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대전시기 진실한 중국: 저항파가 많았을까, 협력파가 많았을까?(1)
글: 허검홍(許劍虹)
올해 필자는 Hoover Institution 근대중국대만컬렉션의 큐레이터인 린샤오팅(林孝庭, Hsiao-ting Lin)의 초청을 받아 샌프란시스코로 가서 중국대만컬렉션에서 활동했다.
후버연구소는 중국국민당의 "해외당사관(海外黨史館)"이라고 불릴 정도로, 일찌기 장개석, 장경국의 일기를 보관하고 있었으며, 작년에 장씨집안과 차이잉원정부(蔡英文政府)간에 합의를 체결해서, 장개석과 장경국의 일기를 대만으로 돌려받은 바 있다. 당연히 선결조건은 후버연구소에 장개석 및 장경국일기의 영인본을 남겨두는 것이었으며 이를 통해 양안정권이 정치적인 목적을 가지고 수정하는 것을 방지하고자 했다.
장개석, 장경국은 중화민국의 국가원수로, 그들의 일기가 대만으로 돌아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다만, 여전히 진입부(陳立夫), 송자문(宋子文) 그리고 공상희(孔祥熙)등 다른 당국원로의 일기는 모두 후버연구소에서 보관하고 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그래서 대륙에서 일찌기 대만을 책망한 바 있다. 중국 '사대가족'의 유산을 모두 미국인에게 넘겨주어 해독하게 했다고. 사실상 후버연구소가 보관하는 것은 '사대가족'의 것만이 아니다. 학백촌(郝柏村)과 당비(唐飛)등 대만군정요원의 문헌도 모두 후버연구소에 기증되어 있다.
대륙은 대만의 군정요원이 문헌을 후버연구소에 기증한 것을 조롱할 것이 아니라, 스스로 객관적인 학술연구환경을 만들지 못하고, 그리하여 중화에 대한 인식이 강렬한 이들 당국원로들이 말년에 여전히 공산당을 믿지 못하고 자신의 문헌을 '해외에 떠돌게' 한 것을 반성해야 한다. 당연히 중국공산당의 "수원필주(雖遠必誅)"의 성격을 보면 향후 온갖 방법을 다하여 이들 문헌을 되돌려받으려 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후버연구소라는 관문은 아마도 중공이 정말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이루었을 때나 비로소 통과할 수 있을 것이다.
주제로 되돌아와서, 후버연구소는 당연히 중국국민당의 '해외당사관'일 뿐아니라, 혹은ㅊ최소한 대만에 있는 중국국민당의 '해외당사관'만이 아니라, 마찬가지로 중국국민당 정통이라고 자처하는 왕정위정권의 문헌도 후버연구소안에 아주 풍부하다. 이는 주로 후버연구소의 전신인 후버도서관(Hoover Library) 중국주재대표인 Mary C. Wright의 공이 크다. 항전승리후 중국의 공산당에 함락된 지역의 문물을 미국으로 옮겨왔다.
7월 31일, 영국 노팅검대학(University of Nottingham)의 교수인 Jeremy Taylor(한자이름 戴傑銘)가 근대중국대만컬렉션에 초청되어 강연을 했다. 내용은 바로 왕정위정권시기 일본점령지구의 문화를 주제로 한 것이다. 대륙과 대만의 학자들이 한 자리에 모였고, 왕정위의 손녀인 왕중륜(汪重輪)도 함께 테일러 교수의 연구성과를 들으면서, 거기에서 이전에 양안의 공식견해와 다른 점을 배우고자 했다.
양안 공식입장상의 왕정위
필자는 왕정위에 관한 글을 '풍전매(風傳媒)'에 적잖이 실은 바 있고, 적지 않은 클릭수를 얻었다. 많은 사람들은 이로 인하여 필자가 왕정위의 '명예회복'을 시도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상 필자는 여러번 강조한 것처럼, 중화민국이 미국의 도움하에 2차대전 전승국의 지위를 얻은 것을 아주 중시하고, 동시에 만나본 모든 항전노병들을 존경한다. 나는 일본의 대동아공영권에 반대하고, 또한 하나의 국가가 침략에 직면했을 때 용감하게 나서서 저항하여야하고, 그저 평화와 타협만을 아무런 레드라인없이 추구해서는 안된다고 여긴다.
그래서, 설사 소위 왕정위와 장개석이 서로 짜고서 중국이 추축국이 이기든, 동맹국이 이기든 모두 전승국의 지위를 누리게 하려했다는 명제가 성립된다고 치더라도, 또한 왕정위정권이 일본점령지역의 민중의 생명과 재산을 얼마나 많이 보호했다고 하더라도, 나는 왕정위노선에 동의하지 않는다. 자연히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략하는 문제에 있어서도, 나는 절대로 젤렌스키(Volodymyr Zelenskyy)의 저항을 지지하고, 우크라이나버전의 왕정위를 지지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부인할 필요는 없다. 왕정위가 지금까지 해협양안에서 여전히 정치적으로 극도로 부정확한 인물이이라는 것을. 중공정권은 비록 일본의 중국침략에 득을 보았고, 모택동도 여러번에 걸쳐 중국을 침략한 일본군에 감사했으며, 또한 왕정위는 국민당내에서 모택동을 끌어준 선생이지만, 중공은 어쨌든 '항일민족통일전선'의 구호를 외치면서 집권의 정당성을 확보했다. 그리하여 지금도 반일선동으로 대륙인민의 애국주의정서를 응집시키니, 자연스럽게 왕정위를 전면적으로 명예회복시킬 여건은 형성되지 않았다.
장개석은 왕정위와 이데올로기에서 사적(死敵)이다. 그러므로 중화민국정부는 대만에 도착한 후 당연히 "한간(漢奸), 주구(走狗)"로 이 <국부유촉(國父遺囑)>을 쓴 당국원로를 형용했다. '탈중국화'를 강조하는 민진당정부도 자신이 중공의 침략에 저항한다는 결심을 강조하기 위하여, 마찬가지로 '왕정위'와는 경이원지한다. 심지어 적지 않은 심록(深綠)인사는 '왕정위'라는 모자를 마잉주(馬英九)등 양안평화를 주장하는 국민당정치인물에게 씌우고 있다.
공산당과 대만의 남록(藍綠, 국민당과 민진당) 주류의 관방견해는 모두 왕정위를 부정적인 인물로 본다. 그것 자체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어쨌든 침략을 당했을 때, 모두 저항자를 좋아하지 협력자를 좋아하지 않으니까. 그러나 테일러교수의 왕정위에 대한 강연이 많은 수의 청중을 끌어들이게 된 것은 그리고 그 수가 전날 있었던 냉전시대 대만을 주제로 한 강연때보다 3배나 많았던 것을 보면, 중국인들 사이에서 왕정위에 대한 호기심은 장개석, 장경국 두 총통에 비해 전혀 낮지 않으며, 심지어 모택동에 가까울 정도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레드라인없이 평화를 추구했는가?
후버연구소 현장에서 테일러의 강연을 들은 사람중 많은 사람은 중국근대사연구자였다. 그러나 왕정위라는 주제에 대하여 흥미를 가진 것은 양안에서 온 학술엘리트만이 아니었다. 필자는 로스앤젤레스에서 여러 화교계의 지도자들을 접촉했다. 특히 국민당을 지지하는 심람(深藍)의 지도자들은 왕정위의 사적에 대하여 알고싶어하는 마음이 강렬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은 자신의 부모가 항전시기에 일본점령지역에 있었으며, 일찌기 왕정위정권의 보호를 받았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왕정위에 대한 평가는 장개석, 장경국시대의 전통적인 입장과는 다르게 된다.
이점은 우리가 많은 대만통일파인사들이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의 침략을 받았을 때, 태도가 일방적으로 우크라이나가 타협하고 투항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심지어 젤렌스키가 미국의 도움으로 러시아에 저항하려는 행위를 '사리분별을 못하는 것'이라고 비난한다. 그들은 우크라이나와 러시아는 인종도 같고 문자도 같은 슬라브인이며, 마땅히 모든 것에 불구하고 평화를 추구해야 한다고 본다. 설사 우크라이나의 영토주권을 포기하더라도 아까워할 것이 없다는 것이다. 마찬가지 논리를 만일 제2차세계대전때의 중국에 놓고 보면, 추구하는 것은 당연히 왕정위의 평화노선이다.
당연히 어떤 사람은 이렇게 강조하기도 한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는 예전에 한 나라였다고. 그러므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에 대한 공격은 '침략'이라고 불러서는 안된다고. 일본이 중국을 침략한 것과는 다르다고 본다. 그러나, 사실상 러시아는 1994년이래 우크라이나와 자신은 서로 예속되지 않는 독립주권국가라는 것을 인정하였다. 하나의 독립주권국가가 또 다른 독립주권국가를 공격하는 것은 당금 국제법의 각도에서 볼 때 100% 침략행위이다.
하물며 러시아를 지지하는 중국인은 모두 우크라이나인과 러시아인이 인종과 문자가 같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일본인과 중국인은 모두 동아시아인에 속하니 인종과 문자가 같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중국이 적지 않은 사서에서는 진나라때 사람인 서복(徐福)이 일본인의 조상이라고 하였는데, 그렇다면 일본인과 중국인은 같은 동아시아인일 뿐아니라, 염황자손의 후대이다. 그렇다면 일본의 중국에 대한 침략은 기실 중화민족의 통일을 추구하는 것이며, 양안의 통일파는 이런 논리대로라면 왕정위를 옹호하는 것이 맞지 않은가?
사실상 중국국방대학 국제방무학원 원장인 서휘(徐輝) 소장은 싱가포르의 샹그릴라대화(The Shangri-la Dialogue)에서 젤렌스키에게 우크라이나인민의 생명가치를 고려하고, 미국의 이익을 고려하여 '우크라이나의 마지막 1인까지 싸우지' 말라고 얘기했다. 생각지도 못하게 서휘의 이 말이 나오자, 가장 먼저 들고 일어나 항의한 사람은 우크라이나인이 아니라, 대륙의 네티즌들이었다. 그들은 서휘를 '투항파소장', '서정위(徐精衛)'라고 불렀다. 그리고 중공매체에서 서휘의 발언을 모두 삭제하도록 하는데 성공했다.
협력자가 되고 싶었지만 말하길 원치 않는 중국인
서휘의 발언이 대륙네티즌의 분노를 불러오게 된 것은 단순히 러시아가 중국을 침략한 역사를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었기 때문이나 혹은 미국에 대항하는 전략상 필요에서 중공당국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침략에서 중립을 유지해야하는 것때문이 아니라, 서휘가 공공연히 저항무용론과 투항을 고취하였기 때문이다. 어쨌든 중공이 오랫동안 중국인민들에게 선전해온 것, 특히 중국의 국민혁명군이 일본침략자에 대하여 마지막 1인까지 투쟁하였다는 주장과 전혀 들어맞지 않기 때문이다.
방선각(方先覺)은 일본군에 용감하게 47일간 저항한 후 무기를 내려놓았다. 그는 중공에 '한간'으로 80년간이나 욕을 먹는다. 그런데 서휘가 젤렌스키에게 투항하라고 말하는 이중기준을 대륙인민이 어떻게 쉽게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사람들이 서휘를 비판하는 것은 우크라이나가 저항하지 않는 것에 반대하기 때문이 아니다. 더 많은 것은 베이징선전의 이중기준때문이다. 대만의 범람(泛藍)진영과 중공해방군내에는 모두 우크라이나가 투항해야한다는 주장이 있는 것을 보면, 왕정위의 신도는 양안에서 확실히 많이 남아 있다.
단지 일본이 제2차세계대전에서 패전하였고, 또한 아주 철저하게 패배하였기 때문에, 일본의 패전으로 와해된 왕정위정권은 철저히 발언권을 잃어버렸다. 이미 죽은 왕정위는 사람들마다 욕하는 한간(매국노)이 되었고, 그의 추종자들은 중경국민정부의 수배를 받는다. 그 누구도 그들을 도와 변호해주지 않았다. 전후에 각각 중공정권에 가입하거나 대만으로 넘어온 국민당정권에 가입한 왕정위정권의 인사들은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하여 왕정위와 선을 긋는 것을 선택했다. 심지어 국군항일장병보다 더욱 왕정위를 원수처럼 미워한다고 말하고 행동하게 된다.
그외에 양안정권은 유엔의 회원국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각도에서 출발하여, 모두 자신의 2차대전 전승국지위를 중시했다. 자연히 추축국에 가입하자고 주장한 왕정위의 명예회복을 꺼낼 수가 없었다. 그러나 양안의 정치엘리트와 인민은 항일국군의 희생으로 얻어낸 성과를 누릴 때 그들의 내심으로 따르는 것은 여전히 왕정위노선이다. 예를 들어 한 로스앤젤레스에 살고 있는 통일파 심람선배는 필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가 항일영웅을 존경하는 것은 그가 항일영웅을 본받아 끝까지 저항하는 정신을 배워야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바꾸어 말하면 다수의 중국인은 기실 저항자는 다른 사람이 맡기를 바란다. 자신은 좌우봉원(左右逢源)의 협력자가 되면서. 저항자가 침입자를 격퇴신 후에 다시 나타나서 어부지리를 얻으며, 저항자의 승리과실을 나눠갖는다. 반대로 침략자가 승리하면, 그들은 계속하여 끝까지 협력자로 남는다. 그렇게 하면 영원히 불패하는 오뚜기가 되는 것이다. 아마도 대대수의 중국인에 있어서, 진정 유감스러운 것은 자신의 역량으로 일본을 패배시키지 못했다는 것이 아니라, 중국이 처음부터 참가했으면 안되는 전쟁에 참가했다는 것이었을 것이다.
양안정권 공통의 역사금기
네덜란드의 역사학자 Ian Buruma는 이렇게 지적한 바 있다. 네덜란드를 포함한 많은 2차대전때 나치에 점령당한 국가는 모두 극력 자신이 저항자라는 이미지를 만들었고, 대다수의 정도는 다르지만 협력자를 선택했던 사실은 절대로 입에 올리지 않게 한다고. 그들이 이렇게 하는 것은 첫째 나치가 패전한 후의 국제환경에 영합하여, 자신이 NATO체제내에서의 지위를 공고히 하기 위함이고, 둘째 전후출생한 유럽인들이 자신의 국가와 민족에 대한 동일성인식을 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60년대에 이르러, 유럽각국이 통치하던 식민지가 속속 독립하면서, 베트남전쟁반대의 사조가 서방세계에 영향을 미치면서 전후에 출생한 서구의 민중들은 점차 자신의 부친대에 다수가 2차대전당시 나치협력자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혹은 최소한 이전의 협력자와 저항자의 지위가 서로 전환된 사실을 발견한다. 사람들은 비로소 이 역사를 다시 연구할 기회를 가졌다. 거기에는 비시정권에 대한 연구를 포함하여 60년대이후에 즉 많은 지도자급의 협력자들이 사망한 이후에 비로소 전개되기 시작한다.
그러나, 유럽인의 사상해방은 어쨌든 훨씬 일찍 시작된다. 1960년대에서 21세기초까지 적지 않은 중하층협력자들이 생존해 있었다. 심지어 이스라엘은 전세계에서 유태인학살의 참여자들을 찾아다녔다. 그러므로 관련진술이나 증언이 남아 있게 되고, 비교적 완전한 기록을 남길 수 있었다. 해협양안정권은 2차대전때의 일본과 마찬가지로, 동방인의 독특한 존엄을 보호하기 위하여, 그저 중국인이 침략에 저항한 일면만 강조하고, 자신이 협력자가 된 추악한 역사는 회피하게 된다.
많은 2차대전의 협력자들은 일본이 투항한 후 국공양당의 정부에서 일하게 된다. 다만 그들은 왕왕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하여 더더욱 자신이 일찌기 친일했던 역사를 지우길 원했다. 왕정위정권을 깊이있게 연구하고자 하거나 혹은 만주국역사의 진상을 연구하는 사람은 걸핏하면 홍색공포 혹은 백색공포수단으로 숙청당했다. 그리하여 전후에 양안에서 출생한 중국인들은 더더욱 당국의 공식적인 주장이외에 다른 면을 보기 힘들었다. 더더구나 중국인이 협력자가 되었던 경우가 저하자가 되었던 경우보다 훨씬 많았다는 사실을 언급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1970년대에 발생한 보조운동(保釣運動, 댜오위다오, 일본명 센카쿠열도를 지키자는 운동)과 중일단교(대만과 일본의 단교)등 역사사건이 발생하면서, 중화민국의 군민들의 반일정서가 심각하게 나타나고, 대만에서는 동시대의 유럽인들처럼 자신의 과거를 반성할 방법이 없었따. 중공정권은 모택동의 영도하에 전30년간 국군항전노병을 미친듯이 정리했고, 그리하여 전후에 출생한 대륙인들은 보편적으로 민국세대에 대해 미안한 감정을 가지고 있다. 개혁개방이후 보상심리로 대거 항일영웅을 선전하고, 수량이 더욱 많았던 협력자들에 대하여는 무시하는 것을 선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