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돌선우(冒頓單于)": 초원제국은 왜 중원통일왕조의 악몽이 되었을까?
글: 서북낭(西北狼)
자고이래로 사람들은 항상 논쟁이 있었다: 도대체 영웅(英雄)이 시세(時勢)를 만드는가, 아니면 시세가 영웅을 만드는가?
필자의 생각에 이 문제의 답은 지역마다 다르다(因地而異)는 것이다.
중원에서 개인영웅주의는 역사발전에 영향력이 제한적이었다. 천하대세는 항상 한 사람의 힘으로 뒤집을 수 없었다. 제갈량같은 지혜있는 인물도 결국 오장원에서 한을 품고 죽어야 했다.
그러나, 초원에서 왕조의 흥망성쇠는 완전히 어떤 영웅인물에게 달려 있었다. 흉노제국의 창업자인 묵돌선우가 바로 그러한 인물이다.
- 유목민족에게 가장 위험한 시기가 도래하다.
묵돌선우가 굴기하기 전에, 장성이북은 동에서 서로 차례대로 3대 강대세력이 있었다. 각각 동호(東胡), 흉노(匈奴)와 대월지(大月氏)이다.
당시, 동호와 월지는 모두 강성했다. 흉노는 동호와 월지의 사이에 놓여 있을 뿐아니라, 3대세력중 가장 취약했다. 묵돌선우의 부친인 두만선우(頭曼單于)는 진나라의 공격을 받고, 물과 풀이 풍성한 하남(河南)의 땅을 빼앗겼다. 여기의 하남은 오늘날의 하투초원(河套草原)과 오르도스초원이다.
이 두 개의 비옥한 토지를 빼앗겼는데, 흉노는 나중에 어떻게 돌연 강성해졌을까?
모두 알다시피, 초원의 유목민족은 물과 풀을 따라 옮겨다녔다. "철새처럼 옮겼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초원은 효과적인 호적제도를 건립할 수 없다는 것이다. 즉, 세금을 거두기 어렵다는 것이고, 세금이 없으므로 대통일국가를 운영할 수도 없었다.
더욱 치명적인 것은 유목민이 설사 이동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세금을 거두는데는 상당한 비용이 들어, 결국 비용이 거두는 세금보다 많아질 것이다. 한번 간단히 계산해보면 알 수 있다:
초원에 100무(畝, 1무는 200평)의 초지가 있으면 5마리의 양을 키울 수 있다. 한 호(戶)에 다섯 가족이 있으면, 최소 100마리의 양이 있어야 최소한의 생존을 유지할 수 있다. 즉, 5명의 가족 이 있는 목민가정에서 최소한 2000무의 초지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희소한 인구밀도에 세금을 거두러 가서 몇마리 양을 받아봐야 교통비도 나오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중원에서는 즉, 흉노의 적수인 한나라의 경우를 보면, 한나라초기 5명이 있는 1호가족은 백무의 토지가 있으면 생존에 필요한 것들을 얻을 수 있다. 흉노의 1호인구를 먹여살릴 토지면 한나라에서는 20호의 인구를 먹여살릴 수 있는 것이다. 같은 거리를 가더라도 흉노1호에게서 세금을 거둘 비용으로 한나라에서는 20호에서 세금을 거둘 수 있다. 즉, 흉노에서 1호가 부담할 것은 한나라에서는 20호가 나눠서 부담할 수 있다.
그러므로, 중원에서 세금을 거두는 것은 비용보다 이득이 큰 것이다. 그러나 초원에서는 거두는 것보다 비용이 더 많이 드는 일이다.
나라를 건립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아예 건립하지 않는 것이 좋다. 왜 하나의 정부를 두어서 자신을 관리하도록 한 것일까? 이는 흉노의 생활방식과 관련이 있다. 흉노족은 유목생활을 한다. 가정재산은 모두 소, 양, 말등의 살아있는 동물이다. 그러나 초원에는 이런 말이 있다: 집안의 재산이 만관이라고 하더라도 털이 달린 것은 계산하지 않는다. 그 뜻은 목민에게 소와 양이 많이 있으면 그들은 아주 부유하다. 그러나 재난이 한번 닥치면 재산은 제로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이와 반대로, 중원의 농경생활은 상대적으로 안정적이다. 가뭄이 들건 홍수가 들건 창고안의 양식까지 모조리 사라지지는 않는다.
그리하여, 남쪽에서 먹을 것을 구하는 것은 유목민의 필수불가결한 부업이 되었다.
처음에, 남쪽의 중원국가는 분봉제였다. 그리하여 수많은 제후국들은 실력이 강하지 않았다. 누구도 만리장성같은 거대한 공사를 할 능력이 없었다. 장성이 없으면, 봉화로 미리 알려주지도 못하고, 흉노인은 그저 몇몇 친구들을 모아서 마을을 습격할 수 있었다. 국가의 군대같은 건 필요하지 않았다.
그러나 전국시대가 되면서 모든 것이 바뀐다. 남쪽에 농업에 과학기술이 도입되고, 철기를 사용하고 소를 사용하면서 기술혁명이 이루어진다. 생산력의 발전으로 분봉제는 중앙집권제로 변하게 된다. 군대규모도 급증한다. 무기, 갑옷도 철기로 바뀐다. 중앙집권제의 국가는 높은 효율을 가지고 인력을 조직하고, 장성을 건설하는 것도 가능하게 되었다.
이런 타격에 직면하여, 북방의 유목민족은 절망하게 된다. 과거의 집단습격모델은 더 이상 불가능했다. 반드시 더욱 큰 공동체를 만들어야만 했다. 예를 들어, 흉노와 동호라는 이름아래 부락연맹을 결성해야 하는 것이다.
대월지는 특수한 사례이다. 그들이 활동하는 곳은 중원에서 천리나 멀리 떨어진 돈황일대였고, 그 주변에는 농경조건을 갖춘 서역삼십육촌이 있어 그들에게서 빼앗으면 되었다. 그래서 동쪽으로 중원을 칠 동력은 없었고, 중원과는 무슨 충돌이 발생하지 않는다.
그러나, 동호와 흉노는 그렇게 운이 좋지 못했다. 이 두 곳의 주변에는 약탈할 대상이 오직 남쪽의 전국칠웅 뿐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부락을 모아서 부락연맹을 만들어도 상대하기 힘들었다.
연(燕)나라는 약하지 않은가? 전국칠웅중에서는 가장 약한 존재이지만, 동호에 대하여는 강력한 힘을 가졌다.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한 후에는 더더욱 힘들어졌다.
중원이 대통일국가로 바뀌면서 유목민족이 굶어죽지 않으려면 스스로를 업그레이드시켜야 했다.
2. 초원분봉제(草原分封制)
이 역사적 사명을 완수한 사람이 바로 묵돌선우이다. 많은 사람은 묵돌선우가 최초의 초원제국을 건설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그가 잘 싸웠기 때문이다.
그건 맞는 말이 아니다. 군사적으로 강력한 인물이라면 확실히 단기간내에 초원제국을 만들어낼 수 있다. 다만 이런 제국은 오래 지속될 수 없다. 사람이 죽으면 그 힘도 사라지게 된다.
예를 들어, 한나라말기 선비족(鮮卑族)의 단석괴(檀石槐), 가비능(軻比能)이 있다. 이 두 사람은 개인의 능력으로 전후로 강성한 선비왕조를 건립한다. 그러나, 그들이 죽자, 제국은 즉시 해체된다. 중원왕조가 그들을 상대하는데에는 단지 자객 한명만 보내면 충분했다.
흉노인은 한나라와 100여년이나 싸운 후에 패배했다. 이건 대대로 강자가 나타났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제도건설에서 돌파구를 마련했기 때문이다. 비록 초원에 대통일의 중앙집권국가를 건설할 수는 없지만, 묵돌선우는 머리를 굴려서, 진시황과 주천자(周天子)의 중간쯤되는 강화버전의 분봉제를 시행한다. 그렇게 하여 최대한도로 초원의 역량을 끌어낸 것이다.
묵돌선우의 설계에서 그 자신은 주나라천자의 지위를 가졌다. 왕정을 물과 풀이 무성한 하투일대에 건설한다. 이는 선우왕정이 다른 지역에 비하여 더욱 많은 인구병력을 가지고, 각 제후들이 말을 듣게 하는 힘을 확보한 것이다.
선우의 아래에 묵돌은 "백(伯)"급의 행정단위를 둔다. 소위 '백'은 어느 구역 모든 제후의 수령이다. 천하는 너무 크다. 천자가 모두 관장할 수는 없다. 그리하여 그중 큰형으로 하여금 대신 관리하게 한다. 예를 들어 서백후(西伯侯) 또는 춘추오백(春秋五伯, 覇)"에 비견할 수 있다.흉노는 4대백후(伯侯)를 둔다. 각각 좌현왕(左賢王), 우현왕(右賢王), 좌곡려왕(左谷蠡王), 우곡려왕(右谷蠡王)이 그것이다.
선우는 흉노의 영토를 '밭전자(田)'구역으로 나누어, 4명의 왕이 4대관할구역을 관장한다. 좌는 동, 우는 서이다. 현왕은 남쪽, 곡려왕은 북쪽이다.
네명의 왕의 관할지구아래 다시 여러 제후가 있다. 사대천왕이 수하의 제후들을 지휘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선우는 다시 사대천왕에게 관할구역내에 최대의 토지를 부여한다: 즉 좌우현왕, 좌우곡려왕이 최대국이다.
사왕의 권력이 아주 크다. 혈통관계가 멀어지게 되면 그들이 어떻게 말을 듣게 할 수 있을까? 그건 겁날 것이 없다. 선우는 4왕을 세습할 수 없도록 규정했다. 그들은 모두 선우가 임명한다. 취임자는 선우의 형제 아니면 선우의 아들이 된다.
그외에 4대천왕와 선우는 모두 4명의 보정대신(輔政大臣)이 있다. 먼저 문직(文職)의 승상(丞相)이 있다. 흉노는 그를 골도후(骨都侯)라고 부른다. 그외에 무직(武職)의 대장(大將), 대당호(大當戶), 대도위(大都尉)가 있다. 이들 대신을 모두 합하면 20명이다. 이 20명은 제1대선우가 분봉한 혈통제후이다. 대다수는 왕족 연제씨(攣鞮氏)가족출신 및 소수의 개국공신후예이다. 예를 들면, 서주의 제(齊)나라같은 경우이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들은 왕정과의 혈연관계가 점점 멀어지게 된다. 그래서 혈연이 가까운 4대천왕을 보내 그들을 관리할 필요가 있다.
이들은 한 지방의 제후이면서 동시에 선우와 사대천왕의 수하로 근무한다. 만일 이해가 되지 않으면, 주공(周公)을 참조할 수 있다. 그는 노(魯)나라의 국군이면서 주왕조의 보정대신이다. 양자는 충돌되지 않는 것이다.
사대천왕에 20보신을 합치면 모두 24명이다. 이것이 바로 흉노의 이십사장(二十四長)이다. 주왕조가 상왕조를 멸망시킬 때, 일찌기 53명의 희성(姬姓)제후를 임명하여 천하를 다스렸다. 이건 이십사장과 유사하다. 즉, 이십사장은 흉노왕족이 초원을 통치하는 핵심군사역량이다. "좌우현왕부터 그 아래 당호까지, 큰 경우는 만여기, 작은 경우는 수천기이다. 무릇 24장은 '만기(萬騎)'라고 불렀다."
이십사장과의 혈통적인 동질감을 심화시키기 위해, 선우는 자주 종족제사활동을 벌여 혈연관계를 강화하곤 했다. 매년 정월이 되면, 이십사장은 선우정(單于庭)에 모여 제사지낸다. 오월이 되면 용성(龍城)에서 대회를 열어, 선조, 천지, 귀신에 제사지낸다.
이는 바로 주공이 분봉제를 보완한 것이다. 그럼 어떤 형태의 종법제사를 지냈을까?
여기서 한 가지 상식을 설명하겠다. 우리가 TV드라마를 보면 자주 무슨 흉노좌대도위, 우대도위같은 것이 나오는데, 무슨 구별이 있을까?
답은 그들의 상급지도자의 봉호(封號)에 있다. 좌현왕과 좌곡려왕 수하의 대장, 당호, 대도위, 골도후의 앞에는 모두 '좌(左)'자가 붙는다. 우현왕과 우곡려왕의 보정대신들에게는 '우(右)'자를 붙인다. 흉노는 좌를 더 높게 취급한다. 선우의 수하도 '좌'를 붙인다.
앞에서 얘기한 것처럼, 이들 20명의 보신은 4대천왕에게 보정을 하는 동시에 자신의 봉지내에서는 역시 지방제후이다. 그들에게도 행정조직이 있다. 예를 들어, "천장(千長), 백장(百長), 십장(什長), 비소왕(裨小王), 상(相), 도위(都尉), 당호(當戶), 차거(且渠)의 부하"들이 있다.
이들 천장, 비소왕같은 것은 분봉제하에서 경대부(卿大夫)와 사(士)등이 등급이라고 볼 수 있다.
이들은 모두 어떤 사람들인가? 어떤 사람은 이십사장의 서출방계자손이고, 어떤 사람은 원래 묵돌선우에 정복당한 부락수령이다. 그들의 지위는 주나라때 각 제후국에 분배된 은상유민(殷商遺民)에 비견할 수 있다.
흉노의 왕에는 사대천왕이외에 무슨 누번왕(樓煩王), 백양왕(白羊王)이 있는데, 모두 비소왕과 같은 등급이고, 별로 가치있는 직위는 아니다.
한무제시대에 위청(衛靑), 곽거병(霍去病)은 매번 출전할 때마다 걸핏하면 십여명의 왕을 붙잡아 온다. 기실 이들 왕은 모두 비소왕이다. 중원의 직급으로 따지면 경대부급에 해당할 뿐이다.
그외에 흉노왕에게는 일종의 규칙이 있다: 흉노는 "현(賢)"을 "도기(屠耆)"라고 부르는데, 그래서 태자 즉 좌현왕을 좌도기왕(左屠耆王)이라고 불렀다.
좌현왕의 관할구역은 한왕조와 접경하고 있어, 한무제가 흉노를 치기 이전에 가장 좋은 관할구역이었고, 좌현왕이 다른 삼대천왕에 비하여 훨씬 강한 실력을 구비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한나라가 굴기한 후, 좌현왕의 관할구역은 가장 많은 피해를 입게 된다. 흉노의 계승서열에도 문제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건 모두 나중에 일어난 일이다. 묵돌선우시기, 이 강화버전의 분봉제를 가지고, 초원의 30만 공현지사(控弦之士)를 조직하여 함께 행동했고, 이로 인하여 강대한 전투력을 갖게 된다.
이런 조직성은 백등지위(白登之圍)때 그대로 체현되었다: 묵돌은 정병 30여만기로 유방을 백등산에 몰아넣고 포위했다. 흉노의 기병은 서방은 모두 백마, 동방은 모두 방마(駹馬, 얼굴과 이마만 하얀 푸른말), 북방은 모두 여마(驪馬, 검은 말), 남방은 모두 성마(騂馬, 붉은 말)이었다.
즉, 묵돌선우는 동남서북 4개방향의 군대를 모두 색깔이 통일된 전마로 안배했다. 이건 간단한 일이 아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흉노병사들이 분명 묵돌선우에 의해 부락단위를 흩어서 다시 통일된 군사단위로 편제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3. 분봉제의 우열
묵돌선우의 이 초원분봉제는 어떤 효과를 나타냈을까?
문장의 첫머리에 필자가 얘기한 바 있듯이 선우는 주천자와 진시황의 중간쯤에 있는 사람이다. 그는 진시황처럼 천하관료를 임면할 권력은 없다. 각 부락수령의 영지를 그가 건드릴 수는 없다. 다만, 그는 일부 관료를 임면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사대천왕과 선우자신의 보정대신.
그러므로, 사대천왕과 선우 휘하의 보정대신 직위는 모두 세습될 수 없다. 오늘은 이 부락의 수령이 골도후를 맡지만, 내일은 저 부락의 수령이 골도후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자기사람이기만 하면 된다. 예를 들어, 주환왕(周桓王)은 정장공(鄭莊公)이 경사(卿士)를 맡게 하고 싶지 않아서, 그 자리를 같은 종중의 괵공(虢公)에게 맡긴다. 당연히 정장공은 면직된 것이지만, 그 자신의 봉국과 군사역량은 여전히 세습할 수 있었다. 구별이 있다면, 그가 정부내에 재직하고 있을 때는 대기(大旗)를 내걸 수 있고, 동시에 여러 제후들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지만, 지금은 단지 자신의 신하와 백성들에게만 명령을 내릴 수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흉노의 분봉제는 혈친제후가 절대로 24명에 그치지 않는다. 그저 고위직 편제가 단지 24개일 뿐이다.
이 제도는 흉노가 강성할 때 군사주체로서 존재할 수 있고, 선우의 명령이 일단 내려지면, 만기가 운집하게 만들었다. 설사 왕정중앙이 무너지더라도, 초원은 여전히 선우가문이 장악하고 있는 것이다. 즉 주평왕이 동천하더라도 천하는 여전히 주나라의 기치를 내걸고 있는 것과 같다.
다만 결점도 마찬가지로 분명하다. 그것은 일단 중앙이 쇠락하면, 다섯 선우가 나타나 다투는 것과 같은 제후혼전이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한나라에서 등을 찔러올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결론
묵돌선우의 분봉제는 이미 대통일시대에 접어든 중원인에 있어서, 아마도 그다지 대단하지 않았을 것이다. 다만 부락시대에 처해 있던 초원민족에 있어서, 이것은 시대를 뛰어넘는 진보이다. 만일 이런 제도개혁이 없었더라면, 초원민족은 남쪽으로 가서 먹을 것을 얻지 못했을 것이고, 결국 자연도태되거나, 서쪽으로 이주해야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