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방제(卜舫濟): 중국여자와 결혼한 최초의 미국인
글: 라이(羅爾)
1886년 11월 18일, 미국선박 한척이 황포강으로 들어왔고, 십육포(十六鋪)부두에 정박한다. 22살의 복방제(Framcis Lister Hawks Pott, 1864-1947)는 배에서 내려 오랫동안 그리워한 신기한 나라의 땅을 밟는다.
황포강에는 죽은 돼지, 죽은 쥐가 떠다니고 있었고, 길거리에는 느긋하게 소매를 떨치며 걷고 있는 남색 베로 만든 장포를 입은 황색인종이 보였다. 가만히 있다가 돌연 "캭!"하고는 길거리에 가래를 내뱉었다.
눈에 보이는 장면에 복방제는 놀라지 않았다. 그는 일찌감치 들어서 알고 있었다. 이 혼돈에 빠진 나라에 그가 온 것은 문명을 전해주기 위해서였다.
복방제는 성요한서원(聖約翰書院)의 교사로 왔다.
성요한서원은 미국 성공회 상해주교 시약슬(施約瑟, Samuel Isaac Joseph Schereschewsky, 1831-1906)이 1879년에 설립하였고, 배아서원(培雅書院, 1865)과 도은서원(度恩書院, 1866)이 병합하여 이루어졌으니 그때가지 이니 20여년의 역사가 있는 셈이다. 그러나 그다지 큰 성취는 이루지 못했고, 학생은 겨우 수십명에 불과했다. 성요한서원은 추진력이 있는 교육인재가 시급했고, 학교의 발전을 개척해야 했다.
복방제는 컬럼비아대학을 졸업한 명문대졸업생이다. 또한 성공회 총신학원의 신학학사학위도 있었다. 그는 바로 성요한서원이 찾던 사람이었다. 복방제는 열정을 가지고 자신의 포부를 실현할 곳을 찾고 있어서, 쌍방은 의기투합된 것이다. 중국을 알기 위하여는 반드시 먼저 중국에 융화되어 들어가야 한다. 상해에 온 첫해애, 복방제는 서원의 숙사에 거주하지 않고, 가정(嘉定)의 한 농가에 거처한다. 그는 가죽모자를 쓰고 수(壽)자가 새겨진 신을 신고, 몸에는 장포마괘(長袍馬褂)를 걸쳤다. 그리고 가짜 변발까지 달았다. 뒤에서 보면 그냥 중국인이었다.
복방제는 지방유지들과도 주먹을 마주하며 인사를 했고, 집안일같은 소소한 일들까지 얘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아이들과는 같이 놀이도 한다. 1년도 되지 않아 복방제는 상해말을 유려하게 할 수 있게 된다.
1888년 6월, 상해에 온지 1년반만에 복방제는 성요한서원의 원장이 된다.
큰 꿈을 품고, 복방제는 성요한서원을 중국문명의 요람으로 만들고자 했다.
복방제는 상해말을 할 줄 알았지만, 그가 한 개혁의 첫번째 조치는 교사이건 학생이건 생활에서건 학습에서건 반드시 영어를 말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성요한서원은 중국에서 최초로 모두 영어로 수업하는 학교가 된다.
1890년, 성요한서원은 대학과정을 개설한다.
1896년, 성요한서원은 성요한학교로 개칭하고, 대학부를 둔다. 거기에는 문과, 이과 ,의과, 신학과 및 예과를 두었다. 당시 상해지역에서 최초의 대학교육기관이 된다.
1901년, 성요한학교는 축구부를 만든다. 이는 중국최초의 축구팀이다.
1905년 11월, 성요한학교는 미국 워싱턴에 정식등록하고, 성요한대학이 된다. 복방제는 교장으로 임명된다.
성요한대학은 중국에서 여러가지 '최초' 기록을 가지고 있다. 여기서 하나하나 언급하지는 않겠지만, 부득이 한가지 얘기해야할 것은 복방제가 미중간 국제결혼의 문을 열었다는 것이다.
1886년말, 복방제가 중국에 온지 얼마 지나지 않아, 교회에서 피아노를 치는 황소아(黃素娥)을 알게 되고, 마음이 움직인다. 중국에 오는 선교사들은 반드시 한 가지 기본원칙을 준수해야 했는데, 그것은 중국여자와 연애를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복방제는 매번 황소아를 볼 때마다 마음이 흔들리는 것을 어쩔 수가 없었다. 그는 이 아가씨를 사랑한다는 것을 분명히 알았다.
복방제는 오랫동안 고민했다. 서양인은 원칙을 중시하고, 더더욱 자유를 숭상하며, 자유는 문명의 기반이다. 자신은 중국에 문명을 전파하러 왔다. 만일 정리에 부합하지 않는 규칙때문에 본성을 억누르고 애정을 말살한다면, 자신이 어떻게 문명의 사자라 할 수 있겠는가? 복방제는 그리하여 황소아에 열렬히 구애한다.
교회지도자는 격렬히 반대했다. 황소아도 교회의 규칙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여러번 거절한다.
복방제는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결국 하늘도 감동시키고, 황소아도 감동시켰다.
1888년 8월 23일, 복방제와 황소아는 성요한성당에서 혼례를 거행한다. 이 혼례는 동서방문화의 깊은 융합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들의 결혼사진은 지금 보아도 아름답다.
복방제는 성요한대학은 53년간 주재했고, 중국의 대학교육사업의 새로운 영토를 개척했으며, 크나큰 공헌을 했다. 그러나, 우연한 '국기사건'으로 그의 모든 노력은 거의 말살되어 버린다.
1925년 5월 30일, 상해학생이 공공조계로 가서 시위를 했다. 일본사창(日本紗廠)에서 중국노동자들을 총으로 싸아죽인 건을 항의하기 위해서이다. 조계의 순포는 학생 100여명을 체포하고, 학생들을 향해 총을 쏜다. 그리하여 13명이 사망하고 ,수십명이 부상을 입는 "오삼십참안(五卅慘案)"이 발생한다.
6월 2일 저녁, 성요한대학의 학생들이 교장에게 요청한다. 내일 반기를 달아 애도를 표하자고. 복방제도 동의한다. 6월 3일 새벽6시, 성요한대학에서는 국기게양식이 거행되고, 미국국기는 정상적으로 끝까지 올렸으나, 중화민국국기는 반기로 단다. 이때 복방제는 상해교구 주교의 지시를 받는다. 성요한대학은 미국학교이고, 정치사건에 개입할 수 없다. 복방제로 하여금 중국국기를 내리게 한다. 복방제도 학교는 순수해야 하고, 정교분리해야한다고 여겨서, 운동장으로 가서 중국국기를 내린다.
이에 교수와 학생들이 크게 분노한다. 그날로 553명의 학생과 19명의 교사가 영원히 성요한대학과 관계를 끊겠다고 맹세하고, 9월에는 학교를 떠난 교수와 학생들이 광화대학(光華大學)을 건립한다.
성요한대학은 '동방하버드'라고 불렸으며, 고유균(顧維鈞), 송자문(宋子文), 임어당(林語堂), 장애령(張愛玲), 패율명(貝聿明), 영의인(榮毅仁)등 유명한 인물을 배출했다.
1952년, 성요한대학은 해체된다: 의학원은 상해제2의학원에 흡수되고, 공학원 토목건축과는 동제대학에 흡수되고, 이화학과는 화동사범대학에 흡수되고, 경제학과는 상해재경대학에, 외국어와 역사등 문과는 복단대학에 흡수된다. 성요한중학부와 대동중학부속중학은 합병하여 오사중학(五四中學)이 되며, 캠퍼스는 화동정법대학이 귀속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