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백달(陳伯達) vs 섭영진(聶榮臻): 누가 부평(阜平)에서 모택동(毛澤東)을 구했을까?
글: 옥미수(玉米穗)
진백달이 만년에 회고록을 썼다. 그의 아들 진효농(陳曉農)이 기술편찬하여 <진백달최후구술회억(陳伯達最後口述回憶)>이라는 책으로 냈다. 이 책의 한 장면은 진백달이 모택동을 구해준 적이 있다는 것이었다. 진백달은 이렇게 회고한다: 1948년 모택동이 하북성 부평현에 있을 때, 하루는 국민당 비행기가 부평의 상공으로 날아왔다. 진백달은 비행기엔진소리를 들은 후, 상황이 잘못되었다고 느끼고, 급히 모택동의 거처로 달려가 모택동에게 말했다: "비행기가 머리 위에 있습니다. 빨리 떠나야 합니다!" 모택동은 원래 어떡할지 망설이고 있었는데, 진백달이 그렇게 말하자, 바로 경위원과 건물을 나갔다. 모택동이 건물을 나간 후, 진백달은 비행기의 주의를 끌기 위하여, 고의로 마당에 서서 떠나지 않았다. 모택동은 그것을 보고 고개를 돌려 소리쳤다: "너는 왜 아직 안가고 있는 거냐?" 그는 그저 소리쳤다: "주석 빨리 가십시오. 주석 빨리 가십시오." 모택동이 이미 안전하다는 것을 확인항 후, 비로소 진백달도 건물밖으로 급히 달려나갔고, 이때 비행기에서 폭탄이 떨어졌다. 진백달은 낮은 물구덩이에 엎드렸고, 폭탄은 건물에서 폭발하여, 건물의 창유리는 모조리 박살난다. 진백달은 말했다: "만일 조금만 늦게 떠났더라면 아주 위험했다."
진백달이 말한 이 장면은 많은 사람들에게 낯설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많은 글에서 모택동이 부평에서 겪은 위험한 상황을 얘기할 때나, 영화 <건국대업> 그리고 여러번 모택동을 묘사한 영화드라마작품에서도 나왔던 장면이기 때문이다. 단지 그들 글이나 <건국대업>등 영화드라마에서 모택동을 구해준 사람은 진백달이 아니라 섭영진이었다. 이런 상황이 나오게 된 것은 섭영진에게도 회고록이 있기 때문이다. 그 회고록에서 섭영진은 부평의 그 공습사건때, 그는 집을 떠나지 않으려 하는 모택동을 경위원에게 시켜 들것에 태워 강제로 데리고 나와 위험을 피했다는 것이다. 섭영진의 회고록에 따르면, 그는 비행기소리를 듣고 그리고 폭격기를 본 후에 모택동의 방으로 달려갔다. 모택동은 "남색수건과 잠옷을 걸치고 침대위에 누워 휴식을 취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래서 말한다: "'주석, 적의 비행기가 폭격하려고 합니다. 빨리 방공동으로 피하십시오!' 모택동은 자리에서 일어나 마치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담담했다. 그리고 아주 유머스럽게 나에게 말했다: '서두를 것 없다. 별 거 아니니까. 기껏해야 쇳덩어리를 떨어뜨릴 것 아니냐. 그저 호미질 여러번 해서 황무지를 개간하는 것이나 다를 게 없다.'" 섭영진의 회고록은 이어서 이렇게 묘사한다. "나는 모택동동지가 방공동으로 가고 싶어하지 않는 것을 보고, 마음이 급해졌다. 그래서 연이어 소리쳤다. '주석, 적의 비행기가 왔습니다. 반드시 즉시 이곳을 떠나야 합니다. 제가 안전을 책임지겠습니다.' 그러나 모택동동지는 자리에 앉아있었고, 떠나려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섭영진은 "즉석에서 결단을 내려, 경위원에게 가서 들것을 가져오라고 시켰다." 들것을 가져온 후에 섭영진은 경위원에게 눈짓을 하면서, 모택동 동지를 부축해서 들것에 태운다. 그 자리에 있던 비서와 경위원들이 서로 손을 보태 들것을 들고 건물 뒤의 방공동으로 잰걸음으로 달려갔다. 강정은 겁이나서, 비행기소리가 들리자, 일찌감치 도망쳤다. 우리가 모택동 동지를 데리고 방공동으로 들어가니, 그녀는 이미 방공동 안에 있었다. 나와 모택동동지가 막 방공동에 들어갔을 때, 적의 비행기가 폭탄을 투하했고, 쾅쾅 하는 몇 번의 큰 소리가 들렸다. 우리가 주둔하던 건물부근에 짙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발생한 같은 위험한 상황을 겪은 경력은 모두 모택동을 위험에서 구해주었다고 하지만 사람이 두 사람이다. 서로간의 회고록에서 다른 상대방은 언급하지 않고 있다. 이를 보면 두 사람이 공동으로 구했을 가능성은 없다. 그렇다면, 진백달과 섭영진중 도대체 누가 그때 그 자리에서 모택동을 구해준 것일까? 혹은 도대체 누가 사실을 얘기하고 누가 거짓말을 하는 것일까?
두 사람의 당시 상황에 대한 서술을 비교해보면, 섭영진이 말하는 것이 문학창작상 기교가 더 뛰어나다는 것을 알 수 있다(그래서 영화 <건국대업>의 관련 장면은 이 버전에 따라 연기했다). 장면도 생생하고, 위대한 지도자의 유머스러운 점과 위기에 닥쳐서도 흔들리지 않는 영웅본색을 잘 드러냈다. 또한 부하로서의 자신의 충성심과 기지, 그리고 과감성도 잘 표현했다. 그리고 이야기하는 김에 겁많고 자기만 생각하는 강청의 모습까지 잘 표현했다. 실로 여러가지를 주도면밀하게 잘 고려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단지 읽을 때는 그저 탕궈창(唐國强)이 연기하는 영화속의 모택동같은 느낌이다. 그리고 자세히 살펴보면, 모택동은 당시 장년으로 나이들어 걸을 수 없을 정도의 상황도 아니다. 신체도 건강하고, 발다리도 튼튼한데, 스스로 걷는 것이 훨씬 빠르고 편리할 땐데, 설사 그가 정말 떠나길 원치 않는다고 하더라도, 팔을 부축해서 걷는 것이 들것으로 옮기는 것보다는 훨씬 편리하지 않겠는가. 굳이 사람들에게 들것까지 가져오게 해서 그를 옮겨야 했을까? 그리고 비행기가 언제든지 폭탄을 투하할 수 있는 긴급한 순간에, 어디에 가서 들것을 찾아온단 말인가? 급한 와중에 들것을 찾지 못하면 어떻게 했을 것인가?
한가지 주목할 점은 진백달은 원래 이 지난 일을 언급하지 않았었다는 것이다. 나중에 문혁때 타도당해 진성감옥(秦城監獄)에 갇힌다. 감옥에 들어갔을 때 그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이렇게 소리쳤다: 너희가 나를 이렇게 대해서는 안된다. 나는 모주석을 구해준 적도 있다. 이렇게 하여 그는 그 일을 털어놓은 것이다. 당시는 모택동이 건재해 있었다. 그리고 이미 중공서열4위의 인물에서 반혁명죄수로 전락한 진백달이 만일 아무런 근거없이 모주석을 구해준 경력을 날조했다면 너무나 손쉽게 들통났을 것이다. 사실상 아무도 그가 헛소리를 한다고 말하지 못했다. 그리고 감옥에서의 대우도 그가 그런 말을 한 이후에 확실히 좋아졌다. 이를 보면, 진백달이 사실을 날조했을 가능성은 높지 않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섭영진의 회고록의 이 이야기가 가장 먼저 나온 것은 1983년이다. 당시 모택동은 이미 사망하여 세상에 있지 않았다. 그래서 사실여부를 확인할 도리가 없었다. 섭영진은 원수의 신분으로 자연히 아무도 그에게 그 이야기의 진실성을 따질 수 있는 사람도 없었다. 그러나 의미심장한 것은 모택동의 당시 위사(衛士) 이은교(李銀橋) 및 염장림(閆長林)이 나중에 이 일을 회고하는데, 그들의 회고속에는 섭영진도 언급하지 않고, 또한 진백달도 언급하지 않는다. 진백달은 당시 타도당한 반면인물이었고, 역사상 아무리 좋은 일을 많이 했더라도, 성왕패구(成王敗寇)의 원칙에 따라 모조리 말살되는 것이 중국에서는 정상적인 일이다. 다만, 섭영진 원수를 두 위사의 회고에서 언급하지 않았다는 것은 사람들에게 암시하는 바가 있다고 할 것이다.
역사에 가정은 없다. 다만 그래도 한번 생각해보면, 만일 진백달이 타도되지 않고, 여전히 중공 고위층에 남아 있었떠라면, 섭영진이 그렇게 회고록에 모주석을 구한 이야기를 쓸 수 있었을까? 만일 모택동이 살아있었더라면, 섭영진이 사람들에게 그 일을 언급할 수 있었을까? 설사 언급했다고 하더라고, 그가 위의 글에서처럼 강청을 묘사할 수 있었을까?
앞에서 말한 것처럼, 현재 볼 수 있는 모택동의 당시 위기를 벗어난 장면에 대한 글은 모두 섭영진의 회고록을 판본으로 하고 있다. 권위있는 역사에 관한 글에서 나타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영화드라마작품이야 당연히 말할 필요가 없지만, 필자의 생각에 만일 소설의 태도로 극본을 써서 탕궈창에게 연기하게 한다면 그걸로 족한 것이다. 만일 역사의 진상을 알려고 한다면, 당연히 더욱 엄격하고 책임있는 태도를 가져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