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궐전투(伊闕之戰): 전국시대의 분수령, 전신(戰神) 백기(白起)의 등장.
글: 서북낭(西北狼)
기원전293년, 진(秦), 한(韓), 위(魏) 3국간에 분수령적 의미가 있는 전투가 발생한다. 바로 이궐전투이다. 이 전투에서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낸 백기는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하며 24만의 한,위 연합군을 섬멸한다. 한, 위 양국은 이후 도마위에 놓은 고기처럼 진나라에 유린당한다. 이 전투를 복기해보기로 한다.
- 이궐전투전의 국제형세
기원전307년, 진무왕(秦武王)이 무거운 것을 들다가 죽은 후, 진나라 국왕의 자리는 그의 동부이모의 친동생 진소양왕(秦昭襄王) 영직(嬴稷)의 머리 위에 떨어진다.
진소양왕의 즉위초기, 진나라는 상앙변법이래 국운이 쇠락한 시기였다. 영직이 즉위한 초기, 국내의 여러 공자들은 그에게 불복했고, 3년에 걸친 계군(季君)의 난이 발생한다.
반란을 평정한 후, 북쪽은 다시 조무령왕(趙武靈王)의 제약을 받았고, 승상(丞相)마저도 스스로 지정할 수 없었다. 동쪽에서는 맹상군(孟嘗君)이 제,한,위 3국연합군을 이끌고 함곡관(函谷關)을 함락시키고 진나라에 영토할양을 요구했다.
운이 좋았던 점은 쇠락기가 오래가지는 않았다.기원전295년, 조무령왕이 사구지변(沙丘之變)으로 사망한다. 다음 해, 맹상군은 전갑겁왕(田甲劫王)사건으로 어쩔 수 없이 제나라를 떠난다.
기원전294년, 오랫동안 억눌려있던 진나라는 동으로 진출한다. 첫번째 전투목표는 한,위 두 나라였다.
한,위 두 나라는 근 20년간 아주 편안히 살았다. 일찌기 그들을 괴롭혔던 진(秦)나라와 초(楚)나라에 모두 내부문제가 발생하여, 조진모초(朝秦暮楚)의 악명을 벗어날 수 있었을 뿐아니라, 제나라의 맹상군과 함께 수사(垂沙)에서 초나라를 이기고, 함곡관에서 진나라를 공격하여 적지 않은 영토를 확보할 수 있었다.
전국(戰國)시대의 국면은 진,체,초,조가 각각 동서남북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고, 한,위는 그 중간에 끼어 있었다. 4대강국의 다툼 속에서 한,위가 어느 편을 들면 그쪽이 이길 수 있었다.
과거의 합종연횡은 대부분 이 2개국가를 상대로 전개된 것이다.
현재 초나라는 이미 단양(丹陽)전투와 수사전투에서 진, 제 두 나라에게 패배하여 국세가 약화되었고, 제, 조 두 나라는 사구지변과 전갑겁왕사건으로 자신을 돌보는데 바빠 외부의 일에 신경쓸 수가 없었다. 진나라에 있어서, 이런 시기에 한,위를 수습하지 않으면 더 이상 좋은 시기는 오기 힘든 상황이다.
2. 병력배치
진나라는 공격을 개시하여 바로 한나라의 무시(武始)와 신성(新城)을 차지한다. 역사기록에는 이렇게 적고 있다: "십삼년, 향수(向壽)가 한나라를 정벌하고, 무시를 취한다. 좌경(左更) 백기(白起)는 신성을 공격한다"
모두 알고 있는 것처럼, 진나라와 중원을 연결시키는 것은 바로 효함통도(崤函通道)이다. 무시는 한나라의 효함통도에 있는 마지막 거점이다. 이 곳을 차지한 것은 진나라가 중원으로 진입하는 장애를 제거하기 위함이다.
신성은 이궐의 남쪽에 있다. 이 전투에서 백기는 한,위 연합군의 대본영을 공격했다.
낙양분지는 이수(伊水)와 낙수(洛水) 두 큰 강이 충적되면서 이루어졌다. 낙하는 서쪽에 있고, 이하는 동쪽에 있다. 낙하는 효산과 웅이산에서 나오고, 이하는 웅이산과 외방산에서 나왔다. 두 강은 산골짜기를 나온 후, 평원에서 만난다.
그 외에 두 강의 산골짜기지대에 한나라는 두 개의 중요도시를 건설했다. 각각 낙하 하곡(河谷)의 의양성(宜陽城)과 이하하곡의 이궐관(伊闕關)이다.
의양성은 진무왕시기에 이미 진나라에 의해 점령되었다. 즉, 진나라는 이미 낙하 하곡은 통제하고 있었다.
진나라의 이번 목표는 이하 하곡의 통제권을 차지하는 것이고, 그렇게 되면 전체 낙양분지를 탈취할 수 있게 된다.
그외에, 외방산은 여수(汝水)의 발원지이다. 이하를 통제한 후 진군은 여하의 하도를 따라 한나라의 수도 신정(新鄭)으로 직격할 수 있다. 그래서 이궐을 잃게 되면, 한나라는 진나라의 도마 위에 올라간 고기꼴이 되는 것이다.
이궐은 이하 하곡중 가장 좁고 길며 험준한 지역에 설치되어 있다. 길이는 150이이고, 너비는 200미터에 불과하다. 가히 일부당관(一夫當關) 만부막개(萬夫莫開)라고 할 수 있다.
진나라가 이궐을 공격하려면 두 가지 방안이 선택될 수 있다. 하나는 이미 통제하고 있는 낙하 하곡에서 웅이산을 넘어 이궐 남쪽의 신성을 점거하고, 그후 이를 기지로 하여 이궐의 남부를 공격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의양에서 낙하 하곡을 나가 낙양성을 점령하고, 그후에 남으로 고개를 돌려, 이하를 역류하여 하곡으로 들어가 이궐의 북부를 공격하는 것이다.
다만 이 방안에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 그것은 바로 중원지구에서 낙양분지북부로 들어가는 호뢰관(虎牢關)을 한나라가 여전히 통제하고 있다는 것이다.
만일 진나라가 이궐의 북문을 공격하려면 그쪽의 한나라에서 병력을 호뢰관을 통해 진나라군대의 북방으로 보낼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진나라는 앞뒤로 협공을 당하는 국면이 될 것이다.
반대로, 남쪽의 신성은 서로는 웅이산이 막아주고 있고, 동,남으로 두 방향은 외방산이 병풍처럼 둘러 있어, 북쪽의 이궐관만을 공격할 수 있게 된다.
진나라가 이궐관을 공격하자 한나라의 조야는 크게 놀란다. 한왕은 급히 명장 폭연(暴鳶)을 이궐관으로 보내 방어하게 한다. 위왕은 대장 공손희(公孫喜)로 하여금 병력을 이끌고 도와주게 한다. 한위연합군의 총병력은 24만에 달했고, 진나라쪽은 10만가량이었다.
전쟁은 기원전294년에 개시되고, 진나라장수는 노장 향수(向壽)였다.
향수는 이궐관의 아래에서 1년간 싸웠지만 전혀 성과를 내지 못했다. 진나라의 재상 위염(魏冉)은 병가의 금기를 어기면서 전쟁중에 장수를 교체한다. 처음 전투에 나선 백기로 하여금 향수의 총사령관직위를 대체하도록 한다.
한,위방면에서의 배치는 이러했다. 한군이 이궐관의 남문을 지키켠서, 신성의 진나라군대의 공격을 막고 있었다. 위군은 이궐관이북의 평원지대에 주둔하면서 진군이 위에서 언급한 첫번째 노선으로 낙수하곡을 나와 이궐북문을 기습하는 것을 막고 있었다.
이 배치는 문제가 없다. 한,위 양군이 엄격하게 집행할 수만 있다면 백기는 절대로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했을 것이다. 심지어, 그들은 병력도 우세했다 .만일 적극적으로 성문을 열고 출격하더라도 승산이 낮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쉽게도 두 나라는 한 마음으로 움직이지 않았다. 이궐전투에서 한나라는 병력이 적기 때문에 먼저 나서려 하지 않고, 위나라군대를 앞장세우고자 한다. 그러나 위나라도 바보는 아니다. 그들은 한나라군대가 더욱 정예라고 여겨서 그들이 먼저 나서서 싸우기를 바랐다.
양국이 모두 이런 심리상태이니, 스스로 나서서 먼저 공격하는 일은 없다. 그저 피동적으로 방어하는 수밖에 없다.
3. 올인
이궐은 한국의 생사지지(生死之地)이기 때문에, 한나라사람들은 전투의지가 비교적 완강했다. 그리하여 백기는 눈길을 상대로 소극적인 위나라쪽으로 돌린다.
방법은 이러했다. 웅이산을 넘어 이수하곡에서 낙수하곡으로 간다. 그후에 앞에서 얘기한 첫번째 노선으로 돌연 현재 이궐국부에 나타나 위나라군대를 격패시킨다.
그러나 위에서 본 것처럼, 한위연합군의 배치는 바로 이런 것까지 대비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백기의 기습은 어떻게 효과를 낼 수 있었을까?
필자의 생각에 원인은 세 가지라고 본다:
첫째, 과거 1년동안 진나라군대는 계속 남쪽에서 죽어라 싸우고 있었다. 그래서 위군은 경계심이 느슨해져 있었다.
둘째, 백기는 유명하지 않은 젊은 장수이다. 공손희는 그에 대하여 경적심리가 있었다. 그가 감히 한나라군대에 대본영 신성을 기습당할 리스크를 안고 자신을 기습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온다고 하더라도, 자신이 진나라군대를 잠시 막고 있으면, 한나라군대가 밀고 들어와서 백기의 부대는 무너질 것이라고 보았다.
셋째, 필자의 생각에 가장 중요한 것은 이점이라고 본다. 위나라군대를 기습하기 전에, 백기는 신성에 남긴 진나라군대로 하여금 주력인 것처럼 크게 기세를 올리면서 주력군이 이궐을 공격하는 것같은 태세를 보인다. 그리하여 이궐이북의 위군은 진나라의 주력이 남문을 공격한다고 생각하여 전혀 경계를 하지 않고 있었다.
위군은 졸지에 기습을 당해 어쩔 줄 몰랐고, 금방 붕괴상태에 빠진다. 주장 공손희는 피살되고, 나머지는 백기에게 쫓겨 이궐관으로 돌아가 혼란을 야기시키며, 동맹군이 한나라군대까지 죽게 만든다. 이때 이궐관의 좁은 지형은 순식간에 한,위연합군의 천험의 요새에서 그들의 절지로 바뀌고 이어진 것은 전쟁이 아니라, 일방적인 도살만 남았다.
결론
이궐전투이후, 한,위양국이 수십년간 축적한 것이 하루아침에 사라진다. 낙양분지의 통제권이 진나라수중에 넘어간다. 이제부터 진나라는 동쪽의 중원으로 진출하는데 아무런 장애가 없어진다. 한,위 양국은 철저히 진나라의 도마위에 놓은 고기꼴이 된다. 비록 나중에 조(趙)나라가 다시 한,위를 끌어들여 삼진동맹(三晋同盟)으로 진나라에 항거하려 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진나라는 이미 날개가 튼튼해져 있었다. 그리하여 이 전투는 전국역사의 분수령이다. 그후 진나라는 진정한 전국시대의 최강자로 떠오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