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문화/중국의 그림

냉매(冷枚): 강희, 건륭이 좋아한 청나라 궁정화가

중은우시 2025. 1. 9. 15:43

글: 중국국가역사(中國國家歷史)

강희27년경, 스승 초병정(焦秉貞)의 소개로 산동(山東) 교주(膠州)의 '소진작화가(小鎭作畵家) 냉매는 내정(內廷)으로 들어가 강건성세(康乾盛世)에 궁정화가로서의 생애를 보내게 된다.

먼저 중요하게 보아야 할 점은 강(康)과 건(乾)이라는 것이다. 강희제와 건륭제는 두 조손은 마치 묵계라고 있듯이, 이 화가를 좋아했다. 그러나 옹정(雍正)은 아니었다.

초병정의 안목은 아주 뛰어났다. 강희제때 제자 냉매가 뛰어난 활약을 보이면서 스승의 얼굴에도 금칠을 하게 된다.

강희30년부터, 20세가량의 냉매는 자신의 직업생애의 상승기를 맞이한다. 강희제의 여러 인생사건에 그는 모두 참여한다. 예를 들어:

강희제의 남순(南巡)에 냉매는 참여하여 '청초화성(淸初畵聖)' 왕휘(王翬)가 주도하여 창작한 <강희남순도(康熙南巡圖)>에 참여한다;

강희제가 환갑을 경축하기 위하여, 냉매가 주도하여 <만수도(萬壽圖)>를 그려 황상에게 바친다;

강희제와 동생 장친왕(莊親王)의 관계가 좋았는데, 냉매는 <동엽봉제도(桐葉封弟圖)>를 그려 형제간의 우의를 칭송한다;

강희제는 재위기간동안 여러 공사를 벌였는데, 그중에는 560헥타르에 이르는 피서산장(避暑山莊)이 있다. 냉매는 크기 약 4평방미터의 <피서산장도>를 창작하여 열하의 이궁 피서산장의 경치를 묘사했고, 피서산장의 36경중 30경을 포함시켰다.

냉매 <피서산장도>

냉매의 화풍은 스승과 같았다. 그림을 그릴 때 "참용해서법(參用海西法, 서양의 기법을 참조하여 사용하다)"을 써서 서양의 많은 수법을 받아들였다. 그는 또한 만능형의 화가였다. 인물, 건축, 화조에 모두 뛰어났고, 또한 서양의 명암투시기법을 취했는데, 중국방식과 서양방식을 잘 배합하여 화풍이 온건하며 진실했다.

이 시기의 대표작으로는 <남순도>와 <피서산장도>가 있다. 이는 전체 강희시기를 대표하는 작품들이다. 냉미의 사실기법을 잘 드러낸다.

냉매와 초병정은 강희말기 궁정화가중의 대표적인 인물이라 할 수 있다. 또한 나중에 유명한 낭세녕(郎世寧)보다도 더욱 일찍 서양회회기법을 동방회화에 융합시킨 선구자이다.

재능이 있으면서, 창작의 열정도 강했다. 이로 인해 이 젊은 화가는 빠르게 승진한다. 강희제때 냉매는 순조롭게 급여도 오르고 내각중서(內閣中書)로 발탁된다.

그때 냉매는 물만난 고기같았다.

그러나.....

사람의 인생에는 기복이 있기 마련이다. 오래 살다보면 좋은 일 궂은 일을 모두 당한다. 황은의 호탕함도 맛보았지만, 하늘이 냉매에게 안배한 스토리는 총애를 잃고 쫓겨나는 것이었다.

옹정제가 즉위한 후, 냉매는 궁중에서 사라진다. 내정의 기록에 다시는 냉매에 관한 여하한 창작기록도 찾아볼 수 없다.

강희제와 건륭제를 사로잡은 이 화가는 오직 옹정제에게만은 인정을 받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이건 아마도 그의 그림이 우수하지 않아서가 아닐 수 있다. 학자 섭숭정(聶崇正)의 고증에 따르면, 여러가지 상황으로 볼 때, 냉매는 강희제가 폐출한 황태자 윤잉과 교류가 있었기 때문에, 옹정제로부터 궁정에서 쫓겨난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

냉매는 화가인데 무슨 다른 욕심이 있었겠는가. 모두 알다시피 강희제의 구자탈적은 아주 흉험했다. 객관적으로 말해서, 냉매가 잠시 궁을 나가서 분쟁과 거리를 둔 것도 그다지 나쁜 일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사실은 증명한다. 실력이 뛰어난 사람은 어디를 가더라도 쓸모가 있다. 옹정제가 재위한 13년간 냉매는 '야생화가'가 되고, 그후 또 다른 한 남자에게 '고용'된다.

그는 바로 보친왕(寶親王) 홍력(弘曆, 나중의 건륭제)이다.

홍력은 냉매에게 잘 대해준다. 최소한 먹고 사는 것은 걱정하지 않도록 해주었다. 그러나 또 다른 견해에 따르면, 이 시기동안 기실 자유직업인인 화가로서 활동했다고 한다. 냉매는 강희제때의 유명한 궁정화가로서 많은 사람들이 그의 그림을 좋아했고, 자신의 그림을 팔아서 잘 살았다는 것이다.

냉매는 이때 영감을 많이 얻는다. 이 기간동안 창작한 작품들은 궁정에서 창작한 작품들과 스타일이 달랐다. 시정의 모습들을 그리는 것이 많았다. 그리고 그는 그림의 작자를 표시할 때 "신(臣)"이라는 글자를 쓰지 않는다. 대부분의 그림에는 "금문화사냉매(金門畵師冷枚)" 혹은 "동명냉매(東溟冷枚)"라고 적었다.

<증수교지(增修膠誌)>에는 냉매에 대하여 "인물화가 특히 당시 최고였다"라고 언급한다. 냉매는 자신의 실력을 발휘할 때를 만난 것이다. 이 시기에 그가 그린 사녀화(仕女畵)는 너무나 뛰어났고, 창작의 최전성기라 할 수 있다.

궁중에서 활약할 때는 대부분 요청받은 그림을 그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민간에 있던 시기에 그의 작품이 표현하는 것은 더더욱 스스로의 취미에 따른 것이었다. 냉매의 인물화중 대표작품으로 꼽히는 <마고헌수도(麻姑獻壽圖)>, <춘규권독도(春閨倦讀圖)>가 모두 이 시기에 창작되었다.

냉매 <마고헌수도>

냉매 <춘규권독도>

<춘규권독도>에서는 냉매가 의미심장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림 속의 취채(翠釵, 비취비녀)를 꽂고, 금탁(金鐲, 금팔찌)을 차고 있는 미인은 오른쪽 다리를 등자(凳子, 등받이없는 의자)에 꼬고 있다. 그림의 제목인 "권독(倦讀)"은 책을 읽다가 피곤해졌다는 의미이다.

이 미녀는 무슨 마음 속의 걱정때문인지 멍하니 있다.

그녀는 손으로 턱을 괴고, 상반신은 탁자에 기대고 있다.

미녀는 작은 입을 다물고 손톱을 씹으며 깊은 생각에 잠겨 있다.

화가는 그녀가 책을 읽는 도중에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 모습을 아주 진실되고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피부의 질감도 그대로 느껴지게 그렸다.

집안의 가구, 탁자위의 청아한 물건등은 모두 여자의 신분이 범상치 않음을 나타낸다. 서갑(書匣)에는 당시 상류층여인이라면 반드시 읽어야할 <명원시귀(名媛詩歸)>가 놓여 있지만, 그녀가 흥미를 가지고 손에 들고 읽는 것은 <자야가(子夜歌)>이다.

서갑에 <명원시귀>가 보인다

손에 든 책은 <자야가>이다.

이를 통해 미인의 마음을 엿볼 수 있다. 답안은 바로 그녀가 손에 쥐고 있는 책에 있다.

<자야가>는 진(晋)나라의 악부시(樂府詩)이고, 그 내용은 이러하다. 한 여자가 마음에 둔 남자와 서로 사랑하고 있다. 원래 두 사람은 아름답게 맺어져야 하지만, 그녀는 남자에게 배신당한다. 사랑에 빠진 여인의 꿈이 깨져버린 이야기이다.

여자는 아마도 그 시를 읽으면서 생각에 빠져있는 것일 것이다. 그녀의 곁에 있는 것은 오직 귀여운 개뿐이다. 그림에서 가장 중요한 정보는 벽에 붙어 있는 그림이다.

벽에 붙어있는 그림의 의경(意境)은 아주 직관적이다: 고주사립옹(孤舟簑笠翁), 독조한강설(獨釣寒江雪)" 굴원(屈原)의 <어부(漁父)>이후, 그의 시에서 얘기한 "창랑의 물이 맑으면 내 갓끈을 씻고, 창랑의 물이 더러우면 내 발을 씻겠다."는 어부는 많은 문화인들의 마음 속의 이상을 가리킨다.

그리고, "갑진동일(甲辰冬日)"은 이것이 옹정2년의 작품임을 의미한다. 고의로 낙관에서 더욱 명확히 설명한 것이다. 이 그림 속의 그림은 바로 냉매가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었던 이야기인 것이다.

재미있지 않은가? 사랑에 빠져 깊은 생각에 잠겨있는 미인을 그리면서, 그 뒤에는 속세를 끊고 은거한 사람을 숨겨둔 것이다.

찬바람이 불고 물방울이 떨어지면 바로 얼음이 되는 한겨울에 붓을 들어 이 그림을 그리는 냉매는 기실 이 그림을 해독하는데 빠질 수 없는 일부분이다.

아마도 이 그림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삼중의 공간, 삼중의 꿈일 것이다: 현실에서 인생의 급격한 변화를 맞이한 화가, 화가의 붓아래에 그려진 어찌해야할지를 모르는 여자, 그리고 그림 속에 숨겨진 닿기에는 머나믄 은거의 꿈.

이 셋을 묶어주는 것은 오직 하나이다: 고독.

그래서 이 그림은 아주 특별한 것이다.

냉매의 또 다른 사녀화인 <연생귀자도(連生貴子圖)>는 이해하기 아주 쉽다. 사용한 것은 모두 해음(諧音, 발음이 같은 글자)이다: 연꽃(蓮, 連), 생황(笙, 生), 계수나무(桂, 貴), 아이(孩子, 子)

냉매 <연생귀자도>

<춘규권독도>는 다른 길상화처럼 직접적으로 의미를 드러내지 않는다. 그래서 냉매의 모든 인물화중에서 독특한 지위를 차지한다고 말할 수 있다.

13년의 시간은 사실 아주 빠르게 지나간다. 홍력이 즉위한 후, 냉매는 금방 궁으로 불려들어간다. 그 "뉴후루(鈕祜祿). 냉매(冷枚)"가 돌아온 것이다.

냉매가 처음 내정에 들어갔을 때부터 계산하면, 냉매가 이해에 다시 궁정으로 불려들어갈 때는 이미 반세기가 지났다. 강희중기에 입궁했던 젊은이 냉매가 이제 건륭제때의 노인 냉매로 궁정에 들어간 것이다.

아마도 홍력이 친왕으로 있을 때의 정의를 생각해서인지, 건륭제는 냉매를 특히 중용했다.

먼저 그의 급여를 올려준다. 내대신 해망(海望)은 성지를 받들어 자녕궁화가의 상전량(賞錢糧)을 냉매에게 내렸는데, 매달 은11냥이었다. 이게 어떤 의미인가? 당시 최고수준의 화가인 김곤(金昆), 손호(孫祜), 정관붕(丁觀鵬), 장우삼(張雨森)등이 모두 매월 8냥을 받았을 뿐이다. 냉매는 이것만으로도 상등대우 정도가 아니라 상상등대우를 받은 것이다.

이것만이 아니었다. 냉매에게는 가족이 많다는 점을 고려하여, 건륭제는 그의 급여에 3냥을 더해준다. 매달 실제로 받는 금액이 14냥이 되도록 한 것이다. 그리고, 같은 해에 입궁한 냉매의 아들 냉감(冷鑒)에게도 3등전량의 대우를 해주고, 그외에 의복, 은량등을 따로 하사했다.

건륭2년 사월 십사일, 그는 다시 냉매에게 관방 여러 칸을 주어 거주하게 한다.

건륭제는 그에게 돈도 주고, 집도 주고, 집에서 일할 일꾼까지 보내주었다. 그는 이 예술가에 대하여 상당한 인정미가 있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한 가지 전제 위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냉매의 실력은 너무 강했다. 노익장을 발휘하고 있었다.

은퇴같은 것은 없었다.

건륭제때에 접어들면서, 냉매의 창작화는 수십건에 이른다. 인물화도 있고, 불도(佛道), 화조, 건축등등이 있다. <원명원> 총책, <성제명왕도> 책, <양정도>책이 모두 당시의 작품이다. <석거보급(石渠寶笈)>에 기재된 냉매의 잡품은 18건이나 된다. 그중 가장 주요한 작품은 60여페이지에 걸친 <양정도(養正圖)>이다.

냉매는 자신의 근면함으로 건륭제의 지우지은을 갚은 것일 것이다. 그러나, 냉매의 이때 업무량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제자를 거둘 자격이 있었기 때문이다.

냉매의 아들 냉감은 그림재주는 비교적 평범했다. 건륭은 부친의 면을 봐서 아들을 입궁시켜준 것이다. 입궁후에도 '3등'대우를 받았을 뿐이다.

냉매의 가장 뛰어난 제자는 따로 있었다. 그는 바로 요문한(姚文翰)이다.

요문한은 항상 사부와 함께 그림을 그렸다. 어떤 때는 냉매가 먼저 핵심요소를 그린 후, 요문한이 나머지를 보완했다. 혹은 냉매가 초고를 그리고 ,요문한이 윤색을 했다. 이러한 합작으로 창작된 작품들의 성과는 상당히 우수했다.

건륭7년이후, 더 이상 내정에서 냉매가 창작한 기록이 없다. 냉매의 구체적인 출생일자를 모르지만, 개략 이 해에 이미 70여세가 되었을 것이다.

작품을 더 이상 남기지 않았다는 것은 이 노화가에 있어서 한 가지 가능성밖에 없다: 그는 아마도 이 해에 사망했을 것이다.

냉매에 대한 마지막 상사(賞賜)기록은 건륭의 생일때이다. 음력 팔월 삼십일. 태감 고옥(高玉)이 성지를 전한다; 냉매에게 은 오십냥을 하사한다.

그후 궁중에는 더 이상 냉매가 급여를 받아갔다는 기록이 없다.

아마도, 건륭제의 생일쯤에 그가 돌연 병사했을 것이다. 아마도 피휘를 위하여, 건륭제는 상사로 무휼금(撫恤金)을 내렸을 것이지만, 냉매가 병사한 것은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아니면 건륭제의 32살 생일에, 기쁜 나머지 오래전부터 알아왔던 그에게 돈을 하사한 것일 수도 있다.

냉매는 평생 대부분 길상화를 그렸다. 그리고 마지막에 후세에 남긴 그의 기록도 역시 희경(喜慶)의 상사(賞賜)였다.

이건 선시선종(善始善終)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냉매 <미인도> 대영박물관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