이품(正二品)으로 승격되었다.

내무부총관대신에는 인원제한이 없고, 만주대신내에서 특별히 선발했다.

내무부의 아래에는 칠사삼원(七司三院)이 설치되어 있다. '칠사'는 광저(廣儲), 도우(都虞), 장의(掌儀), 회계(會計), 영조(營造), 신형(愼刑), 경풍(慶豊)을 가리키고, '삼원'은 상사원(上駟院), 무비원(武備院)과 봉신원(奉宸院)을 가리킨다.

칠사의 직책은 다음과 같다:

광저사: 내부고장(內府庫藏), 즉 내무부의 창고를 관장하며, 은(銀), 피(皮), 자(瓷), 단(緞), 의(衣), 차(茶)의 육고(六庫), 즉 여섯개의 창고가 있다.

도우사: 내무부의 무관(武官)선발과 수렵, 사냥을 책임진다.

장의사: 내정의 예악(禮樂)을 책임지고, 태감(太監)의 품급(品級)을 심사평가한다.

회계사: 황가장원(皇家莊園), 전답을 관장하며, 궁녀, 태감의 일상사무를 관리한다.

영조사: 자금성, 황가원림, 황제능묘등의 건설과 수리를 책임진다.

경풍사: 황실의 소, 양, 목축을 관장한다.

신형사: 상삼기(상황기, 정황기, 정백기)의 형옥사건을 재판한다.

삼원의 직책은 다음과 같다:

상사원: 어용마필을 관장한다.

무비원: 기계제조, 그리고 산개(傘蓋), 안갑(鞍甲, 안장과 갑옷), 도창궁시(刀槍弓矢)등의 접수, 보관 및 유지보수등을 책임진다.

봉신원: 경산(景山), 삼해(三海, 북해, 중남해), 남원(南院), 원명원(圓明園)등 황가원림, 열하행궁(熱河行宮)등 황제행궁(行宮)의 일상관리등을 책임진다.

이것이 내무부에서 하는 모든 일은 아니다. 내무부의 아래에는 30여개의 부속기구가 설치되어 있는데,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은 경사방(敬事房)과 직조처(織造處)로 모두 내무부에 귀속되어 있다.

강희제가 여러번 강남을 고찰했는데, 그중 네번은 모두 조인(曹寅)의 집에서 머물렀다. 조인은 바로 조설근(曹雪芹)의 할아버지이다. 왜 조인의 집에 머물렀을까? 그가 당시 내무부의 강녕직조(江寧織造)였기 때문이다. 자연스럽게 황제를 영접하는 임무를 맡은 것이다.

강녕직조에게 얼마나 많은 돈이 있었는지는 <홍루몽>을 보면 바로 알 수 있다. 이런 직조가 내무부의 산하에 3개가 있었다.

내무부의 가장 큰 수입원은 황장(皇莊)의 수입이다. 내무부는 건륭제때 경성부근의 황장만 천여개가 있었고, 면적은 합계 근 300만무(畝亩, 1무는 200평, 즉 666.7평방미터)에 달했고, 동삼성(東三省)에는 황장이 더욱 많았다.

내무부는 그외에 두 곳에서 자금지원을 받는다:

첫째, 호부(戶部)에서 매년 내무부에 은량을 지급한다. 금액은 고정적이지 않고, 내무부의 자금소요에 따라 결정된다.

화신이 내무부총관대신 겸 호부상서로 있을 때, 건륭제가 개인적으로 쓸 수 있는 돈을 넉넉히 주었다. 그리하여 건륭제는 화신을 매우 총애한 것이다. 화신이 부정부패한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눈감아준 것이다.

둘째, 염세(鹽稅). 초관(鈔關, 세관을 가리킴)같은 국가에서 장악하고 있는 핵심경제명맥에서도 내무부는 일부를 나눠받았다.

마지막 황제 부의(溥儀)에 이르러, 내무부의 권력은 더욱 커지게 된다. 어린 황제 부의를 완전히 무시했고, 자주 황제를 괴롭히는 일들을 저지른다. 이는 부의의 회고록 <나의 전반생>에 여러 번 쓰여 있다. 내무부의 매년 씀씀이는 수백만냥에 달한다. 그러나 대부분은 내무부내에서 나누어 가졌고, 돈이 부의를 위해서는 쓰여지지 않았다. 부의가 황제에서 물러난 후, 내무부는 돈이 많았지만, 부의는 궁중의 기물을 팔아서 살아가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