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남북조)

유유(劉裕) vs 환현(桓玄): 역사상 최강의 반군, 4일만에 왕조 하나를 무너뜨리다.

중은우시 2025. 1. 21. 14:39

글: 명장영웅양천년(名將英雄兩千年)

403년 십이월, 동진(東晋)의 권신(權臣) 환현(桓玄)은 동진 종실(宗室)의 실권자와 북부노장(北府老將)들을 제거한 후, 마침내 황위를 찬탈하고, "초(楚)"를 건립한다. 역사에서 "환초(桓楚)"라고 부르는 왕조이다. 그러나, 환초는 건립된지 두 달도 되지 않아, 북부의 소장파 장수인 유유(劉裕)가 북부의 총본산인 경구(京口)에서 이백여명의 동료를 규합하여, 204년 이월 이십팔일 거병하여 자사(刺史) 환수(桓修)를 죽이고, 신속히 경구와 광릉군부(廣陵軍府)를 점거한다. 그후에 다시 하룻만에 모두 1,700여명의 반군을 모집한 후, 200리 밖에 있는 경사(京師, 수도) 건강(建康, 지금의 남경)으로 진격한다. 이 1천여명의 용맹한 경구주민과 퇴역한 북부노병들은 파죽지세로 승리를 거둔다.

사실상 천하를 차지한 후 유유는 조정에 이번 의거의 상세한 봉상명단(封賞名單)을 내놓았는데, 거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신(臣) 및 무군장군 의(毅)등 272명은 의거를 일으켜 싸웠고 남은 사람이 1,566명이었다."(<송서.무제기>) 즉, 1,700여명의 반군장병들 중에서 의거에 성공한 후에도 1,566명이 살아남았다는 것이다. 이렇게 계산해보면 환현을 무너뜨리는데, 유유측에서는 겨우 100여명만이 희생했다는 것이다. 환현은 어쨌든 '개국황제'인데 어떻게 이렇게 쉽게 유유에게 당해버렸을까? 이는 중국역사에서 기적에 가까운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월 이십구일 저녁, 반군은 죽리산(竹里山, 지금의 강소 구용시 북쪽)까지 행군한다. 이곳은 강이 산을 돌아흐르는 곳으로, 산중간의 좁은 길 하나로만 통행할 수 있고, 지세가 험준하다. 수레는 조금만 부주의하면 산골짜기로 떨어져버린다. 그래서 이곳을 지나는 사람들은 "번거현(飜車峴)"이라고 불렀다. 다만 이 길은 경구에서 건강으로 가는데 반드시 지나야 하는 곳이다. 그래서 관청에서는 이곳에 역참을 설치해 두었고, 오가는 관리나 사자들이 투숙할 수 있게 했다. 반군은 환현의 군대가 오는 것을 보지 못했고, 날이 이미 어두워졌으므로, 죽리에서 군영을 설치하고 휴식을 취한다. 만일 환현의 초군이 공격해 오면 험준한 지세를 바탕으로 대응할 수 있었다. 이곳은 삼림이 무성하고, 자주 맹호가 출몰했다. 역참에 투숙하더라도 호랑이에게 잡혀갈 위험이 있었다. 당시 북부의 군관 황웅(黃雄)은 이 길을 지날 때 비록 엄밀하게 대비했지만, 결국 호랑이에게 목숨을 잃은 바 있다(<태평어람 권892)

이어서 유유는 경사 건강, 원근 사방에 하무기(何无忌)가 초안하고 유목지(劉穆之)가 수정한 격문(檄文)을 보낸다. 격문에는 환현의 죄상을 나열하면서 이 대초황제(大楚皇帝)인 "역신환현(逆臣桓玄), 능학인귀(陵虐人鬼), 조병형영(阻兵荊郢), 사폭도읍(肆暴都邑)"하여 왕망(王莽), 동탁(董卓)에 비견할 수 있는 절국대도(竊國大盜)라는 것이다. 그리고, 반군이 좋은 형세임을 선언한다: 익주자사(益州刺史) 모거(毛璩)는 이미 형초(荊楚)를 소탕했으며(실제로는 삼협에서 막혀서 한발짝도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강주자사(江州刺史) 곽창지(郭昶之)는 이미 심양(尋陽)에서 주상을 맞이하여 황위에 다시 등극시켰고(실제로 곽창지는 환초의 대충신이다), 진북참군(鎭北參軍) 왕원덕(王元德)등은 이미 부곡(部曲)을 이끌고 건강 교외의 군사요충지 석두성(石頭城)을 점령했으며(실제로 왕원덕은 정체가 들통나서 이미 피살되었다), 양무장군(揚武將軍) 제갈장민(諸葛長民)은 이미 의병을 모아 역양(歷陽)을 찰취했고(실제로는 이이 체포되어 건강으로 압송중이었다), 그외에 정로참군(征虜參軍) 유색지(庾賾之)등도 내부에서 우리에게 호응할 것이다(실제로 유색지도 환초의 충신이었다). 그러니 환현은 이제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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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알고 있다. 이 글의 대부분은 허풍이라는 것을. 그러나 격문이라는 것은 기세를 올리기 위해 쓰는 것이다. 비록 아직 발생하지 않았더라도 나중에 우리가 발생하게 할 것이다. 단지 일찌감치 경축하는 것일 뿐이다. 반군이 반드시 이긴다는 것을.

다른 한편으로, 환현은 마침내 경구, 광릉의 두 곳이 이미 함락당하고, 유유가 거병하여 쳐들어오고 있다는 소식을 듣는다. 그는 즉시 궁으로 돌아가 전투를 준비한다. 그리고 모든 문하성 시관(侍官)들에게 입궁하여 당번을 서도록 명하면서, 언제든지 조서를 내릴 수 있도록 대기하도록 한다. 환현의 첫번째 조서는 바로 신야왕(新野王), 양주자사(揚州刺史), 위장군(衛將軍) 환겸(桓謙)을 정토도독(征討都督)에 임명하고, 심복인 시중(侍中), 좌위장군(左衛將軍) 은중문(殷仲文)을 서연이주자사(徐兖二州刺史)에 임명하여, '나라를 위해 희생당한' 환수(桓修)을 자리를 대체하게 했다.

그후, 환현은 신하들을 소집하여 긴급군사회의를 개최한다. 환겸등은 신속히 출격하여, 유유의 병력이 비교적 약소할 때 신속히 그를 소멸시켜버리자고 말한다. 환겸이 가장 두려워한 것은, 그의 수하인 건강의 금군(禁軍)중에는 적지 않은 사람이 북부병에서 뽑아온 정예병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유유는 북부병내에서 명망이 높았고, 일단 기세를 타게 되면, 금군내에서도 적지 않은 인원이 유유의 편에 설 것이어서, 그렇게 되면 대초는 끝장난다는 것이다.

그러나 환현은 그 의견에 확고하게 반대한다. "저쪽 병사는 현재 아주 날카로운 기세로, 죽기를 각오하고 있다. 만일 차질이 생기면(패배하면), 저들의 기세가 올라가고 우리는 끝장날 것이다. 차라리 많은 병력을 (건강성의 북쪽에 있는) 복주산(覆舟山)에 배치하여 저들을 기다리는 것이 낫다. 저들은 이백리를 행군해 오면서, 아무런 소득이 없으니 예기가 많이 꺾였을 것이다. 돌연 대군을 만나면 반드시 경악할 것이다; 나는 병사들에게 굳게 진을 지키기만 할 뿐, 도발해 오더라도 싸우지 말라고 할 것이다. 그러면, 저들은 싸우려고 해도 되지 않으니, 자연스럽게 흩어지게 될 것이다. 이것이 상책이다."

이건 환현의 고질병이기도 하다. 당초 사마원현(司馬元顯)이 환현을 토벌한다고 했을 때도, 환현은 전투를 상당히 겁냈다. 그리하여 강릉(江陵)에 모아놓고 방어하려고 했었다. 지금 유유는 사마원현보다 훨씬 대단하니, 환현으로서는 당연히 겁을 먹을 수밖에 없다. 싸우는 것은 가장 싫어하는 것이다. 그저 시간을 끌고 버텨서 그들을 물러나게 하는 것이 가장 좋지 않은가.

환겸은 더 할 말이 없었다. 일이 이 지경이 되었으면, 유유에게 약한 모습을 보여서는 안되지 않은가? 그랬다가는 아군의 사기가 떨어지게 될 것이다. 외나무다리에서 만나면 더욱 용맹한 자가 이기는 법이다. 현재 이런 상황에서는 죽기를 각오하고 싸워야 하는 것이 아닌가.

환겸등이 계속하여 권했고, 환현도 더 이상 고집을 부릴 수 없게 되어, 할 수 없이 돈구태수(頓丘太守) 오보지(吳甫之)와 우위장군(右衛將軍) 황보부(皇甫敷)로 하여금 군대를 이끌고 북상하여 유유를 토벌하도록 명한다. 그러나, 토벌명령을 하달하는 동시에, 환현은 다시 비밀스럽게 심복 은중문으로 하여금 석두성에 선박을 준비해 놓도록 한다. 일단, 전투가 불리해지면, 건강을 버리고 상류로 도망칠 생각인 것이다.

은중문등은 답답해 했다. 당신은 이미 황제인데, 유유의 일천여명을 두려워한단 말인가. 그리하여 묻는다: "유유등은 오합지졸이고, 아직 기세도 타지 않았는데, 폐하께서는 뭘 그렇게 크게 우려하십니까?"

환현이 말했다: "유유는 일세의 영웅이다. 유의(劉毅)는 집안이 가난하기 그지 없지만, 크게 도박을 걸었던 인물이다(家無檐石之儲, 樗浦一擲百萬); 하무기는 그의 외삼촌과 많이 닮았다; 이들이 함께 대사를 도모하는데 어찌 성사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삼월초하루, 경구에서 거병한 후 삼일째 되는 날, 유유의 반군은 정비를 마치고, 죽리산에서 내려와 장강을 따라 서행한다. 장강의 물을 거슬러 강승현(江乘縣)의 성밖에 도착하여, 오보지가 이끄는 초군의 선두부대를 만난다. 쌍방은 급히 진영을 갖추고 전투를 준비한다. 이때, 새로 유유의 군에 들어온 주령석(朱齡石)이 돌연 이렇게 말한다: "저 주령석은 대대로 환씨집안에 두터운 은혜를 입었습니다. 차마 칼날을 맞대어 싸울 수 없으니, 군의 뒤에 머물러 있겠습니다."

원래 주령석의 부친인 서부장(西府將) 주작(朱綽)은 환충(桓冲)에게 재생지은(再生之恩)을 입고, 평생 환충을 부친처럼 모셨다. 주령석과 동생 주초석(朱超石)은 어려서부터 환충의 아들 환수, 환겸과 함꼐 자라서, 그 정이 형제와 같다. 어른이 된 후, 주령석은 환수를 따르고, 주초석은 환겸을 따르며, 각자 그들의 군부에서 참군을 지낸다. 환수가 반군에 피살된 후, 주령석은 유유의 군에 들어와 참군이 되었다. 이는 주령석이 환씨에 대하여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이고, 정치적인 입장이 같다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세상에 공과 사를 이처럼 확실하게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있을 수 있겠는가? 예를 들어, 유매(劉邁), 환현, 유뢰지(劉牢之)는 그 점을 완전히 혼동했고, 그들의 실패는 이에 기원한다고 할 수 있다.

다행히 유유는 주령석과 마찬가지로 공과 사는 분명한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주령석의 의로움을 크게 칭찬하며, 그가 부대를 이끌고 후방에 머물도록 허락한다. 주령석은 유유의 명확함에 크게 감동받는다. 나중에 그의 동생 주초석과 함께 유유의 휘하에서 충성을 맹세하고, 두 사람은 모두 그를 위해 목숨을 바친다.

일처리를 마친 후, 유유는 눈물을 흘리면서 사람들 앞에서 맹세하고, 병사들보다 앞장서서 큰 칼을 휘두르며 적군을 향해 돌진한다. 오보지는 환현의 휘하에 있는 맹장이다. 그가 이끌고 온 병사들도 정예병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북부병은 그들보다 더욱 정예였다. 한차례 전투를 통해 추풍낙엽처럼 스러지며 오보지는 대패하고 죽임을 당한다.

유유는 승기를 잡고 다시 진격하여, 병력이 나락교(羅落橋)에 이른다. 거기서 다시 황보부가 이끄는 초군 수천명과 싸운다. 황보부는 안정황보씨(安定皇甫氏)집안 출신이다. 즉 동한 말기의 양주명장(凉州名將) 황보규(皇甫規), 황보숭(皇甫嵩)의 후손이다. 서진말기이래, 관중은 계속하여 전란에 휩싸였고, 많은 옹주(雍州), 양주(凉州)의 유민들이 형주, 양양 일대로 도망쳐 와서, 형주군(荊州軍)의 주력이 되었고, 나중에 환현을 따라 건강으로 내려왔다. 황보부는 우위장군인데, 그의 휘하에 있는 이 수천명은 분명 옹주, 양주 유민으로 구성된 환초의 초군육군(楚軍六軍)중에서 우위군(右衛軍)일 것이다. 이들은 환현 수하의 핵심주력군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인원수도 유유의 반군보다 몇배가 많다. 다만 그렇기는 해도, 유유는 여전히 자신감있게 주령석의 부대를 예비대로 빼놓고, 관건적인 순간에 기병제승(奇兵)으로 써서 승리를 거둘 생각이었다.

이건 분명 어려운 싸움이다. 이기면 왕후장상이 되고, 지면 죽어도 묻힐 곳이 없게 될 것이다.

모든 반군병사들은 이 점을 잘 알고 있었다.

전투가 시작되고, 황보부가 먼저 공격을 감행하여, 반군에 대해 맹렬한 공세를 펼친다. 이들 양주의 기병은 과연 대단했다. 기병의 우세로 반군의 보병을 압도했다. 유유와 그의 사마 단빙지(檀憑之)가 각각 1군을 이끌고 돌진한다. 그러나 완전한 우세를 차지하지는 못했다. 단빙지는 몇 무리의 기병에게 포위당하여, 휘두르는 칼에 맞아 전사한다. 유유는 단빙지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전투에 나선지 근 십년이 되었고, 그 정은 형제와 같았다. 지금 그렇게 가까운 전우가 전사해버리니 비분강개하지 않을 수 없다. 단빙지의 죽음은 안타깝다. 그는 공신집단내에서 말그대로 2인자였다. 만일 그가 죽지 않았다면 유의가 올라가 유유와 경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건 아마도 운명일 것이다.

그러나, 유유는 눈물을 흘릴 여유가 없었다. 황보부의 우세한 병력에 몇 겹으로 포위당해버렸다. 그때 곁에 있던 전우들은 모두 흩어져, 유유는 큰 나무를 등에 지고 홀로 싸울 수밖에 없었다. 황보부가 유유를 알아보고, 기뻐하며 크게 소리친다: "넌 어떻게 죽구 싶으냐!" 말을 마치고 말을 몰아 그를 향해 찔러간다.

유유도 피하지 않고, 두 눈을 크게 뜨고 장판파의 장비(張飛)처럼 크게 소리치며, 동귀어진(同歸於盡, 함께 죽다)하자고 덤볐다. 그러자 황보부가 약간 겁을 먹고 놀라서 말의 고삐를 돌려 피해나갔다. 중요한 순간에 유유가 준비해두었던 예비대가 전투에 참가한다. 졸지에 사방에서 화살이 날아왔고, 황보부는 이마에 화살을 맞아 말 위에서 떨어진다. 유유는 급히 칼을 쥐고 근처로 달려갔다. 황보부의 얼굴은 온통 피로 뒤덥혀 살지 못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황보부는 마지막 힘을 짜내어 말을 한다. 유유에게 이렇게 부탁한다: "그대는 천명을 받았으니, 자손을 부탁합니다!"

유유는 고개를 끄덕인다. 좋다. 그렇게 할 테니, 안심하고 죽어라. 말을 마치고 칼을 들어 황보부의 수급을 벤다. 유유는 그후 과연 황보부의 가족을 잘 돌봐준다.

한차례의 악전고투가 지나가고, 반군은 마침내 황보부의 부대를 물리친다. 전투가 끝난 후, 유유는 직접 단빙지의 시신을 수습하며 통곡한다. 그는 당초 거병할 때 당연히 마음 속으로 불안감이 있어서, 경구의 술사 위수(韋叟)를 불러 앞날에 대해 점을 쳤다. 위수는 유유, 하무기, 위영지(魏詠之)를 보고 모두 대귀(大貴)의 상(相)이라고 말하며, 가까운 시일내에 확인될 것이라고 했다. 다만 유독 단빙지에 대하여는 "그대는 급병지액(急兵之厄)이 있다. 그때는 삼사일을 넘기지 않을 것이다. 깊이 숨어서 피해야 하고, 가볍게 나서서는 안된다." 그러나 단빙지는 관상가의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여전히 참전할 것을 고집했었다. 그리고 유유는 별도로 하무기에게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같은 배를 탔다. 마땅히 차이가 없어야 한다. 우리는 모두 부귀를 누려야 한다. 단빙지만 다를 수는 없다." 결국 그 관상가는 그저 헛소리를 한 것이라고 여긴다. 생각지도 못하게 두 차례의 전투를 거치면서, 다른 사람들은 다 괜찮은데 유독 단빙지만 죽었다. 그 관상가가 아주 용했던 것같다. 그렇다면 그것이 설명하는 것은 반군내에서 단빙지가 희생당하는 것이 끝이고, 이번 거사는 반드시 성사될 것이라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환현은 오보지와 황보부 두 명의 맹장이 전사했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더욱 공포에 휩싸인다. 급히 각종 화상, 도사, 신파(神婆), 무사(巫師)등을 불러 그의 점을 치게 하고, 온갖 법술을 써서 유유등을 저주하게 한다. 이런 신비한 역량을 빌어 대초강산을 지키고자 했던 것이다.

"그는 양광(楊廣, 수양제), 조길(趙佶, 송휘종)같은 류이다. 모두 제왕가에 태어났고, 시운을 만나지 못했다. 그런데 환현은 개국지조가 되고자 했으니 웃기는 일이다."

마지막으로 환현의 진정으로 의미있는 배치는 역시 자신이 원래 계획했던대로, 병력을 복주산에 모으는 것이다. 거기서 유유와 최종결전을 치루려는 것이다. 복주산은 지금의 남경 구화산(九華山)공원이다. 남경성의 동북쪽에 있고, 현무호의 남안에 있다. 모양이 뒤집어진 큰 배와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그리고 복주산의 동쪽에 종산(鍾

山), 현무호의 사이에 있는 북리문(北籬門)은 바로 경구에서 건강으로 들어오려면 반드시 지나가야 하는 곳이었다. 그래서 복주산은 황가원림에 속하면서 성을 지키는 문호이다. 복주산만 차지하면, 반군은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볼 수 있게 되고, 건강의 궁성 바로 앞까지 밀고 들어갈 수 있다. 사실상 70여년전의 소준(蘇峻)의 난은 바로 소준이 먼저 복주산을 점거하고, 그후에 불을 질러 건강궁을 완전히 잿더미로 만들어 버렸었다. 그래서 환견은 복주산에 2만의 금군을 배치한 것이다. 이들 금군은 환겸의 지휘를 받고, 병력은 둘로 나누어 복주산의 동쪽과 서쪽 양측에 배치된다.

유유는 환현의 배치를 계속 보면서 웃고 있었다. 그렇게 많은 병사를 보내어 겨우 산의 양쪽에 주둔시키고, 산의 꼭대기의 고지는 우리 군에게 넘겨준단 말인가? 과연 사치부패한 도련님이다. 이런 줄을 부친은 알고 있는가?

404년 삼월 이일, 경구에서 거사한지 사일째 되는 날, 유유의 반군은 아침식사를 하고, 나머지 양식을 버리고, 복주산의 동쪽 산아래 큰 길로 들어선다. 왜 양식을 버렸는가? 이는 파무침주(破釜沉舟)이다. 승리하면 건강에거 경축연회를 열 것이고, 그것이 아니면 여기서 죽는 것이다. 제3의 길은 없다.

유유의 반군은 어쨌든 겨우 1천여명이다. 비록 연전연승을 거두며 사기가 올라가 있기는 하지만, 초군의 병력은 자신의 십여배이다. 그래서 이번 전투에서는 계책을 써야지 힘과 힘으로 부닥쳐서는 승산이 없다. 먼저, 유유는 모든 노약자들에게 깃발을 들게 한 다음 복주산의 정상으로 올려보낸다. 그들의 임무는 전투가 아니고, 그저 산 위에서 깃발을 흔들면서 소리치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여 반군이 이미 산 골짜기에 가득 차 있다는 기세를 보이는 것이다.

과연, 환현이 보낸 척후병이 그 장면을 보고는 깜짝 놀라서 급히 보고한다: "유유군이 사방에 깔려 있는데, 도대체 몇명이나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환현도 유유가 도대체 어디에서 그렇게 많은 병력을 모았는지 몰랐다. 그저 일이 잘못되고 있다고 느낄 뿐이었다. 그리하여 급히 무위장군 유색지에게 정예 예비부대를 이끌고 증원가게 했다. 아직 전투를 시작하기도 전에 예비대부터 보낸 것이다. 이를 보면 환현은 이미 체계가 혼란해지고 있는 것이다.

황제가 혼란스러워하니, 초군의 각 장수들도 자연스럽게 그런 영향을 받는다. 하물며 환초의 초군에는 많은 병사들이 북부병에서 선발되어 온 자들이었다. 그들이 평생 가장 경외하는 장군은 바로 유유이다. 지금 그와 싸우려고 하니 어찌 투지가 생기겠는가? 그저 환현을 계속 따르던 형주병만이 어느 정도 전투의지가 있었다. 그리하여 유유는 중점적으로 그들을 타격하기로 정한다. 반군을 몇개의 무리로 나누어, 산 위에서 아래로 환겸의 군영을 맹렬하게 공격했다. 유유는 총사령관으로, 여전히 병사들의 앞에 섰고, 장수들도 그의 용맹함에 감염되어 죽기살기로 분전했다. 모두가 일당백이고, 고함소리가 천지를 진동했다. 이때는 동풍이 불고 있었는데, 유유등은 그것을 이용하여 불을 지른다. 화재로 환겸의 군영은 모두 불타버리고, 화염이 치솟는다. 환겸의 이만명은 궤멸하고 만다.

충천하는 화염과 벼락이 치는 것같은 소리를 내며 건강궁실로 쳐들어간다. 이때 용상에 있던 환현은 더 이상 앉아 있을 수가 없어, 심복 수천명을 데리고, 직접 전투에 참전하겠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자신은 남몰래 도망칠 궁리를 한다. 그는 뚱뚱한 몸을 큰 말에 올라타고, 아들 환승(桓昇), 조카 환준(桓浚)을 데리고 건강남문으로 빠져나간다. 그때 마침 참군 호번(胡藩)을 만난다. 호번은 환현의 고삐를 붙잡고 간한다: "지금 우림군의 궁병이 팔백이 남아 있고, 모두 의고(義故, 형주의 자제병)입니다. 서쪽사람들은 여러 대에 걸쳐 은혜를 입었습니다. 가서 전투명령을 내리지 않고 일단 이곳을 버리면 어디에 가서 편안히 지낼 수 있겠습니까?"

환현은 대답할 말이 없었다. 할 수 없이 말채찍으로 하늘을 가리켰다. 하늘의 뜻이 그러하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말을 몰아 달아났다. 석두성에서 배에 올라 장강상류로 거슬러 올라간다. 황급히 도망치다보니, 준비가 부족하여, 배 위에서 제공되는 음식은 형편없었다. 환현의 마음보다도 더욱 형편없었다. 그러나 황제폐하가 먹을 마음이 생기겠는가. 환현의 5살된 아들 환승은 이미 철이 들어서 앞으로 다가와 가슴을 만지면서 위로했다. 환현이 그 모습을 보니 더욱 가슴아팠다. 결국 어린아이처럼 대성통곡을 하게 된다.

다른 한편으로, 승리를 거두고 건강성에 들어간 유유도 통곡하고 있었다. 원래, 이전에 건강성 안에서 호응하는 것을 책임졌던 왕원덕은 정체가 들통나 피살당한 후, 그의 동생 왕중덕(王仲德)이 왕원덕의 막내아들 왕방회(王方回)를 데리고 사방으로 숨어다니면서 체포를 피했다. 마침내 유유가 입성하는 때까지 살아남은 것이다. 왕중덕, 왕방회의 남루한 의복과 가련한 모습을 보고, 유유는 슬픔이 밀려와 한편으로 왕방회를 끌어안으면서, 왕중덕과 마주보며 통곡했다. 나중에 왕씨형제의 충의를 표창하기 위하여, 유유는 왕원덕을 급사중(給事中)에 추증하고, 안복현후(安福縣侯)에 봉한다. 그리고 왕중덕은 자신의 장군부의 중병참군(中兵參軍)으로 임명한다. 왕중덕 형제는 원래 북방의 태원왕씨(太原王氏)이다. 신분이 고귀하지만 전진(前秦), 적료(翟遼)에서 장수가 되었다가, 나중에 남으로 내려왔다. 그러나 그의 망족(望族)신분은 양전기(楊佺期)와 마찬가지로 남쪽의 남방문벌들에게는 인정받지 못하고 있었다. 기록에 따르면, 그들은 일찌기 남방의 태원왕씨를 찾아갔으나, 왕유(王愉)등 동족들에게 쫓겨난 바 있다. 그리하여 환현에게 귀순한 것이다. 그러나 환현도 그들은 단순히 무인으로 대접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결국 경구건의집단의 편에 서기로 결정한 것이다. 유유의 북부집단에 가입한 후, 그들은 물만난 고기같았다. 왕중덕은 나중에 관직이 좌장군, 서주자사, 도독회북칠주제군사(都督淮北七州諸軍事)에 오르고, 신감현후(新淦縣侯)에 봉해진다. 유송(劉宋)군대내에서 한 지방을 책임지게 된다. 그는 유유북벌의 믿을만한 장수였을 뿐아니라, 송문제(宋文帝)의 원가북벌(元嘉北伐)에도 참가한다. 심지어 환갑의 나이에도 유송왕조의 북부국경을 책임지는 중임을 맡는다. 436년, 70세의 왕중덕은 진북대장군(鎭北大將軍)이 되어, 조정무관중 서열1위가 된다. 그외에 왕원덕이 남긴 아들 왕방회도 나중에 유송의 대장이 되어 관직이 청기이주자사(靑冀二州刺史), 효기장군(驍騎將軍)에 이르고, 445년, 심경지(沈慶之)와 함께 옹주(雍州)에서 오랑캐군을 대파하고, 450년에는 다시 송문제의 제2차 원가북벌에 참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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