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장태염)

장태염(章太炎): 민국시기의 정치광인

중은우시 2024. 11. 1. 13:51

글: 장명(張鳴)

장태염(章太炎)은 지금 국학대사(國學大師)로 유명하지만, 청말민초때 그는 혁명가, 정치가로 유명했다. 단지 그의 정치가로서의 인생은 옛날의 책무더기에서 억지로 기어나온 것이다보니, 제대로 할 때는 그럴 듯했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엉망진창이었다. 그의 제자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선생은 학자인데, 학문을 얘기할 때는 졸다가도 정치를 얘기하면 바로 기운이 살아난다. 단지 그렇게 기운이 살아날 때 너무나 자기마음대로였기 때문에 어떤 때는 동지들을 웃지도 울지도 못하게 만들고, 또 어떤 때는 상대방을 웃지도 울지도 못하게 만든다.

장태염은 동맹회(同盟會)의 초기 핵심인원이었다. 도쿄에서 민보(民報)를 간행할 때 그가 크게 싸웠다. 만일 마구잡이로 욕해대는 글재주를 지닌 그가 없었더라면, 혁명당의 기세는 일찌감치 양계초(梁啓超)에게 짓눌렸을 것이다. 그러나, 금방 장태염은 손중산(孫中山)과 싸운다. 그저 동지들간의 내부싸움이 아니라 공개적인 결렬이었다. 민국초기에 정당이 이합집산을 거듭했는데, 장태염은 비록 열혈분자이기는 하지만, 계속하여 처음에는 동맹회, 나중에는 국민당의 반대편에 섰다. 그는 손중산을 싫어했고, 황흥(黃興)에게는 흥미가 없었으며, 심지어 원래 광복회(光復會)의 동지들과도 사이가 벌어진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반란을 일으킨 신군병사가 침대밑에서 끌어내서 부총통에 오른 여원홍(黎元洪)에 대하여는 아주 열정적이었다. 심지어 후처를 고를 때도 호북(湖北)여자를 취한다. 그래서, 원세개가 국민당을 압박할 때, 장태염과 그가 속한 공화당은 방조자이거나 최소한 수수방관자역할을 한다. 그러나, 원세개가 정식대총통에 오르자, 더 이상 국회라는 선거기관은 필요가 없어졌다. 그리하여 국민당의원의 증서를 회수하여 실제로 국회를 폐지시켜버린다(과반수가 되지 않으니 회의를 열 수가 없었다). 그제서야, 의회정치에 심취해있던 양계초와 장태염등은 비로소 꿈에서 깨어나듯이 깨닫게 된다. 그렇지만 이미 쌀은 익어 밥이 되었다. 후회해도 이미 늦은 것이다.

그러나, 장태염은 양계초가 아니다. 이렇게 쉽게 포기할 수는 없다. 그는 "중국에 한줄기 광명을 남기기 위해(爲中夏留一線光明)", "이 위기국면을 만회하기 위해(挽此危局)"(장태염이 제자와 부인에게 남긴 서신에 있는 말), 신혼이었던 그는 자신의 신부를 놔두고 북경으로 북상한다. 그리고 원세개를 찾아가서 따지려 한다(1913년 12월). 그리하여 그의 제자인 노신이 다음과 같이 묘사한 일막이 나타나는 것이다: "대훈장을 부채장식으로 달고, 총통부에서 소동을 벌이다" 이건 당시의 <신보>(1914년 1월 14일)의 내용이다: 장태염은 손에 단선(團扇) 하나를 들고, 아래에는 훈장을 매달고, 발에는 낡은 군화를 신고, 총통을 만나야겠다고 소동을 부린다. 승선관이 막자, "미친 듯이 소리치면서 소란을 멈추지 않았다." 또 다른 관방기재에 따르면, 장태염은 욕을 했을 뿐아니라, 가구같은 물건들도 부수었다.

장태염이 이렇게 성깔을 부리자, 원세개는 더 이상 난감할 수 없을 정도로 난감해진다. 그리하여 대외적으로 "장태염이 미쳤다"고 말하고, 경성의 헌병두목 육건장(陸建章)의 수하들이 그를 치료한다는 명목으로 끌고갔다. 실제로는 연금당한 것이다. 이때부터 2년여동안의 연금생활이 시작된다.

장태염은 연금당했지만, 돈은 마음대로 쓸 수 있었다. 장태염의 부인 탕국리(湯國梨)도 이렇게 말했다: 장태염이 연금당한 기간동안, 매월 비용 500원을 썼다.(당시 경찰의 한달 급여가 4원가량이고, 대학내에서 가장 잘나가던 교수의 월급도 400원이었다). 이 시기는 분명 장태염의 일생에서 가장 돈을 마음대로 쓰던 시기라 할 수 있다.

대우는 좋았지만, 구금은 구금이다. 이건 장태염이 소란을 부린데 대한 징벌이자, 더더욱 원세개로서는 미래의 가능한 불안정요소에 대한 방비였다. 당연히, 장태염이 기꺼이 그에 따를 사람은 아니다. 그는 계속하여 소동을 부렸다. 그러나 당시의 조건하에서 글을 쓰는 것도 불가능하고, 욕을 해봐야 원세개가 들을 수 없다. 그리하여 그는 그를 연금하는 경찰들을 괴롭히기 시작한다. 장태염은 가난한 서생이고, 평생 돈이 없었다. 생활도 극히 검박했다. 그러나 그는 연금기간 한꺼번에 10여명의 요리사와 하인을 고용한다(그는 당연히 알았다. 이들이 실제로는 경찰이라는 것을). 그리고 어르신행세를 한다. 이들에게 자신을 '대인'이라고 부르게 하고, 그의 손님이 오면 '노야'라고 부르게 했다. 부르면 두 손을 앞으로 모으고 고개를 숙이게 했으며, 매월1일과 15일에는 그를 향해 절을 하게 했다. 잘못을 저지르면 벌로 꿇어앉거나 벌금을 내게 했다. 이런 모욕을 제대로 주기 위해 그는 심지어 이들(실제로는 경찰)에게 그 조선대로 서약서를 써서 서명하고 지문을 찍게 했다.

경찰들을 혼내주면, 화가 풀리기는 하지만, 어쨌든 원세개에게 미치지는 못한다. 심지어 육건장, 주계검(朱啓鈐)에게도 닿지 않는다. 같여서 어르신노릇을 하면서 부리는 사람들이 떠받들어주는 말을 듣지만 시간이 오래되니 그래도 기분이 풀리지 않았다. 그리하여 장태염은 단식을 시작한다. 그러나 장태염이 비록 미치광이에 고집불통이지만, 이번의 단식은 정말 목숨을 걸고 항쟁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이를 통해 반응을 살펴보려는 것이고, 원세개에 대한 불리한 여론을 조성하여, 이 간웅을 난감하게 만들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장태염의 단식은 하다가 중단하고, 다시 하기를 반복했다. 1년여가 흘렀지만 죽지 않았다. 단식하지 않을 때는 식사할 때 반드시 은식기를 고집했다. 원세개가 독을 넣을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알고 있다. 장태염의 연금은 원세개의 칭제가 실패하고 죽은 후에 끝났다는 것을. 그동안 비록 원세개는 공개적으로 그를 욕하는 소리는 듣지 않을 수 있었지만(양계초 하나만으로도 이미 충분했다), 장태염도 이를 통해 자신의 명성을 되찾을 수 있었다. 민국초기의 일들을 이제 아무도 언급하지 않는다. 그 자신의 이미지는 이제 다시 옛날의 영광을 되찾은 것이다. 그의 제자들도 그의 일생을 얘기할 때, 이 시기의 역사를 거의 전설처럼 얘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