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선진)

양각애(羊角哀)와 좌백도(左伯桃): 결의형제(結義兄弟)이야기의 원조

중은우시 2024. 11. 13. 20:13

글: 자귤(紫橘)

도원삼결의(桃園三結義)를 배울지언정, 와강일주향(瓦崗一炷香)은 배우지 말라. 유비, 관우, 장비가 결의형제를 맺은 후, 생사를 같이 하기로 하는 형제가 된다. 그들이 결의를 맺은 이야기는 후대에까지 칭송받고 있다. 이후 형제결배(結拜)이건 아니면 흑방결배이건 모두 도원결의의 여파라 할 수 있다. 다만 실제로, 유관장의 도원결의 이야기는 명(明)나라때 비로소 나타난 것이다. 명나라이전에 형제간의 결의를 맺을 때는 양각애와 좌백도를 따랐다. 이 두 사람 간에는 도대체 무슨 이야기가 있는 것일까?

  1. 별로 유명하지 않은 형제정의

양각애, 좌백도의 이야기는 정사(正史)에 실려 있지 않다. 두 사람의 이야기의 출처는 서한시대 유향(劉向)의 <열사전(列士傳)>이다. 아쉽게도 원문은 송나라때 이미 유실되었고, 오늘날 볼 수 있는 <열사전>은 나중에 당송시대문인들이 여러 곳에 흩어진 이야기를 모아서 만든 것이다.

이야기는 대체로 다음과 같다: 춘추시기, 양각애와 좌백도는 '사우(死友, 죽음을 같이할 정도로 가까운 친구)'였다. 두 사람은 함께 초(楚)나라로 관직을 얻으러 떠났다. 도중에 큰 눈을 만났는데, 배도 고프고 날씨도 추웠다. 두 사람은 이렇게는 살아남기 힘들겠다고 여긴다. 그리하여 좌백도가 양각애에게 이렇게 말한다: "이는 하늘이 우리를 를보우하지 않는 것이다. 만일 한 사람이 죽으면, 나머지 한 사람이 살아남아서 관직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만일 함께 죽는다면, 시신조차 거둘 사람이 없을 것이다. 공평하게 말하자면 나의 재능은 그대만 못하다. 살아도 도움될 점이 없고, 오히려 그대의 뒷발을 잡게 될 것이다." 말을 마치고, 좌백도는 자신의 물자를 양각애에게 넘겨주고 자신은 숲속으로 뛰어들어가 죽는다. 양각애는 그의 옷과 양식을 얻어 순조롭게 초나라에 도착한다. 그리고 초평왕에게 중용된다. 초평왕은 좌백도의 행동에 대해서 들은 후 "의로움이 가상하다"고 하면서 상경(上卿)의 예로 좌백도를 후하게 장사지내준다.

어느날 좌백도는 꿈에 양각애를 만난다. 양각애가 말하기를 너의 덕으로 초왕이 후하게 장사를 치러주었다. 다만 나의 묘는 형장군(荊將軍)의 묘 옆에 있는데, 그는 계속 나를 괴롭힌다. 나는 비록 반항해봤지만, "계속 싸워도 이기지 못했다." 이번 달 십오일에 나는 그와 다시 큰 싸움을 해야 하는데, 만일 네가 나를 도와줄 수 있으면 내가 이길 수 있을 것같다. 그렇지 않으면 또 패배할 것이다. 양각애는 정한 날짜에 그의 묘 앞에 병마를 진열하고 절을 하고는 자결한다.

양좌(羊左, 양각애와 좌백도)의 일은 형제정의의 모범이라 할 수 있다. 좌씨는 양씨의 목숨을 지켜주기 위해 스스로 죽음을 택했다. 양씨는 꿈에 좌씨가 죽은 후에 괴롭힘을 당한다는 것을 듣고, 역시 그와 함께하기 위해 목숨을 끊는다. 두 사람의 우정은 절대로 유관장 삼형제에 못지 않다.

2. 이야기의 확장

서한에서 시작된 양좌이야기의 메인스트림은 연기(緣起), 증량(贈糧), 탁몽(托夢), 자살상수(自殺相隨)의 네 부분이다. 후세의 판본은 비록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대체로 이 네 부분으로 구성된다. 위진(魏晋)시기, 양좌이야기의 지명도는 높지 않았다. 오직 왕숙(王肅)의 <상복요기(喪服要記)>에 노애공(魯哀公)과 공자(孔子)간의 대화를 기록하면서, 좌씨가 동사하고 양각애가 그의 해골을 거두어 추위를 막는 옷으로 삼았다고 적었다. 왕숙은 낭야왕씨(琅瑘王氏)로, 남조의 중요한 사족(士族)이다. 남조가 교체된 후 북조로 도망가서, 남조의 전장에 따라 개혁을 진행하던 북위의 효문제에게 중용된다. 효문제개혁을 자문한 사람이 바로 왕숙이다. 왕숙은 가학연원이 극히 심후하다. 그래서, <상복요기>는 신뢰도가 있다. 이는 어느 정도 유향의 부족한 점을 보충해준다. 최소한 양좌간이 일어난 일은 공자(공자는 기원전479년에 사망함)이전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외에 <위서>에는 늠구현(廩丘縣, 산동)에 양각애, 좌백도의 묘가 있다고 적혀 있다.

산동의 양좌합장묘

수당시기는 양좌이야기가 널리 퍼지게 되는 핵심시기이다. 당시 사람들은 <후한서.열사전>의 문자외에, 2사람의 우정을 찬미하는 시가(詩歌) 2수, 지괴소설(志怪小說) 5편, 그외에 돈황 천불동에서 출토된 문서에도 2편의 운문에서 이 일을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당나라때 전해지는 이야기에는 한가지 중요한 차이가 나타난다. 즉, 식량을 남기고 죽은 사람이 좌백도인지 양각애인지이다. 동진의 <수신기>에서는 죽은 사람이 좌백도라고 했고, <경양각애묘작> <고사전> <양사전>등에서는 스스로 죽은 사람이 양각애라고 적었다.

3. 이학(理學)하의 양좌이야기

송나라이전에, 양좌이야기에 평론을 내놓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설사 언급하더라도 몇 마디에 불과했다. 예를 들어, 남조 <광절교론>에서는 두 사람의 행위에 대하여 "휘열(徽烈)"하다고 했다. 간보의 <수신기>에는 초왕의 말을 빌어, "친구간의 의리가 중함이 기이하도다. 기이하도다(朋友之重, 奇哉, 奇哉也)"라고 적혀 있다.

그러나 송나라때는 양좌이야기가 널리 인정받는다. 먼저, 송나라때는 좌백도가 죽었다는 것이 주류가 된다. 송나라때의 <태평환우기> <태평어람> <책부원귀>도 모두 기록되어 있다. 이를 보면 관방에서 양좌이야기를 인정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유학부흥운동을 추진하면서, 양좌이야기는 더더욱 유학자들이 숭배하는 대상이 된다. 송나라사람은 양좌 두 사람의 이야기에 대하여 모두 긴 글을 남긴다. 예를 들어, 장지기(蔣之奇)는 "말세우도절(末世友道絶)....시도양가애(市道良可哀)" 주방언(周邦言)은 은"고교구윤상(古交久淪喪)...요가흥박속(要可興薄俗)", 국화옹(鞫華翁)은 "독차도혐인(獨此道嫌人), 포기진토(抛棄塵土)." 그들은 양좌 두 사람의 이야기와 유가의 삼강오륜을 결합시켰다. <경정건강지(景定建康志)>에는 위륜(魏倫)이 양좌의 묘에 있는 나무를 베려 하자, 양좌의 혼백이 지현 관기(關杞)의 꿈에 나타나 도와달라고 하는 이야기까지 파생된다. 이 이야기는 당시 널리 퍼진다.

원나라때는 소설이 크게 발전했다. 명나라때 사람은 당나라사람의 <독이지(獨異誌)>의 양좌이야기에 대한 기록을 그대로 옮긴 바 있다. 다만, 원명시기에 양좌이야기가 유행한 것은 이를 빌어 권선징악의 목적을 내세우기 위함이 더욱 명확해진다. <양각애사명전교>는 송나라때의 전해지는 이야기로 도입하던 첫부분을 바꾸어 바로 목적을 내세운다. 즉 바로 두 사람의 정의는 천리(天理), 우제(友悌)에 부합한다는 것이다. <금란의>도 역시 첫부분과 끝부분에 목적을 명시한다. 심지어 좌백도가 꿈에 나타나서 옥황상제가 두 사람에 대하여 "입만세붕우지강상(立萬世朋友之綱常), 명천추제형지절의(明天秋弟兄之節義)"라고 표창했으며 그들을 "열선(列仙)"의 반열에 올려놓았다는 말등을 한다. 이를 보면 명나라때 사람들이 우정을 중시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외에 명나라사람은 초나라의 형장군을 형가(荊軻)라고 했는데, 이는 명확히 사실착오, 장관이대이다.

4. 양좌는 관우에 자리를 양보하다.

유관장삼형제의 도원결의 이야기는 실제로 명나라때의 <삼국연의>에 나온다. 이 책이 완성된 된것은 원말명초이고, 나관중은 송원화본(宋元話本), 희곡(戱曲)과 전해지는 이야기의 기초 위에 진수(陳壽)의 <삼국지>와 배송지의 <삼국지주>에 근거하여 재창작했다. <삼국연의>는 역사소설의 문을 열었다. 문필이 아름다와 이 소설은 널리 유행한다. 그리고 여러 판본이 전해진다. <삼국연의>의 영향력은 심지어 정사 <삼국지>를 뛰어넘는다. 특히 유비의 인(仁), 제갈의 지(智), 관우의 충(忠)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 자리잡는다. 이는 시민들의 영웅인물에 대한 숭배욕구에 부합한다. 그리하여 천리주단기(千里走單騎)는 결의의 정과 결합되면서 충량의 모범이 된 관우는 의기(義氣)의 대명사가 되고, 후대 형제결의에는 대부분 관우를 참배한다.

완전한 이야기체계와 사람들이 다 알고 있는 관우와 비교하면, 양좌 두 사람은 존재도 의문스럽고, 이야기도 너무 짧으며, 게다가 두 사람의 정의는 너무 과하다. 그리하여 항상 의문을 품는 소리가 있었다. 예를 들어, 명나라때 <양각애사명전교>에는 양각애를 비판한다. 초왕의 지우지은도 돌보지 않고, 자신의 신체발부를 준 부모도 생각지 않고, 오로지 친구간의 의리를 위하여, 이렇게 과장된 행위는 미친약을 먹은 것이라고 비판했다. 그 뜻은 마약을 먹은 것같다는 것이다. 그래서 양좌이야기는 관우와 도원삼결의에 자리를 내주게 된다.

결론

도원삼결의 이야기에서, 유관장 삼형제는 누구를 향해 절을 했을까? 어떤 사람은 황천후토(皇天后土)라고 했지만, 필자의 생각에는 아마도 양좌 두 사람일 것이다. 어쨌든 한나라말기 정말 삼형제결배가 발생했따면, 그들은 분명 당시의 우상인 양각 두 사람을 모범으로 삼았을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