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청 후기)

청일전쟁에서 청군의 어뢰는 몇척의 일본군함에 명중했을까?

중은우시 2024. 10. 21. 11:37

글: 삼파도(三把刀)

19세기말기에 발발한 청일전쟁(중국에서는 中日甲午戰爭이라 함)에서 중국이 패전하면서 특히 북양수군이 전멸하면서 후세에 "갑오지치(甲午之恥)"라 불리고 있다. 일본군국주의의 외교와 군사압력으로 청정부는 패전후 굴욕적인 <시모노세키조약(馬關條約)>을 체결해야 했다. 이제 100여년이 지났고, 신중국은 이미 논쟁의 여지없는 세계적인 대국으로 성정했고, 정치, 경제와 군사분야에서 모두 강력한 힘을 가졌으며, 더 이상 예전의 굴욕사는 재연되지 않을 것이다. 당연히, '물망국치(勿忘國恥)'는 모든 사람들이 중국민적이 겪은 고통과 굴욕을 잊지 말아야 하고, 그래야만 더욱 굳건한 신념으로 미래를 열 수 있을 것이다. 최근, 바다에서 100여년간 표류하던 어뢰(魚雷)가 발견되어, 다시 한번 그 당시의 갑오해전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바다에서 건져올린 청일전쟁때의 어뢰

길다란 원주형의 불명물체는 나중에 청일전쟁전문가의 감정에 의해, 청일전쟁때 사용된 근현대어뢰로 인정되었고, 그후 중국갑오전쟁박물원이 영구소장하도록 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당국에서 이 어뢰의 모델과 제조국을 밝히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마도 상세히 고증할 수 없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사실상, 당시의 북양수군이건 일본해군이건 모두 여러 모델의 화포와 어뢰를 사용했다. 양군은 모두 영국과 독일에게 무기장비를 구매했기 때문이다.

어뢰를 보면, 북양해군아문은 영국과 독일에서 어뢰정(魚雷艇)을 구매했고, 여러 군인을 독일로 보내 어뢰정의 조종과 어뢰발사기술을 배우게 했다. 그리고 국내에는 여순어뢰영(旅順魚雷營), 위해금선정어뢰영(威海金線頂魚雷營)과 여순구어뢰학당(旅順口魚雷學堂)등 훈련기구를 개설하여, 전문적으로 어뢰정과 어뢰발사기술분야의 인재를 양성했다. 1894년 청일전쟁이 발발하기 전에, 청나라의 해군은 모두 35척의 어뢰정이 있었다. 일본해군연합함대수중의 어뢰정보다 훨씬 많았다. 그중 북양수군은 13척의 어뢰정을 갖추고 있었으며, 그중 7척은 독립적으로 바다로 나가 전투할 수 있는 대형어뢰정이었다.나머지 6척은 철갑선으로 순양함에 탑재하는 소형어뢰정으로 사용하거나 주로 교육에 사용하는 어뢰영연습정이었다. 그외에 북양수군의 주력순양함에는 어뢰발사영과 전문어뢰병이 있었다.

19세기의 어뢰 및 어뢰정

그렇다면, 청일전쟁의 해전에서, 북양수군이 일본군함에 어뢰를 발사한 전과는 어떠했을까? 아주 유감스럽게도, 답연은 "명중율 0"라는 것이다. 단 1척의 일본군함에도 명중하지 못했다. 원인은 주로 두 가지이다.

부차적인 원인부터 보자면, 그 시기의 어뢰는 탄생시간이 비교적 짧고, 기술이 충분히 성숙되지 않은 신흥장비였다. 많은 경우 압축공기를 수중에서의 주동력으로 한다. 사정거리는 400미터를 넘기 힘들었다. 일본은 1888년 독일에서 독일제 최신형 어뢰를 구매했는데, 일본해군이 88식 "주식어뢰(朱式魚雷)"라고 부르는 것이다. 600미터의 사정거리때문에 환영을 받았다. 이것만 해도 이미 대단한 '원거리어뢰'였다. 그러나 북양수군이 사용한 어뢰는 보편적으로 300-400미터의 사정거리를 가졌다. 알아야 할 것은 갑오해전에서 대포전의 거리는 기본적으로 3천미터이고, 가장 가까웠을 때도 1천미터이다. 상대방의 밀집한 포화를 뚫고 3,4백미터까지 접근하여 어뢰를 발살하는 것은 아주 곤란하면서도 위험한 일이었다.

어뢰를 제조하는 어뢰국

주요원인을 살펴보자면, 북양수군 어뢰정부대의 "서면상 수치"는 아주 보기 좋다. 그러나 실제로 문제가 너무 많았다. 최대의 문제점은 기구편제가 불합리하다는 것이었다. 비록 어뢰영과 북양수군은 모두 청나라해군에 소속되어 있고, 어뢰영은 북양수군내에 편제되어 있지만, 양자는 직접적인 지휘예속관계가 없었다. 즉 어뢰영은 북양수군제독 정여창(丁汝昌)의 관할을 받지 않았고, 여순선오영무처(旅順船塢營務處)에 직접 예속되었다. 그러므로, 어뢰영에 배치된 어뢰정과 어뢰는 모두 어뢰영의 장비이고, 여순선오영무처의 관할을 받았다. 이는 "모함(母艦)"과 "자함(子艦)"이 분가상태라는 것이었다. 간단히 말해서 어뢰영은 서면상으로는 북양수군의 작전역량이지만, 부대의 일상관리와 운용에서 어뢰영과 북양수군은 거의 독립된 해군부대에 가까웠다. 장비부터 인원까지 모두 서로 다른 관리와 기관이 관할하고 있었다.

이런 영향으로, 일상훈련에서, 북양수군의 철갑함과 순양함은 기본적으로 어뢰영과 "힙동작전훈련"을 전개할 수 없었다. 그러니, 무슨 "화력사격이 밀집된 전함에서 어뢰정을 엄호하여 급속히 적의 전함에 근접하여 어뢰를 발사하는 것"이나 "전함의 정면에 적함의 화력이 있을 때, 어뢰정부대가 기회를 틈타 측면으로 적함에 접근하여 어뢰를 발사하는 것"같은 전법이 북양수군에서는 모조리 전혀 없었다.

이뿐아니라, 관련경비를 절약하기 위하여, 당시 어뢰영을 관할하는 관리 공조여(龔照璵)는 맹목적으로 어뢰영의 많은 숙련된 인원을 감원하고, 어뢰정의 일상 유지보호에 사용되는 금액도 삭감했다. 중일간에 전쟁이 발생할 때에 이르러 공조여는 황급히 다시 군대와 민간에서 선원을 모집했다. 그러나 이미 새로 모집한 인원을 시스템적으로 어뢰정조종과 어뢰발사를 하도록 훈련시킬 시간이 없었다. 북양수군의 어뢰정부대이건 순양함상의 어뢰발사조작수이건 모두 기초가 0인 '신병'이었다. 실전에서 명중률은 자연스럽게 0이 될 수밖에 없었다....

갑오해전에서 일본군함 단 1척도 어뢰를 명중시키지 못했다. 이 일은 북양수군의 전력이 약하다는 점을 보여주는 축소판이다. 지금 100여년만에 다시 사람들의 시야에 나타난 그 어뢰는 마치 조용히 그 때의 치욕, 유감과 불만을 말해주는 것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