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백(李白)은 왜 과거시험을 치지 않았을까?
글: 야사미필가(野史未必假)
1
시선(詩仙) 이백(李白)은 평생 과거시험장에 들어가지 않았다.
당현종(唐玄宗) 개원(開元)초년, 한 18살짜리 소년이 사천(四川) 재주(梓州) 장평산(長平山) 안창암(安昌巖)으로 가서 조유(趙蕤)라는 은사(隱士)를 방문한다.
조유는 촉중(蜀中)에서 유명한 잡가(雜家)이고, <장단경(長短經)>이라는 책을 쓴 바 있다. 이는 종횡가(縱橫家)의 모략을 집대성한 책이다. 내용은 내정, 외교, 군사등 여러 방면에 걸쳐 있고, 아주 실용적이었다.
이 소년은 어려서부터 제세안민(濟世安民)의 이상을 가지고 있었고, <장단경>같은 기서를 특히 좋아했다. 그래서 그는 직접 찾아가서, 조유를 스승으로 모시고자 한 것이다. 조유는 젊은이가 솔직하고 시원스러운 것을 좋아했다. 두 사람의 나이는 20여세였지만, 같은 나이대인 것처럼 스승이면서 친구로 지낸다.
소년은 조유에게 공부하며 수행하고, 행위예술도 했다. 산골짜기에서 나무를 찾아 나무집을 지었고, 그 나무집에 몇년씩 머물렀고 시내에는 들어가지 않았다. 가장 좋아하는 것은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는 수천마리의 새를 기르는 것이었고, 새들이 가장 좋아하는 것은 사람옆에 서서 먹을 것을 달라고 하는 것이었다.
오늘날의 사람들 눈으로 보기에 이건 광장에서 비둘기에게 먹이를 주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다만 고대인들이 보기에, 새와 인간이 이렇게 친근한 것은 아주 신기한 일이었다. 그래서 광한태수(廣漢太守)는 그 말을 듣자 바로 구경하러 왔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두 사람을 제과고시(制科考試)의 "유도과(有道科)"에 추천하겠다고 말한다. 유도과는 도행이 있고, 도술을 할 줄 아는 사람들이 치는 시험이었다.
나이가 반백에 가까운 조유는 유명한 은사였고, 매일의 일상은 그저 누워있다가, 금(琴)을 연주하고, 새들과 어울리며, 풍경을 구경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조징군(趙徵君, 징군은 徵士와 같은 뜻으로 학문이 높으나 벼슬에 나가지 않는 사람을 가리킴)"으로 불렸다. 그건 조정에서 불러도 관직에 나가지 않는 대단한 인물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담담하게 광한태수의 추천을 거절했고, 이건 항상 그래왔던 바이다.
그런데, 이 소년까지도 턱을 한번 치켜들고는 시원스럽게 일반인이라면 꿈에도 바랄 과거시험자격을 거절한다.
광한태수가 말한 제과고시라는 것은 황제본인이 직접 주재하는 초빙방식이다. 당나라버전의 "Boss직접채용"인 셈이다. 일단 제과고시를 순조롭게 통과하면 당나라의 관리가 되는 것이고, 정식편제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오늘날의 사람이라면 '시험'이라는 발명에 대하여 아주 악감정을 가지고 있을지 모르지만, 고대인들에게 과거는 이를 통해 개인의 운명을 바꿀 수 있고 신분상승을 노릴 수 있는 아주 좋은 기회였다.
이 소년은 왜 그렇게 좋은 기회를 거절했을까? 그는 도대체 누구일까?
그가 바로 나중에 크게 이름을 떨치는 시선 이백이다.
찬란하게 빛나는 별처럼 많은 당나라때 시인들 중에는 왕유(王維)처럼 손쉽게 과거에 참가하여 바로 장원을 차지하는 인물도 있고, 맹교(孟郊)처럼 수십년간 여전히 초심을 잃지 않고 과거시험을 치는 인물도 있었다. 과거에 합격을 하든 말든 어쨌든 모두 과거에 참가는 했었다.
그러나, 이백은 유일한 예외이다. 문채풍류(文采風流), 시정만장(詩情萬丈)의 그는 평생 과거시험장에 들어가지 않았다. 이건 도대체 무슨 이유때문이었을까?
많은 사람들의 첫반응은 분명 시선이 과거시험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고, 무시했기 때문이라고 여길 것이다. 어쨌든 그는 "어찌 권력귀족들에게 허리를 숙이고 미소를 지으면서 스스로의 마음은 즐겁지 않게 만들 수 있겠는가."라는 글도 쓴 적이 있지 않은가.
사람으로서 살아가는데 즐거운 것이 가장 중요하긴하다.
그러나, 기실 그런 것은 아니었다.
이백은 확실히 과거시험에 참가하지 않았지만, 그는 과거에 참가하는 사람을 멸시하거나 무시하지 않았다.
이백이 가장 존중했던 맹호연(孟浩然)도 진사과의 시험을 치른 바 있다. 그러나, 이백은 여전히 맹호연을 미치 ㄴ듯이 좋아하는 뜻을 나타냈다: "오애맹부자(吾愛孟夫子), 풍류천하문(風流天下聞)"(나는 맹호연을 좋아한다. 그의 풍류는 천하가 들어서 알고 있다). 이백의 가까운 친구 고적(高適)은 자신의 수준으로 상과(常科)에 참가하는 것은 다른 참가자들을 괴롭히는 일이라고 여겼다. 그래도 그는 제과고시에는 참가했다. 그리고 성공적으로 관직에 오른다. 그렇다고 하여 이백이 고적과 가까운 친구가 되는데 장애가 되지는 않았다.
그뿐아니라, 이백은 과거시험에 응하는 사람들을 찬양하는 글도 썼다: "아비탄관자(我非彈冠者), 감별단개금(感別但開襟)"(나는 관리가 되기에 적합한 사람이 아니다. 헤어지지만 마음은 즐겁다) "욕절일지계(欲折一枝桂), 환래안소전(還來雁沼前). 그대가 과거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어 제왕의 궁전으로 돌아가기를 바란다.
이를 보면, 이백은 과거시험이나 과거시험에 참가하는 사람에 대하여 멸시하거나 무시하는 뜻은 전혀 없었다.
그렇다면 이백이 과거시험을 치지 않은 것은 합격하지 못할까봐 겁이 났기 때문일까.
그럴 가능성도 있기는 하다. 어쨌든 많은 시인들이 재능이 넘치지만, 과거시험에는 합격하지 못한 경우가 있다. 혹은 여러차례 시험을 쳐서 비로소 합격한 경우가 있다. 예를 들면, 두보(杜甫), 가도(賈島), 한유(韓愈), 온정균(溫庭筠)등등이 있다.
당나라때의 과거시험은 상과와 제과의 둘로 나뉜다. 상과는 조정이 정기적으로 치르는 대규모 시험이다. 일반적으로 진사과(進士科)와 명경과(明經科)에 참가하는 사람이 가장 많다. 특히 진사과는 글읽는 선비들의 최종 꿈이다. 일단 합격하면 평생이 보장된다. 진사과는 경쟁이 상대적으로 치열해서, 합격률이 일반적으로 2%가량에 불과하다. 명경과는 합격률이 조금 높아서 20%가량이 된다. 그래서 "삼십노명경(三十老明經), 오십소진사(五十少進士)"(서른에 명경에 합격하면 늙어서 합격한 것이고, 쉰에 진사에 합격하면 젊어서 합격한 것이다)라는 말까지 있다.
상과에 합격하지 못했다고 해서 실망할 필요는 없다. 제과라는 길도 열려 있기 때문이다.
당나라때 특수한 인재채용시험으로 제과고시는 과목이 적으면, 7,80종, 많으면 근 100종이다. 거의 지덕체미로(智德體美勞)의 모든 분야가 가능하다. 일을 잘하거나 덕행이 높거나, 군대를 이끌고 전투를 잘하거나 아니면 연단하고 수도하는 것을 잘하거나 한가지 재주만 있으면 자신에게 맞는 길을 찾아갈 수 있다. 그리고 동시에 여러 과목도 신청할 수 있다. 그물을 넓게 펼치고 있으면 언젠가 합격하는 날이 올 것이다.
이렇게 보면, 과거의 길은 비록 인산인해이지만, 희망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이백의 뛰어난 재능으로라면 합격하는데 별 무리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시선은 왜 시도조차 해보지 않았던 것일까?
만일 우리가 자세히 이백의 동년(童年) 성장경력을 살펴보면 이유를 알 수가 있다.
2
이백은 과거에 참가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흑호(黑戶)"이기 때문이다.
이백은 일찌기 개인의 이력에 대해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오세통육갑(五歲通六甲)
십세관백가(十歲觀百家)"
육갑은 천간 지지로 시간을 계산하는 일종의 산법이다. 백가는 제자백가의 저작을 가리킨다. 즉,이백은 어려서부터 배운 것이 유가경전이 아니었던 것이다. 초급수학과 선진제자백가의 글이었다. 비록 비주류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아주 이상한 것은 아니다. 다만 이후 이백의 스타일은 약간 들판을 뛰어다니는 야생마같이 된다.
"십오관기서(十五觀奇書)
작부능상여(作賦凌相如)"
"십오유신선(十五遊神仙)
선유미증헐(仙遊未曾歇)"
"십오호검술(十五好劍術)
편간제후(遍干諸侯)"
오늘날 열다섯살짜리 학생이라면 고등학교입시공부하느라 바빴을 것이다. 당시 열다섯살짜리 이백도 아주 바빴다. 검술도 익히고, 이상한 책들도 읽고, 신선이 되는 수련도 하고, 여행도 하는 등등....
한 마디로 말해서, 정사(正事)를 빼고는 다 했다.
왜 이백은 이렇게 했을까? 아주 간단하다. 과거는 그가 갈 수 없는 길이기 때문이다.
그렇다.이백이 과거에 참가할 수 없었던 것은 그의 호적이 불명확하고, 신분이 수수께끼이고, 가족관계가 모호한 "흑호"였기 때문이다. 과거시험을 치를 자격이 없었고, 과거시험의 자격심사를 통과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당나라때 과거시험은 많은 글읽는 선비들에게 신분상승의 길이었다. 다만 이 길을 아무나 달릴 수는 없었다. 최소한 2종류의 사람은 시험참가자격이 없었다: 하나는 "형가지자(刑家之子)"이고, 다른 하나는 "공고이류(工賈異類)"이다.
간단히 말해서, 죄인이나 천대받는 직업을 가진 사람의 후대는 관리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죄인의 후손은 시험을 칠 수 없다. 이건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한 사람이 범법자가 되면 그 일가족이 관료가 될 수 없는 것이다.
당시 차별받던 직업은 주로 "상인(商人)"과 "이원(吏員)"이다.
고대상인은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사민체계중 말석이다. 한편으로 선비를 위주로 하는 관료계층은 동전냄새가 나는 상인이 '사대부'가 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보았고, 다른 한편으로 관상결탁, 권력을 이용해서 돈을 버는 행위등 부정부패현상이 나타나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고대에 일반적으로 정치를 하는 사람은 상업활동에 종사하는 것을 금지했고, 상인도 과거를 통해 관료가 되는 것을 막았다.
"이원"은 조정의 임시직이다. 당시에도 신분차별을 받았다. 자신이 과거에 참가할 수 없을 뿐아니라, 후손3대까지도 과거를 치를 수 없었다.
이백의 신세는 이 몇 가지에 다 관련된다.
이백 자신의 말에 따르면, 그의 선조는 한나라때 유명한 비장군(飛將軍) 이광(李廣)이고, 농서이씨(隴西李氏)이다. 나중에 십육국시대가 되어, 농서이씨집안에 대단한 인물이 나타난다. 서량(西涼)의 개국군주인 무소왕(武昭王) 이고(李暠)이다.
우연하게도 이고는 당나라황실이 인정한 선조이다. 당나라의 개국황제 이연(李淵)은 자칭 이고의 7대손이라는 것이다. 이연의 일가가 굴기하면서, 이당왕조를 건립했다; 그러나 이백의 조상은 죄를 저질러 머나먼 서역(西域)의 쇄엽(碎葉)으로 유배를 간다.
이처럼 일가의 남녀노소가 모조리 먼 곳으로 쫓겨가는 것은 큰 죄를 저질렀다고 봐야 한다. 아마도 "모반" "모대역"같은 대죄일 것이다. 이런 대죄를 범한 사람은 집안의 친척은 모조리 연좌되어 처리된다. 변방지구로 유배되고, 돌아오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다.
유배를 당해, 고향을 버리고 떠난 이백의 선조는 그저 비단길 주변에서 살아갈 방법을 찾아야 했고, 심지어 어쩔 수 없이 성과 이름을 바꾸어야 했다. 심지어 "이(李)"라는 성조차 쓰지 못했다. 쇄엽 일대는 농업이 발전할 여건이 되지 않았고, 가족을 먹여살리는 가장 좋은 방법은 장사를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이백의 집안이 장사를 했다고 본다. 심지어 어느 곳에 분점이 있고, 어느 곳에 판매대리점이 있다는 것까지 추측한다.
이렇게 이백은 "형가지자"와 "공고이류"의 두 가지에 모두 해당하게 되었다. 그러니 그 후손인 그는 과거에 참가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여러해가 지난 후에 대당의 정국에 급격한 변화가 발생한다. 여황제 무측천이 역사무대에서 물러나고, 당중종 이현(李顯)이 다시 등극한다. 이 정권교체의 특수한 시기에 정국이 발안정하니 각지의 인구유동에 대한 관리나 제한이 잠시 느슨해졌다. 이백의 부친은 그 기회를 틈타 가족을 데리고 만리를 이동하여 서역에서 중원으로 돌아온다.그러나 그들은 조상의 본적지인 농서(隴西) 성기(成紀)로는 가지 못했고, 남쪽으로 방향을 틀어 사천으로 간다. 그리고 사천 면주(綿州), 창륭현(昌隆縣) 청련향(靑蓮鄕)에 정착한다.
사천으로 돌아온 후 이백의 부친은 이전에 쓰던 성명을 버리고, 원래의 성씨인 "이(李)"씨로 되돌아간다. 그리고 자신의 이름은 "객(客)"으로 짓는다. 아마도 스스로를 고향을 떠난 이향객(異鄕客)이라는 뜻일 것이다. 이백의 모친이 이백을 임신하였을 때, 꿈속에 금성(金星)이 자신의 배로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그리하여 아들의 이름을 "백(白)"이라 하고, 자를 "태백(太白)"이라 하였다.태백금성의 그 태백이다.
이때는 수나라말기에서 이미 수십년이 지났을 때이고, 이백의 조상이 범한 "십악불상'의 대죄도 무수한 사면을 통해 점점 담화(淡化)된다. 이 각도에서 보자면 이백은 이미 죄인의 후손이라고 할 것도 없다. 그리고 이백 본인이 장사를 한 적도 없다. 그는 학문을 위해 스승을 찾아가고 연단하고 수도했다. 어떻게 보더라도 학자이다. 과거시험에 응시하는 자격이 문제될 것같지는 않았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백은 여전히 과거를 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옛날의 죄명은 사라졌지만, 새로운 죄명이 다시 나타난 것이다.이백의 부친 이객은 허가를 받지 않고 임의로 중원으로 돌아왔다. 이건 당시에 범죄에 해당한다.
당나라의 호적관리제도에 따르면, 지방정부는 매3년마다 한번씩 호구조사를 하고, 호적정리를 한다. 이를 통해 소지재의 인구거주상황을 파악한다. 이는 조정의 세수에도 영향을 미치니 절대로 엉성하게 할 수가 없는 일이다. 이백의 조상은 농서를 떠난지 오래 되었고, 원래의 호적은 말소되었다. 쇄엽은 그들집안의 새로운 호적지가 되었다. 이건 마음대로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만일 임의로 호적소재지를 벗어나면, 도망자 혹은 도호(逃戶)가 된다. 3년이하의 유기징역에 처할 죄가 되는 것이다.
이객은 중원으로 몰래 돌아온 것이다. 이는 합법적인 절차를 거치지 않고 몰래 숨어서 돌아온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그는 감히 자신의 조적소재지인 농서로 가지 못하고 남하하여 사천 면주에 정착한 것이다.
이 지방을 선택한 이유는 사천이 상대적으로 봉쇄되고 편벽하여, 이곳에 숨어지내면 조정의 주목을 받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외에 이씨의 중요조상중 한명인 당고조 이연의 할아버지, 당태조(唐太祖)로 추존된 이호(李虎)가 바로 이 곳에 매장되어 있다. 이곳에는 많은 이씨친족들이 살고 있어, 이객이 가족을 데리고 이들 친척들에게 의탁하러 온 것은 너무나 정상적인 선택이라 할 수 있다. 비록 혈연관계가 멀다고 하더라도, 이런 말도 있다. '이(李)'자를 쓰지 못하더라도 어쨌든 모두 같은 조상의 자손이니 서로 도와주는 것이 당연하다.
이객은 사천으로 온 후에 조용히 살면서 잘 숨어지냈다. 그리하여 불필요한 법적 문제는 발생하지 않는다. 다만 그가 법을 위반하여 중원으로 돌아온 일은 시종 숨은 화근이었다. 이백이 관직에 나가는데는 시한폭탄인 셈이다.
사료기재에 따르면, 이백이 사천을 떠나기 전에 한동안 "이원"을 지낸 적이 있다고 한다. 이런 경력도 아마 이백의 과거시험참가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3
"대도여청천(大道如靑天), 아독부득출(我獨不得出)"
이백의 신분문제는 비록 그의 대부분 일상생활에는 영향을 주지 않지만, 그의 인생선택을 결정하게 된다.
예를 들어, 이백은 두 차례에 걸쳐 재상집안에 데릴사위로 들어간다. 비록 당시 데릴사위로 들어가는 것은 아주 자랑스럽지 못한 일이었지만, 이백에 있어서, 이건 자신의 사회적 신분을 급속히 상승시킬 수 있는 좋은 방법이었다. 당나라때는 "동류상구(同類相求), 부득억취(不得抑取)"를 중시했다. 즉 서로 다른 신분계층간의 결혼은 금지되었다는 것이다. 이백이 재상가문의 데릴사위가 되었다는 것은 우회적으로 그가 이미 상류사회의 외곽층에 진입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마도 이렇게 묻는 사람이 있을 수 있을 것이다. 이백이 재상집안에 데릴사위로 들어갈 수 있었따면, 과거시험에 응시하는 것도 그다지 어렵지 않은 일이 아닌가. 혹은 사람을 찾아서 가짜 문서를 만들면, 고대에 오늘날처럼 빅데이타가 있는 것도 아니다보니 과거시험 자격심사를 통과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만일 그런 생각을 했다면 그건 이백의 인품을 너무 낮게 평가한 것이며, 또한 과거시험의 엄격성을 너무 낮게 본 것이기도 하다.
이백처럼 오만한 사람이 어떻게 신분을 위조하는 방식으로 관직에 나갈 수 있겠는가? 하물며 고대인들도 바보느 ㄴ아니다. 그런 위법행위에 대하여는 엄격하게 조사확인한다.
예를 들어, 신청시에 시험생의 호적을 조사하여 확인한다. 만일 객지타향에 사는 사람이라면, 호구원적지의 증명문건이 있어야 한다. 이건 오늘날의 "고고이민(高考移民, 대학입시를 위하여 호적지를 옮기는 것)"을 방지하는 것과 유사하다. 각지의 교육수준이 다르고, 합격T/O도 다르며 경쟁압력도 큰 곳과 작은 곳이 있다. 어떤 사람이 고의로 합격률이 높은 지방으로 가서 장성적인 수험생들의 T/O를 차지하는 일을 방지하기 위하여 반드시 원적지를 강조하는 것이다.
응시생의 개인정보는 각급정부의 여러 단계에 거친 확인을 받는다. 일단 호적정보에 문제가 있으면 합격했다고 하더라도 취소될 리스크가 있다.
설사 신청단계는 어찌어찌하여 통과했다고 하더라도, 이백은 중요한 증명문건 하나가 부족하다. 그것은 바로, "가상(家狀)"이다. 이는 "보첩(譜牒)"이라고도 부른다. 개인인사자료중 가족구성원조사표와 비슷한 것이다. 응시생의 조손3대, 가정구성원, 개인상황같은 정보를 명확히 밝혀야 한다. 취직할 때 배경조사를 하는 것과 유사하다.
이런 문건은 아주 중요하다. 쓰여진 정보가 정확해야할 뿐아니라, 격식도 엄격하다. 일단 잘못 적어넣게 되면 바로 응시자격이 박탈된다.
이백은 호적원적문건을 내놓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는 제대로 된 호적이 없기 때문이다.사천면주의 임시거주증명만 있을 뿐이다. 그는 또한 "보첩"도 내놓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의 조상은 쇄엽에 유배된 죄인이고, 그의 부친은 몰래 도망온 혐의자이기 때문에, 자신이 그런 것을 얘기하게 되면 바로 자신의 부친이 범법자라고 고발하는 셈이 된다.
생각해보라. 만일 대학입시에 응시생등록정보를 입력하는 업무담당자인데, 신분확인이 필요한 응시생을 만났는데, 그가 신분증도 없고,호적등본도 없다. 유일하게 그의 신분을 증명할 수 있는 것은 그가 살고 있는 집의 출입카드이다. 그에게 가족상황을 물어보는데, 그는 자신의 부친의 현재 이름은 가짜이고, 진짜이름은 말해줄 수 없다고 말한다; 다시 조상이 누구냐고 물어보는데 그는 그저 자신은 염황자손이고 용의 전인이라고만 말한다.
머리가 정상인 사람이라면 모두 눈앞의 이 자가 문제있다는 것을 알아차릴 것이다. 그런데 과거에 응시한다고? 고발당하지 않으면 다행이라 할 것이다.
이백의 집안내력의 수수께끼는 사람들이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복잡한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이백은 자신이 비장군 이광의 후예라고 강조하는데, 수나라말기이래의 선조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그에게 신분증명, 호적원본을 요구하지만 그는 시간이 너무 오래되어서 찾을 수가 없다고 말한다. 이백이 살아있을 때 그는 자칭 "포의(布衣)" "일인(逸人)" 혹은 "산인(山人)"이라고 했다. 즉 보통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죽기전에 그는 자신과 황제가 친척관계라는 것을 털어놓는다.
이백은 평생 사람을 찾아다니며 자신을 추천해줄 사람을 구했다. 만일 그가 정말 황제와 친척관계라면 그렇게 좋은 신분레테르를 사용하지 않았을 리 없다. 유비, 유황숙을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당현종은 재위시에 조서를 내려, 빠진 황실종친을 찾아서 보완한 바 있다. 이백은 왜 그런 기회에 자신의 황실혈맥이라는 신분을 회복하지 않았을까?
이건 실로 너무나 상식에 어긋나는 일이다.
이백이 분명하게 말해주지 않았으니, 후손들이 죽어라 찾아내서 보완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이백의 선조가 죄를 범한 시기는 '수말'이 아니라 '당초'일 것으로 본다. 당나라가 건립된 후에 쇄엽에 있었는데, 이는 그들이 이리 멸망한 수나라떄 죄를 진 것이 아미라, 막 건립된 당나라에 무슨 죄를 지었기 때문으로 봐야할 것이다.
이백의 선조가 구체적으로 무슨 죄를 지었을지에 대하여는 각자 다른 의견이 있다. 어떤 사람은 이백의 선조가 이연과 천하를 다투었던 양왕(凉王) 이궤(李軌)일 것이라고 하고, 또 어떤 사람은 현무문사변때 당태종에 의해 제거된 태자 이건성(李建成)일 일것이라고 말하고, 또 어떤 사람은 일찌기 겨병하여 무측천에 반대하는 반란을 일으킨 이당황실의 어떤 왕일 것이라고 말한다.
비록 구체적인 후보는 다르지만, 모두 한 가지에는 동의하고 있다. 즉 이백의 선조가 당나라황제에게 큰 죄를 범했고, 시간이 오래 흘렀지만, 신분의 수수께끼는 드러낼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은밀한 집안내력때문에 이백은 그저 신분정보가 없는 '흑호'로 지낼 수밖에 없었다. 당나라때의 과거시험에서 아무리 많은 사람을 뽑고, 선택의 자주성이 아무리 확대되고, 합격률이 아무리 올라가더라도, 그에게 있어서는 갈 수 없는 길이었다.
그래서 이백은 <행로난.기이>에서 이렇게 개탄한 것이다.
"대도여청천(大道如靑天), 아독부득출(我獨不得出)"
쉬운 말로 표현하자면; 다른 사람은 모두 갈 수 있는 큰 길이 있는데, 유독 내가 갈 수 있는 길은 없다.
기실 이백뿐아니라, 이백의 자손들도 후대에 과거에 참가했다는 기록이 없다. 이를 보면 신분문제의 영향이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다.
이백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관직에 나가려면 유일한 방법은 스스로가 유명인사가 되어 황제가 직접 관직을 내리는 것이다. 그래야 호적을 조사하지도 않고, 심사단계를 거치지 않을 수 있었다.
이 방안은 이백이 혼자서 생각해낸 것이 아니다.
고대에 재능이나 명성이 높아서 황제가 높이 평가하여 관직에 발탁된 경우가 부지기수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개원22년, 당현종은 태산에 봉선을 가는 길에 두 차례에 걸쳐 방사(方士) 장과(張果)에게 공손히 청하여 입궁하게 한다. 여동생 옥진공주(玉眞公主)를 거의 그에게 시집보낼뻔했었다. 단지 장과는 오직 한마음으로 수도하고, 관직에 나갈 생각도 없으며, 더더구나 결혼할 생각은 없다고 하여 이 일은 성사되지 못한다. 다만 당현종은 그래도 명을 내려 장과에게 종삼품의 은청광록대부를 내리고, 현통선생(玄通先生)이라는 호를 하사한다.
이 장과가 바로 전설 속의 "팔선과해(八仙過海)"에 나오는 그 장과로(張果老)이다.
이들 종교계의 인사들 외에 선비들 중에서도 과거를 거치지 않고 황제의 눈에 들어 관직을 받은 사례도 있다. 예를 들면, <노자>에 정통한 윤음(尹愔), 서예가 뛰어난 이옹(李邕), 박고통금의 여향(呂向)은 모두 이백과 동시대의 인물이고, 모두 과거를 거치지 않고 관직을 수여받았다.
그래서 자신의 재능에 대한 자신감이 충만한 이백은 충분히 많은 명성을 얻고,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다면 황제의 흥취를 이끌어 낼 수 있고, 관직으로 나갈 수 있을 것이라 여겼다.
이제 이백이 왜 어려서 유가경전이 아닌 다른 책들을 읽고, 또한 조유의 <장단경>에 특별히 흥미를 보였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이백 자신의 인생계획에 부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4
이백은 정말 관료가 되고 싶었지만, 그는 정말 관료에 적합하지 않은 인물이었다.
이백의 전반생은 비교적 단순했다. 은거수도하면서 명성을 얻으려 하거나, 명인들을 찾아다니면서 추천을 구하거나, 친구들을 찾아서 도처를 다니거나, 붓을 들어 시를 쓰거나. 그의 놀라운 재능은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고, "적선인(謫仙人)"이라는 칭호까지 얻는다. 명성이 어느 정도 커지자 자연스럽게 황제의 귀에 들어가게 된다.
천보(天寶)원년 드디어 당현종이 이백에게 입경하여"대조한림(待詔翰林)"하게 한다. 이 해에 이백은 이미 42살이었다. 즉, 그는 이십년이 걸려 비로소 관직에 나갈 길이 열린 것이다.
당현종은 용모를 중시했다.잘 생긴 사랆에게는 저항력이 전혀 없었다. 그리고 이백은 문장이 뛰어나고 풍류적일 뿐아니라, 말솜씨도 뛰어나고, 선풍도골, 세외고인의 풍모였다. 당현종의 심미관에 딱 들어맞는 유형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백이 '대조한립'하는 기간동안 당현종은 이백을 잘 대우해주고, 총애한다. 심지어 이백을 중서사인(中書舍人)으로 임명할 생각까지 품었다. 중서사인은 황제의 비서로 조령의 초안, 황제의 명을 전달하는 것을 책임졌다. 비록 직급이 높은 것은 아니지만, 직책은 아주 중대했고, 재상에 오른 사람들중 많은 사람이 거쳐간 직위이다.
다만,이백은 이를 통해 재상에 오르고 제후에 봉해지며 인생의 최고봉에 오르지 못했다. 금방 그는 "사금방환(賜金放還, 돈을 주고 돌려보내다)"당한다.
이백의 실패에 관하여 일반적으로 소인의 모함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당연히 그 소인은 소문에서처럼 이백의 신발을 벗겨준 "고력사(高力士)"가 아니다. 소위 "귀비봉연(貴妃捧硯), 역사탈화(力士脫靴)"는 원래 사실이 아니다. 이백의 재능은 너무 뛰어났고, 그를 시기하는 다른 관리들이 모함하는 것도 정상적인 현상이다. 심지어 누군가 이백의 신세내력에 대하여 떠들고 다녔는지도 모른다.
다만, 더욱 중요한 것은 황제의 태도이다. 이백은 경천위지의 치국지재가 되고 싶었다. 그러나 당현종은 이백을 그저 시나 쓰는 사람으로 여긴 것같다. 그리고 여러해동아 이백은 자유롭게 사는데 익숙해져서, 업무기율이나 기밀유지의식같은 것은 전혀 없었다. 가끔 지각하고 조퇴하고, 업무를 게을리하는 정도는 황제도 용인할 수 있다. 그러나 이백은 술마시기를 좋아하고, 그것도 많이 마셨다. 술을 많이 마시면 온갖 소리를 한다. 이런 인물을 중앙정부내에서 일하게 하는 것은 실로 부적절하다.
이백은 정말 관료가 되고 싶었지만, 그는 관료가 되기에 부적합한 인물이었다. 이건 처음부터 운명처럼 정해진 일이다.
설사 당나라때의 과거교육이 아무리 신축성있고, 아무리 자유롭더라도 역시 사람의 생각을 고착화시키고, 사람들의 개성을 제한하고, 사람의 행위를 규범화하는 측면이 있다.
이백의 불명확한 신세내력은 그로 하여금 과거시험과 유가경전의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주었고, 그가 자신의 개성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게 해주었으며, 그가 가"독기서" "관백가"하고, 검술을 배우고, 신선의 도를 추구하고, 표신입이(標新立異)할 수도 있고, 쇄탈불기(灑脫不羈)할 수 있었다. 그는 하지장(賀知章)이 말한 바대로 "적선인"이고, 두보가 가장 존경하는 "음중팔선"이었으며, 천고에 이름을 떨친 "시선"이다. 그러나 유독 정교하게 운용되는 정치체계내에서의 합격부품은 아니었던 것이다.
이것이 이백 개인에게는 최대의 불행이지만, 전체 중국문학사에서는 최대의 행운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