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선왕(忠宣王) 왕장(王璋): 티벳(西藏)으로 귀양간 고려왕
글: 자귤(紫橘)
고대 중국과 조선의 관계는 오호난화이후 적지 않은 변화가 발생한다. 그후 중원왕조는 거의 조선반도의 일에 더 이상 관여하지 않았다. 다만 원(元)나라는 예외이다. 조선반도는 명목상으로는 독립정권이었지만, 원나라의 번속국으로 쌍방은 생구(甥舅, 조카와 외삼촌)관계를 건립한다. 다만, 원나라는 언제든지 조선반도의 일에 간섭할 수 있었다. 그 전형적인 사례는 바로 원영종(元英宗)이 고려(高麗)의 충선왕(忠宣王) 왕장(王璋)을 티벳(西藏)으로 유배보냈던 일이다. 원영종이 왜 일국의 왕을 유배보냈을까?
- 최초의 몽골-고려혼혈왕
고려의 충선왕 왕장의 부친은 충렬왕(忠烈王) 왕거(王昛)이다. 모친은 원세조 쿠빌라이의 딸 원성공주(元成公主) 쿠틀룩켈미쉬(忽都魯揭里迷失)이다. 왕장은 1274년에 태어났으며, 다음 해에 세자(世子)로 책봉된다. 그는 최초의 몽골-고려혼혈의 세자로서 원나라의 관심과 기대를 한몸에 받았다. 원나라는 그에게 특별히 몽골이름까지 붙여준다: "이지르부카(益智禮不花)" 그 뜻은 숫송아지라는 뜻이다. 그가 숫송아지처럼 잘 성장하기를 희망하는 뜻이 담겨 있다.
1292년, 왕장은 대도(大都, 지금의 북경)로 가서 숙위(宿衛, 황궁의 호위를 뜻함)를 한다. 그는 예의바르게 행동하여 유학자다워서 원나라조정의 호평을 얻는다. 원성종(元成宗) 테무르(鐵穆耳)는 조카를 보탑실련공주(寶塔實憐公主)로 임명하여 그에게 시집보낸다. 원나라는 이번 혼인을 아주 중시했다고 볼 수 있다. 그녀의 조부는 원세조의 적자(嫡子)인 원현종(元顯宗) 진킴(眞金)이고, 부친은 진킴의 적장자(嫡長子) 카말라(甘馬剌)이다. 카말라는 황위계승투쟁에서 패배하여 황위를 셋째동생 테무르에게 빼앗겼다. 이를 보면 보탑실련공주의 혈통은 고귀하고 황금가족의 적계출신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2. 새로운 후원자
1298년, 원나라의 요구로, 일생동안 16번이나 중원으로 가서 원나라황제를 알현하고, 최초로 원나라공주와 결혼하고, 원나라에 더할 수 없이 공손했던 왕거는 세자 왕장에게 왕위를 넘겨준다. 그러나 왕장은 즉위후에 조금 달라진다. 즉위후 8개월만에 중서성(中書省)의 탄핵을 받아 폐위되고, 충렬왕 왕거가 다시 왕위에 오른다. 중서성에서는 그저 "죄가 있다"고만 했는데, 지금 추측해보면, 그가 원나라공주를 냉대하고, 다른 후궁을 총애한 것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그후 왕장은 다시 대도로 들어와 숙위를 한다. 그러나, 비극태래(否極泰來)라고 생각지도 못하게 대도에서 귀인을 만난다. 그와 함께 숙위를 서던 종실 카이산(海山, 나중의 원무종(元武宗))과 아유르바르와다(愛育黎拔力八達, 나중의 원인종(元仁宗))형제와 관계가 아주 좋고, 거의 형제같았다. <고려사>에는 이렇게 적고 있다: "무종, 인종은 잠룡인데, 두 사람은 왕장과 같이 자고 일어났으며 밤낮으로 서로 떨어지지 않았다."
1307년, 원성종이 사망하고, 원나라에서는 권력투쟁이 발발한다. 다행히 아유르바르와다가 색목인과 이슬람교를 신봉하는 아난다(阿難達)을 격파한다. 이 과정에서 왕장은 확고하게 카이샨형제의 편에 선다. 카이샨이 등극한 후, 논공행상을 할 때, 왕장은 "추충규의협모좌운공신(推忠揆義協謀佐運功臣)"을 수여받고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부마도위(駙馬都尉), 상주국(上柱國)의 관직을 수여받고, 심양왕(瀋陽王)에 봉해진다. 같은 해 7월, 왕장은 고려로 돌아가 고려왕위를 승계한다. 이렇게 되니 그는 왕의 작위를 두 개 가지게 된다. 11월, 왕장은 다시 대도로 들어와 정착하며, 멀리서 고려의 국정을 이끈다. 그리고 태위(太尉)의 직위를 하사받고, "심왕(瀋王)"으로 개칭된다. 중국역대왕조의 법도에 따르면, 1글자 왕은 종실친왕이고, 2글자왕은 군왕(郡王)이다. 이를 보면, 원나라는 정말 왕장을 자기 사람으로 여겼던 것으로 보인다.
3. 액운의 강림
왕장은 오랫동안 대도에 머물게 되다보니, 그는 고려왕의 왕위는 아들에게 넘겨주고, 심왕의 왕위는 조카에게 넘겨준다. 그리고 원무종이 그에게 태위의 관직을 내렸으므로 그는 스스로 태위왕(太尉王)이라 칭했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고려태상왕(高麗太上王)이라고 불렀다.
1319년, 원인종은 왕장에게 절강의 보타산으로 가서 황실을 대표하여 보살을 조배(朝拜)하도록 명한다. 이를 보면 그를 얼마나 신임하고 좋아했는지 알 수 있다. 그러나 원인종이 죽자 왕장 인생의 운의 수레바퀴는 완전히 뒤바뀌게 된다.
1320년, 원인종이 사망하고, 그의 아들 원영종(元英宗) 시데발라(碩德八剌)가 황위를 이어받는다. 그러나 원영종은 순행중인 고모부 왕장이 조정으로 돌아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6월, 원영종은 사람을 보내 진강(鎭江) 금산사(金山寺)에 그를 구금하고, 다시 그를 대도로 압송한다. 12월, 원영종은 직접 명을 내려 왕장을 티벳 살가(薩迦, 지금의 시가체(르카쩌))로 보내 불법을 공부하게 한다. 실제로는 그를 티벳에 유배보낸 것이다.
조서를 받은 날부터 왕장은 서행길에 나선다. 그와 고려신하 박인간(朴仁干), 장원지(張元祉)등 18명은 반년이 걸려 비로소 티벳유배지에 도착한다. 그는 2년간의 유배생활을 겪은 후 1323년초, 고려의 대신 이제현(李齊賢)이 대도에서 중서성승상이자 원영종의 총신인 바이주(拜住)에게 왕장의 처지를 읍소하며 돌아오게 해줄 것을 간청한다. 바이주의 노력으로, 원영종은 왕장을 타사마선위사사(朵思麻宣慰使司, 지금의 감숙성 임하)로 옮기게 되어, 그의 상황은 조금 호전된다. 같은 해 8월, 원영종이 남파지변(南坡之變)으로 피살당하고, 9월 태정제(泰正帝)가 등극하며 천하에 대사면령을 내린다. 그리하여 왕장은 대도로 돌아올 수 있었고, 다음 해에 사망하니, 향년 51세였다.
원나라황제의 총애를 받아가 황제에게 버림받기까지 짧은 몇년간 왕장의 처지는 하늘과 땅처럼 바뀌었다. 그럼 그의 처지는 왜 다시 역전된 것일까?
4. 왕장이 유배를 가게된 진실한 원인
이제현의 <충헌왕세가>에 따르면, 바얀퇴귀스(伯顔禿古思)는 고려인으로, 스스로 환관이 되어 입궁했으며, 원인종의 집에서 일했다. 그리고 나이어린 시데발라와 사이가 좋았다. 그러나 그가 여러번 불법적인 일을 저지르자, 왕장이 그를 싫어하게 된다. 바얀퇴귀스도 그 점을 잘 알았고, 황위교체기에 왕장에 대한 나쁜 얘기를 많이 해서 원영종이 왕장을 유배보내게 된 것이라고 한다. 이 기록을 보면, 왕장이 유배된 원인은 소인의 무고때문이다. 그러나 진상이 정말 그렇게 간단한 것일까?
원영종이 한 나라의 국왕을 손쉽게 귀양보냈다는 것은 자연히 원나라와 고려의 특수한 관계때문일 것이다. 원나라와 고려의 관계는 원세조시기에 건립되었다. 이를 대표하는 것이 쌍방간의 정략결혼이다. 성과는 바로 왕장의 출생과 즉위이다. 왕장의 존재는 원나라를 정치적으로 고려의 종주국으로 만들 뿐아니라, 종법혈연상으로도 고려왕실은 황금가족의 한 갈래가 된다. 왕씨집안의 지계(支係)는 반드시 황금가족인 본계(本係)에 복종해야 한다. 이런 수단을 통하여, 고려는 완전히 원나라의 부속국이 되는 것이다. 원나라는 국왕의 폐립을 통해 고려를 통제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원나라시절의 고려는 기실 중앙통제하에 있는 군현과 별 차이가 없었다고. 이러한 상황하에서 왕장은 국왕의 존엄을 유지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훼형역복(毁形易服), 원찬토번지지(遠竄吐蕃之地)"하는 곤경이 나타난 것이다.
다만 우리가 다시 이제현의 글을 보면 분명히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중상모략을 당한 것이 왕장이 유배를 간 원인이라고 하지만, 구체적으로 무슨 죄명을 뒤집어 썼는지에 대하여 이제현은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다. 원영종은 절대로 혼군이 아니다. 겨우 몇 마디 중상모략하는 말에 자신의 고모부를 유배보내진 않았을 것이다. 다시 1323년 이제현이 바이주에게 읍소할 때의 말을 보면, "수집미불오(雖執迷不悟), 죄지망가(罪至罔加), 원기본심(原其本心), 고역무타(固亦無他)....혁신개과(革新改過)"(비록 잘못된 길로 빠져 깨닫지 못하고, 지은 죄가 더할 수 없이 크지만, 그 본래 마음은 다른 것이 없습니다...그리고 새로 바뀌어 잘못을 고쳤으니..). 여기의 '집미불오' '혁신개과'를 보면 왕장에게 죄가 있었음이 분명해 보인다.
또 어떤 사람은 왕장이 불법에 깊이 빠져서 유배를 갔다고 말한다. <고려사>에는 왕장이 "집미이획죄(執迷而獲罪)", "집미획려어천(執迷獲戾於天)"이라고 되어 있고, 고래대신 민지(閔漬)의 <고려국첨의찬성사사대장경기>에도 "심신승연(深信勝緣)"이라고 되어 있다. 다른 기록을 보면, 원영종이 그를 유배시킬 때의 이유는 확실히 '불법에 탐닉한다'였다. 그러나 불법에 탐닉하는 것이 큰 죄인가? 왕장은 보통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는 원나라의 외손자, 부마이니 황금가족의 일원이다. 황금가족의 일원이 먹고 마시고 계집질하고 도박하는 것은 죄라고 볼 수가 없는데, 불법에 탐닉하는 것은 고상한 일이 아닌가. 그런데 어찌 유배갈 일이란 말인가? 이를 보면, 왕장이 유배를 가게 된 것은 적지 않은 소인들에게 밉보였기 때문이거나, 불법에 빠진 것처럼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닐 것이다.
왕장은 황금가족의 일원으로 그에게 큰 정치적 자원을 가져다 주었다. 고려에서는 절대적인 통치지위를 가지고 있었고, 원나라로부터 좋은 대우를 받았다. 소위 "총권무출기우(寵眷無出其右)"(총애와 보살핌을 받는 것이 그를 따를 자가 없었다). 다만 마찬가지로 이런 모습의 뒤에는 부정적인 영향도 있을 수밖에 없다. 원나라의 황실은 내부투쟁을 통해서 황위에 오르는 전통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안정적인 후계자제도를 두지 않았다. 왕장은 몽원황실의 인물로 오랫동안 대도에 머물렀으니, 황실의 권력투쟁에 관여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앞에서 얘기한 것처럼 원성종말기, 왕장은 이미 원나라의 권력투쟁에 깊이 발을 담궜고, 대도지변에 참여했다. 원무종, 원인종조에 그래서 그는 잘나갔던 것이다. 원무종, 원인종의 모친 다기(答己)는 이미 황태후에 올랐고, 원래 자신의 분수를 지키며 조용히 살아야 했다. 그러나 원인종이 일찌감치 사망하자 다기는 가만히 있지 않았다! 원인종, 원영종의 한화정책은 유목민족의 보수적인 귀족의 반대에 부닥쳤고, 그들은 다기의 아래에 뭉쳐서 강대한 반대세력을 형성한다. 그래서 원영종은 등극초기 태황태후이자 조모인 다기와 투쟁해야 했다.
왕장은 대도에서 자신의 세력집단을 가지고 있었고, 쌍방이 서로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는 대상이었다. 그러나 분명히 이번에 왕장은 줄을 잘못 선 것이다. 그는 태황태후의 편에 섰다. 이는 <고려사.충선왕세가>에서 확인된다. "왕장은 명을 받아 왕위에 복귀했으나, 첨사부시(諂事婦寺)하여, 연경에 남아 있었다." 여기의 "부(婦)"는 분명 원무종, 원인종의 모친인 다기를 가리킨다. 이를 보면 왕장이 티벳으로 유배간 것은 권력투쟁의 결과였던 것이다!
결론
왕장이 티벳으로 유배를 간 일은 원나라의 정치생태를 반영하는 외에 원나라와 고려간의 특수한 관계를 집중적으로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황제가 이렇세 손 쉽게 외국의 번왕을 유배보내다니, 이를 보면, 원나라와 고려의 관계는 이미 종주국-번속국의 관계를 넘어 완전히 중외일가가 되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러므로, 왕장의 일은 원나라의 대외관계사에서 중요한 영향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