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천국말기 천경(天京)위기때 왜 각지의 제후들은 도와주러 오지 않았을까?
글: 암암설사(巖巖說史)
천경함락전 3개월간 홍수전은 마치 뜨거운 가마속의 개미처럼 조급하여 어쩔 줄 몰랐다. 이때 상군(湘軍)은 기본적으로 남경을 완전 포위했고, 국면은 위기일발이었다. 그러나 수성하는 병사는 겨우 3천여명에 불과했다. 포위망을 풀려면, 각지의 병력으로 하여금 남경으로 와서 근왕(勤王)하도록 하기 위해 불러야 했을 것이다.
증원군을 얻기 위하여,홍수전은 심지어 자신의 동생 홍인간(洪仁玕)으로 하여금 강소,절강으로 가서 구원병을 데려오도록 하려 했다. 그러나 결과는 그 어느 제후왕도 천경으로 오려하지 않았고, 아무도 오지 않았다. 예를 들어, 시왕(侍王) 이세현(李世賢), 강왕(康王) 왕해양(汪海洋)은 수중에 수십만대군을 보유하고 있었는데, 절강, 강서 변경지역에서 국면을 관망할 뿐 천경의 국면이 악화되는 것은 무시해버린다.
제후왕들이 오지 않으니, 홍수전은 계속하여 사자(使者)를 보내어 그들에게 속히 천경으로 오도록 재촉했으나,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1864년 6월, 홍수전이 병사하였는데, 죽기전에 여러 차례 사람을 보냈으나 아무런 소식도 없었다. 7월, 상군이 남경을 함락시키고, 이수성(李秀成)을 포로로 잡으면서, 태평천국은 멸망한다.
태평천국이 마지막 3개월간, 국면은 누란(累卵)의 위기였다. 그러나 외지의 제후들은 근왕을 거절한다. 원인이 어디에 있었을까? 큰 적을 상대하려면 마땅히 일치단결하여 하나로 뭉쳐서 전투에 가담하지 않았을까? 국면으로 말하자면 그들이 와도 소용이 없었기 대문에, 아예 오지 않았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경성이 포위되면 근왕을 와야하는 것이 아닌가? 그것도 상황에 따라 다르다. 근왕에도 여건이 구비되어야 한다. 다만 태평천국은 상응한 조건이 구비되어 있지 않았다. 제후왕은 경성으로 가서 전투하는 것보다 전투역량을 보존하여 동산재기를 노리는 편이 나았던 것이다.
천경함락전 3개월, 태평천국의 제후왕들은 어떤 상황이었을까? 답은 스스로를 보살필 여유도 없었다고 할 수 있다.
1861년 9월, 안경(安慶)이 함락되고, 16,000명의 정예병이 도륙당한다. 진옥성(陳玉成)은 환북(皖北) 여주(廬州)로 물러나 지킨다. 이수성은 이때 강절(강소,절강)에 정력을 집중하고 있었다. 소복성(蘇福省), 천절성(天浙省)의 근거지를 개척할 뿐, 진옥성의 사활은 신경쓰지 않았다. 진옥성은 막다른 골목에 몰려 수주(壽州)로 가서 묘패림(苗沛霖)에 의탁했다가 살해당한다.
진옥성이 죽은 후, 태평천국의 장강상류의 국면은 주재할 사람이 없어진다. 상군은 파죽지세로 천경까지 쇄도한다. 이와 동시에 증국번은 이홍장(李鴻章)으로 하여금 회군(淮軍)을 조직하게 하여 상해, 강소를 공격하게 하고, 좌종당(左宗棠)으로 하여금 초군(楚軍)을 조직하게 하여 절강일대를 공격하여, 동쪽에서 태평천국을 포위공격하게 함으로써 강소, 절강의 태평군이 천경으로 증원을 오지 못하게 막게 했다.
1862년 10월, 이수성은 13명의 왕야, 20만대군을 이끌고 강소, 절강에서 돌아온다. 그리고 증국번의 상군주력부대와 우화대(雨花臺)에서 결전을 벌인다. 이 전투는 44일간 지속되었고, 상군은 5천여명이 사망한다. 태평군도 비슷했다. 그러나 태평군은 물자부족으로 철수하게 되고, 상군은 진지를 보존할 수 있었다.
이어서, 홍수전은 이수성으로 하여금 "진북공남(進北攻南, 강북으로 진격하여 무창을 점령함으로써 상군이 지원갈 수밖에 없도록 함으로써 포위망을 풀겠다는 전략)"작전을 집행하도록 압박한다. 십여만대군이 흉년으로 사람이 없는 강북지방으로 가서 환남(안휘남부)를 전전하다가 굶어죽고, 병사하고, 피로해 죽은 사람이 부지기수에 이른다. 1863년 7월, 이수성은 아무런 소득도 없이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장강에서 홍수를 만나고, 상군의 수군에 기습당하여 수만명을 잃는다.
우화대전투, '진북공남'작전, 강소절강 태평군의 강북이동, 이로 인해 회군, 초군은 반격을 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태평천국의 강소, 절강의 기반은 튼튼하지 못했다. 그리하여 태평천국에 귀순했던 전 청나라관리, 사신들은 속속 태평군을 떠나 청군의 조력자가 된다.
낙국충(駱國忠), 전계인(錢桂仁), 이문병(李文炳), 낙국효(駱國孝), 소주팔대장(蘇州八大將), 웅만전(熊萬荃)등은 투항하면서, 성을 청군에 바친다. 그외에 태평천국은 봉지제를 실행하여 제후왕은 각지역을 스스로 다스렸다. 그리하여 자신의 봉지만 신경썼지, 다른 지역의 동료들 사활에는 무신경했다. 그리하여 청군에 각개격파당한다.
천경이 함락되기전 3개월간, 강소,절강은 어떤 상황이었을까? 호주(湖州)를 제외하고, 나머지 성은 모두 청군에게 빼앗긴 상태였다. 강소, 절강은 천경이 의지하는 지역이고, 만일 강소, 절강의 기지를 잃어버리고 나면, 제후왕들이 어떻게 근왕을 올 수 있겠는가? 모왕(慕王) 담소광(譚紹光), 호왕(護王) 진곤서(陳坤書), 조왕(潮王) 황자륭(黃子隆), 정왕(挺王) 유득공(劉得功)같이 잘 싸우는 장수들은 일찌감치 피살당하거나 전사했다.
이세현, 왕해양은 아직 싸울 수 있었고, 수십만대군이라고 자칭했는데, 무슨 상황이 있었단 말인가? 이세현의 금화(金華) 본거지는 일찌감치 빼앗겼다. 그리고 부장(部將) 진병문(陳炳文)에게는 항주(杭州)에서 철수하도록 명하고, 왕해양에게는 여항(餘杭)에서 철수하도록 명하여, 실력을 최대한 보존했다.
이세현은 절강을 포기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도리가 없었다. 항주, 여항은 초군의 주력부대에 포위당하고, 증원군도 오지 않았다. 그리하여, 함락은 시간문제였따. 거기서 죽기살기로 버틸 필요는 없었다. 그리하여 성을 포기하면, 군대는 보존할 수 있다; 그러나 성을 포기하지 않으면, 성도 잃고 군대도 잃는다. 이세현은 남은 전력을 보존하는 쪽을 선택한다.
강소, 절강을 잃고 이제는 겨우 호주 하나만 남았다. 호주는 초군,회군, 양창대(洋槍隊),영불연합군에 포위당한 상태여서 황문금(黃文金)은 자신을 지키는 것만도 힘들었다. 그리하여 이세현이건, 황문금이건, 왕해양이건 모두 근왕을 갈 방법이 없었다. 그들이 우선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어떻게 살아남느냐는 것이었다.
백보 양보하여 이세현,왕해야, 황문금이 무주(撫州), 건창(建昌), 호주를 포기하고 남경으로 가서 전투했으면 괜찮았을까? 답은 노이다. 당시 이수성이 20만대군을 끌고 가서도 안되었는데, 지금이라고 가능했을 것인가. 그들이 가고 싶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갈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가도 소용이 없었다. 밥조차 먹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한가지 알아야할 점은 태평천국 후기, 태평군이 직면한 최대의 곤란은 식량문제였다. 그들은 해결이 어려웠다. 해결할 방법이 없었다. 환남, 강절, 감북(贛北, 강서북부), 환북(안휘북부)는 장기간 전란을 겪으면서, 농업생산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그러니, 양식이 어디에서 나오겠는가.
다음으로, 태평천국은 전문적인 수군이 없었다. 그리하여 장강에 대한 통제권을 상실하여, 외지에서 식량을 운반해올 수가 없었다. 1854년 10월, 태평군은 5천척의 '민선(民船)'함대를 가지고 있었다고 주장했으나, 전가진(田家鎭)에서 상군에게 모조리 불탄다. 이제는 민선조차 없어졌다.
왜 태평군은 전문적인 함대를 건설하지 않았는지에 대하여는 그 원인을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당시, 태평천국은 직접 열강과 관계를 맺을 수 없어서, 선진화포를 구매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석달개(石達開)가 안경에서 상군의 모델을 따라, 전문전선(戰船)을 건조하였는데, 화포가 없다보니, 파양호에서 상군에 전멸당한다.
천경성내에는 일찌감치 식량이 떨어졌다. 그리하여 식량을 외부에서 어떻게 가져올지를 고민하고 있었는데, 어떻게 근왕군에게 양식을 제공할 수 있었겠는가? 생각해보자. 이세현, 왕해양이 만일 수십만의 병력을 이끌고 갔다면, 태평군은 무엇을 먹고, 무엇을 입을 수 있었을까? 이런 기본문제조차 해결할 방법이 없는데, 무슨 전투를 한단 말인가?
양식이 없는데, 이세현, 왕해양은 어떻게 수십만의 병력을 보유했을까? 기실 싸울 수 있는 사람은 수천명에 불과했다.나머지는 기아에 굶주린 백성들이었다. 그들은 굶주림으로 태평군에 참가한 기민(飢民)들이다. 당연히 기세를 부풀려서 일부 작은 현성은 점령할 수 있었고, 관청의 은고, 양고를 약탈하여 잠시 식량곤란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홍인간이 '차병(借兵)'하러 왔을 때, 이세현, 왕해양이 거절한 이유는 바로 "양식부족"이었다. "그들은 강서로 가서 먼저 양식을 모으고, 가을에 추수한 후에 천경으로 가겠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하여 홍인간도 방법이 없었다. 반박할 도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스스로를 지키기 어렵고, 양식이 부족하다는 점외에 제후왕들은 다른 생각도 있었다: 천경은 결국 지켜낼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새로운 기지를 찾아야 한다. 굳이 죽기살기로 지킬 필요는 없다. 이 점은 거의 컨센서스를 이루고 있었다. 예를 들어, 이수성은 여러번 홍수전에게 남경을 포기하자고 권한다. 강남의 번화함에 미련을 두지 말고 관중으로 가자고 하였으나, 홍수전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세현은 더욱 그런 입장이었다. 그는 천경을 구원하는데 전혀 흥미가 없었다. 우화대전투때 이세현은 좌종당과 강소절강을 놓고 싸우느라 바빴다. 만일 형 이수성의 체면을 고려하지 않았더라면 돌아오지 않았을 것이다. 이세현이 돌아오자, 금화 본거지를 남익풍(藍益灃)에게 점령당한다. 각지의 수비군들도 연이어 투항한다. 심지어 자신의 가족들조차 포로로 잡혀버린다.
1864년초, 강소남부의 기지가 함락되고, 이수성은 홍수전의 지시에 따라 남경으로 돌아온다. 이수성은 이때 이세현의 군영을 지나가는데, 이세현은 형에게 야율대석(耶律大石)을 본받아 스스로 창업할 것을 권한다. 돌아가서 괜히 죽음을 당하지 말고. 왜냐하면 천경은 어차피 지켜낼 수 없으니, 차라리 새로운 발전기회를 노리는 것이 낫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수성은 듣지 않았고, 결국 상군에 포로로 잡힌다.
태평천국의 마지막 3개월, 소복성, 천절성이 함락당하고, 천경도 포위된다. 양식도 다 떨어졌다. 그러니 대세는 이미 기울었다고 볼 수 있다. 이때는 전략적으로 이전하여 동산재기를 노리는 것이 상책이다. 경성을 사수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 그러니, 제후왕들은 가겨고 하지 않은 것이다. 서북군단의 진득재(陳得才)는 관중, 한중에서 아주 잘 발전하고 있었다. 그러나 근왕을 위해 돌아오다가 이미 닦아놓은 기반을 포기했고, 그 결과 호북에서 전멸하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