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정치/중국의 정치

"러시아를 모델로 삼는다"는 것은?

중은우시 2025. 2. 2. 15:23

글: 회하우(淮河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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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에게 책 한권을 추천하겠다: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 작자는 다론 아세모글루와 제임스 A. 로빈슨이다.

다론 아세모글루는 터키에서 태어났고, 나중에 영국과 미국에서 빛을 발하였으며, 현재 MIT의 경제학교수이고, 미국국가과학원회원 및 터키과학원회원이다.

제임스 A. 로빈슨은 미국 하버드대학의 정치학교수이고, 아프리카, 남아메리카등지의 정치문제에 대하여 깊이있는 연구를 하고 있다.

두 사람은 로마제국, 마야도시국가, 중세기의 베니스, 소련, 라틴아메리카, 영국, 유럽, 미국과 아프리카의 많은 역사적 증거를 정리하면서, 왜 어떤 국가는 부유하고, 어떤 국가는 가난한지; 왜 국가는 부유한지 아닌지, 건강한지 아닌지, 식량이 충분한지 아닌지에 따라 나누는가? 문화, 날씨, 지리특징인가 아니면 정확한 정책인가.

이 책을 다 보고나면 아마 알 수 있을 것이다. 왜 100년전의 부유한 국가는 지금도 여전히 부유한지.

100년전에 가난한 국가는 지금도 여전히 가난한지.

설사 이전보다 약간 부유해졌다고 하더라도, 기초는 상당히 박약하다.

러시아를 얘기하자면, 여러분들이 어떻게 평가할지 모르겠지만, 아래의 몇 마디 말을 보기로 하자:

소련과 파시스트는 구별이 되지 않는다. 거기에는 정치적 자유가 없고, 인민은 단지 한 주인의 거짓 명의만 얻을 수 있고, 공복(公僕)은 생사여탈권의 절대권력을 가진다.

거기에는 개인의 자유가 없다. 모든 공직자들은 그저 상사에 책임지고, 모두 권력을 남용하고, 백성을 착취한다.

거기에는 사상, 언론, 과학연구등등의 일체의 자유가 없다. 사람들은 거짓말, 불공정과 절망에 빠진다.

소련의 사악함은 나치를 훨씬 넘어선다: 나치는 단지 국가로 사회와 개인을 압제했지만, 소련은 모든 사상을 독점하고, 모든 도덕을 소멸시켜, 독립적으로 사고하는 것은 대역무도한 것이 되었다.

위의 말은 프랑스의 저명한 사상가인 레몽 아롱의 말이다. 1905년, 레몽 아롱은 프랑스 파리의 한 유대인가정에서 태어났고, 집안형편은 괜찮은 편이었다.

레몽 아롱은 막스 베버, 스메일, 만하임, 후설, 슈츠, 마르크스등의 저작을 깊이 연구했다. 그의 마르크스에 대한 평가는 아주 높지만, 마르크스의 견해는 황당하고 과격하다고 생각했다.

1950년대부터, 레몽 아롱은 소련에 대한 비판의 수위를 점차 높여갔다.

그때는 공산주의가 서구에서 성행할 때여서, 레몽 아롱의 반소련입장은 많은 비판을 받아야 했다.

1970년대에 들어선 이후, 소련의 헝가리와 체코슬로바키아 무장침략을 겪으면서, 서방민중들은 소련을 다시 보게 되었다.

사람들은 그제서야 레몽 아롱이 얼마나 선견지명이 있었는지 알게 되었고, 그의 영향력도 커져갔다.

소련은 왜 해체되어야 했을까? 그리고 해체과정에 거의 아무도 동정하지 않았을까? <국가는 왜 실패했는가>와 레몽 아롱의 견해를 종합하면 그 해답을 알 수 있을지 모른다.

이 점에 관하여 이 글의 후반부에 설명하도록 하겠다.

다론 아세모글루와 제임스 A 로빈슨 두 사람은 16년의 연구를 통해 제도는 한 국가발전의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보았다.

두 사람은 제도를 정치제도와 경제제도로 귀납시키고, 동시에 정치제도와 경제제도를 두 가지 형태로 나누었다. 약취형과 포용형.

현대중국어에서 "착취(攫取)"라는 단어가 중성적이고, 일정한 기교와 능력을 통하여 '획득'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착취(攫取)'는 '교취호탈(巧取豪奪)'과 연결되여, 부정당하고 부도덕하거나 심지어 아무런 하한선도 없이 이익을 약탈하는 것을 의미하는 부정적인 의미의 단어이다.

다론과 로빈슨이 보기에, 오로지 포용형의 정치제도와 포용형의 경제제도를 건립하여야, 한 국가는 장기적으로 발전하는데 공고한 기반을 가질 수 있다.

반대로, 비포용적인 정치제도와 비포용적인 경제제도하의 국가는 모두 진정으로 업그레이드하거나 전환하기가 어렵다.

이는 필자로 하여금 이런 것을 연상케 한다. 왜 절대다수의 개혁은 실패하는가?

예를 들어, 양무운동을 보자. 공친왕, 이홍장, 장지동은 기실 착취형정치제도하에서 착취형경제제도를 건립한 것이다.

그렇다. 양무파가 건설한 신공장, 신식학다은 포용형의 경제체제가 아니었고, 착취적이었다.

착취+착취, 이를 통해 성공을 기대하는 것은 백일몽이다.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보면, 왕안석의 변법도 여전히 성공적이지 못하다.

왕안석의 변법은 그 배경이 송나라가 돈이 부족하여, 쓸 돈을 마련해야했었다.

송나라는 봉건제국으로 원래 착취형의 정치제도와 착취형의 경제제도를 가지고 있었다. 장기적으로 가장 좋은 방법은 정치와 경제분야를 모두 포용형으로 전환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이건 말도 안되는 소리이고, 그 역사시기에는 근본적으로 불가능했다.

왕안석은 그저 경제제도를 수술할 수밖에 없었다. 다만 왕안석의 방식은 국가의 경제에 대한 통제를 강화시켰다. 예를 들어, 전형적인 시역법(市易法)은 바로 정부의 경제활동에 대한 통제, 조절을 강화한 것이다.

이전에 완전히 시장이 통제하던 경제활동을 정부가 통제하게 되었고, 이를 통해 정부는 더욱 큰 경제적 이익을 획득하게 된다.

설사 왕안석의 변법이 성공했더라도, 그것은 착취형의 정치제도 + 강화후의 착취형경제제도일 뿐이다.

일시적으로 성공하더라도 조만간 붕괴할 것이다.

중국의 개혁실패사례를 제외하고, 외국에서도 유사한 사례가 없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이집트의 무함마드 알리의 개혁이 있다. 18세기말에서 19세기초, 무함마드 알리는 정권을 탈취한 후 개혁의 길을 연다.

전기는 크게 성공하여, 신속히 이집트의 극도로 낙후한 면모를 바꾸며 이집트의 공농업발전을 추진하며, 이집트의 군사역량을 강화시켰다.

그러나 개혁은 실패했다. 왜냐하면 알리가 건립한 것은 봉건전제의 정치제도였기 때문이다.

상업분야에서는 국가독점의 경제제도를 건립했고, 농민이 생산한 농산품은 개인적으로 판매하는 것을 엄금했으며, 모조리 국가가 수매한 후 유럽으로 수출했다.

전성기때, 이집트수출의 95%는 국가가 통제했다. 가격차이를 이용하여 알리는 저가로 농산물을 구매한 후, 고가로 유럽에 판매한 것이다.

그리하여 정부는 거액의 수입을 얻었지만, 백서으이 수입증가는 상당히 완만했다. 이런 개혁이 어찌 성공할 수 있겠는가?

일본의 메이지유신은 왜 성공할 수 있었던가? 왜냐하면 일본은 반착취형+반포용형의 정치와 경제제도를 건립했기 때문이다.

반(半)이라고 말하는 것은 메이지유신은 서방의 정치와 경제라는 새로운 이념을 받아들이면서 동시에 대량의 봉건잔여를 남겨두었기 때문이다.

양무운동과 마찬가지로, 메이지유신때 초기에 설립한 기업은 국유기업이었다.

1880년, 일본정부는 역대이래의 제도에 반하는 결정을 하고, 국퇴민진(國退民進)을 시행한다.

당시 일본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경제학자중 한명인 다구치 우키치(田口卯吉)는 자유무역을 고취하면서 이런 말을 한다.

"세상에는 왕왕 정부숭배론자들이 있다. 그들은 모두 '정부'라는 단어는 아주 위대한 역량을 지녔다고 본다. 여러가지 핑계로 관영기업을 증가시키는데, 그 요점은 관영기업은 비록 독점의 폐해는 있지만, 그 사업은 여전히 개인이 소유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가 내린 결론은 이러했다: "독점의 무서움은 민영사업에 있지 않고, 관영사업에 있다."

이런 목소리가 커지자, 1880년 11월 5일, 메이지정부는 공장양도세칙을 발표하고, 정식으로 국퇴민진을 실시한다.

 

대량의 관영기업이 저가로 심지어 무상으로 개인에게 양도된다. 1889년 일본헌법이 공표되기 전에, 일본정부는 이미 모든 관영, 반관반민기업을 민간에 매각했다. 군사공업은 예외였다.

이 사건은 일본자본주의의 확립과 근대국가의 형성에 모두 획기적인 의미를 지닌다.

일본은 이로 인하여 경제적으로 관영과 관독상판(官督商辦)의 단계를 벗어날 수 있었으며, 자본활동의 자유와 경제활동의 자유가 인정되기 시작한 것이다.

일본정부가 스스로 진행한 국퇴민진으로 일본의 민간에서는 창업붐이 일어나고, 자본은 마침내 활발하게 활동하게 된다.

1868년 메이지유신이 정식으로 시작된 후, 1880년까지 12년간 일본은 모두 702개의 기업을 설립했다.

그러나, 1880년부터 1890년까지 겨우 10년만에 2,390개의 기업이 늘어나서, 3.4배로 증가한다.

자본총액은 더더욱 1,340만엔에서 1조 8,936만엔으로 14배나 증가한다.

민중에게 충분히 포용적인 정치와 경제제도를 허용하면 민중의 에너지, 창조력, 열정은 무한히 발휘된다,

민중의 창조력을 자극하지 않고, 단순히 국가의 역량으로 추진하려고 하는 것은 무수한 사실이 증명하듯이 그 길은 점점 좁아져서 결국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될 뿐이다.

일본 메이지시기의 경제학자이자 역사학자인 다구치 우키치는 일본 최초의 자유주의경제학자로서 문명개화, 평민주의, 자유민주가 그의 사상의 핵심내용이다. 기실 다구치 우키치와 동시대에 대청제국에도 국가가 민중에게 권한을 넘겨주자고 주장한 사람이 있었다. 예를 들어 중국근대에 최초로 그리고 완전한 유신사상체계를 갖춘 이론가이자 계몽사상가 정관응(鄭觀應)은 일찌감치 관독상판기업은 '관탈상권'으로 명목은 상인을 보호하는 것이지만 실제로는 민간의 재물을 약탈하는 것이라고 지적했었다.

2

제정러시아에서 소련으로 바뀐 것은 기실 갈수록 좁아지는 길의 전형이다. 그리고 그것은 사상유례없는 전형이다.

러시아역사상 제1차 중대개혁은 표트르1세의 개혁이다. 표트르1세는 바로 표트르대제이다.

표트르대제의 개혁은 의미가 중대하다. 러시아역사학자들은 러시아근대화가 정식으로 시작된 것으로 본다.

다만, 표트르대제는 러시아의 근대화를 위하여 개혁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권력을 위하여 개혁했던 것이다.

그는 유럽에서 유행하는 시정부, 지방정부의 자치제도를 도입했는데, 목적은 지방의 자치권을 확대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지방귀족의 세력을 타격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는 또한 의회제도를 도입하였는데, 서방세계에서 의회는 현대민주의 중요한 형식이다.

그러나, 표트르대제는 자신만의 이해가 있었다. 서방의 의원은 선거로 선출되지만, 표트르대제의 의회는 그가 임명하는 것이었다.

이처럼 새로운 술을 옛날 병에 담는 방식으로 표트르대제는 중앙집권을 강화하고, 원로귀족에 속해있던 권력을 의회로 거두어들이고, 다시 의회를 자신의 손아귀에 장악했다.

비록 여러가지 문제가 있었지만, 표트르대제의 개혁은 러시아의 경제, 군사, 공업의 발전을 크게 추진했다.

착취형의 정치와 경제제도가 일정한 기간동안 역량을 집중하여 큰 일을 해낼 수 있는 효과는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역량의 탱크는 결국 소모되어 제로가 될 때가 온다.

19세기 중엽에 이르러, 농노제의 낙후함으로 러시아는 크리미아전쟁에서 패배하고, 러시아는 다시 농노제개혁을 시작한다.

다시 1904년, 군주입헌을 시행한지 30여년만에 러일전쟁에서 일본에 패배한다. 러시아는 다시 입헌개혁을 시작한다.

1917년 2월혁명과 10월혁명은 일정한 정도로 러시아의 또 한번의 개혁이다. 단지 규모와 심도에 있어서 이전을 크게 넘어설 뿐이다.

소련시대로 접어든 후, 레닌의 신경제정책, 스탈린모델, 후르시초프개혁, 브래즈네프개혁(전반기는 코시킨개혁), 안드로포프개혁, 고르바초프개혁등이 현란하게 벌어진다.

역대소련지도자중에서, 체르넨코가 개혁을 주장하지 않은 것을 제외하면,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개혁 혹은 조정을 진행했다.

개혁을 하지 않으면 약간은 체면이 서지 않는다는 느낌이었다.

러시아는 18세기부터 20세기에 이르기까지, 소련시대에는 다시 걸핏하면 개혁을 진행했다. 이론적으로 개혁을 하면할수록 새로워져야 한다.

개혁을 진행한 최후결과는 소련이 없어진 것이다. 지금의 러시아도 선진경제체에 비하면 훨씬 낙후되어 있다. 심지어 마지막 가리개였던 군사역량마저도 들통이 나버렸다.

그 원인을 따져보면, 10월혁명이전에, 러시아/소련은 한번도 진정으로 포용형의 정치와 경제제도를 건립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만일 양적 기준을 보면, 표트르대제의 개혁이전에 러시아는 100% 착취형의 정치와 경제제도였다.

표트르대제의 개혁이후에는 90%, 농노제개혁이후에는 80%, 입헌개혁이후에는 70%로 낮아졌다.

그러나, 10월혁명이후에는 1,000%로 된다......

걸어가는 길이 서서히 좁아진 것이 아니라, 스스로 큰길에서 칼날위로 뛰어내렸으며, 되돌아갈 여지조차 없게 되었다.

소련은 왜 해체되었을까?

소련은 착취형의 정치와 경제제도를 건립했다는 것처럼 그렇게 간단하지는 않다. 오히려 "착취"의 손길이 거의 모든 영역에 미쳐서 사상, 문화, 언론, 과학연구, 심지어 일반백성의 보통생활에까지 끼어들었기 때문이다.

이런 극도의 고압적인 상황 속에서 소련이 해체되지 않는다면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해체이후의 러시아는 기실 포용형의 정치와 경제제도를 건립하지 못했다.

정치적으로는 더 말할 것도 없다.

경제적으로도 기실 얘기할 것이 없다. 모두 각양각색의 올리가르흐들이 크고 작은 사럽을 독점하고 있다.

러시아는 기실 소련정치제도의 내핵(內核) + 서방자본주의의 외의(外衣)라는 구조로 이루어진 현대권력귀족자본주의이다. 정치제도와 경제재도에 포용성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다.

러시아가 오늘날까지 버틸 수 있었고, 이전의 착취형의 국가들처럼 신속히 붕괴하지 않은 것은 그들이 새로운 생존방식을 찾아내서가 아니라, 지금의 경제글로벌시대하에서 그들은 더 많은 생존공간을 가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착취정도가 아무리 심하더라도, 조금만 신경쓰면, 국제시장에서 밥먹을 거리는 찾을 수 있다.

발전은 생각할 수 없지만, 최소한 굶어죽지 않을 수는 있다.

왜 어떤 착취형국가는 한편으로 같은 유형의 국가들과 우호적으로 지내면서, 다른 한편으로 극력 포용형국가와 관계를 개선하려 하는가? 원인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들은 글로벌화의 시대에 착취형의 정치제도 + 포용형의 경제제도를 건립하고자 한다. 양쪽의 이점을 모두 누리려는 것이다.

그러나, 역사의 사례는 증명한다. 고구마는 양쪽 모두 달지는 않다.

양자가 부딛쳐 임계점에 도달하면, 반드시 착취형의 정치제도가 포용형의 경제제도부분을 집어삼키게 되고, 최종결과는 예측하기 어렵게 된다.

KGB는 미국의 CIA, 영국의 MI6, 이스라엘의 모사드등과 함께 나란히 세계4대 정보기구로 불린다. 다만 또 다른 차원에서 본다면, KGB는 4대정보기구중에서 가장 하한선이 없는 기구이다. 왜냐하면, 미국, 영국, 이스라엘의 정보기구는 KGB처럼 본국의 민중에 대하여 전면적인 감시감독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본국민중에 대하여 대규모의 감시감독을 진행하는 것은 냉전시기 동구국가의 특색이다. 동독의 정보기구 슈타지의 국내민중에 대한 감시감독은 더욱 세밀하여 공포스러울 정도였다.

3

소련의 길은 어떻게 묘사할 수 있을까?

그것은 한 사람이 입으로 크게 이렇게 소리치고 있는 것과 같다: "우리는 새로운 길을 간다. 완전히 새롭고, 전례없던 길이다."

구호는 그렇지만, 실제로 가는 길은 옛사람이 갔던 바로 그 길이다.

그러나, 옛길을 가면서 어떻게 새롭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을까? 그리하여 머리를 굴린 다음에, 도로가의 관목숲으로 기어들어가서, 지름길로 가고자 시도한다.

이 '지름길'은 가시와 벌레가 충만하다. 관목숲을 뚫고 나오면 온 몸이 상처투성이가 된다.

그러나 그는 격동하여 소리친다. 나는 성공했다.나는 겨우 하루의 시간을 들여서 이웃마을의 최고부자 이구(二狗)가 1달 걸려 갔던 길을 갔다.

나는 새로운 목표지점에서 더욱 가까워졌고, 과연 내가 가장 총명하다.

그러나 온몸의 상처는 가볍게 보아넘긴다. 그건 그저 모색단계에서 반드시 거쳐야 하는 것이라고.

그리고 아무런 반성도 하지 않고 변함없이 또 다른 관목숲으로 뛰어들어 계속하여 '우회추월'하고자 한다. 그 결과는 다시 온몸에 상처를 입는 것이다.

이렇게 여러번 반복하고 나면 이 사람은 몸안의 피가 모두 흘러나오고, 결국은 땅바닥에 쓰러져 죽고 만다.

그후에 또 다른 관목숲에서 뛰쳐나온 사람이 앞사람의 시신을 밟고 반복관찰한 후 이런 결론을 내린다.

이 사람의 죽음은 이웃마을의 최고부자 이구가 조성한 것이다. 그가 지름길로 갔던 방식은 잘못이 없다. 그래서 나는 계속 지름길로 달려야 한다.

러시아를 모델로 삼는 궤이한 길은 영원히 새로운 곳에 도달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자신만은 예외라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은 못해냈지만, 자신도 반드시 못해내란 법은 없다고 생각한다.

"러시아를 모델로 삼는다"는 논리의 핵심이 무엇인지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이 나라는 지금까지 희망이 있는 정치체제나 경제체제를 대외적으로 수출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