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명제(漢明帝)의 다섯째 아들인 유달(劉炟)은 어떻게 황위를 계승할 수 있었을까?
글: 이대규(李大奎)
동한(東漢)왕조에는 여러가지 불가사의한 일들이 많이 벌어졌다. 예를 들어, 마황후, 등황후, 염황후, 양황후는 모두 자식을 두지 못했고, 책봉된 황태자는 많은 경우 폐출되었다. 예를 들어, 동해왕(東海王) 유강(劉疆), 청하왕(淸河王 劉慶), 제음왕(濟陰王) 유보(劉保)등. 그리하여, 번왕이나 그 후손들이 여러가지 기연이 합쳐지면서 황위를 계승하는 일도 벌어졌다.
한명제(漢明帝), 유장(劉莊)과 가귀인(賈貴人) 사이에 태어난 다섯째 아들 유달(劉炟)도 바로 그러한 경우이다. 그는 어떻게 황위를 승계할 수 있었고, 역사에 위업을 남길 수 있었을까?
유달의 생애를 살펴보기로 하자.
- 마황후가 맡아기르다.
기원56년에 출생한 황자 유달은 적출이 아니었다. 그에게는 4명의 형이 있었다. 각각 승애왕(乘哀王) 유건(劉建), 진경왕(陳敬王) 유선(劉羨), 팽성정왕(彭城靖王) 유공(劉恭), 악성정왕(樂城靖王) 유당(劉黨)이다. 이처럼 적자가 아닌 유달은 정상적인 상황하에서라면 황제로 등극하기는 어렵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역사는 교묘하게 얽히는 법이다.
첫째, 유달은 한명제의 명덕마황후가 맡아서 길러주는 복을 누렸다. 그래서 '한나라때 황후중 가장 현덕한 사람"으로 꼽히는 마황후는 자식이 없었다. 아들 하나를 낳았지만 어려서 불행히도 요절하고 만다.
마황후를 총애했던 한명제는 그녀를 위로했다: 너무 슬퍼하지 말라. 가귀인이 낳은 유달을 데려다가 길러라. 그래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원래 유달의 생모인 가귀인은 마황후의 배다른 언니였다. 그래서 두 사람은 아주 가까운 자매관계였다.
어려서부터 유학을 좋아했던 유달은 봄날처럼 따뜻함 속에서 건강하게 성장한다. 마황후의 사랑을 받았을 뿐아니라, 한명제로부터 인정도 받는다.
2. 네명의 형들은 재능이 부족했다.
둘째로 하늘의 뜻인지는 몰라도, 유달의 네명의 형은 모두 한명제와 보통궁녀 사이에 태어났다. 보통궁녀들은 황제의 총애를 받지 못했다. 어떤 사람은 조용히 살다가 죽었거나, 심지어 이름은 남기지도 못했다.
자연스럽게, 그녀들이 낳은 황자들도 그다지 두드러지지 못했고, 서자출신인 유달보다 못했다. 더욱 중요한 점은 이 네 명의 형들은 모두 재능이 평범해서, 그다지 사람들의 눈길을 끌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독보적인 유달은 더욱 한명제의 사랑을 받는다. 한명제는 영평3년, 즉 기원60년에 나이 겨우 5살의 유달을 황태자로 책봉한다. 그리고 후계자수업을 받게 한다.
기원75년, 한명제가 붕어한 후, 19세의 유달이 황제에 오르게 된다. 그가 바로 동한왕조의 세번째 황제인 한장제(漢章帝)이다.
3. 유달은 "명장지치(明章之治)"를 완성하다.
운좋게 황제에 오른 유달은 확실히 한명제, 마황후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13년간의 집권기간동안, 역사에 이름을 남길 '명장지치'를 원만하게 완성한다.
정치적으로 여정도치(勵精圖治)하여, 정관형소(政寬刑疎)하고, 연좌제등 잔혹한 법률 50여조를 폐지시킨다. 청렴하고 능력있는 관리를 기용하고, 호족세력을 억누르며, 백성의 세금부담을 감소시킨다. 그리고 "태양령(胎養令)"을 반포하여 인구를 늘인다.
경제적으로, 농상(農桑)을 중시하며, '휴양생식'을 주장하고, '염철관영'을 회복시켜, 백성들이 소금을 만들고 쇠를 주조할 수 있도록 허가한다.
문화적으로 유학을 발전시키고, '사분력'을 고치고, <좌씨춘추>등 경학서적을 정리한다. '음양오행'과 '참위지학'을 체현한 '금문경학'을 내놓는다. 이것이 바로 사상 유명한 <백호통의>이다. 그 본인도 뛰어난 서예가로 그가 형헝한 서체는 오늘날 초서의 전신인 '장초(章草)'이다.
군사적으로 흉노정벌을 중단하고, 서역도호부를 취소시키며, 무기교위(戊己校尉) 경공(耿恭)을 불러들인다. 그렇게 "십삼장사귀옥문"의 전설을 만들어낸다. 반초를 두번 서역에 사신으로 보내고, 반초는 이로 인하여 30년간 서역에 머문다. 그렇게 서역을 평정한다.
외교적으로, 거사(車師)의 회귀에 동의하고, 귀상(貴霜, 쿠샨왕조)제국의 화친을 거절한다. 진공한 금모웅사가 궁인에게 격살당한 후, 스스로 춤을 춘다. 오늘날 무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무사(舞獅)"는 여기에 기원한다.
등등. 이것은 모두 한장제가 후세에 미친 주요한 업적이다. 그가 한명제와 함께 만들어낸 집정의 공훈은 모두 합쳐서 "명장지치"라고 부르는데, 동한왕조의 평온한 사회결제발전을 이끌었다.
아쉽게도 유달은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다. 향년 33세이다. 그의 관대한 정치로 외척세력의 견에 실패하여, 결국 두씨집단(竇氏集團)의 힘이 너무 커지게 되면서 동한왕조의 중후기에 황실이 쇠약하고, 외척과 환관이 돌아가며 권력으 장악하는 국면으로 흘러가고, 결국 몰락하게 된다.
이는 천고의 유감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보자면, 업적이 뛰어난 한장제 유달은 그래도 긍정적인 점이 많다. 그는 일대의 명군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