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당)

필원(畢沅): 입비광인(立碑狂人)

중은우시 2025. 2. 9. 01:10

글: 마약학교수(魔藥學敎授)

필원(1730-1797), 지금의 강소(江蘇) 태창(太倉)에서 태어났고, 청나라 건륭, 가경제때의 관리, 학자이다. 필원은 섬서순무(陝西巡撫)로 10년간 재직했는데, 문화고적들을 고찰하고, 고대제왕의 능묘를 보보하고, 비림(碑林)을 정비했다. 그는 이들 문화유적과 능침에 비문을 썼는데, 완전하지 않은 통계에 따르면, 섬서 경내에 남아 있는 필원의 비문은 65개에 달한다.

필원비의 내용은 아주 간단하다. 중간에 큰 글자로 능묘의 연대, 묘주인의 명칭과 신분을 썼고, 양측에는 "사진사급제병부시랑섬서순무겸도찰원우도어사필원서(賜進士及第兵部侍郞陝西巡撫兼都察院右副都御史畢沅書)"와 "대청건륭세차XX(大淸乾隆歲次XX)"등 작은 글자 및 비를 세우는 장소의 지방관리의 신분과 이름을 적었다.

주진고묘(周秦古墓)의 앞에 세운 비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주빈공류묘(周邠公劉墓), 주태왕릉(周太王陵), 주왕계릉(周王季陵), 주문왕릉(周文王陵), 주무왕릉(周武王陵), 주성왕릉(周成王陵), 주강왕릉(周康王陵), 주공왕릉(周共王陵), 원성주공지묘(元聖周公之墓), 노공백금지묘(魯公伯禽之墓), 제태공지묘(齊太公之墓), 주노자묘(周老子墓), 진경조문자묘(晋卿趙文子墓), 진공손의사저구묘(晋公孫義士杵臼墓), 진정영의사묘(晋程嬰義士墓), 진이세황제릉(秦二世皇帝陵) 합계 16개의 석비. 당시, 이곳은 전국시대 진(秦)나라와 서한(西漢)시기의 능묘가 서주왕릉과 중요인물의 묘장으로 와전되었다. 필원이 세운 석비는 비록 잘못된 인식이 있었지만, 어느 정도 이들 능묘를 보호하는 역할을 했다.

양한고묘(兩漢古墓)의 앞에 세운 비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한태상황릉(漢太上皇陵), 한혜제안릉(漢惠帝安陵), 한문제패릉(漢文帝覇陵), 한박태후남릉(漢薄太后南陵), 한경제양릉(漢景帝陽陵), 한효무제무릉(漢孝武帝茂陵), 한표기장군대사마관군후곽공거병묘(漢驃騎將軍大司馬冠軍侯霍公去病墓), 한대장군대사마장평후위공청묘(漢大將軍大司馬長平侯衛公靑墓), 이부인영릉(李夫人英陵), 한소제평릉(漢昭帝平陵), 한선제두릉(漢宣帝杜陵), 한원제위릉(漢元帝渭陵), 한성제연릉(漢成帝延陵), 한평제강릉(漢平帝康陵), 한무양후번장군묘(漢舞陽侯樊將軍墓, 번쾌), 한정서장군마공초묘(漢征西將軍馬公超墓), 한승상찬후소하묘(漢丞相鄼侯蕭何墓), 한평양후조공참묘(漢平陽侯曹公參墓), 한곡역후진공평묘(漢曲逆侯陳公平墓), 한태중대부육공가묘(漢太中大夫陸公賈墓), 한박망후장공건묘(漢博望侯張公騫墓), 한태사공묘(漢太史公墓, 사마천), 한전속국소공묘(漢典屬國蘇公墓, 소무), 한복파장군마공묘(漢伏波將軍馬公墓, 마원), 한용정후채륜지묘(漢龍亭侯蔡倫之墓), 한태위이공고묘(漢太尉李公固墓). 합계 26개의 석비. 당시, 사람들은 서한황제릉의 구체적인 분포상황을 아직 알지 못하고 있어서 여러 능침의 위치를 잘못 알았다. 심지어 황후묘를 황제릉으로 보기까지 했다.

북조(北朝)에서 수당(隋唐)의 고묘(古墓) 앞에 세워진 비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전진부견묘(前秦苻堅墓, 손괴), 주문제성릉(周文帝成陵), 수문제태릉(隋文帝泰陵), 당태종소릉(唐太宗昭陵), 당고종건릉(唐高宗乾陵), 당예종교릉(唐睿宗橋陵), 당양제혜릉(唐讓帝惠陵), 당원종태릉(唐元宗泰陵), 당숙종건릉(唐肅宗建陵), 당순종풍릉(唐順宗豊陵), 당헌종경릉(唐憲宗景陵), 당목종광릉(唐穆宗光陵), 당경종장릉(唐敬宗莊陵), 당희종정릉(唐僖宗靖陵), 당무부상서양순묘(唐武部尙書楊珣墓), 당대국충공안공금장묘(唐代國忠公安公金藏墓), 양귀비묘(楊貴妃墓, 잔결), 당태자태사하동군왕유공권묘(唐太子太師河東郡王柳公權墓), 당병부상서유공작묘(唐兵部尙書柳公綽墓), 합계 19개의 석비. 필운의 비에서 "당원종태릉"이 가리키는 것은 당현종(唐玄宗)이다. 강희제의 이름인 현엽(玄燁)의 이름을 피휘하기 위하여 '당현종'을 '당원종'으로 고친 것이다.

북송(北宋)의 고묘 앞에 세운 비석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송진사양려묘(宋進士楊礪墓), 송구래공묘(宋寇萊公墓, 구준), 조의간공신도비(趙懿簡公神道碑, 조첨), 송안강군개국후양종의묘(宋安康郡開國侯楊從義墓). 합계 4개의 석비. 당나라이후 더 이상 섬서에 왕릉이 건설되지 않았다. 일부 지방명인들이 섬서로 돌아와 매장되었다. 필원은 그들을 위하여도 석비를 세웠따. 북송이후의 묘앞에는 더 이상 "필원비"를 볼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