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인궤(劉仁軌): 당나라때 출장입상(出將入相)의 항왜민족영웅
글: 최애역사(最愛歷史)
당고종(唐高宗)때 낙양(洛陽)에 순우씨(淳于氏)라는 부인이 있었다. 그녀는 남편을 죽인 죄로 대리시(大理寺)에 압송되어 수감되었다. 그녀의 죄명은 마땅히 사형감이다. 그런데 재상(宰相) 이의부(李義府)가 마침 대리시를 시찰왔다가 순우씨를 보고 그녀의 미모에 반해버린다.
그리하여, 이의부는 대리시승(大理寺丞) 필정의(畢正義)에게 자신이 순우씨를 첩으로 삼고 싶으니, 방법을 찾아서 그녀를 풀어주라고 말한다.
필정의는 그저 담량이 적은 관리였다. 재상의 분부를 어찌 어길 수 있겠는가. 그래서 그는 몰래 희생양을 찾아서 순우씨와 바꾸게 된다. 그런데, 이 일이 나중에 대리시경(大理寺卿) 단보현(段寶玄)에게 발각되고, 그가 고발하여 경성을 뒤흔들게 된다.
사안이 중대하다보니 당고종이 직접 그 일에 대하여 관여하여, 이 사건을 급사중(給事中) 유인궤(劉仁軌)등 감찰관리로 하여금 엄중히 조사하게 한다.
이의부는 자신에게까지 화가 미칠까 우려하여, 필정의를 압박하여 자결하게 한다. 그렇게 하면 당사자가 죽었으니, 증가가 없고, 자신은 화를 피해갈 수 있을 것이라 여겼다. 그러나, 유인궤는 사건조사를 철저히 했고, 결국 사안의 진상을 모두 밝혀버린다. 그리하여 이의부 본인도 어사들의 탄핵을 받게 된다.
아이러니한 것은 이 사건이후, 이의부는 여전히 황제의 총애를 받지만, 유인궤는 관료로서 힘들게 지내게 되었다. 그는 곧이어 청주자사(靑州刺史)로 밀려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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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인궤가 청주자사로 부임하던 해에 그의 나이는 이미 60이었다. 그와 나이가 비슷한 사람으로는 당태종 이세민(李世民), 현장(玄奘), 소정방(蘇定方), 이순풍(李淳風)등이 있다. 이때 이들은 이미 명성을 떨쳤거나 이미 죽은 사람이었다. 오직 그만이 환갑의 나이에도 재능은 있지만 이를 펼치지 못하고 그저 조용히 살아가고 있었다.
다행히 당고종시대는 정치가 암울했던 시기가 아니었다. 오히려, 당태종의 강토개척정신을 이어받아, 당고종도 영토를 확장하는 안목이 있었다. 그의 재위기간동안, 당나라의 판도는 더욱 확장된다. 최전성기때는 북으로는 시베리아, 남으로는 오늘의 인도차이나반도, 서로는 아랄해(咸海), 동으로는 조선반도에 이르는 광활한 영토를 보유한다. 이는 당나라 유사이래 최대의 강역이다.
그러나, 당고종의 신체는 날이갈수록 좋지 않았고, 당나라의 외환도 여기저기서 발생한다.
수당시대 중원왕조의 숙적인 고구려는 여전히 군사력이 강했다. 수양제가 세번에 걸친 정벌이건, 당태종의 고구려친정이건, 모두 이 7백년동안 이어진 정권을 무너뜨리지 못했다. 그리하여 당나라는 조선반도의 삼대정권중 신라와 백제를 지원하여, 고구려를 고립시키려 하게 된다. 이를 통해 싸우지 않고 이기는 병법을 쓰려 한 것이다. 그러나, 조선반도의 3개국은 모두 영토를 빼앗으려는 목적이 있었고, 백제는 당나라가 자신과 동시에 신라를 지원하는데 불만이 있었다. 그리하여, 백제왕 부여의자(扶餘義慈)는 비밀리에 고구려와 동맹을 맺어, 신라를 공격한다. 신라는 망국을 우려하여, 당나라에 도움을 청하게 된다.
유인궤가 청주자사로 부임하기 직전인 현경5년(660년), 나당연합군은 당나라의 대장 소정방의 지휘하에 백제를 격패시키고, 부여의자를 생포한다. 이는 고구려에 큰 타격이 된다.
소정방이 낙양에서 포로를 바칠 때, 당고종은 이미 고구려를 정벌하기로 결정했다. 그해 십이월, 당고종은 소정방을 요동도행군대총관(遼東道行軍大總管)으로 임명하고, 명장 계필하력(契苾何力), 정명진(程名振), 유백영(劉伯英)등으로 하여금 병력을 나누어 출동하게 한다.
수나라가 고구려정벌에 나선 때로부터 대군의 군수물자공급은 기본적으로 산동에서 해로를 통해 조선반도로 운송되었다. 그러므로, 신임 청주자사로서, 유인궤는 군량미를 책임지고 출정하는 당군에 보급하는 임무를 확보해야 했다.
이건 이의부에게 다시 한번 유인궤를 손봐줄 기회가 된다.
황해, 발해일대에 해상폭풍이 발생하는 계절이 되자, 이의부는 재상의 신분으로 명령을 하달하여, 유인궤에게 즉각 식량운송선을 조직하여 전선으로 보내어 전선의 병사들에게 제공해주라고 명령하게 된다. 유인궤는 이번에 바다에 나가면 위험이 크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긴급히 조정에 보고하여 이 명령의 집행을 잠정적으로 유예해줄 것을 청한다. 그러나 그의 상소가 낙양에 도달하자, 이의부는 이를 묵살한다. 이의부의 뜻에 따라, 조정은 계속하여 재촉하는 명을 내려보낸다. 유인궤로서는 도저히 방법이 없어, 민부와 식량운송선을 준비하여 시간에 맞추어 출발한다. 결과는 이의부가 생각한대로였다. 식량운송선이 해상에서 폭풍을 만나 군량과 배가 모두 바다에 가라앉아버린 것이다.
사고가 발생하자, 유인궤로서는 그 책임을 면하기 어려웠다. 당고종은 그리하여 감찰어사 원이식(袁異式)에게 이 사안을 조사하게 한다.
원이식이 출발하기 전에, 이의부가 그를 찾아와서 이렇게 암시한다; "그대가 일을 잘 처리한다면, 관직이 없을 것은 걱정하지 말게"
원이식은 총명한 사람이었다. 이 말에 숨은 의미를 너무나 잘 이해했다. 그리하여 그는 유인궤를 만나서 솔직하게 상대방에게 이렇게 얘기한다; "당신은 조정내의 어떤 사람에게 밉보였다. 그건 당신 자신이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가 나를 불러서 당신을 처리하라고 했다. 당신이 스스로 알아서 해주면 좋겠다!" 그 말의 암시하는 것은 유인궤에게 자결하라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모두에게 좋다는 의미였다.
유인궤는 이의부가 자신을 끝까지 물고늘어진다는 것을 잘 알았다. 이 기회를 틈타 자신의 목숨을 앗아가려는 것이다. 그러나 대당의 율법에 죄를 지은 관리가 반드시 자살해야 한다고 규정되어 있지는 않다. 그래서 유인궤는 직접적으로 반박한다: "저 유인궤가 관리로서 잘못한 것이 있다면 국가의 법이 있으니, 공적으로 법에따라 처형하면 될 것이며, 도망갈 수도 없을 것입니다. 만일 이를 이용하여 자결하게 하여 사적으로 원한을 갚으려 한다면 그것은 따를 수 없습니다."
유인궤가 자결을 원치 않자, 원이식도 방법이 없었다. 할 수 없이 사안을 정리하여 조정에 보고한다.
조정에서 논의할 때, 이의부는 시종 "유인궤를 죽이지 않으면 천하가 조용하지 않을 것입니다"라는 입장을 취한다. 그의 위세때문에 많은 조정대신들도 그의 말에 동조했다. 오직 형부상서 원직심(源直心)은 이렇게 말한다: "바다에서 폭풍이 부는 것은 사람의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유인궤에게 잘못은 있지만, 그렇다고 죽을 죄는 아니라는 것이다.
원직심은 당고종의 심복이다. 그의 말은 유인궤의 목숨을 살려주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유인궤도 즉시 자신은 관직은 필요없고 그저 국가를 위해 충성을 다하고 싶다고 말한다. 그리하여 당고종은 그를 서민으로 강급시키고, 요동(遼東)의 군대로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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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의부는 비록 조정의 결정에 크게 만족하지는 않았지만, 유인궤가 군대에 들어갔으면 군법을 이용하여 죽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되면 자신의 분풀이는 확실히 할 수 있는 셈이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유인궤가 출발하자마자, 이의부는 사람을 보내어 사비성(한국 부여군)을 지키는 명장 유인원(劉仁願)에게 방법을 강구하여 유인궤를 처형하라고 밀령을 내린다.
유인원은 홍문관(弘文館)의 학생이었고, 당태종의 친위(親衛)를 지냈으며 문무에 모두 능했다. 이의부가 최근 들어 조정에서 충신, 양신을 많이 죽였다는 소문을 그는 이미 듣고 있었다. 유인궤가 환갑의 나이에도 계속 군대내에서 일하는데 대하여 유인원은 감동받았고, 그의 입장을 잘 이해했다. 그리하여 이의부의 밀명을 그는 무시해버린다.
조선반도의 전투는 순식간에 변화했다. 백제가 소정방에게 멸망한 후, 당군을 협조해서 전투하던 신라는 백제의 옛땅에서 보복성 약탈을 벌인다. 그렇게 되자, 백제유민들 사이에서도 복수와 복국의 마음이 생겨나게 된다. 일찌기 왜국에 인질로 보내어졌던 백제왕자 부여풍장(扶餘豊璋)이 명망을 이용하여 흑치상지(黑齒常之), 귀실복신(鬼室福信), 도침(道琛)등을 우두머리로 한 백제의 옛 백성들이 신속히 복국군동을 전개하게 된다.
당군이 백제를 멸망시킨 후, 그 옛땅에는 웅진도독부(熊津都督府)가 설치되어, 관할지역의 일체 사무를 관리하도록 했다. 원래 유인궤가 군대에 들어간 것은 바로 이 옹진도독부건설을 지원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그가 아직 도착하기도 전에 웅진도독부는 백제유민에 의해 무너지고, 겨우 사비성만 남아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당나라에서 원래 파견했던 웅진도독 왕문도(王文度)는 부임하자마자 신라왕 김춘추에게 조서를 전하고 하사품을 내리는 의식을 하는 도중 병이 돌발하여 사망해버리고 만다. 이로 인하여 웅진도독부는 관리할 사람이 없어진 상태가 되어버린다. 소정방의 대군은 다시 조선반도에 들어와 연이어 승리를 거두었지만, 계필하력의 북로당군은 고구려의 연개소문의 정예병에 막혀있어, 남로의 소정방과 회합할 수가 없었다. 다른 한편으로, 당고종이 적극적으로 고구려를 정벌하려할 때, 당나라제국의 서북쪽 철륵구성(鐵勒九姓)이 기회를 틈타 반란을 일으켜 당나라의 변경안전을 크게 뒤흔들었다.
국
그와 비교하면, 백제의 복국운동은 신속히 진행된다.
백제멸망이전에 왜국과 우호관계를 유지해오고 있었기 때문에, 이번에 부여풍장이 복국운동을 벌이자, 왜국의 코교쿠천황(皇極天皇)의 지지를 받아낸다. 역사상 최초로 중국정벌을 주장한 일본인으로서 코교쿠천황은 부여풍장에게 무기, 선박을 제공해주었을 뿐아니라, 스스로 직접 군대를 이끌고 전투에 나서서 실력으로 백제유민들에게 힘을 보탠다.
고구려를 공격하는 일은 계속하여 용삭2년(662년)말까지 늦추어진다. 조선반도북부는 이미 겨울이 되어 큰 눈이 여러번 내렸기 때문에 소정방등은 그저 여한을 안고 고구려에서 철수하여 휴식을 취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때 백제와 조선반도남부에 있는 당군과의 전쟁은 일촉즉발이 된다. 당고종은 왕문도의 후임자를 바로 찾아내지 못했다. 할 수 없이 그는 성지를 추가로 보내어, 유인궤를 검교대방주자사(檢校帶方州刺史)로 임명하여 웅진도독의 직위를 대리하여 왕문도의 부하들을 지휘하여 웅진도독부를 방어하게 한다.
이 명령에 대하여, 이의부를 포함한 대부분 당나라조정의 관리들은 유인궤가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여긴다. 어쨌든 문관신분이고 칼이나 창을 다뤄보지 않았기 때문에, 더더구나 직접 전투에 나서서 적을 죽이는 것은 하지 못할 것이라고 여겼다. 그건 그에게 죽으라는 명령이 아닌가? 그러나, 유인궤는 오히려 기뻐했다. 그는 임명을 받은 후, 만나는 사람들에게마다 하늘이 자신에게 부귀를 내려주었다고 말하고 다녔다. 그가 보기에 백제유민 및 일본과 전투를 벌여서 이기는 것은 너무나 쉬운 일로 보였기 때문이다.
당시 조선반도남부에는 당군이 오랫동안 증원을 받지 못했지만, 동맹군인 신라도 시종 당나라의 말을 거역하지 못하고 있었다. 유인궤가 부임한 날로부터, 웅진을 잘 경략하며, 외적에 대항할 전략을 세운다. 왜국과 백제구세력이 계속하여 움직임을 보이는 것을 보고, 그는 한편으로 군대를 잘 단속하면서, 적극적으로 신라왕실과 협력을 추구했다. 그리고 나당연합군을 이끌고 백제유민들이 웅진강입구에 세운 본거지를 점령한다. "죽거나 강물에 빠진 사람이 수백명이었다." 다른 한편으로, 군대와 조정에서의 철군의 목소리에 대해 그는 전체적으로 분석한 후 이렇게 지적한다. 만일 현단계에서 당군이 전투에서 철수한다면, 이전에 여러 차례에 걸쳐 고구려를 공격한 일이 수포로 돌아갈 것이다. 당군이 돌아가면, 백제의 여진이 곧 되살아날 것이고, 그때가 되어 다시 백제, 고구려를 평정하려 하면 훨씬 어려워질 것이다.
백제를 평정하고, 고구려를 정벌하는 것은 당나라가 오랫동안 견지해온 군사방침이었다. 유인궤는 역사의 죄인이 되고 싶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백제를 굳게 지켜야할 의무가 있다고 여긴다. 그리고 시기를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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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인궤가 기다리던 "시기"는 금방 스스로 찾아온다.
유인궤, 유인원의 부대가 고립무원에 빠진 것을 보자, 부여풍장과 그의 부하인 귀실복신, 도침등은 다시 거사하기로 결정한다. 이전에 실패한 바 있으므로, 이번에는 성급히 출병하지 않고, 부여풍장이 당군에 사자를 보내 말을 전한다. 당군의 현재 군사력으로 왜국을 당할 수 없으니, 일찌감치 포기하고 본국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않겠느냐고. 당군이 돌아가겠다고만 하면, 그들은 연도에서 환송하겠다고 한다.
그 말은 확실히 유인궤의 화를 돋구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유인궤는 사자의 말을 듣고도 전혀 화를 내지 않고, 생각해보겠다고만 말한다.
사자는 만족하여 돌아간다. 유인궤의 계획은 이제 정식으로 집행된다.
부여풍장, 귀실복신등이 방심하고 있는 틈을 타서, 유인궤는 밤중에 그들의 영지를 기습하여, 이 백제왕자로 하여금 부하들을 데리고 이백리밖으로 도망치게 만든다. 그후 당군은 계속하여 전격전을 벌이면서 백제부흥세력을 모조리 격파하고, 더더구나 일거에 백제와 신라간의 군사요충지 진현성(眞峴城)까지 점령하여, 신라와 식량수송루트를 확보한다.
첩보를 전해들은 당고종은 너무나 기뻐한다. 용삭3년(663년), 당고종은 유인궤의 요청을 받아들여, 장수 손인사(孫仁師)로 하여금 다시 7천의 장병을 이끌고, 170척의 배에 나눠타고 웅진으로 가도록 하여, 유인궤를 증원한다.
유인궤의 생각에, 부여풍장은 당군을 이기지 못하면 분명 왜국에 도움을 청할 것이고, 왜국은 당군과 교전할 때는 반드시 전선을 파견하여 당군과 해상에서 생사의 결전을 치루려 할 것이라고 여겼다. 이것이 바로 손인사로 하여금 수군을 이끌고 증원오게 한 이유였다.
전투의 국면은 유인궤가 예상한대로 진행되었다. 부여풍장이 당군에 패퇴한 후, 내부에 의견대립과 파벌투쟁이 심각해진다. 복국의 희망이 사라지는 것을 보고 귀실복신은 점차 복국에 대한 생각을 포기한다. 그는 백제복국에 숭고한 신앙을 가지고 있던 스님 도침을 죽이고, 부여풍장의 반대편에 선다. 내부투쟁과정에서, 귀실복신은 부여풍장에 의해 모반죄로 죽임을 당한다. 이제 귀실복신도 죽고, 도침도 죽었다. 백제부흥운동의 대표자들 예를 들어 흑치상지, 사타상여(沙吒相如)등의 눈에 부여풍장은 명주(明主)가 아니었다. 그리하여 부대를 이끌고 유인궤에 투항한다. 그리고, 당나라장수의 신분으로 유인궤, 손인사를 도와 백제잔여세력을 토벌하는데 참여한다.
이때 혼자남게된 부여풍장은 어쩔 수 없이 왜국에 도움을 청하게 된다.
왜국은 부여풍장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았다. 코교쿠천황이 백제를 돕기위해 출정하는 도중에 죽은 후 "다이카 개신(大化改新)"이 지도자인 나타노오에노미코토(中大兄皇子)는 다시 덴지천황(天智天皇)의 신분으로 당나라에 대한 전쟁을 주재한다. 전장군(前將軍)으로 카미츠케노와카코(上毛野稚子), 하시히토노무라시오오후타(間人連大蓋), 중장군(中將軍)으로 거세신전역어(巨勢神前譯語), 미와노네마루(三輪軍根麻呂), 후장군(後將軍)으로 아배인전신비라부(阿倍引田臣比羅夫), 대택신겸병(大宅臣鎌柄)를 데리고 27,000여명의 병력으로 부여풍장을 도우러 나선다.
유인궤 휘하에는 비록 손인사가 데려온 7000명의 당군이 있었지만, 유인원등과 병합한 후, 당군의 병력은 2만이 넘지 못하였다. 인원수로만 보면 백제,일본연합군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재미있는 점이라면, 왜국의 선단이 바다를 건너올 때, 서둘러 당군을 공격하려 하지않았다는 것이다. 오히려 먼저 일본과 바다를 사이에 두고 마주하고 있는 신라로 갔다. 신라는 국력이 백제, 고구려에 미치지 못했지만, 역내의 상업은 아주 발달해 있었다. 신라의 지증왕은 6세기에 법전을 반포하여 금성(경주)에 동시(東市)를 개설한 이래 수십년간 신라는 "시장에서 부녀가 모두 물건을 팔았다." 일본이 군대를 일으키기 전에 신라는 동북아의 상업활동중심이었고, 일년내내 당나라, 일본에서 오는 무역상인들이 모여들었다. 그리하여, 일본귀족들은 일찌감치 신라의 부유함을 탐내고 있었다. 그들은 부여풍장이 백제에서 그들을 조급하게 원군을 기다리고 있는 것에는 신경쓰지 않고, 부유한 신라를 대규모로 약탈했다. 부여풍장을 후방에서 지원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기 위해, 일본수군은 아예 해상으로 움직여 공격하는 전략을 포기하고, 상륙작전을 감행한다. 그리하여 일거에 살비기(殺鼻岐), 노강(奴江)의 두 성을 점령한다.
유인궤는 원래 일본수군이 바다로 오는 것을 우려하였다. 일단 공격을 받으면, 웅진도독부의 당군은 숫자가 적어서 여러 곳을 모두 막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현재 일본수군이 재물을 탐내어 전략을 바꾸게 되니 오히려 유인궤를 도운 셈이다.
당군은 왜군의 동향을 파악한 후, 병력을 집중하여 백제잔여세력의 중요거점인 가림성(加林城, 부여군 임천면 일대)과 임시수도인 주류성(周留城, 부안군 일대)을 공격한다. 당군이 두 곳을 맹공하자, 부여풍장은 피해가 아주 컸고, 왜국수군에게 빨리 증원와달라고 재촉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이 되자, 왜국수군은 신라약탈을 포기하고 배를 몰아 서행한다.
용삭3년(663년) 팔월, 나당연합군이 주류성을 함락시키려 할 때쯤, 왜국수군이 도착한다. 백제잔여세력은 죽음을 무릅쓰고 혈로를 뚫고 사람을 보내 해안에서 일본군과 연락한다.
유인궤는 백제가 왜국의 손을 빌어 복국하고자 하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주류성을 공격하기 전에, 당군을 둘로 나누어, 유인원, 손인사 및 신라의 김법민을 우두머리로 하여 주력을 이끌고 육로로 주류성을 공격하고, 유인궤는 다른 170여척의 전선을 이끌고 수로로 우회하여 백강구(白江口, 지금의 한국 금강입구)일대로 가서, 육상의 당군을 지원했다.
유인궤 일행이 백강구에 도착했을 때, 선두부대는 벡제잔여세력의 이상현상을 발견한다. 유인궤는 이를 근거로 백강구가 분명 왜국수군의 상륙장소라고 판단한다. 적들이 당군의 종적을 발견하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그는 그 자리에서 원래의 작전계획을 변경시켜, 뱃머리를 돌려 백강구밖에 배치한다. 거기에서 왜국수군을 공격하여 꼼짝 못하게 만들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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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삭3년(664년) 팔월 이십팔일, 역사상 최초의 중일간의 전쟁이 시작된다.
나중에 동북아역사의 발전에 중대한 영향을 끼친 전투로 확인되는 이 전투는 사료에 그저 31글자의 간단한 묘사만 남아 있다. 마치 대당제국의 눈에 이 정도 승리는 언급할 가치도 별로 없다는 듯이.
"인궤우왜병어백강지구(仁軌遇倭兵於白江之口), 사전첩(四戰捷), 분기주사백소(焚其舟四百艘), 연염창천(煙焰漲天), 해수개적(海水皆赤), 적중대궤(賊衆大潰)"
"유인궤는 왜병을 백강의 입구에서 만나, 네번 싸워 이기고, 그들의 배 사백척을 불지른다. 연기와 불꽃이 하늘에 닿았고, 바닷물은 모두 붉게 변하였으며, 적의 무리는 크게 궤멸하였다."
그러나, 이번 전투는 일본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백제의 동맹군을 하루빨리 구해주기 위해, 왜국수군은 "우리가 먼저 상륙하면, 저들이 스스로 물러날 것이다"라는 생각을 하고, 집중적으로 백강구에 400여척의 전선을 투입하여 당군에 대한 맹렬한 공격을 진행한다. 이를 통해 당군의 맹렬한 공세를 꺽고, 기세로 승리를 거두려는 것이었다.
유인궤는 적의 이러한 전술에 전혀 겁을 먹지 않았다. 당나라는 수군을 설립한 이후, 수군에는 누선(樓船), 몽동(艨艟), 두함(斗艦), 주가(走舸), 유정(遊艇), 해골(海鶻)등의 제식전선(制式戰船)이 있었다. 수당시대의 대표적인 누선 오아전함(五牙戰艦)을 보면, 이런 누선은 전루(箭樓)의 높이가 5층으로 매층마다 대형노기(弩機), 투석기(投石機), 교거노(絞車弩)등의 장비를 갖추고, 전투시에는 백명이상의 병사를 탑승시킬 뿐아니라, 동시에 7대의 사정거리가 1000미터가 넘는 거전(巨箭)도 있어, 직접 앞의 적선을 파괴시킬 수 있었다. 그외에 당군이 갖춘 몽동, 두함, 주가, 유정, 해골은 장병글이 배 위에서 사다리식으로 서서 적을 맞이해 싸울 수 있을 뿐아니라, 이들 전선 각각의 특징을 이용하여 당군의 독특한 수군전술을 섞어 계절에 따라 기후에 따라 여러가지 돌격공격방법을 갖추고 있었다.
일본학자의 연구에 의하면, 덴지천황시대에 왜국은 비록 '다이카개신'후에 중앙집권제국가를 건립하였지만, 천황의 권력은 아직 만능이 아니었다. 예를 들어, 덴지천황이 보유한 이들 수군부대의 주력은 당시 왜국의 지방호족무장을 끌어모아 임시로 조직한 것이다. 전, 중, 후의 삼군을 두기는 했지만, 전군상하에 수직적인 지휘계통이 없었다. 그리하여 전투때는 각각 따로 싸우게 되어, 건제를 갖춘 당군에 치명적인 위협이 되지 못했다.
유인궤는 적군의 이러한 약점을 잘 이용했다. 행동이 불편한 누선등 대형전함을 중심으로, 백강구의 물의 흐름이 완만한 곳에 견고한 방어기지를 구축하여, 왜군의 돌격을 방어한다. 그후 다시 기동성이 좋은 조가, 해골등을 이용하여 왜국수군을 좌우에서 포위한 후 각개격파한다. 그외에 전투개시전에, 당군은 당시의 바닷물의 흐름, 풍향, 강우량등을 고려하여 사전에 각종 화전(火箭), 화약(火藥), 화구(火球)까지 준비하여, 왜군이 다가오면 쏠 준비를 했다.
그리하여 삽시간에 "연염창천, 해수개적"의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유인궤는 왜군과 4차례에 걸쳐 싸웠다. 왜군장수 에치노하타노다쿠츠(朴市秦田來津)가 직접 독전에 나섰지만 왜국수군의 패세를 뒤집지 못한다. "그리하여 전사한다" 당군수군이 대승을 거둔 것이다.
왜국이 패전한 후, 백제의 부흥은 희망이 사라진다. 잔여저항세력도 금방 와해된다. 덴지천황은 이번 전투를 통해 더 이상 '해뜨는 곳의 천자'라는 생각을 품지 못하게 되고, 당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선진문명을 학습하고 당나라를 정삭(正朔)으로 받들게 된다.
고구려는 동맹국 백제를 잃은 상황하에서 6년을 더 버틴다. 총장원년(668년)에 나당연합군의 공격에 멸망하여, 7백여년에 걸친 국운을 끝낸다. 이때부터 조선반도는 통일신라시대로 접어들게 된다.
한 마디로 말해서, 백강구전투는 동북아의 전략국면을 수립하는데 심원한 영향을 끼쳤다. 당나라를 핵심으로 하는 동아시아정치질서가 최종적으로 확립된 것이다. 그리고 일정한 정도로 미래 근 천년간의 동아시아역사의 흐름을 결정했다. 1592년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이 조선을 침입할 때까지 근 천년간 일본은 다시 중국에 도전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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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인궤는 백제의 옛땅을 수복한 후 즉시 철군하지 않았다. 그는 시종 잊지 않았다. 당군이 백제를 멸망시킨 것은 고구려를 격패하기 위한 전단계였고, 당나라 동쪽국경의 변방압력을 완화시키기 위함이었다는 것을.
당군이 웅진에 주둔한 후, 유인궤는 호적을 정리하기 시작하고, 관서와 관리를 설치한다. 그리고 도로를 만들고, 마을을 건설하며, 제방과 둑을 복구했고, 빈곤한 백성들을 구휼했으며, 농업생산을 장려하고, 고구려를 정복할 계획을 세웠다.
그의 노력은 헛되지 않았다.
웅진도독두에 몇년간 머물러 있을 후 그는 고구려정벌에 참여할 기회를 얻게 된다. 총장3년(670년) 정월, 나이가 고희를 넘긴 유인궤는 조정의 특별허가를 받아 귀국한 후 업무보고를 한다.
당나라조정은 원래 전공을 아주 높이 평가했다. 유인궤가 이번에 귀국하자, 수십년간 재능을 가지고도 빛을 보지 못했던 처지를 벗어나게 된다.
백발이 성성한 유인궤를 보고 당고종은 격동해 마지 않는다. 열정적으로 그를 내각의 재상에 앉히는 한편 여러번 그에게 국사편찬, 토번토벌, 장안유수등을 맡긴다. 그리고 이때의 유인궤는 이미 나이가 들어 체력이 쇠약해져 있었고, 당고종에게 여러번 사직을 청하였지만, 조정에서는 재삼 그의 은퇴를 만류했다. 당고종이 나중에 동의하고나서도, 다시 조금 시간이 지나면 그를 다시 조정으로 불러들였다.
이미 세상을 떠난 이의부와는 달리, 유인궤는 고위직에 앉아서도 사적으로 복수하지는 않았다.
유인궤가 조정으로 돌아와 대사헌(大司憲)이 되었을 때, 이전에 그를 괴롭혔던 감찰어사 원이식은 마침 첨사승(詹事丞)으로 있었다. 당나라때 첨사승은 6품의 관직이고, 대사헌은 원래 어사대부로 백관의 감찰을 책임지는 자리이다. 원이식은 유인궤가 고위직에 오른 후, 이의부와 같이 자신을 괴롭히지나 않을까 걱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전혀 생각지도 못하게, 유인궤는 부임한 첫날 그를 찾아가 술을 같이 마시면서 그에게 절대로 그런 일을 자신은 하지 않을 것이라고 안심시킨다. 그후 원이식의 재능을 보고 유인궤는 그를 호부랑중으로 승진하도록 추천해주기까지 한다.
유인궤는 나이가 들어도 여전히 강건했지만, 당고종은 갈수록 병이 심해졌다.
정무처리의 편의를 위하여, 당고종은 일찌감치 무측천의 정무처리능력을 키워주기 시작했다. 그러나, 당태종의 무재인이었던 무측천은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갈수록 옛날의 현모양처의 모습은 사라지고, 오히려 자주 조정에 나타나 정무를 처리하는 정치여강자의 모습을 드러내어, 당고중이 부름에 바로 응했다. 당고종의 병이 위독하자, 무측천은 "학술의 명분을 빌어 정치에 간섭했다." 그녀는 유생들을 모아서 <신궤(臣軌)>를 편찬했는데, 그 안에는 대신들이 어떻게 황제에 충성하는지를 가르치는 내용이다. 이를 통해 자신의 조정에서의 영향력을 높이려 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황권을 노리는 그녀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되지 않았다.
외정(外廷)에는 함형3년(672년)부터, 당고종의 재상반열에 다음과 같은 인물들이 속속 들어오게 된다: 유인궤, 학처준(郝處俊), 이의염(李義琰), 장대안(張大安), 장문관(張文瓘), 최지온(崔知溫), 대지덕(戴至德), 배염(裴炎)등의 조정중신이 있었다. 이들 중에서 학처준, 이의염은 공개적으로 무측천에 반대했다. 장문관, 최지온은 중립파이다. 장대안은 태자 이현(李賢)이 사람이다. 오직 배염만이 자기편이었다. 그래서, 무측천이 보기에, 유인궤를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면 자신의 자리가 더욱 안정적이 될 것이라 여긴다.
당시, 당고종의 수하의 소부감(少府監)으로 배비서(裴匪舒)라는 자가 있었는데, 그는 황제에게 잘보이기 위하여, 당태종이 "구리를 거울로 삼아 의관을 바르게 한다"는 전고(典故)를 빌어, 당고종을 위해 경전(鏡殿)을 짓는다. 당고종은 아주 기뻐하면서 경전의 낙성식에 무측천과 유인궤를 불러 함께 의식을 진행한다.
유인궤는 전내에 몇개의 큰 동경(銅鏡)을 달아둔 것을 보고, 차갑게 입을 열어 한 마디 한다: "하늘에는 두 태양이 없고, 나라에는 두 임금이 없는데, 사방에 무수한 천자가 보이니 이는 극히 상서롭지 못한 일입니다."
이 말 속에는 뼈가 있다. 무측천이 듣기에는 거슬리는 말이다. 그러나 당고종은 그의 말을 듣자 즉시 전각의 동경을 철거하게 한다.
홍도원년(683년) 십이월, 당고종이 붕어한다. 황태자 이현(李顯)이 즉위하니 바로 당중종(唐中宗)이다. 이전에 무측천은 관중의 가뭄을 피한다는 이유로, 병이 위중한 당고종을 데리고 장안을 떠나 모두 낙양으로 옮겨가 거주하고 있었다.
당나라의 수도로서, 장안에 비록 군주는 자리하고 있지 않지만, 행정의 중요성은 여전히 무시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무측천은 출발전에 방대한 장안의 업무를 유인궤에게 처리하라고 위임한다. 이는 무측천이 유인궤의 재상집단과 이당종실의 영향에서 벗어나려는 중요한 조치이기도 했다.
이때 유인궤의 나이는 이미 팔순을 넘겼다. 비록 그는 "여주당정(女主當政)"이 못마땅했지만, 그는 스스로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은 당나라의 정국교체를 좌지우지할 힘이 없다는 것을.
광택원년(684년) 이월, 당중종 이현은 무측천에 의해 축출된다. 이당기업을 이은 것은 이현의 여덟쨰동생인 예왕(豫王) 이단(李旦)이었다. 이단은 즉위하여 당예종(唐睿宗)이 된다. 그후 당나라의 "정사(政事)는 모두 태후(太后)가 결정했다" 이단 본인은 사실상 허수아비군주이고, 행동의 자유마저 잃어버린다.
얼마 후, 무측천은 태후의 신분으로 당나라관제개혁을 선포한다. 그리고 당예종 이단을 황태자로 끌어내리고, 무씨칠묘(武氏七廟)를 세우고, 그녀의 부친과 조부를 왕으로 추존한다. 그녀의 예법에 어긋나는 행위는 한때 당나라 종실, 귀족들 및 심복재상인 배염등의 집단적인 반대에 부닥친다. 그러나 이미 풍운변환을 너무나 많이 보았고, 세상일의 변화막측함을 오랫동안 보아온 유인궤는 아무런 반대도 하지 않고 묵묵히 사직할 것을 청한다. 그는 이제 조정을 떠날 생각인 것이다.
유인궤가 떠나려 한다는 말을 듣고, 무측천은 즉시 사람을 보내 유인궤를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에 앉히고, 자신이 가장 신임하는 조카 무승사(武承嗣)로 하여금 자신의 친필서신을 가지고 그를 찾아가 위로하고 만류하도록 한다. 왜냐하면 그녀는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유인궤는 4조원로이고 명망이 있다. 그런 중량급인물의 거취는 직접적으로 자신의 등극의 난이도에 영향을 줄 수 있다.
무측천은 서신에 유인궤에 대하여 이렇게 적었다: "충정지조(忠貞之操), 종시불투(終始不渝), 경직지풍(勁直之風), 고금한비(古今罕比)"
그러나, 유인궤는 무측천이 자신을 신하의 모범으로 삼으려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무측천에 보내는 회신에서 그는 이렇게 적었다: "여씨견치어후대(呂氏見嗤於後代), 녹산이화어한조(祿産貽禍於漢朝)"(여후가 후대에 웃음거리가 된 것은 여록, 여산이 한나라에 해를 끼쳤기 때문이다). 확실히 유인궤는 여후의 역사를 끄집어 내어 무측천에게 막나가지 말 것을 경고한 것이다.
당연히 유인궤는 여후의 이야기를 꺼내면서도 자신에게는 퇴로를 마련해 두었다. 즉 창끝을 직접 무측천의 권력전횡으로 겨누지 않고, 그저 무씨외척의 정치간여에 겨눈 것이다. 무측천이 보기에 유인궤는 자신에게 할 일을 권유하는 도잇에 무씨일족까지 구해준 것이니, 국가에 큰 공이 있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후 유인궤가 아무리 사임하고자 해도 무측천은 계속하여 응하지 않았다.
수공원년(685년) 정월, 유인궤가 장안에서 병사한다. 향년 84세이다. 무측천은 그 소식을 듣고 즉시 관리들에게 차례로 그의 집으로 가서 문상하도록 명하고, 그를 건릉(乾陵)에 배장할 수 있도록 허락한다.
유인궤가 죽은 후 5년만에 무측천은 등극하여 황제가 된다. 그녀의 마음 속에 여전히 명망있는 대신의 가족이 나서서 자신이 황위에 오르도록 권해줄 것을 희망했다. 그리하여 그녀는 유인궤의 아들인 태자중사인(太子中舍人) 유준(劉濬)에게 여러 신하들을 모아서 자신이 황제에 오르도록 권유해줄 것을 요청한다. 그러나 유준은 유씨자손은 주속(周粟, 무측천이 국호를 당에서 주로 바꿈)을 먹지 않는다는 이유를 들어 단칼에 거절한다. 그는 결국 혹리의 손에 죽임을 당한다.
유준이 피살된 후, 무측천은 그녀의 일관된 가혹한 일처리방식대로 처리하지 않고, 유씨일족에는 연좌시키지 않는다. 그는 유인궤의 손자에게 가업을 잇게 하고, 명신의 가풍을 이을 수 있도록 해준다. 아마도 그녀의 강인한 겉모습 뒤에는 충직한 신하와 그 가족에 대해서는 그래도 경외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