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추리] 여공(呂公)은 왜 딸을 유방(劉邦)에게 시집보냈을까?
글: 역사대작회(歷史大炸燴)
만일 역사서의 설명대로라면, 여공이 당시 처음 유방을 만났을 때, 딸을 유방에게 시집보내려고 했다. 주요 이유는 유방이 처음 만났을 때 좋은 인상을 주었기 때문이다.
사서의 기록에 따르면, 여공이라는 사람은 관상을 보는 재주가 있었다. 그래서 여공이 처음 유방을 만났을 때, 즉시 유방은 아주 귀한 인물이 될 것이고, 나중에 분명 황제가 될 것이라고 생각해 즉시 유방에게 자신의 딸을 시집보내려고 했다는 것이다.
이 일에 관하여, 사서에 확실하게 기록되어 있다. <한서>에 따르면, 당시 여공이 유방에게 이런 이유를 댔다.
신소호상인(臣少好相人), 상인다의(相人多矣), 무여계상(無如季相), 원계자애(願季自愛), 신유식녀(臣有息女), 원위기추첩(願爲箕帚妾)
번역하자면, "저는 관상을 볼 줄 압니다. 평생 많은 사람들의 관상을 보았지만, 당신만큼 좋은 관상을 지닌 사람은 보질 못했습니다. 저에게는 딸이 있는데, 당신에게 시집을 보내고 싶습니다."
이건 당시 여공이 한 말이다. 혹은 후세 사관이 기록한 말이다. 우리는 여공이 한 원래 말 그대로는 아닐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대체적인 뜻은 그러했을 것이다.
이렇게 보면, 여공이 딸을 유방에게 시집보낸 것은 마치 정말 유방의 관상이 비교적 좋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 만일 우리가 자세히 그 시기의 역사를 살펴서, 당시 이 일에 관련된 모든 참여자들을 환원시켜보면 우리는 발견할 수 있다. 여공의 이런 말은 사실 상당한 헛소리라는 것을.
여공의 진실한 목적은 아마도 정말 자신의 집안과 어울리는 사위를 구하고 싶었을 것이고, 리스크를 안고 투자하려는 것이었을 것이다.
먼저, 우리가 살펴봐야할 것은 이 사건이 발생했을 때,유방의 집안이 어떤 상황이었느냐는 것이다.
많은 역사애호가들의 인상 속에서, 유방은 하층출신인 것처럼 느낀다. 최소한 유방이 거병하기 전에, 유방의 집안은 아주 가난했고, 계속 사회하층에서 살아갔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역사상 진실한 유방은 우리가 가진 전통적인 인상과는 차이가 있었다.
사서기록에 따르면, 유방의 조상은 진(晋)나라의 대부 사회(士會)이다. 춘추시기의 진나라에는 6명의 아주 강력한 경대부(卿大夫)가 있었다. 이 6개의 세가(世家)는 나중에 진나라조정을 장악하고, 그후 상호 혼전을 벌여, 결국 한위조(韓魏趙) 세 가문이 승리하여 진나라를 나눠갖는다. 이것이 역사상 유명한 삼가분진(三家分晋)이다.
유방의 집안은 이 6개의 집안 중에서 패배한 집안이다.
비록 유방의 조상이 조정에서의 투쟁에서 패배했지만, 그들 집안의 귀족신분은 전혀 바뀌지 않았다. 최소한 유방의 할아버지 대에 이를 때까지는 여전히 귀족이었다. 사서기록에 따르면, 전국말기, 유방의 할아버지는 일찌기 위나라 풍현(豊縣)의 현령(縣令)이었다. 풍현은 패현(沛縣)의 이웃 현이다. 바로 이 때, 유방의 집안은 패현으로 옮겨온다.
유방의 부친 대에 이르러, 진(秦)나라가 육국을 멸망시킨다. 그래서 유방의 집안은 쇠퇴한다. 그러나 관리가 되지는 못했지만, 유씨집안은 그래도 땅이 있었다. 최소한 중농(中農) 혹은 부농(富農)이다. 그리고 진나라에 이르러, 유씨집안의 경제상황은 아마도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나쁘지 않았을 것이다.
유씨집안의 당시 경제상황에 대하여, 기실 두 가지 일을 방증으로 삼을 수 있다. 첫째, 사서기록에 따르면, 유방은 일찌기 생산에 종사하지 않았다. 그리고 위나라의 신릉군(信陵君)을 존경하여, 한동안 외지로 나들이를 한 적도 있다.
알아야 할 것은 유방의 청소년시기는 바로 진나라가 육국을 멸망시키는 기간이라는 것이다. 이런 천하가 혼란불안한 떄에 유방은 외지로 나들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집안 일을 도와주지 않아도 되었다. 이것이 증명하는 것은 당시 유씨집안안 경제상황이 비록 보통이라 하더라도, 유방같이 노는 사람을 먹여살릴 수 있을 정도는 되었다는 것이다.
둘째, 유방의 집안은 형제가 4명인데, 유방은 셋째이다. 넷째는 유교(劉交)이다. 사서기록에 따르면, 유교는 어려서부터 글읽기를 좋아해서, 순자(荀子)의 제자인 부구백(浮丘伯)을 스승으로 모신 적이 있다고 한다. 즉, 유교는 기실 순자의 도손(徒孫)인 것이다.
전국시대말기에서 진나라까지, 글을 읽는다는 것은 아주 사치스러운 일이다. 당시 유씨집안에서는 유교를 공부시킬 수 있었고, 게다가 순자 제자의 문하에서 공부할 수 있게 했다. 이건 측면에서, 유씨집안의 당시 경제상황을 말해준다. 생각하는 것처럼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는 것이다. 최소한 현지에서는 특별히 가난한 편이 아니었을 것이다.
진나라가 천하를 통일한 후, 유방은 정상적인 관리시험을 거쳐, 진나라의 고나리가 된다. 즉 여러분이 잘 알고 있는 사수정장(泗水亭長)이다. 정장이 무슨 의미인가? 간단하게 말해서 오늘날로 보면 파출소장이다.
정장이 된 후, 유방은 이 정장이라는 신분을 가지고 현지에서 아주 잘나갔다. 각 분야에서도 모두 그를 인정해 주었다. 게다가 유방은 사람됨이 비교적 원활하고, 현에도 아는 사람이 있었다. 그래서 패현 현지에서 유방은 영향력있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었다.
당연히, 사생활은 조금 문제가 있었다. 평소에 회색지대에서 생활하다보니 유방의 사생활은 확실히 난잡했다. 그리고 현지의 조(曹)씨성의 여자와의 사이에 사통으로 아이를 하나 낳기도 앴다.
이렇게 여치(呂稚)의 집안이 패현으로 올 때, 유방은 이미 삼십여세였다. 비록 현재라면 삼십여세에 결혼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별로 희귀할 것이 없지만, 진나라때에 삼십여세까지 결혼하지 않은 것은 확실히 노총각이라 할 수 있었다.
여치의 집안이 패현으로 오기 전에 유방의 집안상황은 개략 이상과 같았다. 그러면 이어서, 여치의 집안상황을 살펴보기로 하자.
사서기록에 따르면, 여치의 집안은 원래 산동(山東) 단현(單縣)에 있었다. 현지에서 비교적 돈있는 집안이었다. 다만 나중에 여씨집안은 화를 피하기 위해, 단현을 떠난다. 당시 퍠현의 현령은 여치의 부친과 아는 사이였기 때문에, 여씨일가족은 패현으로 이사오게 된 것이다.
여씨집안이 패현으로 이사온 후, 여공은 패현현령과 관계가 아주 좋았기 때문에 패현으로 이사올 때 패현의 관리들이 모두 여씨잡안을 방문하여 여씨집안이 이사온 것을 축하했다. 바로 이 연회에서, 여공은 처음 유방을 만났다. 당시 유방은 한푼도 가지고 오지 않았다. 다만 문을 들어서면서 자신은 '일만'의 예금(禮金)을 내겠다고 했다. 그래서 여공은 그를 순간 주목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여공과 유방의 첫만남이다.
사서기록에 따르면, 당시 유방이 이렇게 소리치자, 여공의 첫번째 반응은 기실 약간 화를 낸 것이었다고 한다. 그는 현지의 흑사회(조폭)이 와서 연회를 교란시키는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래서 심지어 그를 쫓아낼 생각까지 했다. 다만 유방이 들어온 후, 사람들과 서슴없이 웃으면서 얘기를 나누고, 현의 관리들과도 거리낌없이 얘기하고, 다른 사람들과 농담을 주고받는 것을 보게 된다. 그리고 현승(縣丞) 소하(蕭何)는 여공에게 유방을 소개시켜준다. 유방은 그저 큰소리치기 좋아하는 사람이지 악의는 없다 그러니 여공께서는 크게 나무라지 마시라고.
사서에 기록된 이 역사에서 우리는 기실 두 가지 문제를 발견하게 된다: 첫째, 여공은 도대체 패현현령과 어느 정도 로 가까웠기에 그가 패현으로 오자마자 패현의 모든 관리들이 그에게 선물까지 가지고 가야 했을까?
이건 기실 아주 불합리한 일이다.
만일 현령의 직계가족이라면, 아마 그럴 수도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문제는 여공은 단지 현령의 친구라는 것이다. 친구라는 것은 아무리 가깝다고 하더라도, 조금은 거리가 있을 것이다.
둘째, 여공의 집안이 패현으로 옮겨온 것은 화를 피하기 위함이다. 그럼 도대체 무슨 화를 피하려고 했던 것일까? 사서에는 아무런 기록이 없다. 야사에서도 아무런 언급이 없다. 그래서 당시 여씨집안의 실제상황은 우리로서 기껏해야 추측해볼 수밖에 없다.
다만 몇 가지 일은 확실하다. 하나, 여씨집안은 화를 피하기 위해서 패현으로 온 것이고 패현현령의 비호를 받고자 했다. 둘, 이번 여씨집안이 이사온 후의 연회는 패현현령이 암중으로 지시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만일 현령의 체면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누가 이제 막 이사온 외지인을 찾아가서 축하해주겠는가. 셋, 여공이 패현에 온 후 현령으로 지내는 친구는 확실하게 의사표시를 한 바 있다. 여치를 취하고 싶다고. 이 일은 한서에 명확히 기록되어 있다. <한서>에 따르면, 여공은 딸을 유방에게 시집보내겠다고 한 후에 술자리가 끝나고, 여공의 부인이 불만을 표시하면서 명확히 말한다:
공시상욕기차녀(公始常欲奇此女), 여귀인(與貴人). 패령선공(沛令善公), 구지불여(求之不與), 하자망허여유계(何自妄許與劉季)
번역하자면 이러하다: 당신은 딸은 귀하게 여겨 귀인에게 시집보내겠다고 말했다. 그런데, 패현현령이 딸을 취하겠다고 할 때도 주지 않더니, 왜 딸을 유방같은 자에게 시집보내려 하는가?
이 일은 기괴하지 않은가?
패현현령은 분명히 여공과 관계가 좋다. 그런데 왜 여공의 딸을 취하겠다고 했을까? 이건 논리에 부합하지 않는다. 당연히 패현현령이 여씨집안의 재산에 눈독을 들였을 수도 있다. 혹은 정말 여치의 미모에 반했을 수도 있고. 다만 당시 여공이 패현현령에게 의탁하러 온 것을 보면 이 현령은 분명 그런 자가 아니었을 것이다.
당시 구체적인 상황이 어땠는지에 불구하고, 여씨집안이 최초에 패현으로 왔을 때, 상황은 그다지 좋지 않았을 것이다. 완전히 도망쳐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비록 집안에 약간의 돈이 있다고는 해도 그들 집안의 문제는 분명 단순히 돈으로 해결할 수 없는 것이었을 것이다. 정말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였다면, 여씨집안이 패현으로 도망쳐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이런 상황하에서 여씨집안은 패현으로 이사온 후, 급히 현지에서 여씨집안을 보호해줄 수 있는 사람을 찾아야했다.
패현현지에서 가장 권세있는 사람은 자연히 패현현령이다. 게다가 여공은 패현현령과 사이가 좋았다. 어느 각도에서 보더라도, 여공은 이 현령에게 도움을 받으려 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다.
그러나 문제는 만일 우리가 여공의 입장이 되어 본다면, 아마도 상황이 조금 다르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먼저, 진나라법률에 따르면, 현령은 교체된다. 즉, 이 현령은 임기가 끝나면 다른 지방으로 간다. 그렇게 되면 현령의 임기가 끝나면 여씨집안은 어떻게 할 것인가? 여씨집안은 패현에 뿌리내릴 생각이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최선의 선택은 패현 현지인으로 뒤를 봐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다.
다음으로, 만일 여공이 정말 딸을 패현현령에게 시집보낸다면, 그 현령의 나이로 보아 이미 처를 취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여치는 시집을 간 후에 겨우 첩으로 지내야 한다. 첩과 처의 지위는 고대에 천지차이이다. 여공은 만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라면, 자신의 딸을 첩으로 보내려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배경하에서, 유방이 여공의 앞에 나타난 것이고, 여공에게 새로운 선택지가 된 것이다.
당시의 유방은 현지의 파출소장으로 현지에 영향력이 상당했다. 그리고 현령처럼 교체되는 것도 아니다. 계속 패현에서 일하는 것이다. 이는 더욱 좋은 선택이라 할 수 있다. 만일 여씨집안이 패현에 뿌리를 내리는데, 유방같은 사람이 도와준다면 훨씬 쉬워질 것이다.
바로 이런 목적하에서, 여공은 딸을 유방에게 시집보내려 한 것이다. 그중의 구체적인 내용이 어떠하든지간에 여공의 진정한 목적은 분명 유방의 현지에서의 영향력을 좋게 보았을 것이고, 유방은 여씨집안이 패현에 뿌리내리는 것을 도와줄 수 있다는 것을 보았을 것이다. 그래서 유방을 선택한 것이다. 관상같은 이야기는 그저 겉으로 내세우는 명목일 뿐이다.
당연히 나중에 유방은 크게 성공해서 한나라의 황제가 된다. 이는 아마 누구도 생각지 못했던 일일 것이다. 여공은 아마 스스로도 몰랐을 것이다. 단지 뒷배경이 되어줄 수 있는 사위를 찾은 것인데, 그 사위가 나중에 황제가 될줄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