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민국 후기)

남창기의(南昌起義)의 총지휘관을 비당원인 하룡(賀龍)이 맡은 이유는?

중은우시 2024. 11. 10. 19:45

글: 옥미수(玉米穗)

1927년 8월 1일 발발한 남창기의는 중공당사에서 아주 중요한 사건이다. 그 의미가 크다는 점은 더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것은 중국공산당이 국민당에 무력으로 대항한 첫번쨰 사건이며, 그후 20여년간 지속된 국공전쟁의 서막을 여는 것이기 때문이다. 비록 남창기의 당시에는 국민당좌파의 기치를 내걸었고, 기의후에 건립된 혁명위원회의 명단에는 송경령(宋慶齡), 등연달(鄧演達), 장발규(張發奎), 하향응(何香凝)등 국민당원들의 이름이 들어 있었지만, 그건 그저 내건 것에 불과했고, 진정 기의를 기획, 조직, 발동한 사람은 모조리 공산당원이다. 국민당좌파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었다. 혁명위원회 위원중 한명인 장발규는 기의발발후 위대를 이끌고 기차를 타고 현장으로 가서 기의를 막으려고 시도했지만, 기총소사를 받아야 했다. 그가 조금만 늦게 도망쳤다면 포로로 잡힐 뻔했다. 8.1남창기의의 실제지도자는 주은래(周恩來), 장국도(張國濤), 이입삼(李立三), 운대영(惲代英), 등중하(鄧中夏), 담평산(譚平山), 섭정(葉挺), 하룡(賀龍)등이었다. 거의 모조리 공산당원이다. 유독 기의의 총지휘관인 하룡은 비당원이었따. 이건 사람들이 이상하다고 여기게 만드는 일이다. 왜 당외인사가 공산당의 생사를 건 중대한 활동에서 이렇게 중요한 역할을 맡은 것일까? 공산당은 왜 토비(土匪)였고, 이전에 공산당과는 별다른 교류가 없었던 구식군인을 이렇게 신임했던 것일까?

공식적인 당사(黨史)를 보면, 거의 천편일률적으로 이렇게 말하고 있다: 하룡은 비록 구식군대에 있었지만, 우국우민의 뜻을 품고 구국의 길을 찾고 있었다. 공산당원인 담평산이 그를 찾아와서, 그에게 남창기의에 가담하도록 권유받았을 때, 그는 공산당이야말로 구국의 큰 임무를 맡을 만하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공산당과 늦게 만난 것을 한탄하며, 즉시 의기투합하여 그 자리에서 동의하게 된다: 당중앙이 나를 신뢰해주는데 감사한다. 나는 한 마디만 하겠다. 찬성! 그리고 하룡에 대한 신뢰를 보여주기 위해, 전적위원회(前敵委員會) 서기(書記)인 주은래는 그에게 이렇게 말한다: 공산당이 당신에게 하달하는 첫번째 명령은 당의 전위가 당신을 기의군 총사령관에 임명하는 것이다! 이런 극적인 간담상조(肝膽相照)의 묘사는 아마도 사람들에게 감동을 불러일으킬 수는 있겠지만, 감동을 받는 동시에 마음 속에 의문이 들게 될 것이다. 사실의 진상이 정말 이처럼 간단한 것일까? 신뢰라는 것이 아무런 검증도 없이 그렇게 쉽게 얻어지는 것인가? 만일 신뢰가 배신당한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공산당이 생사를 건 중대한 사건을 이렇게 리스크를 안고 가볍게 아직 완전히 알지도 못하는 구식군인에게 주요책임자의 지위를 넘겨줄 수 있었을까? 남창기의의 주요지도자중 한명인 장국도가 말년에 쓴 회고록 <나의 회고>에서 남창기의의 원인과 경과에 대해 상세하게 회고하고 기술한 바 있다. 거기에는 하룡이 왜 기의군총지휘관을 맡았는지에 대하여도 언급이 되어 있다. 필자의 생각에 장국도의 회고는 역사의 진상을 복원하는데 도움이 된다고 보고, 또한 아주 가치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최소한 그가 말하는 것이 정리에 부합하고, 인지상정에도 부합한다. 인위적으로 분식하거나 혹은 이런 저런 것을 꺼리지도 않았으며 고의로 말을 애매하게 하지도 않았다. 동시에 감정적으로 폄하하거나 비방하지도 않았다.

간단하게 장국도의 <나의 회고>에 나와 있는 남창기의의 준비와 경과를 보면 대체로 이러하다: 당시 장개석(蔣介石)과 왕정위(汪精衛)는 혁명을 배신하여 1927년 12월, 장개석이 상해에서 공산당원을 도살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7월에는 왕정위가 다시 무한에서 청당(淸黨)을 진행하면서 군벌 허극상(許克祥), 하두인(夏斗寅)등을 시켜 공산당인을 도살했다. 공산당은 연이은 큰 타격으로 손실이 참혹했다. 분기탱천하였을 뿐아니라,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갚아주겠다고 결심하게 된다. 그리하여 무장기의로 반항하거나 혹은 혁명을 배반하고 공산당원을 도살한 장개석 왕정위에게 보복하겠다고 결심한다. 당시 진독수(陳獨秀)와 코민테른고문 미하일 보로딘(Borodin, 鮑羅廷, 1884-1951)은 모두 우경기회주의과오를 범한 것으로 권한을 내려놓고 주변으로 밀려나 있었다. 무창에서 실제로 중공중앙의 업무를 주재한 사람은 주은래와 장국도 두 사람이었다. 주은래는 이입삼이 남창에서 폭동을 일으키자는 건의를 받아들여, 섭정이 이끄는 혁명군이 먼저 들고 일어나, 상,악,감(호남, 호북, 강서)의 공농군중과 연락하여 반무한(왕정위), 반남경(장개석)의 중심을 형성하자고 주장했다. 주은래는 한편으로 중앙에서 빠르게 남창폭동의 명의, 정강 및 기타 관련중요전략을 확정할 것을 요구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코민테른에서 신속히 군수물자와 무기를 제공해줄 것을 요청했다. 그후 주은래, 장국도 두 사람은 중앙상임위원의 명의로 주은래는 신속히 구강(九江), 남창(南昌)으로 가서 전적위원회를 조직하여 주은래가 서기를 맡고, 담평산, 이입삼, 운대영, 섭정을 위원으로 하여 남창기의를 일으키고, 장국도는 남아서 중공중앙을 지키기로 한다.

당시 급박한 상황하에서의 서둘러 내린 결정이다보니, 이번 중대행동은 사전에 코민테른의 동의와 비준을 받지 못했다. 그 결과 문제가 생기게 되어, 골치아픈 결과가 나타난다. 골치아픈 일이란 코멘테른이 보고를 받은 후 남창폭동에 반대한 것이다. 폭동이 성공을 거둘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보고, 경비지원을 하지 않을 뿐아니라, 러시아고문들에게 남창폭동에 가담하지 말라고 전령을 내려보냈다. 보로딘의 자리를 승계받아 코민테른고문이 된 로미나제(羅明納玆, 1897-1935)는 모스크바의 지령에 따라 남창폭동을 저지했다. 군사고문인 가륜장군(加侖將軍, Vasiliy Blyukher, 중국명이 가륜임)은 철군영웅이라는 명성을 지니고 있고, 공산당과의 합작에 적극적이었던 장발규장군과 연락하여, 그가 이끄는 제4군을 광동으로 돌아가게 한 후, 다시 북벌하자고 건의했다. 당시 중앙책임자였던 구추백(瞿秋白)등은 가륜장군의 건의가 남창폭동을 일으키는 것보다 성공가능성이 훨씬 크다고 보고 찬성을 표시했다. 그리고 장국도를 남창으로 보내 당중앙의 새로운 지시를 관철하도록 한다. 장국도는 처음에 주은래와 상의하여 남창기의를 일으키자고 한 당사자이다. 당중앙은 남창기의를 저지하고 또한 그를 보내어 중앙의 지시를 관찰시키게 하니, 그로서는 말을 뒤집어야 하는 난감한 처지에 이른다. 이는 그가 나중에 정통적인 관방당사에서 남창기의를 저지했다는 악명을 뒤집어쓰게 된 원인이 된다.

장국도는 남창으로 가서 기의지도자, 운대영, 주은래, 이입상등을 만나 당중앙의 새로운 지시를 전달했으니, 격렬한 반대와 비난을 뒤집어 쓴다. 그리고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활시위는 이미 당겨졌고, 쏘지 않을 수 없다. 성패에도 불구하고, 기의는 이미 반드시 거행해야하고 이는 바꿀 수 없는 일이다. 장국도는 이미 되돌릴 여지가 없음을 깨닫고, 그가 코민테른의 명령을 위반한 책임을 지기로 결정하고, 다른 지도자들과 함께 공동으로 남창기의를 지휘한다.

장국도는 중앙의 지시를 전한 후, 지도자들과 각각 장시간 대화를 나눈 바 있고 기의를 중단할 수 없는 원인을 이해했다. 가장 먼저 그와 장시간 대화를 나눈 사람은 이입삼이다. 그때 이입삼은 기의를 중단할 수 없는 가장 중요한 원인으로 기의군총지휘관 하룡과 체결한 밀약을 어길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입삼, 주은래와 담평산은 장국도에게 중공과 하룡과의 관계 및 왜 하룡을 기의군총지휘관으로 선임했는지의 원인에 대해 상세히 설명해주었다.

장국도의 회고에 따르면, 대화때 이입삼은 그에게 이런 말을 했다: 하룡은 토비출신의 군인이다. 이전에 중공과의 관계는 그다지 밀접하다고 볼 수 없었다. 현재 중공을 따라면서 함께 하기로 했는데, 우리는 그를 실망시킬 수 없다; 우리는 하룡과 이미 맹세한 바 있다. 형세상 피차는 서로 호랑이 등에 올라탄 셈이다. 결심상 피차 모두 이미 파부침주(破釜沉舟)하기로 했다. 조그만치만 바꾸더라도 모두 심각한 오해를 불러올 수 있는 상황이다. 이입삼은 나아가 경고하며 말했다: 하룡은 성공하지 못했고, 의심이 아주 많다; 그는 장발규에게 불만이 크다(하룡의 부대는 장발규의 2방면군에 속해 있었다). 그리고 그는 스스로 토비출신인 그는 국민혁명군에서 성공할 날이 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조만간 무기를 내놓아야할 것이라고 여겼다. 현재 만일 우리가 계획을 변경하고 장발규에게 연락하면, 그는 아마도 배신당했다고 여길 것이고, 아마도 선발제인으릐 수단으로 장발규에게 이를 밀고하며, 스스로의 책임을 면하려 하면서, 오히려 우리를 역으로 공격할 수도 있다. 주은래는 이에 대하여 또 한가지 중요하게 보충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하룡이 폭동에 참가하기로 결심하고, 비밀리에 그의 부하 각 사장(師長)들의 동의를 모두 받아낸 것은 그들이 이렇게 해야 비로소 성공할 날이 올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전체 폭동계획과 발동시간을 그들은 이미 모두 알고 있다. 그러므로, 다시 바꾸기는 어렵다. 담평산이 가장 먼저 하룡에게 폭동에 참가하도록 권유한 사람이다. 그도 장국도에게 설명했다. 하룡은 내심으로 두려우면서도 야심을 가지고 있다. 장발규의 지위를 빼앗아 차지하고 싶어한다. 우리는 그의 그런 야심을 이용하여 그를 총지휘관에 앉힌 것이다. 그리고 장발규와 연락하려는 어떠한 시도도 그의 의심을 사게 될 것이다. 이입삼은 중앙이 방발규에게 연락하자는 건의를 거절하기 위하여, 최후로 장국도에게 경고했다: 설사 장발규와 진정으로 우리와 합작하기를 원한다고 하더라도, 광동으로 부대를 돌려 거기에서 국민혁명근거지를 재건하려고 한다면, 현재의 상황으로 보아 희망이 없다. 왜냐하면 장발규는 남창에 도착한 후, 우리가 일찌기 폭동을 일으켜 그에 반대하려는 것을 알게 될텐데, 그가 우리와 등을 돌리지 않을 이유가 있겠는가.

이상의 서술을 종합하면 우리는 알 수 있다: 남창기의때 공산당과 하룡의 합작은 신앙이나 주의에 기초를 둔 것이 아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공산당하급은 상급에 복종하고, 당이 시키면 한다는 기율과 원칙이 있으므로, 기의계획을 취소하더라도 하룡의 불만을 우려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더더구나 그가 반대편에 서서 공격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다. 하룡과의 합작은 서로가 서로를 이용하는 것이다. 공산당은 하룡의 부대를 추가하여 기의군의 실력을 증강시킬 필요가 있었고, 하룡은 새로운 출로를 찾아 처지를 개선하고 개인의 포부 혹은 야심을 실현할 필요가 있었따. 피차간에 상대방이 필요했던 것이고, 모두 상대방에 대하여 경계하고 방비하고 있었다. 그래서 하룡을 총지휘관으로 임명한 것은 그에 대한 신뢰라기보다는 그를 회유하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 정확하다. 일종의 그로 하여금 다른 생각없이 죽어라 공산당과 함께 폭동을 일으키도록 하기 위한 수단이다. 당연히 기의후에, 하룡은 공산당에 가입했고, 공산당의 도움과 자신의 노력하에 점차 이전의 여러 공산당의 요구에 들어맞지 않았던 생활습관과 일처리스타일을 바꾸어, 자각하여 공산주의를 신앙하는 공산당원이 되었지만, 그건 이후의 일이다.

건국후, 주은래가 국무원총리를 맡고, 하룡은 십대원수중 한명이 된다. 공명을 이루었고, 그 성취는 대단했다. 그러나, 문혁때, 주은래는 하룡이 박해받아 죽을 때도 전혀 도움을 줄 수 없었다. 하룡이 명예회복된 후 추도회를 개최했을 때, 주은래는 눈무릉ㄹ 흘리면서 하룡의 유상(遺像)에 일곱번 허리를 숙였다. 그리고 목이 메어 제대로 나오지 않는 목소리로 하룡의 미망인 설명(薛明)에게 말한다: 저는 하룡을 보호해주지 못했습니다. 저는 하룡을 볼 면목이 없습니다. 아마도 그는 그때 옛날 일을 떠올리며 만감이 교차했을 것이다. 위험이 충만했던 남창기의때 주은래와 하룡이 피차간의 의심과 시기를 극복하여, 밀접하게 협력하며, 어깨를 나란히 하고 함께 싸울 수 있었다. 천하를 차지한 후에는 건국건군의 공로가 있는 하룡이 자기편의 손에 죽어나갔다. 그러나 주은래는 그것을 두 눈 멀거니 뜨고 보면서도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한다. 이 어찌 탄식할 일이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