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벽대전에 대한 종합분석
글: 명장영웅양천년(名將英雄兩千年)
동한 건안13년(208년) 십이월, 조조(曹操)는 형주군(荊州軍)을 합하여 자칭 80여만의 병력으로(실제로는 20여만임), 병력을 양로(兩路)로 나누어, 손권(孫權), 유비(劉備)를 향해 진격했다.
조조의 양로 병마는 이러하다. 일로는 육군으로 조조의 주부(主簿) 조엄(趙儼)이 도독호군(都督護軍), 영장릉태후(領章陵太守)로, 우금(于禁), 장료(張遼), 장합(張郃), 주령(朱靈), 이전(李典), 노초(路招), 풍해(馮諧)의 7군(軍) 및 문빙(文聘)의 강하(江夏)북부지방부대, 합계 근 4만명으로 이루어져 있고, 양양(襄陽)에서 한수(漢水)를 따라 남하하며 유기(劉琦), 관우(關羽)가 지키는 하구(夏口, 지금의 漢口)를 공격했다. 다른 일로는 수군(水軍)으로 조조가 직접 지휘하며, 형주병(荊州兵)을 합하여 약 15,6만으로 강릉(江陵)에서 장강(長江)을 따라 내려가면서, 직접 육구(陸口)로 진격했다. 육구를 돌파하면, 그 후에는 일사천리로 내려가서 순조롭게 하구, 번구(樊口)에 이르러 유비의 최후근거지를 격파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육구(陸口)에서 육수(陸水)로 들어가 상륙하여, 장강남쪽의 양두산(羊頭山, 通山)의 저산구릉지구를 통과하여, 다시 양신(陽新)을 지나면 직접 손권의 수군본부 시상(柴桑, 지금의 九江)을 취할 수 있을 것이다.
조조의 양로 병마에 맞서서, 주유(周瑜)는 유비와 상의한 후 상응한 병력배치를 한다. 그는 병력을 둘로 나누어, 일로는 관우가 만여명의 수병, 보병을 이끌고 하구의 북쪽에서 조조의 군대와 전투와 퇴각을 계속하게 했다. 이를 통해 그들의 진격을 늦추는 것이 목적이다. 그렇게 하면, 주유의 수군주력이 배후의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게 된다. 다른 일로는 공세전략을 취하기로 한다. 주유가 3만의 수군으로 앞에 서고, 유비는 직접 수천의 정예병을 이끌고 뒤에 위치한다. 번구(樊口, 지금의 호북성 악주시 서쪽)에서 장강을 거슬러 올라가, 조조보다 먼저 육구(陸口)에 도착하여 수군군영을 설치한다. 이를 통해 육수를 봉쇄한다. 그리고 이곳의 적벽산(赤壁山, 당시의 명칭은 石頭山) 일대의 강위에 선진(船陣)을 펼치고, 적극적으로 조조의 수군부대를 맞이한다. 생사의 성패는 이 전투에 달렸다. 이것이 바로 중국역사상 유명한 적벽대전이다.
다만, 본명한 것은 수군끼리 싸우면, 조조의 북방병과 형주병은 모두 주유의 강동병(江東兵)을 이길 수 없다; 하물며, 장강의 이곳 구간은 먼저 서남에서 동북으로 강물이 흐르고, 적벽을 지나면, 급격히 정동방향으로 방향을 튼다; 강물을 따라 내려오던 조조군은 원래 속도와 기동성에서 우세를 점하고 있었다. 다만 이곳에서는 자신의 선박측면이 강동수군의 선박머리와 맞부닥치게 된다. 그렇게 되면 충돌시 쉽게 격침될 수 있고, 또한 쉽게 선단이 분할될 수 있다. 그리하여, 이곳에서는 우세가 극도의 열세로 바뀌는 것이다.
그외에, 적벽의 상류는 강의 폭이 1,500미터가량이다; 적벽의 하류는 급격히 확장하여 3,000미터이상으로 늘어난다; 오직 적벽이 소재하는 강의 폭만 겨우 1,100미터가량이 되어, 마치 아령의 손잡이처럼 중간이 급격히 좁아지게 되어, 유속이 신속이 증가하여, 흐름이 아주 빨라진다; 게다가 장강은 이곳에서 맹렬하게 오른쪽으로 휘어지므로, 빠르게 흘러오는 강물이 북쪽강안에 막혀서 뒷면에 강력한 파도를 형성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경도박안(驚濤拍岸), 권기천퇴설(卷起千堆雪)이다. 이런 복잡하고 험악한 강물의 상황하에서 기동성이 약한 옛날의 목선을 조종하는 것은 절대로 단기간내에 익힐 수 없는 능력이다. 이로 인하여 뱃몰이에 익숙한 강동수군에 더욱 유리하게 되는 것이다.
고고학발굴과 문헌자료를 살펴보면, 동오(東吳)의 전선(戰船)은 이미 대부분 선소(船艄, 선현(船舷)의 바깥으로 나온 갑판을 가리킴. 선박에 선소를 추가하는 것은 원래의 조건하에서 갑판을 확장하는 것이며, 이렇게 되면 상대적으로 항해중 앞뒤나 좌우로 흔들리는 것을 줄여주어, 안정성을 높인다), 미타(艉舵, 배뒷머리의 키. 선미의 위치와 방향을 조정함), 선범(船帆, 동오의 돛은 아주 높았다고 함)과 중판조선기술(重板造船技術, 나무조각을 여러 겹을 겹쳐서 대어 갑판의 두께를 늘이는 것)을 사용하고 있었다. 오나라의 단양태수(丹陽太守) 만진(萬震)이 쓴 <남주이물지(南洲異物誌)>에 따르면, 동오의 대선(大船)은 이미 "사범(四帆)"을 갖추고 있어, 풍력의 크기와 방향에 따라 선박의 돛을 올리고 내려서, 바람을 이용하여 빠르게 항해할 수 있었으며, 동시에 선체의 안정과 안전을 보장받을 수있었다고 한다. 동오에서 남해를 거쳐 대진(大秦)으로 가는 해상선박은 심지어 "칠범(七帆)"을 펼치고, 600-700명까지 태울 수 있으며, 순풍인 경우 1달여만에 대진국(로마)에까지 이를 수 있었다"고 한다.
이를 종합하면, 주유가 적벽을 전장으로 선택한 것은 최대한도로 자신의 수군우세를 확대한 것이다. 조조는 평생 천하를 종횡했지만, 이때는 상대를 잘못 골랐다. 장강은 주유등 강동인들의 놀이터이고, 육지에서 아무리 강대하더라도, 이곳에서는 그저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수전에서 이기지 못하면, 강을 건너 상륙하여 육로로 가는 것을 생각해볼 수 있지만 그것도 불가능했다. 육구의 남쪽강안은 모두 깍아지른 절벽이 이어져 있다. 적벽산은 말 그대로 모조리 붉은 색의 백장높이의 사암(砂巖)이다. 날카로운 칼들이 하늘을 향해 꽂혀 있는 것같아서, 산을 기어올라갈 곳조차 없는 것이다!
조조는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할 수 없이 장강의 북안으로 물러나 오림(烏林)에서 군영을 차릴 수밖에 없었다. 오림진(烏林鎭)은 지금의 홍호시(洪湖市)이다. 이곳은 운몽택(雲夢澤) 동부의 장강이 범람하는 평원이다. 네개의 호수(長湖, 三湖, 白露湖, 洪湖)가 모여있는 곳으로 예로부터 "백호지시(百湖之市)", "수향택국(水鄕澤國)"이라 불린다. 이런 습지, 소택지는 병법에서 "이(圯)"지로 불리며, 군영을 차리기에는 '하지하(下之下)'인 곳이다. 더욱 불리한 점은 인구과밀과 위생문제(늪이나 소택지는 파리모기가 많다)로 조조의 군대내에 소규모의 전염병이 더욱 확산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후한과 삼국을 연구하려면 전염병은 피할 수 없는 핵심이슈이다. 심지어 전체 세계고대사를 연구하는데 있어서, 전염병은 극히 핵심포인트이다. 기실 전염병이 대규모로 유행한 것의 시작은 서한시기의 흉노(匈奴)이다. 한무제(漢武帝)의 <윤대죄기조(輪臺罪己詔)>의 기록에 따르면, "흉노는 한군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무사(巫師)를 시켜 양과 소를 한군이 나타나는 여러 길과 수원(水源)에 묻게 하여, 한군을 막았다" 흉노는 위청, 곽거병을 이길 수 없게 되자, 생물전을 벌인 것이다. 죽은 소와 양으로 수원을 오염시키는 방식으로 전염병을 전파했다. 곽거병이 젊은 나이에 요절한 것도 아마 이것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나중에, 이런 전염병은 한군장병에 의해 중원내지로 전파된다. 그리하여, 일종의 '상한(傷寒)'이라고 부르는 무서운 질병이 장기간 대한제국을 괴롭히게 된다. 그리고 동한말기에 대폭발한다. 사서기록에 따르면, 동한 환제(桓帝)때, 큰 역병이 3차례 발생하고, 한영제(漢靈帝)떄 5차례 발생한다. 황건적의 난은 바로 한영제때 마지막 전염병시기에 폭발했다. 한헌제(漢獻帝) 건안연간에 역병의 유행이 극히 심했다. 수천 수만이 전염병으로 사망했고, 집 열개 중에 아홉개가 비어있는 상황이 된다. 건안말기 위, 촉, 오는 각각 많은 문신, 무장들이 병사하는데, 이것도 모두 전염병과 관련이 있다. 조조는 시를 지어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백골노어야(白骨露於野), 천리무계명(千里無鷄鳴)"(백골이 들판에 널려 있고, 천리에 닭울음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이는 인재뿐아니라 전염병으로 인한 것이다!
왜 동한말기와 건안시기에 전염병이 돌연 급격하게 폭발했을까? 첫째는 이주때문이다. 동한은 전란이 빈번하여, 많은 북방민족이 남방으로 이주한다. 그들은 이전에는 접촉해보지 못한 병원미생물을 접촉했고, 쉽사리 전염병을 일으켰다. 둘째는 기후이다. 축가정(竺可楨) 선생의 연구에 따르면, 동한말기는 중국에서 제1차 소빙기로 가장 추운 때였다(제1차 소빙기는 서주말기 견융의 침입을 초래했다). <삼국지.문제기>를 보면, 225년 조비(曹丕)가 동오를 정벌할 때, 회하(淮河)가 결빙(結氷)되어, 전선이 장강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그리하여 정벌을 포기한다. 이를 보면, 당시가 지금보다 훨씬 추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추위는 농작물의 감산을 불러올 뿐아니라, 사람의 저항력도 저하시켜서 감염병에 더욱 쉽게 감염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마침 적벽대전은 한겨울에 일어난다. 조조군은 습기있고 추운 기후와 위생상황이 상승작용을 일으켜, 전염병이 더욱 심해지고, 매일 한수레 한수레의 시신을 교외로 운반해서 불태웠다. 보는 사람을 전율하게 만드는 일이 끝도 없이 일어나서, 마치 영원히 깨지않을 악몽과도 같았다. 다만 조조에게 또 무슨 방법이 있겠는가? 장강을 뚫고 지나갈 수도 없고, 건너편 강안으로 상륙할 수도 없다. 그저 오림에 머물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을 뿐이었다.
시간은 이렇게 하루하루 흘러갔다. 장강은 갈수록 추워지고 있었다. 옷은 몸에 달라붙은 것처럼 몸까지 얼려버린다. 차가운 바람은 마치 몸에 달라붙는 것처럼 밀려든다. 이는 조조같은 북방인들도 겪어보지 못한 고통이었다. 조조군이 남정을 시작했을 때는 칠월의 한여름이었으므로, 추위를 견딜 옷같은 것은 전혀 가져오지 않았다. 나중에 온갖 방법을 강구하여 현지에서 징발하고, 후방에서 급히 운송하였지만, 그래도 부족했다. 일부 신체조건이 나쁜 하병사들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추위 외에 굶주림도 있었다. 조조군의 양초는 모두 유표(劉表)가 강릉(江陵)에 여러 해동안 모아두었던 양식에 의존했다. 반드시 운반선으로 한척 한척 장강을 통해 운반해와야 했다. 다만 조조군이 수전에서 열세에 몰리면서, 전체 장강의 수면은 이미 주유의 수군이 장악하고 있었다. 강릉에서 식량운송선을 통해 운송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운송해오더라도 주유군에 빼앗겨버린다. 조조로서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할 수 없이, 사람을 양양등지로 보내 육로로 양식을 운송해 와야 했다. 그러나 오림의 북쪽에 있는 육로는 모두 호택(湖澤)이어서 운송이 극히 곤란했다. 그래서 공급이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었다. 그 결과 조조군내에서 병이 든 병졸은 기아로 인해 영양회복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결국 50%이상의 비전투손실을 겪게 된다. 즉, 조조의 10만 북방군은 손권,유비의 군대와 상관없이 스스로 병력손실을 입어 5만이하로 줄어든 것이다. 이렇게 계속 시간이 흐르면 죽는 사람이 더 늘어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손류연합군은 강하(江夏)와 강동본부의 작전에 의존하여, 수로로는 하구에서 보급을 받고, 육로로는 시상을 통해 보급을 받고 있었다. 보급선이 조조보다 배이상 짧았다. 그러다보니 장기전을 겁낼 필요가 없었다. 왕부지(王夫之)가 <독통감론(讀通鑒論)>에서 말한 바와 같다:
"조조는 원소를 격패시킨 기세를 틈타 형주,동오를 공격했다. 조조가 원소를 격파한 것은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것이 아니라, 고수하면서 원소의 군대를 피로에 빠지게 만들고, 그 약점을 이용해서이다. 이 전술을 동오에 대해서 쓸 때는 정반대가 되었다. 동오는 강을 의지하여 수비하고, 화살과 돌이 미치지 못했다. 그리고 동오는 온 나라의 힘을 모아 군대를 지원했으며, 양식운송에 아무런 걱정이 없는 곳이었다. 그리하여 지키면 지킬 수록 병사는 더욱 늘어나고, 양식은 더욱 충분해졌다. 그리하여 사기도 올라갔다. 동오의 군대를 피로하게 만들기 전에 아군의 피로가 쌓였으니, 패배하는 것이 필연적이다."
이때 적벽쪽은 온통 붉은 색이다. 홍심만장(紅心萬丈). 이쪽의 오림은 검은 색이었다. 오운개정(烏雲蓋頂). 하나는 붉고 하나는 검다. 그런 대비는 조조를 미치게 만들었다.
사실상, 황개(黃蓋)가 거짓으로 항복하지 않고, 주유가 화공을 펼치지 않더라도, 조조는 몇달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바로 왕부지가 말한 것처럼, "화공이 없었더라도, 몇달이 지나면 조조의 처지는 관도지전의 원소와 같았을 것이다." 결국은 북쪽의 육로로 퇴각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는 앞뒤의 장강항로가 주유의 수군에게 통제당하고 있어, 만일 조조가 수로로 파구(巴丘)를 거쳐 후퇴하려면,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어서 속도가 느리게 될 것이고, 오군의 추격에 따라잡히고 포위당하여 더욱 비참하게 패배했을 것이다.
육로로 퇴각하면, 수천의 전선을 강안에 남겨두어 적군에게 고스란히 넘겨줄 수는 없지 않은가? 조조는 아마도 이를 악물고 배를 모조리 불태워버렸을 것이다. 그러면 이제 7,8만에 이르는 형주수군은 골치거리가 된다. 그들은 당초 너무 많이 투항했고, 상황상 어쩔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일단 조조가 패퇴하여 위명이 바닥에 떨어지게 되면, 그들은 아마도 다시 옛주인인 유기(劉琦), 유비에게 투항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화소적벽(火燒赤壁)"에서 조조는 기실 주유에게 감사하는 것이 맞다. 주유는 조조가 미리 결정하고, 더욱 큰 손실을 막을 수 있도록 도와준 것이다. 게다가 시간도 골라주고, 풍향도 골라주면서, 힘을 들여서 풀과 장작 기름을 준비해서 배와 수군을 불태워서 후환을 제거해 준 것이니, 정말 세심하기 그지없었다고 할 수 있다.
여기까지 생각하다보니 필자는 더욱 대담한 생각을 떠올리게 된다: 황개가 거짓투항으로 배를 불태운 것이 혹시 조조가 적극적으로 그렇게 한 것은 아닐까? 그렇게 되면 마침 병력을 퇴각시킬 명분이 된다. 호랑이등에 올라탄 형국에서 시간을 끌면 끌수록 더욱 비참한 결말이 올 것이다. 만일 전염병이 계속 만연하여 다시 수만의 장병이 죽는다면, 그리고 다시 양식위기가 닥친다면, 형주병이 반기를 들어 내외에서 협공을 당할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조조의 군대는 죽어도 묻힐 곳이 없어질 것이다. 조위의 기업도 하루아침에 잿더미가 될 수 있다. 하물며 이때 손권은 빈틈을 파고 들어 합비(合肥)를 공격했다. 조조가 비록 호표기(虎豹騎)를 파견해서 증원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부족할 것이다. 하루빨리 북으로 몸을 빼서 합비를 보살피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진상이 만일 그러했다면, 적벽대전의 여러가지 의문점은 실타래 풀리듯이 풀려버린다.
첫째, 황개의 거짓투항은 헛점이 아주 많다. 황개는 영릉(零陵) 천릉(泉陵)(지금의 호남 영주) 사람이다. 어려서 고아로 가난하게 자랐다. 가난한 지방의 가난한 사람이다. 동탁의 난때 손견(孫堅)의 거병에 참여하면서부터, 계속하여 그를 따라 남정북전했고, 나중에는 손책과 손권을 따르면서 여러차례 공을 세운다. 그리하여 관직이 단양도위(丹陽都尉)에 이른다. 황개의 말에 따르면, 그는 손씨집안의 삼대가신으로 "손씨의 후은을 받아, 장수가 되어 대우가 박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가 조조에 투항하려는 것은 조조의 사람이 많기 때문에, "중과부적이라는 것은 세상의 모두가 보는 것"이라는 것이다.(<삼국지.오지.주유전>에서 주석으로 인용한 <강표전>). 그러나 이건 말이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당시 조조의 수군을 패배당했고, 병사들은 굶주리고 병을 앓고 있었다. 일지감치 당초의 "수군팔십만"이 장강을 따라 내려오는 공포스러운 기세는 사라진 상태이다. 황개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오히려 무슨 환상에 사로잡힌 것같아서 근본적으로 믿을 수 없는 것이었다. 하물며 삼국의 군제에 따르면, 장수가 대외전투에 나서면, 가족을 모두 후방에 남겨 인질로 삼는다. 그래서 삼국시대에 투항한 장수들은 모두 어쩔 수 없는 상황하에서 투항한 것이다(예를 들어, 우금, 황권등) 혹은 평화시키에 일가족을 거느리고 투항한 경우(예를 들어, 한당의 아들 한종)이다. 전쟁터에서 적으로 넘어간 경우는 거의 없다. 조위의 황친국척 하후패(夏侯覇)의 경우에도 그가 촉에 투항한 뒤, 아들은 낙랑(樂浪)으로 유배되었다. 황개가 만일 전쟁터에서 위나라에 투항했다면, 그의 후방가족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는 충분히 예상가능하다. 손견때부터의 동오장수가 이렇게 조조에게 투항하다니 도대체 무엇을 바란단 말인가?
그리하여, 조조가 이 사건을 대하는 태도는 정상적이다: "다만 네가 거짓일까 우려된다. 만일 사실이라면 마땅히 작위와 상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조조는 황개의 투항이 거짓일 것을 의심하면서도 황개가 투항하러 올 때 먼저 선박을 내보내 맞이하면서 사실여부를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전군에 막지 말라고 통보함으로써 이 '테러분자'가 가까이 다가와 자폭하도록 좌시했을까? 이건 의심많은 간웅이라는 조조의 이미지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역사의 이 헛점을 보완하기 위하여, 소설가 나관중은 머리를 굴려서, "주유가 황개를 때리다"라는 내용을 추가해야 했다.
그리고, 황개의 거짓투항은 특별히 홍색봉포(篷布)로 시초(柴草)로 가득한 선실을 가렸는데, 이는 오히려 뭔가 있다고 말해주는 것이나 다름없다. 설사 조조는 속았다 치더라도, 조조의 그 많은 모사, 대장들은 왜 전혀 대비를 하지 않았을까?
그 외에 나관중은 방통(龐統)이 연환계(連環計)를 건의하는 장면도 집어넣었다. 그리하여 불에 더 확실하게 타도록 하기 위하여. 그러나 정사에서는 방통이 이때 아직 등장하지 않는다. 더더구나 조조의 군영으로 가서 계책을 올릴 가능성도 없다; 하물며, 사서에는 조조가 자신의 선박을 모조리 철삭으로 연결시켰다는 내용이 없다. 그저 "조조의 군대의 선박은 뱃머리와 배꼬리가 서로 닿아 있었다(首尾相接)."(<삼국지.오지.주유전)>라고 기록할 뿐이다. 우리는 생각해보면 알 수 있다. 조조군은 선박이 수천척인데, 그들을 연결시키려면 얼마나 많은 철삭이 필요할까? 그걸 즉시 만들어내는 것이 가능할까? "수미상접"이 된 이유는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그곳의 수류상황이 복잡하고, 조조군의 선박운항기술이 뒤떨어져 수천척을 "정박위치"에 정박하기 어려워 혼란스럽게 이리저리 얽혀 있었다는 것이고, 강안에는 쉽게 불에 탈 수 있는 갈대가 있었다. 황개도 보고는 화공이 필요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다만, 마땅히 설명해야할 점은 조조의 군대선박은 서로 묶여 있지 않았고, 모조리 불태워버리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뒤쪽의 배는 상황이 좋지 않다고 보면 도망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조는 원래 배를 불태워버리고자 했다. 그래서 아예 "나머지 배를 불태워버리고 퇴각했다(燒其餘船引退)"(<삼국지.오지.오주전>)
한 마디 덧붙이자면, 나관중이 연환계를 추가시켰는데, 그 장면은 아마도 주원장(朱元璋)이 진우량(陳友諒)의 연환선을 불태워버린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나관중은 바로 원말명초의 사람이니, 그들은 대체로 동시대의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제갈량의 차동풍(借東風)"과 관련해서 일반적으로 주유가 일기예보한 공로(시베리아의 차가운 고기압이 지나가는 4,5일)라고 본다. 다만 필자가 상세히 현지의 기상자료를 살펴본 결과, 적벽일대의 겨울에는 가끔 동풍이 부는 것이 아니라, 자주 동풍이 불고, 그것은 전혀 규칙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대체로 동지(음력 11월 27일)가 지난 후, 태양이 북으로 옮겨가면, 낮의 계절풍은 북방에서 남으로 향하다가 신농가의 높은 산이나, 적벽의 높은 절벽에 부닥치면, 차가운 고압공기가 형성되고, 풍력이 비교적 큰 동풍이 형성된다. 그러나 저녁이 되면, 동쪽에서 오는 호륙풍(湖陸風)이 더욱 크다. 주유의 수군은 동쪽에서 왔고, 비록 역류하는 것이지만, 바람은 순풍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속도와 기동성에서 조조의 군대보다 뛰어났다. 이때 바람이 부는대로 불을 지르는 것은 너무나 쉽다. 그래서 동풍이 부는 겨울밤에 황개가 돌연 투항하러 온 것은 화공의 의도가 너무나 명백하다. 조조가 알아차리지 못했을리가 없다.
하물며, 적벽대전에서 조조군은 손실이 참혹했지만, 명장, 모사는 한명도 잃지 않았다. 이를 보면 철수는 사전에 일찌감치 준비되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쟁의 형세에 따라 어쩔 수 없었을 뿐, 마음으로 복종한 것은 아니다(逼兵勢耳, 非心服也)"(삼국지.촉지.제갈량전)라는 형주수군은 기실 모두 조조에 의해 버려진 화살받이였던 것이다. 이 전투를 겪고나서, 조조의 십여만대군은 십만의 강안의 군영에 주둔하고 있던 북방병은 굶주림과 전염병으로 절반이 죽었지만, 절반은 살아남았다. 그러나, 7,7만에 이르던 배 위에 있던 형주수군은 대부분 '불에 타거나 물에 빠져 죽었다" 설사 강안으로 도망쳤다고 할지라도, 대부분 조조군의 주력에 의해 "짓밟혔다(所蹈藉)" 그렇게 모조리 죽은 것이다. 그리하여 "지방수천리, 대갑십여만(地方數千里, 帶甲十餘萬, 땅은 수천리에 이르고, 병사는 십여만에 이른다)"(<삼국지.위지.유표전)>이라던 형주(荊州)는 "황량하기 그지없고, 사람은 모조리 쓰러져 죽었다(荒殘不堪, 人物殫盡)"(<삼국지.촉지.방통전>에서 주석으로 인용한 <구주천추>)는 비극이 되었다.
기실, 주유에 있어서, 황개를 파견하여 거짓으로 투항하게 한 것은 단지 전술적인 시탐(試探)이었다. 성공하면 좋고, 전쟁을 빨리 끝낼 수 있는 것이고, 성공하지 못하면, 주유는 나머지 예비대책을 세워 놓았다. 어쨌든 이 전투는 이기는 것이 확정적이다. 단지 전과와 시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러나, 불쌍한 8만 형주병은 동오로서는 가질 수 없으니, 주유도 아마 유비나 유기에게 넘겨주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모두 죽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몇년후, 조조는 손권에게 서신을 보낸다. 이를 보면 이상의 점이 증명된다>
"적벽의 전투는 마침 질병이 돌아, 고(孤)가 배를 태우고 스스로 퇴각했다. 공연히 주유만 이로 인하여 헛된 명성을 얻게 되었다."(<삼국지.오지.주유전>에서 주석으로 인용한 <강표전>)
조조가 손권에게 보낸 서신이니 거짓은 아닐 것이다. 어쨌든 양국간에 오가는 국서이니까. 만일 헛소리라면, 적국에게 비웃음이나 사지 않겠는가.
이상을 종합하면, 주유의 "화소적벽"은 기실 조조가 고의로 그에게 불태우게 한 것이다. 목적은 더욱 큰 손실을 막기 위함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 유비에 가까운 형주병을 제거하려는 것이었다. 조조는 역시 일대간웅이다. 장사단완(壯士斷腕)의 공포스러운 모량은 실로 악독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