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세개(袁世凱)의 장례식: 국장으로 서태후에 못지 않았다.
글: 성도일보(星島日報)
신해혁명(辛亥革命)으로 봉건황제제도를 무너뜨린 후, 원세개는 중화민국의 초대 대총, 제2대 임시대총통을 지냈다. 그는 북양정부의 최고지도자였으며, 북양군의 창시자겸 영도자였다.
그의 장례식은 호화의 극치를 보여주었으며, 규모도 엄청났고, 그 규격은 청나라황제와 비교할 수 있을 정도였다.
1915년말, 원세게는 황제에 오르고, 연호를 홍헌(洪憲)이라 한다. 그러나, 사회각계에서는 반대의 목소리가 커지고, 여러가지 방식으로 저항한다. 특히 병권을 장악하고 있던 당계요(唐繼堯), 채악(蔡鍔), 이열균(李烈鈞)등 실력자들이 호국군(護國軍)을 조직하여 무력으로 원세개를 토벌하고자 한다. 금방 원세개의 황제꿈은 "토원(討袁)"의 소리에 사라지게 된다. 그때 그의 사람들은 거의 떠나갔으며, 울분과 두려움이 교차하는 와중에 마침내 1916년 6월 6일 요독증으로 사망하게 된다.
북양정부는 공판상례처(公辦喪禮處)를 설립하여, 그의 국장(國葬)을 처리한다. 그가 황제를 칭하는 사태를 벌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그에 대한 장례의 규격을 전혀 낮추지 않았다. 그의 장례식은 매우 융중했고, "전국에서 반기를 걸어 애도를 표하고, 오락활동을 하루 중단하며, 학교수업도 하루 중단하고, 문무관리들은 연회를 27일간 중단했다." 그의 영구는 회인당(懷仁堂)에 21일간 놓여 있다가, 6월 28일 장례식을 거행한다. 그리고 북경에서 출발하여 하남(河南) 창덕(彰德) 원상촌(洹上村)으로 간다.
당시 북양정부는 재정이 곤란했지만, 원세개의 장례식에는 큰 돈을 쓰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먼저 5천만원을 원세개의 장례식비용으로 내놓는다. 동시에 원세개가족에게는 의장비(儀葬費)로 백만원을 준다.
중화문을 빠져나가는 장례행렬
장례행렬
종이로 만든 자동차(멀리서 보면 진짜같다)
종이로 만든 여복(女僕), 관가(管家)
원세개의 장례식에 사용된 모든 명기(冥器)는 원래 물건 크기대로 종이로 만들었다. 위의 사진에 나오는 진짜 사람과 같은 크기의 여복, 관가들은 놀라울 정도이며, 정말 머리카락이 솟고 소름이 돋을 정도이다.
원세개의 장례규격은 청나라황제와 비견할 만하다. 예를 들어, 그는 황제의 방식으로 용포(龍袍)를 입고 염했으며, 관목(棺木)은 극히 진귀한 음침목(陰沉木)을 썼고, 관의 바깥을 두른 "당조(堂罩)"도 황제의 규격이었다. 그리고, 애악(哀樂)을 연주하는 악대는 민간의장도 있었고, 총통부의장도 있었다.
6월 28일 새벽, 몸에 마부복장에 엉덩이에 검은비단을 두른 노동자들이 삽으로 큰 길의 중앙에 황토를 뿌려 상징적으로 길을 깔았다. 뒤에는 또 다른 노동자들이 깨끗한 물을 담은 큰 나무통을 들고 따라오면서 길에 물을 뿌렸다. 깨끗한 물을 뿌린 곳은 행인들이 다시는 지나가지 못하게 막았다. 그곳은 "정가(淨街)"라고 불렀다. 날이 밝은 후, 대포를 108발 쏘고난 후, 원세개의 영구가 회인당에서 출발한다. 신화문을 나와, 서장안가에서 동장안가로 동쪽으로 가다가 천안문의 앞에서 남쪽으로 방향을 틀어 중화문, 전문을 지나가고 다시 서쪽으로 방향을 돌려 전문서역까지 이른다. 여기에서 기차를 타고 창덕으로 간다.
6월 28일 당일 경한철로(京漢鐵路, 북경-무한)는 하루동안 운행이 중단된다. 열차가 움직일 때, 군대는 108발의 예포를 쏜다. 영구를 실은 열차는 보정(保定), 한단(邯鄲)등지를 지났고, 문무관리들이 노제(路祭)를 지낸다.
원세개의 출빈때 고대에 관을 운반할 때의 최고규격에 따라 64명이 든다.
신화문을 나서는 장면이다.
원세개를 고향 하남으로 데려갈 전용기차. 단기서(段祺瑞)는 영구를 기차에 실을 때 직접 들다.
원세개 능침의 조감. 원림(袁林)으로 불리며, 하남성 안양시에 있다.
원세개의 능묘 모습
원세개의 영구가 지나가는 곳에는 군경이 두 줄로 늘어서고, 백성들이 길가에 서서 지켜보았다. 인산인해를 이루렀다. 신임대총통 여원홍(黎元洪)은 문무백관을 이끌고 신화문에게 예를 행했고, 국무총리 단기서는 전문서역까지 영구를 모시고 걸어갔다. 장례행열에 참가한 인원은 약 5천명이다.
영구를 드는 공부(槓夫)는 2조로 나뉘었다. 1조에 112명으로, 그중 공부가 80명, 이들을 보조하는 인원이 32명이었다. 1조의 공부는 자홍색(紫紅色) 격사난가의(緙絲鑾駕衣)를 입었고, 2조의 공부는 녹색(綠色) 격사난가의를 입었다. 2조의 공부는 머리에 청하엽식전모(靑荷葉式毡帽)를 쓰고, 황치령(黃雉翎)을 위에 꽂고, 황투고(黃套袴)를 입고, 청포화(靑布靴)를 신었다.
한가지 언급할 점은 원세개의 장례에 사용된 모든 명기는 원래 크기대로 종이로 만들었다. 1:1로 만든 종이자동차, 진짜사람과 같은 크기의 여복, 관가들...
알려진 바에 따르면, 원세개의 장례식비용은 북양정부가 50만은원을 내놓아 치렀다. 그러나 이 금액으로는 부족하여, 묘지건축과 제전(祭田)에 상당한 돈이 필요했다. 이런 부족한 경비를 메우기 위해,여원홍, 단기서등이 앞장서서 돈을 출연했고, 각부총장, 각성독군, 호군사, 진수사등도 속속 돈을 내놓았다. 그들이 내놓은 돈은 절대다수가 1만원이고, 가장 적어도 2천원이었다. 모두 25만여원을 모은다.
8월 23일, 원세개는 창덕 원상촌에서 동북으로 1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매장된다. 능묘는 명청릉의 규격에 따라 만들어졌으며, 중서합벽(中西合璧)의 건축기법을 사용했다. 중국고전전통형제를 본으로 해서, 서양건축의 풍모를 도입했다. 그리하여 고금이 병존하고, 풍격이 독특하게 된다. 중국능묘건축의 새로운 사례가 된 것이다. 그리하여 중국능묘건축사상 특수한 지위를 지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