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항우)

거록지전(巨鹿之戰): 항우(項羽)는 어떻게 승리할 수 있었는가?

중은우시 2024. 9. 22. 21:34

글: 서북낭(西北狼)

진나라말기의 역사무대에서 서초패왕(西楚覇王) 항우(項羽)는 말그대로 남자주인공이다. 다만 그에게는 많은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수수께끼가 있다. 왜 아무도 그의 거록전투에서의 파부침주(破釜沉舟)의 기적을 재연하지 못했을까? 왜 홍문연에서 유방을 보내주었을까, 정말 부인지인(婦人之仁)때문이었을까?

  1. 거록의 국면

항우를 얘기하자면 먼저 그가 거둔 최대의 성공작인 거록지전(巨鹿之戰)을 얘기해야 한다.

거록지전에 관하여, 후세의 많은 사람들은 원인을 간단하게 '파부침주(破釜沉舟)'라고 말한다. 심지어 많은 군사가들은 서초패왕의 기적을 재연하고자 했지만, 결과적으로 호랑이를 그리려다 개를 그린 꼴이 되고 만다. 이는 거록지전에는 재연하기 어려운 여러가지 요소들이 있기 때문이다.

거록지전의 배경은 기원전208년 겨울, 진나라장수 장한(章邯)이 의군의 항량(項梁)을 격파한 후, 공격의 방향을 북방에 있는 조(趙)나라로 향했다.

장한은 먼저 조나라의 도성인 한단(邯鄲)을 함락시키고, 그후 한단을 평지로 만들어버린다.

조왕헐(趙王歇)과 승상 장이(張耳)는 한단에서 도망쳐 나와 한단의 동북쪽에 있는 거록성(巨鹿城)으로 들어가 저항한다. 그리고 사람을 여러 제후들에게 보내 구원요청을 한다. 제(齊), 초(楚), 연(燕), 대(代)로 구성된 연합군이 조나라를 구하러 간다. 이 연합군은 하남지군(河南之軍)과 하북지군(河北之軍)으로 나뉘어 있었다. 하북지군은 거록성의 북쪽에 주둔하며 진여(陳餘), 장오(張敖)등이 지휘했다. 하남지군은 주인공 항우가 지휘하는 부대이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하(河)는 황하(黃河)가 아니고 장하(漳河)이다. 그외에 한 마디 덧붙이자면, 거록은 장하이북에 있다. 하북지군도 장하이북에 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때 하북지군이 거록성의 북쪽에 있었다. 이것이 중요하다.

항우는 송의(宋義)를 죽인 후, 5만대군을 이끌고 장하 이남에 도착한다. 그럼 하북지군은 병력이 얼마나 되었을까? 사서에 명확한 숫자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추산해볼 수는 있다. 항우가 나중에 거록전투가 끝난 후, 직접 제후군 및 진나라투항군을 함께 이끌고 관중으로 가서 홍문연을 연다. 이때 그의 병력은 40만이었다.

관중으로 가는 길에 다시 저명한 신안살항(新安殺降, 항복한 적군을 죽인 사건)이 발생한다. 20만명을 죽였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항우가 거록전쟁이 끝났을 때 수하에 기실 60만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가 직접 이끌던 5만을 빼고 진군이 40만이었으니, 하북지군의 규모는 약 15만명가량이었을 것이다.

아마도 의문을 표시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왜 사상자는 고려하지 않는 것인가. 왜냐하면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거록지전은 격궤전(擊潰戰)이었지, 섬멸전(殲滅戰)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쌍방의 진실한 사상자수는 그다지 많지 않았다.

그럼 왜 자꾸 하북지군을 얘기하는가? 왜냐하면 그들이 거록지전에서 한 역할이 아주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없었더라면, 초군은 아무리 병사 한명한명이 용맹무쌍하다고 하더라도 이 전투를 이길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유감스럽게도, 사서에서는 단지 한마디 "작벽상관(作壁上觀)"으로 그들을 묘사하고 끝낸다. 마치 그들은 전체 전투과정에서 그저 병풍처럼 구경하기만 하고, 거록전투는 마치 항우 혼자서 쇼를 한 것처럼.

다음으로, 반대쪽인 진나라를 살펴보자. 진나라는 이미 등장한지 3년된 장한외에 돌연 한명의 새로운 인물이 등장한다. 왕리(王離)

왕리는 왕전(王翦)의 손자이고 진나라 장성군단(長城軍團)의 최고총사령관이다. 그는 진나라의 가장 정예부대를 지휘하고 있다. 왕리가 등장하면서 장한의 역할을 빼앗아가고, 그가 거록전투의 주공격을 맡고, 의군을 상대하는데 능숙한 장한은 이선으로 물러난다. 왕리를 보좌하는 역할을 하고, 단지 후방의 군수보급선을 엄호하는 책임을 진다

여기에서 진나라의 군수보급선에 대하여 얘기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뒤의 거록지전의 여러가지를 이해하기 어렵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진나라는 중국을 통일한 후, 진시황이 형양(滎陽)부근에 대명이 자자한 오창(敖倉)을 건설한다. 관동(여기서 관동은 函谷關의 동쪽 즉, 하북성등 중원지역을 가리킴) 각지에서 수송되는 양식을 모두 이곳에 보관했다. 왜 오창을 건립했는가? 중원의 수계도(水係圖)는 마치 부채꼴의 반원의 그물망과 같다. 오창이 위치한 곳은 바로 그 중심이다.

관동에 문제가 생기면, 오창에서 양식을 꺼내어 수로를 따라 운송하면 어느 곳이든 갈 수 있는 것이다.

거록전투에서, 진군의 양식은 오창에서 출발하여, 황하를 따라 북상한 다음 황하의 지류인 장하로 역류하여 들어오게 된다.

다시 장하에서 하역한 후, 육로를 통해 거록성 아래의 왕리 군용까지 운송하는 것이다.

수로안전은 장한이 별로 걱정하지 않았다. 그가 걱정한 것은 육로구간이다. 그래서 그는 장하에서 거록에 이르는 길에 용도(甬道)를 건설하여 양식을 운송한다.

2. 거록지전의 수수께끼

좋다. 쌍방의 배치는 모두 얘기했으니, 본격적으로 전투에 대해 이야기하도록 하자.

먼저, 공격개시한 것은 항우의 하남지군이다. 항우는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시작하자마자 바로 파부침주한 것이 아니었다.

그가 처음 한 것은 영포(英布)와 포장군(浦將軍)에게 2만명을 주어 장한의 군수보급선을 끊도록 하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언급해야할 점은 영포라는 인물이다. 영포가 전체 거록지전에서 한 역할은 항우에 전혀 못지 않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영포가 없었더라면, 영포가 뛰어난 활약을 하지 않았더라면, 뒤의 일들을 전혀 추진할 수 없었을 것이다.

알아야 할 점은 거록이 장하에서 멀지 않다는 것이다. 이 육상군수보급선의 거리는 수십리가량이었다.

이는 진군의 두 부분은 서로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는 것이다. 네가 용도를 공격하다가 자칫 잘못하면 40만군대에 포위섬멸당할 수 있게 된다는 말이다.

그러나 영포의 활약은 눈부셨다: "전소리(戰少利), 절장한용도(絶章邯甬道), 왕리군핍식(王離軍乏食)"

이 짧은 13자는 많은 정보를 담고 있다.

첫째, 장한은 20만이 형도대군(刑徒大軍)을 거느리고 있었다. 20만명이 지키는 군수보급선을 2만명으로 끊어버린 것이다. 이건 불가사의한 군사기적이 아닐 수 없다.

아마도 진군의 군사보급선이 너무 길어서 장한이 구간별로 나누어 병력을 배치했으며, 영포는 역량을 집중하여 그중 한 곳을 공격했으니, 그다지 뛰어난 활약은 아니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문제는 보급선을 끊은 후에는? 장한이 끊긴 것을 보고 가만히 있겠는가? 왕리는 보급선을 다시 열기 위해 병력을 보내지 않겠는가? 그렇게 되면 40만대군에 포위당하게 된다.

"왕리군핍식"이라는 기록을 보면, 우리가 이런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영포의 2만은 성공적으로 진군 40만의 반격을 막아내고 진지를 지켰으며, 진군의 양쪽이 회합하는 것을 성공적으로 막아냈다고.

<사기>에는 영포의 거록지전에 대하여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항적(항우)은 영포로 하여금 먼저 장하를 건너 진군을 치도록 한다. 영포는 여러번 승리를 거둔다(數有利)....초병은 항상 승리를 거두었고, 공로가 제후들중 으뜸이었다. 제후의 병력은 모두 이로 인하여 초에 복속한다. 영포는 소수로 다수의 적을 격패시켰다(以少敗衆)."

여기서 주목할 점은 그가 "소수의 병력으로 다수의 적을 이겼다"는 것이다. 그리고 '여러번 승리를 거두었다.' 난이도가 얼마나 높은 일인가.

영포가 진군의 백전백승의 신화를 깨버린 후, 거록성북쪽의 하북지군도 활발하게 움직이기 시작한다. 진여는 항우에게 사람을 보내 계속하여 전과를 확대하도록 요구한다. 그리고 영포는 여전히 용도방어전을 완강하게 진행하고 있었다. 그러나 상대는 어쨌든 40만이다. 영포가 아무리 용맹하더라도, 끝까지 버티기는 힘든 일이다.

그렇다면 항우가 수중에 지닌 3만명을 추가투입하면, 40만진군을 막아낼 수 있었을까?

그건 그들이 왕리군의 군량미조달을 막아낼 수 있느냐여부에 달려 있다.

그래서 항우에 있어서, 영포의 진지보위전에 가담하는 것은 만전지책이 아니다. 그는 자신의 생각이 있었다. 우리는 천천히 분석해보기로 하자.

초군으로 하여금 장하를 건너게 할까? 가능하기는 하다. 그럼 거록성북쪽의 구경꾼들이 계속하여 초군이 죽어나가는 것을 구경만 하고 있을 것인가? 너희도 힘을 보태야 하지 않겠는가?

안심해라. 너희가 진군에 대한 두려움이 있고, 아직 치유되지 않았다는 것도 안다. 이렇게 하자. 너희는 영포가 빼앗은 진지에서 군영에 주둔하면서, 장한, 왕리 두 부대의 연결을 끊는 임무를 맡아달라. 방어는 너희도 할 수 있지 않는가.

진군과 직접 전투를 벌이는 것은 우리 초군이 맡겠다.

그 뒤에 일어난 일들을 보면 진여측에서 동의한 것으로 보인다.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답안은 바로 이 고사성어에 있다: 작벽상관(作壁上觀)

우리가 앞에서 반복적으로 강조한 것을 기억하는가? 하북지군은 거록성북쪽에 군영을 펼치고 있었다. 영포의 진지는 거록성남쪽에 있다.

<사기>에서 제후들의 '작벽상관'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초군이 진군을 칠 때, 여러 장수들은 모두 장벽위에서 구경했다(諸將皆從壁上觀)"

먼저 우리가 알아야할 점은 제후들 군영의 높이는 성벽보다 높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는 간단한 군사상식이고,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을 것이다.

만일 그들이 거록성북쪽에 계속 있었다면 어떻게 군영에서 거록성을 사이에 두고 거록성남쪽에서 일어나는 전투를 구경할 수 있겠는가?

이는 연합군이 성북에 있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에서 또 다른 기록을 보자: "그리하여 왕리를 둘러싸고, 진군과 조우한다. 아홉번 싸웠고, 그들의 용도를 끊으면서 대파한다. 소각(蘇角)은 죽이고, 왕리는 포로로 잡았다."

왕리에게는 20만의 장성군단이 있는데, 항우는 겨우 5만명인데 4배나 많은 병력을 포위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당초 백기(白起)는 장평지전(長平之戰)에서 산골짜기 지형을 이용하여 1:1의 비율로 이미 양식보급로가 끊긴 조(趙)나라군대를 포위했지만, 사상자가 반이 넘게 나왔다. 그런데 항우는 어찌 일마평천(一馬平川)의 하북평원에서 4배나 많은 적군을 포위할 수 있었단 말인가?

그렇게 되면 포위망이 너무 엷지 않은가. 왕리의 병력은 20만이며 게다가 진나라의 최정예부대가 아닌가.

여러 제후들과 연합을 하여 함께 손을 쓰고, 또한 게다가 거록성안의 군대도 있어 안팎에서 협공을 하여, 잠시 왕리를 성아래 붙잡아 놓을 수는 있을지 몰라고. 그건 그저 둘러싸기만 한 것일뿐이다. 영채내에 있는 적군을 바깥에서 둘러싼 정도이다.

그러나 그것이면 충분하다. 제후연합군이 그를 도와서 왕리를 막아주면, 항우의 이어지는 작전이 펼쳐질 수 있는 것이다.

"진여복청병(陳餘復請兵)"이후 항우는 출병하겠다고 대답한다. 그는 파부침주를 명한다. 모든 사람은 3일치 양식만 가지고, 장하를 건너 진군과 결사적으로 싸운다. 대군이 강을 건넌 후 첫번째 전투목표는 왕리가 아니라 장한이었다.

기억할 점은 항우는 이때 장한을 격패시켰지, 장한을 격멸시킨 것이 아니다. 그의 대부대는 여전히 온전했다. 항우는 그저 몇 차례의 조우전에서 승리를 거두었을 뿐이다.

장한은 병법에 뛰어나 작전을 세운 후에 움직인다. 그가 이전에 항량과 싸울 때도 처음에 항량군에게 동아(東阿)에서 패배했다. 그후에 물러나서 상처를 치료한 후, 항량이 교만해져서 주의하지 않는 틈을 타사 비오는 밤에 기습하여 항량을 죽여버린 것이다.

이번에도 기실 마찬가지이다. 그의 '인병해(引兵解)'는 패퇴가 아니라, 물러나서 기회를 엿보아 움직이려는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의 계산이 어긋나게 된다. 항우는 파부침주의 결심으로 나온 것이고, 파부침주의 작용은 단시간내에 사기를 끌어올리는 것이다. 소위 '사지에 떨어지게 만든 후 살아나오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나 이걸 따라해서는 안된다. 사람이 사지에 떨어지면 가장 먼저 나타나는 것은 용기가 아니라 공포이다. 그들이 사지에서 활로가 보일 때 비로소 용기가 폭발하는 것이다.

항우가 감히 파부침주할 수 있었던 것은 영포의 성공적인 노르만디상륙작전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제서야 그는 초군이 부분전투에서 진군을 이길 능력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렇지 않으면 그가 왜 처음부터 파부침주를 하지 않았겠는가.

만일 장한이 항우의 제1차공격을 막아냈다면, 항우는 비참하게 죽었을 것이다.

심지어 만일 장한이 일체의 댓가를 치르고서라도 항우와 결사전을 벌였다면, 초군의 용맹무쌍함이 소모된 후, 그들은 죽는 길밖에 없었을 것이다.

아쉽게도 장한의 안정적인 병력운용은 이때 최대의 실수가 되어버린다.

항우가 아무리 용맹하더라도, 근본적으로 장한의 부대를 격패시킬 생각까지 하지 않았다. 그는 그렇게 천진난만하지 않다. 그의 목적은 연합군의 진군에 대한 두려움을 치유시키는 것이었다. 15만의 작벽상관하는 부대의 자신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이었다.

진승오광의 난이 발생한 이후, 장한은 반란군에게 최대의 악몽이었다. 주문(周文), 진승(陳勝), 위구(魏咎), 전담(田儋), 항량(項梁)이 모두 그에게 패배했다. 하늘에 눈이 있다면 언젠가 누가 나서서 이 대마왕을 수습하도록 해줄 것이다. 진나라는 백전불패가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어야 한다. 제후군의 공진증(恐秦症)은 파부침주라는 강력한 한방으로 순식간에 모조리 치유되어 버리고 만다.

그리고 장한을 보면, 그가 뒤로 물러나는 모습을 우군들이 볼 때 어떻겠는가. 무슨 생각을 하겠는가. 만일 그의 의도를 안다면, 전략적인 후퇴라고 생각할 것이지만, 잘 모른다면, 그들의 양식보급선이 더 이상 유지되지 못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장한은 병력을 일단 물린 다음, 항우와 제후군의 헛점이 노출되면 다시 공격하려고 생각했다. 연합군에게는 헛점이 수두룩하다.

그러나, 항우는 그런 시간을 주지 않았다. 순식간에 와와 소리지르는 연합군을 이끌고 왕리쪽으로 쇄도해 들어가는 것이다.

쌍방은 모두 20만이지만, 한쪽은 승리의 기세를 타고 사기가 충천하는 부대이고, 다른 하나는 양식보급이 끊어져 사기가 바닥에 떨어진 부대이다. 승부는 싸우기도 전에 이미 난 것이나 다름없다.

장한쪽이 반격할 시기를 잡기도 전에 왕리쪽이 무너졌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항우는 왕리를 처리한 후, 계속하여 장한을 친다. 쌍방은 수차례 싸웠고, 진군은 수차례 퇴각한다.

그러나 여전히 문제는 있다. 장한을 이길 수는 있지만, 그의 부대를 철저히 전멸시킬 수는 없다. 장한의 뒤에는 오창이 있다. 그들은 군량이 충분하여, 너를 천천히 말려죽일 수 있는 것이다.

쌍방이 대치하고 있을 때, 거록전투에서 또 다른 전신(戰神)이 나타난다.

거록지전이 발발하기 전에, 진나라조정에 큰 변고가 일어난다. 승상 이사(李斯)와 군대의 원로 풍겁(馮劫), 풍거질(馮去疾)이 피살되고, 조고(趙高)가 진나라제국의 1인자에 오른 것이다!

여기서 알아야 할 점은 장한처럼 20만대군을 지휘하는 제국의 주요장수는 반드시 조정내에 뒤를 받쳐주는 인물이 있는 법이다. 그렇지 않다면 일찌감치 죽임을 당했을 것이다.

당시 조정내에서는 두 파의 세력이 있었다. 하나는 이사와 풍씨형제이고, 다른 일파는 조고이다. 뒤에 일어난 일을 보면 장한은 분명 조고의 일파는 아니었다. 그러니 그로서는 조정의 그러한 변고에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외에 왕리는 아마도 조고의 사람이었을 것이다.

진승오광의 난에서부터 거록지전까지 진나라는 3년간 혼란에 빠져 있었다. 그러나 왕리의 장성군단은 시종 나타나지 않았다.

그런데, 이사가 죽은 후, 장한이 조왕헐, 장이를 몰아붙여 난세를 거의 수습할 지경에 이르렀을 때, 왕리가 돌연 나타나서, 승리의 과실을 따먹으려 한 것이다. 그는 장한으로부터 주인공의 위치를 빼앗아버렸는데, 이건 너무나 의심스럽다.

왕리는 큰 확률로 조고에 의해 장한을 대체하기 위해 보내진 것이다. 그런데 거록전투에서 왕리가 먼저 패배해버렸다. 조고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그는 분명 항우가 무슨 병법이 신처럼 뛰어나다고 여기지 않았을 것이고, 장한이 왕리가 위기에 처했는데 도와주지 않고, 항우의 칼을 빌어 왕리를 제거했다고 여겼을 것이다.

장한은 조고와의 협상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자, 결국 부대를 이끌고 항복하기로 결정한다. 항우측으로서는 의의의 수확이다. 자연히 기꺼이 받아들이게 된다.

3. 금의야행(錦衣夜行). 모두 부득이한 일이다.

거록지전이 끝난 후, 제후들은 항우를 종약장(縱約長)으로 추대한다. 옛날 소진(蘇秦)이 가지고 있던 그 직함이다.

항우는 맹주의 신분으로 대부대를 이끌고 보무당당하게 관중으로 진격한다.

도중에 육국군대와 진군간에 갈등이 생겨 신안살항사건이 벌어진다. 전해지는 바로는 20여만을 죽였다고 한다. 많은 사람은 모두 이를 장한의 사람이라고 여긴다!

다만 필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장한은 항우에게는 자신의 숙부를 죽인 원수이다. 만일 항우가 정말 장한의 그 20만부대를 죽이고자 했다면, 장한도 함께 죽였을 것이다. 하필 그만 남겨둘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리고 사후에 그를 왕에 봉할 필요도 없지 않은가. 서초패왕이 그 정도로 흉금이 넓은 사람이었던가?

이 20만명은 큰 확률로 왕리의 장성군단이었을 것이다. 앞에서 얘기한 것처럼 거록지전은 격궤전이지, 섬멸전이 아니었다. 진정 사상한 사람의 수는 얼마 되지 않았다. 왕리군의 대부분은 포로로 잡혔을 것이다.

이들은 모두 오래된 진나라사람들이고, 항우로서는 그들을 죽일 이유가 있었다. 그러나 장한이 지휘한 수도군단(囚徒軍團)은 진나라사람들과 그다지 큰 관계가 없다.

그때 항우는 40만명을 보유했지만, 자신의 직계부대는 겨우 5만명이다. 장한의 수도군단이 절반을 점한다. 그래서 그는 장한의 이익을 반드시 존중해주어야 했다. 당초 투항할 때 그를 왕에 봉하겠다는 약속을 했고 이제는 그것을 지켜주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 천하의 땅은 모두 주인이 있었다. 단지 두 곳만이 반무주공산이었다. 그것은 바로 진나라의 대본영인 관중(關中)과 파촉(巴蜀)이다.

왜 "반무주공산"인가. 왜냐하면 유방은 이미 두 곳을 자기 것이라고 여기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새로 나타난 거록집단은 그것을 인정해주지 않았다.

유방은 팽성에서 출발하여, 계속하여 투자자를 받아들이며 서진한다. 관중에 도착했을 때 부대는 이미 10만으로 늘어나 있었다. 그는 관중과 파촉을 이들 투자자들에게 나눠주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그의 10만대군은 졸지에 산산조각으로 갈라질 터였다.

현재 천하는 은연중에 유방과 항우의 양대집단으로 나뉘게 되고, 동시에 같은 땅을 노리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항우, 유방이 반목하게 된 원인이다. 바로 이익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다.

유방이 "동관을 지키며, 여러 제후들이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는 것은 정확한 전략이었다. 다만 그의 잘못이라면 그것을 지켜내지 못한 것이다. 누가 생각이나 했으랴. 일부당관 만부막개(一夫當關 萬夫莫開)의 함곡관(函谷關)이 영포가 샛길로 들어와서 함락당할 줄이야. 이건 확률적으로 발생가능이 아주 적은 사건이었다.

그 뒤에 홍문연(鴻門宴) 고사가 나온다. 그러나 많은 부분은 믿기 어렵다. 이 고사의 소재는 사마천(司馬遷)이 번쾌(樊噲)의 손자인 번타광(樊他廣)에게서 들은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번쾌가 홍문연에서 왜 그렇게 두드러진 역할을 했겠는가? 유일하게 확실한 것은 항우가 확실히 유방과 식사를 하긴 했다. 다만 구체적으로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추측하기는 어렵지 않다. 유방은 100% 약한 모습을 보이며 관중을 내놓겠다고 했을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가 항우의 군영에서 빠져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이 문제가 해결되면, 그와 항우간에는 무슨 남아 있는 갈등같은 건 없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이처럼 한고조황제의 명예에 흠이 가는 일을 공식문건에서는 절대 기록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태사(太史)인 사마천은 그저 번쾌의 손자에게 가서 물어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항우의 '금의야행', '목후이관(沐猴而冠)'에 대해 얘기해보자.

항우도 관중을 수도로 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 아니다. 그도 자신이 제2의 진시황이 되고 싶지 않았던 것도 아니다.

이유는 하나이다. 그는 겨우 5만명의 군사를 가지고 있다. 진시황이 되려면, 20만의 수도군단, 15만의 제후군, 그리고 10만의 유방군단이 동의해주어야 한다. 네가 정말 진시황이 되고자 하면 아마 영포마저도 너의 반대편에 서게 될 것이다.

그리서, 소위 "부자가 되고나서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는 것은 비단옷을 입고 밤길을 거니는 것과 같다(富貴不還鄕, 如錦衣夜行)"은 그저 스스로 찾은 변명거리일 뿐이다.

결론

전체 거록지전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세 곳이다: 첫째는 영포의 노르만디상륙작전이다. 이것은 항우의 파부침주의 기초이고, 또한 하북지군이 전투에 참가하는데 자신감을 갖게해준 계기이다. 둘째는 항우의 파부침주이다. 그는 제후들의 공진증을 치유시켰고, 하북지군의 전투력을 철저히 발휘하게 만든다. 셋째는 조고의 도움이다. 만일 그가 장한을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넣지 않았다면, 거록지전에서 진나라는 완전히 패배하지는 않았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