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춘참안(長春慘案): 수십만명이 굶어죽은 죽음의 도시
글: 가람(歌藍)
2016년 8월 23일
도쿄의 일본학자 엔도 호마레(遠藤譽)가 작년 저서를 통해 전중공지도자 모택동(毛澤東)이 항전기간 일본과 결탁한 역사기록을 폭로한 후, 1984년 그녀가 일본에서 출판한 <챠즈(卡子) - 출구가 없는 대지>에서 그녀가 중국 장춘에서 겪은 도시포위의 고난을 회고한 책이 다시 국제적으로 주목을 받고 있다. 이 책의 영문판은 <Japanese Girl at Siege of Changchun>으로 8월 미국에서 출판되었고, 미국의 싱크탱크 2049연구소의 초청으로 워싱턴으로 가서 강연하기도 했다.
<차즈 - 출구가 없는 대지>는 1941년 중국 장춘에서 태어난 도쿄복지대학 국제교류센터 주임 엔도 호마레 교수가 그녀가 중국에서 겪은 일본의 중국침략, 국공내전, 중화인민공화국탄생등 파란만장한 유년기를 회고한 것이다. 특히 1948년 공산군이 장춘을 포위하면서, 국공내전의 총탄, 도시포위봉쇄의 기근, 시체더미의 "차즈(卡子, 공산군이 장춘을 포위할 때 철조망으로 두 겹의 포위망을 만들었는데, 그 사이의 공간을 가리킴)"를 빠져나와 그녀가 중국을 떠날 때까지 심신이 겪은 큰 상처를 기록한 이야기이다.
중문판의 어려움
엔도 호마레는 장춘시의 금연약(당시의 금연은 아편을 끊는 것을 가리킴) "길복덕록(吉福德祿)"을 개발하고, "신경제약창"을 경영하던 오쿠보(大久保)라는 성의 일본인집안에서 태어난다. 위로 오빠, 언니가 있고, 아래로 남동생과 여동생이 있었다. 엔도는 그녀가 결혼한 후에 남편의 성을 따른 것이다. 그녀의 부친 오쿠보선생은 금연약을 성공적으로 개발하여 2차대전후 일가가 중국에 머물렀다. 1953년 그녀는 가족을 따라 일본으로 귀국한다. 30년후, 그녀는 어린 시절을 회고한 책 <불합리한 그쪽>을 내고, 그후 다시 장춘포위와 귀국전에 겪은 세뇌, 비투의 고난을 서술한 책 <차즈(卡子)>를 내놓았다.
1990년대 <차즈>는 중국어로 번역된다. 일찌기 중국사회과학원 사회학연구소의 객좌연구원 및 상해교통대학 객좌교수를 지낸 엔도는 중국에서 출판하려고 했지만, 거의 모든 출판사로부터 "너무 민감하다"는 이유로 거절당했다. 2011년, 엔도는 다시 알고 있는 중국노간부에게 이 책의 출판을 도와줄 것을 부탁했다. 그 노간부는 이렇게 말했다: 나의 친척도 차즈사건을 겪었다. 그러나 이 책을 출판하는 것은 "역시 좀더 시간이 필요할 것같다...아마 그렇게 오래 기다리지는 않아도 될 것같다."
그녀가 살아있을 때 그 역사를 알리고 싶었던 엔도는 마음이 조급해졌다. 그리하여 2012년 9월 중국에서 반일운동이 일어나, 분청(憤靑)들이 '소일본(小日本)' '일본귀자(日本鬼子)' '일본구(日本狗)'를 외치자 엔도의 60년전 중국에서 겪은 옛 상처를 찌르게 된다. 10월 1일 집안에 중국CCTV채널을 달았던 엔도는 CCTV에서 "너 행복하냐?"라고 묻는 장면이 나오자, 비분이 교차했고, 중국대륙이외에서 <차즈>의 중문판을 출판할 결심을 하고, 2014년 대만의 낙과문화출판사에서 출판한다.
전란중 삶을 위한 노력
1945년 일본이 패전을 설포하기 전인 8월 9일, 소련은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고, 일본 관동군은 도시를 버리고 도망친다. 장춘은 불안과 소란에 휩싸이고, 엔도 일가는 소련군에게 약탈당한다. 1945년 11월 국군이 장춘에 진주한 후, "신경제약창"을 접수하여 "장춘시영제1제약창"으로 명칭을 바꾼다.
1946년 4월, 공산군이 장춘을 공격한다. 5살된 엔도는 창문을 열고 석양을 보다가, 오른팔에 유탄을 맞아 부상을 입는다. 5월하순 공산군이 장춘을 철수하기 전에, 당시 중공장춘시위서기 임풍(林楓, 건국후 중공중앙인민정부위원회위원, 전 국가주석 유소기의 비서)이 오쿠보를 찾아와 "길복덕록"을 내놓으라고 요구한다. 큰 트럭에 "길복덕록"을 가득 싣고 출발하기 전에 비록 쌍방 모두 다음 날이면 군표는 휴지조각이 될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임풍은 오쿠보에게 한 무더기의 군표를 주면서 말했다: "고맙다, 당신의 공헌을 우리는 잊지 않겠다." 그리고 하나의 베조각에 소속부대, 성명을 쓰고 큰 도장을 찍어서 엔도의 부친에게 주면서 말했다: "우리는 반드시 돌아온다. 당신은 그때까지 기다려라. 만일 선생이 해방구로 가고, 거기에서 무슨 곤란이 있으면, 이걸 그들에게 보여주어라, 그러면 누구든지 당신을 도와줄 것이다."
1946년 7월 국민당정부는 장개석의 "이덕보원(以德報怨, 덕으로 원한을 갚는다)" 정책으로 장춘의 일본인을 일본으로 돌려보내기 시작했다. 오쿠보는 소수의 장춘에 남은 고급기술인원이 된다.
1947년 입추전에 2차로 일본인들이 떠난 후, 공산군은 도시를 포위하고 전기, 수도, 가스를 끊기 시작했다.
힘든 생활가운데 엔도의 팔의 상처는 악화되었다. 대수(大嫂)는 병사하고, 조카는 굶어죽었다. 기아가 온 가족으로 하여금 고량주의 남은 술지게미부터 시작하여, 풀, 나뭇잎과 나무껍질까지 먹게 했다. 길거리에는 도처에 굶어죽은 시신과 시신을 먹는 개들이 있었다.
도시포위로 지옥이 되다.
비타민이 부족하여 피부는 썩고, 걷는 것도 힘들어진다. 엔도의 오빠가 아사한 후, 임풍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던 오쿠보는 해방구로 가기로 결정한다. 그러나 떠나기 전에 남동생도 굶어죽는다.
1948년 9월 20일, 오쿠보는 마지막으로 장춘에 남아 있던 90명의 일본인들을 데리고 걸어서 "차즈"에 도착한다. 그곳은 공산군이 도시를 포위한 이중철조망 사이의 구역이다.
일행은 썩은 시신, 마른 시신이 온 천지에 가득한 난민지대를 지나, 어둠 속에서 시신이 비교적 적은 지방을 찾아 잠을 잔다. 다음 날 깨어보니 시신뼈 위에서 자고 있었고, 옆에서 땅위로 나온 죽은 사람의 팔이 있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시신과 난민, 가까운 곳에는 사람을 먹는 성인, 피를 젖으로 알고 빠는 영아.....오쿠보는 임풍이 남긴 베조각을 들고 철조망의 문을 찾아갔다. 간수인 조선인 팔로군병사와 교섭을 진행했다. 그러나 90명을 데려가는 것은 안된다고 했다. 며칠 후, 일행은 마침내 오쿠보의 "길복덕록특허증명서"로 고급기술인원신분을 확인하고, 마침내 허락을 받아 "차즈"를 벗어나 해방구로 들어갔다.
그러나 일가는 계속 기아와 추위 속에서 피난다녔다. 엔도는 선명하게 그녀의 부상, 기아, 사별, 놀라움과 피난도중 일가가 주운 음식을 먹다가 중독되어 죽을 뻔한 일등을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 이는 그것이 7살짜리 여자아이의 심령에 얼마나 큰 타격이었을지를 말해준다.
죽어라 진상을 찾다
대부분 2차대전전에 중국에 살던 일본인은 일본이 패전한 후 일본으로 돌아갔다. 보기드물게 이후의 국공내전, 중화인민공화국을 겪은 일본인으로서, 엔도는 이 역사를 <차즈>출판을 통해 역사진상을 알리고자 했다.
그녀는 말했다: "중국은 나를 길러준 은혜가 있는 곳이다. 나는 말로 다할 수 없는 슬픔을 안고 진상을 알림으로써 차즈를 기념하는 묘비를 건립하여 희생자들의 혼을 위로하고자 했다. 중국인민은 그 역사의 진상을 알고 교훈을 얻을 권리가 있다."
엔도는 <차즈>를 쓰기 위해, 1990년대 장춘해방에 참여한 공산군병사를 인터뷰한 바 있다. 그 병사는 그가 본 장춘을 이렇게 설명했다: "길거리에 도처에 시신이 있어 길을 걷는 것조차 힘들 정도였다. 그러나 국민당군인은 보이지 않았다. 굶어죽은 사람은 모두 백성들이었다."
엔도는 말한다. 공산군이 장춘을 포위하여 국군의 양식을 차단함으로써 국군의 사기를 떨어뜨려, 투항하게 하려는 전략을 효과적이었다. 다만 굶어죽은 백성의 숫자에 대하여 중국정부는 12만 내지 15만이라고 한다; 국민당정부는 60만 내지 65만이라고 한다. 그녀 자신은 1947년의 장춘인구변화등을 조사한 근그에 따라 30만 내지 35만명으로 추정한다. "비록 정확하지는 않지만, 어쨌든 수십만명에 달했다는 것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중공은 장춘포위의 실수를 인정하지 않는다. 모택동은 임표와의 서신에서 이런 말을 했다: "장춘을 사성(死城, 죽음의 도시)으로 만들어버리자."
엔도는 말한다. 중공은 장춘참안을 묘사한 소설 <설백혈홍(雪白血紅)>의 출판을 금지하고 작가 장정륭(張正隆)을 체포했으며, <차즈> 중문판 출판을 봉쇄했다.
평생 오른팔에 장애를 안고 여러 병을 앓았던 엔도는 이렇게 말한다.
"중공은 혁명전쟁때 도탄에 빠진 인민을 구원하고, 모두를 민주와 광명의 미래로 데려가겠다고 약속했다. 그래서 인민들은 머리가 깨지고 피를 흘렸다. 그러나 지금 인민중국은 보이지 않는다. 약속은 어디로 갔는가?"
"나는 이미 75세이고, 남은 날이 얼마되지 않는다. 중국이든 일본이든 장춘참안의 실상을 알고 참극을 겪은 사람들이 하나하나 늙어서 죽어가고 있다. 나는 중공이 스스로 얘기할 때까지 기다릴 수가 없다."
"당연히 나는 내가 하는 일이 목숨을 걸어야 한다는 것을 안다. 다만 중공이 차즈의 진상을 인정하기 전에 나는 죽을 힘을 다해서 성과를 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