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수전(洪秀全)의 기독교로 보는 "중국특색"
글: 제과(齊戈)
소위 "중국특색"은 최근 들어 유행하기 시작한 용어이다. 중국특색의 시장경제, 중국특색의 사회주의, 중국특색의 사법제도등등. 여기에는 한가지 기본적인 규율이 있다: 무릇 무엇이라고 말하기 불명확하고, 폐단이 연이어 발생하여 계속 비난받고, 온 천하의 사람들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제도나 주의에 대하여 '중국특색'이라는 네 글자를 붙인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천하는 그게 뭔지 잘 모르게 되고, 잘 모르게 되다보면 결국 흐지부지된다. 예를 들어, 사회주의를 보자. 모택동이 행한 것은 기실 스탈린주의이다. 심지어 스탈린보다 더욱 극단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소련공산당20대이후, 스탈린의 폭정은 전세계에 폭로되었고, 악명을 떨치게 되고, 불명예스러운 것이 되어 더 이상 사람의 마음을 끌지 못하게 되었다. 모택동은 우리는 소련모델을 그대로 가져올 필요가 없다. 스스로 중국특색의 사회주의의 길을 탐색해야한다고 주장하게 된다. 그 말에 숨은 뜻은 우리는 스탈린과 무관하고, 코민테른과 무관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여러가지 옛날 일들을 꺼내서 설명한다: 무슨 획강이치(劃江而治)를 반대했다든지, 공산국제로부터 탄압을 받았다든지, 결국 소련과 중국은 서로 다르고 같지 않다는 것이다. 기실 아는 사람은 모두 알고 있다. 소련, 코민테른이 배후에서 도와주지 않았더라면, 스탈린이라는 태상황이 지원해주지 않았더라면, 모택동의 무장투쟁이 어떻게 승리를 거둘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천하를 얻고난 후, 모택동의 황권독재의 모습은 그대로 드러나게 된다. 그의 그 중국식 사회주의는 토지개혁이라믄 명목으로 다른 사람의 전답을 빼앗고, 국유화라는 명목으로 사회를 강점하며, 결국 계속혁명으로 가다가 천인공노하여 파산에 직면한 것이다. 1970년대말부터 시작된 개혁개방으로 이런 쇠락를 만회할 수 있었다. 그때 등소평이 솔직하게 한 마디를 했다. 사회주의가 무엇인지 우리는 잘 모른다. 말은 이렇게 했지만, 그는 이론무허회(理論務虛會)에서 4개견지(堅持)를 얘기한다.그 중의 하나가 바로 사회주의견지이다. 등소평의 그 견지를 우리는 정치가가 공개적으로 내뱉을 수 없는 고충으로 이행한다. 좋은 방법이 따로 없는 상황하에서 그가 사회주의를 포기하고 개혁을 진행할 수는 없지 않았겠는가? 너무 말이 옆으로 샜다. 중국특색으로 되돌아가보기로 하자.
중공에 있어서, 새로운 용어를 만들어 개념을 바꾸는 수법은 유래가 오래되었다. 그 역사는 최소한 모택동의 연안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중공6기 6중전회때 <약간의 역사문제에 관한 결의>가 통과된다. 당내 약간의 중대한 역사문제에 대해 결론을 내리고, 동시에 이렇게 선포한다: "당은 분투과정에서 자신의 지도자 모택동동지를 만들어 냈고, 중국화된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사상체계인 모택동사상을 형성했다." 나중에는 소위 모택동이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중국혁명실천과 결합하여, 농촌으로 도시를 포위한다는 등등을 창조하고 발전시켰다고 말한다. 이것이 아마도 중공의 중국특색의 최초원형이 아닐까 싶다. 역사의 긴 강물에서 여러번의 변천을 거치고, 여러번의 시련을 거치면서, 마침내 "중국특색"이라는 깃발이 만들어진다. 그동안 두번의 유사하면서도 유명한 사례가 있었다. 하나는 소위 신계몽운동이다. 그리고 신민주주의이다. 그 방식은 중국특색과 이곡동공(異曲同工)의 의미가 있다. 그 결과는 모두 좋았던 것을 나쁜 것으로 바꾼 것이다. '중국특색'이 붙은 여러가지들에 대하여 사람들은 고도로 경계심을 가져야 한다. 왜냐하면 중국특색은 네글자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 경계를 정할 수가 없다. 거기에 포함된 의미나 개념을 확정할 수가 없다. 이런 사이비의 모호한 개념은 가장 쉽게 다른 것으로 바뀔 수 있고, 가장 쉽게 사적인 것이 끼어들 수 있고, 그리하여 결국은 뭐가뭔지 모르게 되어버리는 것이다. 모택동의 소위 중국혁명의 실천과 결합했다는 말은 결국 진시황과 결합했다는 말이 아닌가? 중국특색이 무엇인가? 정치, 경제, 문화등등의 방면을 보면, 예로부터 지금까지 낙후와 진보가 함께 하고, 조박(糟粕)과 정화(精華)가 병존한다. 그 어디에 긍정적이기만 하고 부정적인 면은 없는 중국특색이 있단 말인가? 중국만 그런 것이 아니다. 고금중외가 모두 예외는 아니다. 전족은 절대적으로 중국특색이다. 그러나 중국특색이라고 하여 모든 여인들이 발을 싸매도록 해야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처첩제도도 중국특색이다. 중국특색이므로 우리는 첩을 들여도 된다는 것인가? 삼궤구고(三跪九叩)는 중국특색이다. 중국특색이라고 얘기하면서 서로 만나면 악수를 하지 않고, 무릎을 끓고 절을 해야한단 말인가? 그런 것은 황당한 일이다. 기실 중국사회가 수천년간 바뀌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다만 만일 중국특색으로 그런 책임을 부인하려 한다면, 그 어느 정치가도 감히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런 황당한 일이 다시 나타나지 말라는 법은 없다. 소위 중국특색은 단순히 문경지치, 성당시기의 그런 휘황한 면만 있는 것이 아니다. 뼛속까지 썪고 낙후한 것이 있다. 하물며 우리는 2천여년의 황권제도의 역사적 짐을 지고있다. 이건 중국특색이 아니란 말인가? 정치문화로 말하자면, 중국특색이라는 이 용어는 총명해보이지만 기실 황당무계한 것이다. 중국근대사상, 중국특색의 황당한 일이 없지도 않았다. 가장 황당한 일은 태평천국시기 홍수전의 '기독교'이다. 태평천국(1851-1864)은 청나라후기에 농민이 창건한 농민정권이다. 1851년 금전기의에서 1864년 천경(지금의 남경)함락까지 13년간 존속했었다.
홍수전(1814-1864)은 태평천국의 창건자이며 사상지도자이다. 원래 이름은 인곤(仁坤)이다. 광동 화현(花縣) 사람으로 도광연간 연이어 과거에 실패한다. 그리하여 초기기독교의 교의를 받아들여 배상제회(拜上帝會)를 만들고, <원도구세가(原道救世歌)>를 서서 포교하고, 옛날의 "천하위공(天下爲公)"의 태평성세를 이루자고 주장한다. 홍수전이 접촉한 기독교는 양발(梁發)이 쓴 <권세양언(勸世良言)>에서 시작한다. 이는 9가지 소서(小書)를 포함한 포교집으로, 마예손(馬禮遜)이 대신 모아서 인쇄했다. 이 책 <규시양언(規時良言)>은 홍수전 기독교의 기초가 된다. 나중에 선교사 Meadow가 1856년 책을 써서 중간에 양발이 홍수전에게 미친 영향을 설명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홍수전과 그의 친구 풍운산(馮雲山)이 다른 성으로 가서 선교하겠다고 결심하고, 필묵을 판매하여 생계를 유지했다. 그건 그가 양발의 책에 기록된 '선지자가 집밖에서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말과 사도행전 19장의 바울행전에 영향을 받은 것이다."
1843년 7월, 홍수전과 풍운산등은 배상제회를 건립하고, 자칭 상제의 아들이라고 한다. 그리고 상제를 천부(天父), 예수를 천형(天兄)이라 칭한다. 그리고 양수청(楊秀淸)등과 이 책 <규시양언>을 그들 선교의 기본서로 삼는다. 비록 그렇기는 하지만, 홍수전은 과거합격의 길을 완전히 포기하진 않았다. 1847년 그가 세번째로 과거에 실패하고나서야 비로소 절망한 그는 교회에 가입하기로 하고, 미국 침례교회 나효전(羅孝全, Issachar Jacox Roberts, 1802-1871)목를 찾아간다. 그는 목사와 몇달간 함께 지내며, 기독교의 교의를 배운다. 그는 목사에게 세례를 부탁했으나, 나목사는 그의 신학에 대한 인식을 인정하지 않아, 세례를 거절한다. 홍수전은 실망한 나머지, 돌아가서 계속하여 그의 배상제회를 유지하며, 널리 선전하고 비밀리에 연락한다. 당시 청나라조정은 비밀결사에 대하여는 엄격하게 단속하였고, 배상제회는 자연히 단속대상이었다. 그는 할 수 없이 홍콩으로 도망쳤고, 홍콩에서 다시 교회와 접촉할 기회를 갖는다. 독일 선교사 곽실엽(郭實獵, Karl Friedich August Guetzlaff, 1803-1851)에게 기독교신학을 배운다. 이때 그는 처음 성경을 접한다. 홍수전은 다시 한번 교회에 가입하겠다고 청하지만, 다른 신도들의 배척으로 세례를 받지 못한다. 홍수전이 정식으로 기독교에 가입했는지 여부에 대하여 학술계에는 논쟁이 있다. 또 다른 설에 따르면, 홍수전이 <원도각세훈(原道覺世訓)>을 쓰는 동시에 기독교에 정식 가입했다고 한다. 태평천국이 실패한 후, 비로소 사람들은 그가 기독교도였다는 것을 부인했다고 한다. 진위가 어떠하든지간에, 참가했든 말든, 홍수전과 교회목사가 접촉하고, 기독교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는 일찌기 양발이 쓴 문자로 포교하는 방법을 취했고, 적지 않은 포교서적을 썼다. 비록 그러하기는 하지만, 기독교에 대하여 홍수전은 기껏해야 막 입문한 신도였고, 신학에 대하여는 보통목사의 자격조차 없었던 것이다. 더더구나 종파를 만들 성도라고 할 수는 없었다. 기이한 일은 바로 이처럼 겨우 조금 알고 있고, 신도신분마저도 헛점이 있는 소위 기독교도가 기독교를 명목으로 중국절반을 석권하는 큰 일을 해낸 것이다.
태평천국의 이론강령에는 <원도구세가>, <원도구세훈>, <원도각성훈>등 여러 책이 포함된다. 그러나, 기이하게도, 홍수전의 태평천국은 비록 서방의 기독교 교의와 중국유가의 대동사상(大同思想), 농민의 평균주의(平均主義)를 결합했다고 말하지만, 기독교신학에 대하여 그는 거의 하나도 알지 못했다. 기껏해야 처음 종교에 입문한 신도수준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사상은 기실 전부 중국국적의 선교사 양발이 쓴 <권세양언>에 뿌리를 두고 있다. 나중에 외국선교사들이 이 일을 알고, 그에게 성경의 도리를 이야기하려고 시도했으나, 오히려 홍수전은 이단이라고 배척한다. 그러나, 그는 시종 기독교의 깃발을 내걸고, 말마다 천형, 천부를 외쳤고, 말마다 "너희는 천부의 자녀이다"라고 말하면서 이를 통해 인심을 응집시키고, 사기를 고무시켰다. 도광30년(1850년) 홍수전이 금전촌에서 거병할 때, 만명의 무리를 이끌고 두 달도 되지 않아 영안(永安)을 점령하고, 홍씨를 천왕으로 받든다. 이제 태평군의 기세는 막을 수 없을 정도가 되었고, 파죽지세로 연이어 수십개 도시를 점령하며, 청병은 우수수 무너졌다. 얼마 후에는 호남을 함락시키고, 수륙으로 병진하여, 8개월도 지나지 않아 남경으로 진입하여 태평천국을 건립한다. 태평군은 왜 이렇게 강했을까? 거기에는 자연히 민족사상(民族思想)의 고취도 있었을 것이다. 사람들은 구제달로(驅除韃虜)를 희망했고, 한족의 광복을 바랐다. 그래서 만인(滿人)을 요마(妖魔)라고 불렀고, '요마를 모조리 죽여버리자'는 구호를 내세운다. 그러나 홍수전의 '기독교'가 미친 영향도 평가절하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왕왕 그 점은 회피한다. 홍수전이 처음 출병했을 때의 격문을 보자. 첫부분은 만주족의 죄악을 나열하고, 이어서 자신은 천부, 천형의 명을 받아 인민을 구하기 위해 왔다고 말한다. 이 천오백자에 이르는 격문의 첫째가 "천부천형이 나를 진성주(眞聖主)로 명하여 하늘에서 세상으로 내려오게 했다"는 것이고, 둘째가 "너희 관민등은 모두 천부의 자녀이다"라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의거의 목적을 선전할 뿐아니라, 동시에 홍수전 '기독교'를 포교하는 내용이다. 그들의 군대도 이런 종교분위기에 휩싸여 있었다. 태평군이 정한 군율에도 곳곳에서 종교의 깃발을 내건다. 예를 들어, 군영규칙 제1조는 '천명을 반드시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는 "천조(天條)를 찬미하고, 아침 저녁으로 예배하며, 규칙에 감사하고, 반포한 조유를 잘 익혀야 한다"는 것이다. 그 어느 의식도 기독교를 따라배우지 않은 것이 없다. 소위 천조(天條)는 기독교의 십계명을 가리킨다. 그리고 매 계명의 아래에는 극히 보통의 칠언사구의 글을 덧붙였다, 혹은 그것을 시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예를 들어, 제1조의 아래에는 이렇게 덧붙였다: "황천상제시진신(皇天上帝是眞神), 조석예배자초승(朝夕禮拜自超昇), 천조십관당준수(天條十款當遵守), 절막귀미매성진(切莫鬼迷昧性眞)" 그 나머지 각조의 아래에도 이런 시가 붙어 있다. 이는 형식적으로 기독교의 찬송시에서 본받은 것이다. 다만 말투는 홍수전이 완전히 중국화, 통속화시켰다. 형식적으로 이러하기는 했지만, 신앙의 최종목표는 기독교와 전혀 맞지 않는다. 그외에 홍수전도 소위 신견조성서(新遣詔聖書), 구견조성서(舊遣詔聖書)같은 류의 포교에 관한 글이 있지만, 성경을 삼자경(三字經)으로 편성하여 아동들도 쉽게 읽을 수 있게 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황상제(皇上帝), 조천지(造天地), 조산해(造山海), 만물비(萬物備), 육일간(六日間), 진조성(盡造成), 인재물(人宰物), 득광영(得光榮)"같은 식이다. 그러나 간판은 간판이고, 진정한 종교신앙은 같다고 할 수가 없다.
홍수전의 "기독교"는 어쨌든 겉모습이다. 그는 뼛속까지 이쳔년황권독재의 산물이다. 그가 남경을 점령한 후, 그 독재문화의 잔재는 어김없이 드러난다. 그러하기 때문에 진정한 기독교도들은 홍수전의 '기독교'를 인정하지 않았던 것이다. 홈즈의 남경여행기에서 이렇게 정곡을 찔러 지적한다: "홍수전은 사기꾼이 아니라면 무지한 광신도이다. 그의 사람은 모두 위험분자이다. 그의 조직은 도적집단이나 다를 바 없다. 그를 도적의 우두머리로 모셨을 뿐이다." 기독교를 가지고 얘기하면서 황권독재의 의발을 이어받아, 타가겁사(打家劫舍, 약탈강도를 가리킴)의 짓을 벌이는 것이야말로 홍수전 '기독교'의 진상이다. 역사는 왕왕 놀라울 정도로 닮아 있다. 홍수전의 '기독교'에서 모택동이 발전청조시킨 마르크스주의를 엿볼 수 있다. 그 배후에는 설마 홍수전의 유령이 있는 것일까?
홍수전의 장신농귀(裝神弄鬼)와 모택동의 자아조신(自我造神)은 하나는 기독교를 간판으로 내걸고, 다른 하나는 마르크스주의를 겉옷으로 걸쳤지만, 기실 뼛속까지 일구지학(一丘之貉)이다. 만일 홍수전이 '성고(聖庫)'라는 명목으로 '공산(共産)'을 꾀한 것이 사회의 부를 독점한 독창적인 제도라면, 모택동이 국가의 이름으로 사회의 모든 자원을 차지하고 독점한 것은 조그만치의 창의성도 없다. 그저 홍수전에게서 쓰레기를 주워와 다시 마르크스레닌주의의 겉옷을 입혔을 뿐이다. 마르크스주의를 말하자면, 국제파의 인사들도 인정하지 않는다. 모택동은 산골짜기의 마르크스레닌주의라고 공격하지 않았떤가? 기실, 모택동은 선상서(線狀書)로 길러진 사람이다. 뼛속까지 황권독재, 병가권모(兵家權謀)의 숭배자이다. 마르크스레닌주의에 대한 수준은 그저 아이스치(艾思奇, 중국철학자)의 <대중철학>정도이다. 홍수전이 양발의 <권세양언>에서 배운 것과 별 차이가 없다. 만일 모택동사상이 마르크스주의 의 중국화라면, 홍수전의 '기독교'도 중국화라고 할 수 있지 않은가. 중국특색이라고 하자면, 홍수전의 '기독교'야말로 모택동의 '마르크스주의'에 전혀 손색이 없다. 다만 이건 시종 간판이었을 뿐이고, 걷어내고 나면 역시 황권독재의 그림자이다. 한 짓이라고는 살인약탈의 짓뿐인 것이다. 중국특색이라는 간판은 홍수전, 모택동에 의해 잘 이용당했고, 일찌감치 악명을 떨쳐왔다. 그런데 오늘날에 이르러, 그런 점을 보지 못하고, 분명히 낡고 썩은 것임에도 이걸 정화로 여겨 스스로 좋은 계책을 얻었다고 생각하니, 실로 웃음거리가 되지 않을 수 없다. 중국특색이라는 이름으로 일당독재를 행하면서, 정치문명을 거절하고, 민주헌정을 억누르다니, 이런 거짓연극을 정말 계속해나갈 수 있을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