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진 전쟁: 청일전쟁의 육상전투(1)
글: 팽배신문(澎湃新聞)
130년전에 발발한 청일전쟁은 근대중국의 운명에 중요하고 심원한 영향을 끼쳤다. 전쟁패배의 결말은 직접적으로 1840년이후 중국이 군사자강으로 국가자강을 추진한 양무모델이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다는 것을 증명해주며, 새로운 자강의 길을 걸어야 한다는 점을 알려주었다. 이는 이 오래된 전쟁이 군사자체를 뛰어넘는 역사적인 귀감의 의미를 지니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청일전쟁에 대한 반성은 시간을 초월하여,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의 끊임없는 과정에 맞추어 청일전쟁도 자주 새롭게 조명되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사회에서 폭넓은 주목을 받고, 토론하고 기념하고 있다. 자주 현실의 이슈에 대하여 청일전쟁을 꺼내어 귀감으로 삼곤 한다. 그러나, 아주 특별한 점이라면 역사상의 청일전쟁은 실제로 육상과 해상의 두 구역에서의 전투를 포함하는데, 현재의 청일전쟁에 대한 이슈는 왕왕 갑오해전에 국한된다. 많은 경우 육상전투는 거의 사람들에게 잊혀진 지역이 되어버린다.
1984년 청일전쟁 발발 90주년때, 청일전쟁사학자인 손극복(孫克福)과 관첩(關捷)이 공저로 쓴 두 부의 아주 중요한 저작이 있다. 한 권은 <갑오중일해전사(甲午中日海戰史)>이고, 다른 한권은 <갑오중일육전사(甲午中日陸戰史)>이다. 해전과 육전을 나누었다. 연구자는 당시에 이런 방식으로 독자들에게 청일전쟁에 해전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육전도 있었다는 것을 일깨워주었다.
청일전쟁때의 육상전투는 지역적으로 한반도와 중국의 요녕(遼寧), 산동(山東), 대만(臺灣)까지 걸쳐서 일어난다. 만일 해전은 쌍방간에 참전한 함대의 상대적 기술차이가 비교적 적어서, 쌍방간의 격렬한 전투가 사람들에게 관심을 끌었다고 한다면, 육상전투에서 쌍방군대의 기술적 차이는 상당히 컸다. 전투의 결과는 거의 정해져 있는 것같다. 그 결과 직접적으로 청일전쟁의 패배를 불러오게 된다. 간단히 말해서, 해전에 비하여 육전은 실질적으로 청일전쟁의 승부를 결정지은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청일전쟁이 발발할 때, 중국 일본 양국은 서로 다른 상황에 처해 있었다.
청일전쟁시 조선길거리의 일본군인 왼쪽은 보병제10연대의 2등졸이고, 오른쪽은 여름제복을 입은 헌병이다.
일본의 메이지정부가 들어선 후, 1872년 징병령(徵兵令)을 반포한다. 전민개병(全民皆兵)의 의무병제와 유사한 제도를 시행했다(나이 17살부터 47살까지의 남자는 병역에 복무한다. 현역은 3년을 복무하고, 그후 4년은 예비역(豫備役), 다시 그후 5년은 후비병역(後備兵役)으로 복무한다. 나머지 상비, 후비병역에 속하지 않는 남자는 국민병역(國民兵役)에 편입된다). 그리고 육군, 해군의 군제를 철저히 개혁한다. 청일전쟁이 발발할 때, 일본육군은 야전대(野戰隊), 수비대(守備隊), 보충대(補充隊), 국민군(國民軍)으로 구성된다. 그중 중력은 야전대의 7개 야전사단이다. 즉, 근위사단(近衛師團)과 제1내지 제6사단이다. 모든 사단은 산하에 여단(旅團), 연대(聯隊), 대대(大隊), 중대(中隊), 소대(小隊)등 단위를 두고, 7개 야전사단의 병력합계는 123,047명이다. 전쟁시, 사단은 단독으로 군사행동을 집행한다. 또한 필요에 따라 몇개의 사단을 합쳐서 군(軍)을 만들기도 한다. 전시에는 군, 사단에 야전전신대(野戰電信隊), 병참치중(兵站輜重)등 부대를 배치했고, 수행하는 군부(軍夫, 부대의 물자운송을 도와주는 민간인노역자)가 있다.
7개의 야전군외에 일본육군의 수비대는 주로 각 요지 및 국경에서 방위임무를 책임졌다. 예를 들어, 도쿄만구방어(東京灣口防御), 요코스카군항방어(橫須賀軍港防御), 시모노세키해협방어등이 있고, 후비부대(12개 보병연대, 24개 독립보병대대, 6개 기병중대, 6개 포병중대, 20개 공병중대)와 요새포병연대(동경만구포대군, 요코스카군항포대군, 시모노세키해협포대군), 쓰시마해협경비대, 홋카이도둔전병단의 총병력이 97,533명에 이른다. 합쳐서 일본육군의 총병력은 220,580명이었다. 청일전쟁때 동원을 거쳐 실제로는 247,113명으로 늘어난다. 그중 조선반도와 중국전장에 투입된 인원은 178,294명이고, 전장에 투입 군부의 총수는 10만명이다.
청일전쟁이 발발할 때, 일본육군의 고위장군은 많은 경우 서남전쟁에 참가한 경력이 있는 구군인출신이다. 다만 그중에는 구번(舊藩)이 개설한 군사학교에서 공부한 사람도 있고, 해외유학경험을 가진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중견핵심장교는 많은 경우 육군사관학교졸업생이었다(1875년에 개교하여, 3년제였다. 청일전쟁전까지 졸업한 장교는 천여명에 이른다). 하사관의 많은 경우는 일본육군교도단에서 훈련받았다. 전체적으로 군대의 전문화정도가 상당히 높다고 할 수 있었다.
무기장비면에서 보자면, 일본육군의 기초 무기모델은 이미 고도로 통일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보급의 난이도가 낮았다. 육군이 사용하는 소총은 주로 일본국산의 무라타식(村田式)이었고, 대포는 주로 오사카포병공장(大阪砲兵工場)에서 생산한 75밀리구경 청동산포(靑銅山砲, 경량형의 행영포, 산악지대를 행군하여 통과할 때 유리하다)와 같은 구경의 청동야포(靑銅野砲, 표준적인 행영포) 그리고, 오사카포병공장이 생산한 90밀리구경의 구포(臼砲), 150밀리구경의 구포, 120밀리구경의 캐논포등 대형공성대포였다.
일본의 상황과 비교해보면 청왕조 통치하의 중국육군상황은 훨씬 더 복잡했다.
청왕조가 건설한 북양해군이 근대화정도가 비교적 높았던 이유는 해군의 건설은 그냥 백지에 그리면 되기 때문에, 견제나 저항이 비교적 적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육군은 무거운 역사적 짐을 지고 있었다. 그것을 근대화개혁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청일전쟁이 발발할 때, 근대중국의 육군은 경제부대(經制部隊)와 비경제부대(非經制部隊)의 두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소위 '경제부대'라는 것은 국가재정으로 배양하고, 국가군대의 정식편제와 신분을 가진 부대라는 것이다. 이론적으로는 '정규군'이라 할 수 있다. 주로 팔기(八旗)와 녹영(錄營)이 있다. 청일전쟁전 일본참모부에서 정리한 정보 <청군육군기요(淸軍陸軍紀要)>에 따르면, 당시 중국의 팔기부대는 총병력이 250,078명이고, 그중 북경에 주둔하며 경사를 방어하는 금려팔기(禁旅八旗)가 약 15만명이다. 나머지는 전국각지에 주둔하는 주방팔기이다. 녹영부대의 총병력은 440,413명이다. 전국각지에 분산되어 주둔한다. 팔기와 녹영부대를 모두 합치면 70만대군이지만, 이 두 군대의 군제, 장비는 모두 극히 낙후되어 있었다. 일찌기 아편전쟁, 태평천국전쟁에서 전투력이 전혀 없음이 증명되었다. 극소수 서양식무기로 교체한 부대를 제외하고, 더 많은 부대는 겨우 내부치안을 유지하는 정도의 유한한 가치만을 지니고 있었다. 비록 명존실망(名存實亡)상태이지만, 청왕조가 개국시 의존한 근본역량이고, 국가의 근본제도이다. 그래서 청일전쟁이 발발할 때까지, 여전히 겉으로는 중국의 주력군이고, 청왕조 국가예산의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청왕조의 '비경제부대'는 주로 향용(鄕勇) 즉 용영(勇營)이다. 그리고 용영제도에 따라 선발한 녹영정예로 훈련시킨 연군(練軍)이 있는데, 모두 지방에서 자체적으로 뽑고, 스스로 비용을 부담하는 임시부대이다. 이론적으로는 '비정규군'이다. 국가편제도 없고, 국가군대라는 신분도 가지지 않는다. 다만 주력군의 역할을 했다.
태평천국전쟁에서, 경제부대인 팔기, 녹영은 형편없이 패배했고, 청정부는 어쩔 수 없이 향용, 연군을 모집하는 것을 허락한다. 각지는 자신의 지역을 지키기 위해, 관리, 향신등이 속속 병마를 모집하여 상군(湘軍), 초군(楚軍), 회군(淮軍), 숭무군(嵩武軍)등 지역색채가 아주 선명한 용영, 연영을 형성한다. 용, 연부대는 동향, 친척의 유대를 가지고 있어 내부응집력이 좋았다. 그리고 군사행동의 실질적인 필요에 따라 재력이 뒤를 받쳐주는 범위내에서 최대한 신식무기를 장착했다. 심지어 서양의 군사교본에 따라 훈련시키기도 했다. 용영, 연군은 병사를 장수가 소유하고, 계파가 난립하고, 국가의식이 결핍되어 있다는 등의 고질적인 문제점이 있었고, 각 지방의 관리능력, 재정상황이 다 달랐기 때문에 직접적으로 각지의 용,연군의 수량과 규모, 장비, 훈련수준이 다를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그들의 전투력은 팔기, 녹영보다는 뛰어났다. 청일전쟁이 발발했을 때, 중국에서 진정한 의미의 국방군은 전국에서 459,367명에 이르렀지만, 그중 진정 전투력을 지닌 부대는 소수에 불과했다.
당시 전국에서 훈련이 가장 잘되고, 전투력이 가장 강한 용영, 연군은 직예에 주둔하던 회군(淮軍)과 직예연군(直隸練軍) 그리고 산동(山東), 성경(盛京)등에 주둔하는 북양연해지구의 해상방어임무를 담당하는 회군, 연군이었다. 그중 직예 천진일대의 주둔군이 최정예부대였다. 청일전쟁이 발발하기 전에, 일본이 조선에 출병하여 계속하여 밀어부치는 상황이므로, 대응전략을 위해 직예총독 이홍장(李鴻章)은 청왕조의 이들 부대의 총규모를 점검해본다. 당시 중국육군의 진정한 실력을 보여주는 자료이다.
이홍장의 보고에 따르면, 당시 북양지구의 회군, 연군은 다음과 같다:
직예: 천진노대, 마창, 소참, 북당, 대고등지, 및 고북구, 선화, 준화, 산해관등지의 회군성군(총통 衛汝貴), 성군기마대(총통 呂本元), 인자군(仁字軍)(총통 吳育仁), 무의군(武毅軍)(통령 聶士成), 직예연군(정정연군, 통영연군, 고북구연군, 보정연군등)(통령 葉志超)등.
산동연해: 위해와 유공도에 주둔하는 회군호군(통령 張文宣), 수군(綏軍), 공군(鞏軍)(통령 戴宗騫). 연대, 청도등지에 주둔하는 용영 숭무군(통령 孫金彪, 章高元)
성경: 여순구에 주둔하는 용영의군, 친경군(親慶軍)(총통 宋慶), 대련만에 주둔하는 회군 명군(銘軍)(총통 劉盛休), 그리고 대동구, 대고산 및 압록강변경지역에 주둔하는 봉천연군과 진변군(총통 左寶貴)
이상의 각군의 병력합계는 53,281명이다. 이들이 당시 중국에서 제대로 훈련된 정예부대의 전부이다. 그중의 절반이상은 포대요새를 방어하고 있어, 원정을 떠날 수 없었다. 뽑아내어 다른 곳으로 배치하여 전투할 수 있는 병사 즉 이홍장이 말한 '유격책응지사(遊擊策應之師)'는 실제 성군, 인자군, 무의군, 직예연군으로 총병력이 약 21,741명이었다.
직예총독 이홍장은 북양지구의 육군전투력을 강화하기 위하여, 일찌감치 독일을 모방하여 서양식으로 훈련시켰다. 그리고 휘하의 용영, 연군이 보유한 장비는 수입한 서양무기들이었다. 1885년, 직예에 천진무비학당(天津武備學堂)을 설립하여 회군과 연군의 젊은 장교, 하사관을 입학시킨다. 여기에 모신 독일장교가 가르쳤다. 산술, 기하, 화학, 지리등의 이론과 보병, 포병, 기병등의 전술을 배웠다. 교육 자체로 보면 천진무비학당의 졸업생들은 전술적인 소양이 상대적으로 높았다. 그러나 전투지휘, 참모작전등 교육은 하지 않았다. 그외에 각 지역의 회군, 연군의 지휘관은 거의 모두 태평천국전쟁, 염군(捻軍)전쟁에서 중저급장교에서 성장해온 노장들이다. 신식육상전투에 대한 지식이 없었다. 그리고 천진무비학당에서 교육받은 젊은 장교들은 군대내에서 부대지휘의사결정에 참여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이들은 인원수도 적고, 발휘할 수 있는 역할은 더욱 적었다. 전체적으로 북양지구의 육군은 그저 한계를 안고 근대화된 육군이었다.
이들 군대의 군제는 전통적인 녹영과 다르지 않았다. 최대의 편제단위는 "영(營)"이다. 보병의 1영의 병력은 통상 400-800명이다. 기병과 포병의 1영은 약 100-300명이다. 영에는 영관이 지휘한다. 군사행동시 임시로 여러 영이 합쳐서 고위장령이 통솔하기도 한다. 일단 통솔하는 영이 지나치게 많으면 왕왕 정보전달이 순조롭게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가 많아, 지휘통솔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골치아픈 문제가 있다. 비록 이홍장이 이들 군대에 신식무기를 제공해주었지만, 무기구매자들은 경험이 적고, 조삼모사하다보니, 군대내의 무개모델이 극히 방대하고 복잡했다. 소총모델만도, 모젤, 호치키스, 레밍턴등 10여종이고, 구경도 14.7, 12.5, 11, 7,9밀리등 가지각색이었다. 화포의 모델은 더욱 잡다했다. 각장 구경과 모델의 산포, 야포가 있을 뿐아니라, 케이틀린등 기관포도 있었다. 훈련지휘와 군수보급의 난이도가 아주 높았다.
이렇게 신, 구간을 오가는 여러가지 문제와 모순을 보면, 당시 근대화에 힘들어하던 중국의 모습을 축소판으로 보는 것같다. 인구대국인 중국에서 뽑아쓸 수 있는 야전유격부대의 병사수가 겨우 2만여명이라니. 일본의 야전사단 20여만명과 비교하더라도 생각하지 못할 곤경인 것이다. 지방재정능력이 부족하고, 너무 군대를 많이 가지게 되면 의심받을까 우려하여, 북양육군의 규모는 시종 제한적이었다. 이홍장도 관할하는 부대에 대하여 "영이 하나 더 늘어나면 부담이 하나 더 늘어난다"고 했다. 육군의 병력부족은 실제로 북양대신 이홍장으로 하여금 청일전쟁전에 개전을 할 것인지를 결정할 때 망설이면서, 열강들이 개입하여 조정해주길 희망했던 내재적인 원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