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청 후기)

경신지변(庚申之變): 1860년의 영불연합군(하)

중은우시 2023. 6. 25. 23:10

글: 구양철생(歐陽哲生)

 

외교조약의 체결은 상징적인 의미가 있는 의식이다. 청나라의 전통적인 관례에 따르면, 원칙적으로 외국인과 북경에서 담판하고 직접 조약을 체결하지 않는다. 제2차아편전쟁을 종결시키는 <북경조약>은 청나라가 처음 북경에서 서양인과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이 관례를 깬 것이다. 청나라조정에 있어서 실로 영불연합군이 북경을 점령해서 압박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한 것이었다. 역사가들은 역대이래로 체결된 조약의 내용을 주목했고, 조약체결현장의 내외에 대하여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기실 북경에서 조약을 체결한 것은 그 자체가 연구해볼만한 중요한 이슈이다.

 

영국군은 원명원을 불태운 후, 공친왕에게 보낸 서신에서 그들은 이 조치의 의도를 표명하고, "30만은냥을 피해자가족에게 배상할 것을 요구한다. 프랑스군도 같은 방식으로 프랑스의 피해자가족에게 20만은량을 배상할 것을 요구한다. 배상금은 즉시 지급되어야 한다. 조약의 체결일자는 10월 23일이다." 10월 22일 영국군은 프랑스 선교사 마애(馬埃)로부터 "북경성으로 들어가는 것은 위험하다"는 보고를 받는다. 그리하여 영국군 총사령관 Grant는 푸로빈(普羅賓) 소령에게 두 개의 비정규기병부대를 이끌고 정찰하도록 지시하고, 쌍방의 조약체결시간을 하루 늦춘다. 아마도 영국측이 적시에 중국측에 지연사실을 통보하지 않아서인지, 23일 중국측의 관련인사들은 예부에서 꼬박 하루를 기다려야만 했다.

 

10월 24일, 영국군과 청나라정부대표는 예부에서 조약을 체결한다. 안전을 보장하고, 사고발생을 방지하기 위하여, 영국군은 필요한 예방조치를 취한다. 영국측은 "전전날 저녁, 우리는 군수부서의 장교를 북경성으로 보내, 그들이 곧 조약체결을 거행할 건축물이 안전한지 여부를 검사하도록 헸다." 검사를 해본 결과, "중국측이 위약할 가능성이 크지 않다"고 판단했다. 그후 로버트 나필이 "제2소분대를 엘긴 특사일행이 지나갈 길에 배치하고, 각 길입구를 지키며, 여하한 사람도 접근할 수 없도록 했다. 수행인원은 100명의 기병과 400명의 보병이었고, 그외에 각 병과부문에서 온 장교들로 구성되어 있어, 근거리에서 엘긴 특사의 안전을 보호할 수 있게 조치했다."

 

Grant는 직접 당일 영국군을 지휘하고, 엘긴과 함께 조약체결식에 참석한다. 그는 이 과정을 이렇게 회고했다:

 

"10월 24일 아침, 영국군과 청나라정부간에 조약체결시간은 늦출 수밖에 없었다. 나는 나필에게 제2사단을 지휘하여 예부로 향하는 주요도로를 점거하도록 명령했다. 나필은 임무를 아주 잘 완성했다. 나는 안정문에서 야전포병연대를 배치하여, 각종 출현가능한 상황에 대비했다. 엘긴 특사는 나와 참모부인원들과 함께 북경으로 출발했다. 두 군악대가 앞장서고, 400명의 보병과 100명의 기병이 보무당당하게 전진했다. 엘긴 특사는 화려한 장식이 있는 가마를 탔고, 나는 특사의 곁에 있었다. 3마일거리의 예부까지 갔다....

 

우리는 예부의 대문에 도착했고, 정원을 지나갔다. 잘 깔려진 길을 걸었고, 문입구에서 공친왕을 만난다. 그의 뒤에는 약 500명의 관리들이 있었다. 어떤 사람은 왕공(王公)의 비단예복을 입고 있었다. 친왕이 앞으로 나와 두 손을 모아 중국식 인사를 했다. 다만 엘긴 특사는 오만하게 경멸하는 눈빛을 한번 주고, 서서히 몸을 일으켜 답례를 했다....우리는 왼쪽의 가장 고급스러운 의자에 앉았고, 조약문건은 흠차특사의 앞에 놓여 있었다. 이때 그는 전권을 가지고 있었다. 몇가지 문제를 협의한 후, 친왕은 이전에 체결한 합의문을 비준했다."

 

자넷트 웨슬리는 영국군이 특사를 호송하여 북경의 길거리를 지나갈 때, 사람들이 몰려와서 북적였던 광경을 보았다. 양군이 대치하는 긴장된 분위기는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그날 하루종일, 길거리에는 '오랑캐'정복자를 보려고 몰려온 사람들로 물샐 틈이 없었다. 그들은 우리에게 악의를 가지고 있지 않았지만, 모든 사람들은 관아의 채찍질을 당했고, 일부는 우리 초병들에게 찔려서 늑골에 상처를 입기도 했다."

 

체결과정에서 에피소드가 하나 있었다. 영국의 종군촬영사 Felice Beato는 급히 체결식 사진을 한장 찍었다. 문앞에 촬영설비를 설치하고, 카메라를 공친왕에게 향했다. 공친왕은 그게 무슨 물건인지 몰라 놀라서 '얼굴색이 사색이 되어, Lord Elgin을 보고 Grant를 보았다. 영국측 인원이 그에게 악의가 있는 것은 아니고 단지 사진을 찍는 것이라고 설명해주그제서야 그가 마음을 놓았다. "Beato의 사진은 광선이 좋지 않아 성공하지 못했다." 체결의식이 끝난 후, 중국측이 다과를 준비했다. "다만 Lord Elgin은 요청을 거절했다." 국궁의 예를 행한 후 되돌아왔다. 그날의 체결의식에 관하여, Elgin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본인의 편지와 일기에 아무런 문자기록도 남기지 않았다. 다행히 영국군 중위 자넷트 웨슬리가 현장을 상세하게 기록해 두었다.

 

중국과 영국간의 <북경조약>은 실제로 원래 <천진조약>에서 통과되지 않은 두 개의 조항을 보충하는 것이었다, "한 조문 쿠리의 이민합법화이고, 다른 한 조문은 대영제국에 홍콩 건너편의 구룡반도를 할양하는 것이었다. 이 땅은 이전에 광주통톡에게서 조차한 것이었다." 즉, 중국과 영국의 <북경조약> 제5조, 제6조이다. 이는 영국이 이 기회에 청나라조정을 압박하여 억지로 빼앗아낸 것이다. 청나라조정을 가장 난감하게 한 조항은 제8조의 "무오년원약(戊午年原約)을 북경에서 상호교환하는 날, 대청황제는 당일 북경과 외지 각성의 독무대리들에게 명을 내려, 이 원약과 속약의 각 조문을 열람하게 하고, 명을 내려 길거리에 걸어두어 모두 알게 하도록 한다."는 것이었다. 청나라황제에게 전국상하에 조약을 포고하라는 것이다. 이는 패전을 인정하라는 것이나 다름이 없고, 청나라조정으로서는 체면이 땅바닥에 떨어지는 일이다. 이는 <북경조약>과 <남경조약>의 중요한 구별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대외관계가 이때부터 공중의 시야에 들어오게 되었다는 것이다. 바로 이러하기 때문에 지방관리들은 <북경조약>을 포고하는데 소극적인 심리상태를 보이게 된다.

 

당일 유육남의 일기에는 이런 내용이 나온다: "십일일 미각(未刻). 영국통사(통역관) 바야리(巴雅里)가 마차를 타고 오랑캐병사 백인을 데리고 예부대당 밖에서 말에서 내린다. 항기(恒祺)와 함께 공친왕을 접견한다. 모자를 벗고 예의가 아주 공손했다. 신각(申刻), 영국 백작 공사 Elgin은 16명이 드는 금정녹위견여(金頂綠圍肩輿)를 타고 북과 악기를 연주하며, 기병, 보병을 데리고 왔다. 각각 무기를 들었고, 약 천여명에 이르렀다. 극장군(克將軍, Grant를 가리킴)도 역시 도착했는데, 여군도 몇명 있었다. 예부로 들어갔고, 공친왕이 처마 밑에서 영접했다. 그때 공친왕을 뒤따른 사람은 가정(賈楨), 주조배(周祖培), 전경(全慶), 진부은(陳孚恩), 주준(朱嶟), 서상(瑞常), 심조림(沈兆霖), 면훈(綿勛), 면삼(綿森), 아십혼포(阿什渾布), 송진(宋晋), 필도원(畢道遠), 의진(宜振), 문상(文祥), 보윤(寶鋆), 이정아(伊精阿), 문혜(文惠) 그리고 삼,사품 경당, 무직등의 관리였다. 좌우에 있던 사람은 경영(慶英), 항기(恒祺), 윤동순(尹董醇)이었다. 신정유초(申正酉初), 흠차대신의 관방(關防, 인장)을 찍어 화약(和約)에 날인했다. 그 형식은 책엽(冊頁)과 비슷했고, 약 5,60장이었다. 건물의 처마 밖에는 탁자를 두고 그 위에 방목합(方木盒)을 놓았다. 안에는렌즈(안경알)가 있고, 붉은 천으로 덮어놓았는데, 무슨 물건인지 알지 못하겠다. 유정(酉正), 화약의 체결을 마치고, 이왕부(怡王府) 공관(公館)으로 돌아왔다. 공친왕은 법원사(法源寺)에 머물렀다. 그날 본 사람이 만여명이었다. 서북의 귀퉁이에는 여전히 검은연기가 하늘로 치솟고 있었는데, 어느 곳이 불에 타는지 알 수가 없었다." 유육남의 일기는 상세하게 청나라측에서 체결의식에 참여한 관리를 언급할 뿐아니라, 특별히 영국군이 여군 몇명을 데리고 왔다는 것과 ,영국측이 문밖에 촬영기를 설치한 것까지 언급하여, 외국문화가 중국측에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당시 사람들의 기록을 보면, 영국군의 무기가 정교하고 우수하다는 점, 기율이 엄명하다는 점에 대하여 깊은 인상을 받았다. "당일, 거리에 공친왕이 고시를 붙여서 이르기를, '대영국이 잠시 이왕부에 머문다. 대법국(大法國, 프랑스)은 잠시 현량사(賢良寺)에 머문다. 주민들과 상인들은 놀라지 말라." 등의 내용이었다. 다시 서당자후통(西堂子胡同)의 서형처(書珩處)로 가는 길에 서구(西口) 정자가(丁子街)로 나갔다. 거기서 오랑캐병사들이 보초를 서고 있는 것을 보았다. 총에 칼을 차고 있었는데, 눈도 돌리지 않고 극히 엄숙했다. 총의 앞에는 모두 짧은 칼이 장착되어 있는데 극히 날카로웠다. 멀면 총을 초고, 총은 5번 쏠 수 있다. 가까우면 칼날로 찌른다. Elgin의 일행이 지나가는데, 부대가 서서히 따라갔고, 화기와 무기는 우리나라와 비교할 바가 못되었다. 그 기율은 특히 우리가 미칠 바가 못되었다. 당당한 천조에서 오랑캐병사들이 마음대로 종횡하게 놔두다니 실로 통곡할 일이다." 고시에 공공연이 "대영국" "대법국"이라는 칭호를 썼다는 것에서, 확실히 예전에  '오랑캐'를 경멸하던 태도가 바뀌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0월 25일, 프랑스특사 Baron Gros(Jean-Baptiste-Louis Gros)와 청나라정부대표 공친왕 혁흔(奕訢)이 예부에서 <북경조약>을 체결한다. 그리고 1856년 6월 27일 체결한 <천진조약>의 비준문서를 교환한다. Gros는 상세하게 이 날의 상황을 기록으로 남겼다:

 

아침 8시에 나는 성을 나서서 프랑스군사령부로 갔다. 수행인마를 데리고 정식으로 입경했다. 대오는 당당했으며 의식은 장엄하고 융중했다. 사령관, 염만(冉曼)과 카리노(柯利諾) 두 준장과 2,000명의 병사들이 사절단을 호송하여 북경성으로 들어갔다. 101부대와 102부대의 군기 및 해군육전대의 군기가 나란히 앞장섰다. 뒤에는 특사가 앉은 가마가 있고, 8명의 회색과 성홍색옷을 입고 머리에 삼색의 중국모자를 쓴 쿠리들이 들었다....

 

10여명의 중국관리는 예복을 입고, 말을 타고 문앞에서 영접했고 나에게 인사했다. 그후 그들은 나를 데리고 예부의 한 대청으로 데려갔다. 공친왕이 거기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길에서 2시간이 걸렸다. 물결처럼 밀려드는 사람들을 뚫고 지나와야 했다. 경찰이 채찍으로 질서를 유지했다. 가마가 회의대청으로 들어갈 때 건너편 건물에 젊은 왕야가 몸을 일으켜 수행인원과 나를 영접하려는 것을 보고, 나는 쿠리들에게 가마를 멈추게 한 뒤, 친왕보다 앞서서 문턱으로 나가 맞이했다....

 

사람들이 자리에 앉은 후, 나는 바스다(巴士達)선생으로 하여금 친왕에게 미리 준비한 4부의 중문본을 드리게 했고, 공친왕이 서명했다. 동시에 나는 먼저 4부의 불문본에 서명했다.

 

조약 8부에 서명을 하고, 인장을 찍었다. 인장을 날인하는 것은 중국의 사법절차에서 아주 중요한 작용을 한다. 그후, 나는 친왕전하에게 사령관의 명령에 근거하여 안정문의 포병에게 20발의 예포를 쏘도록 하여 평화가 새로 건립된 것을 경축한다고 말했다. 나는 사령관에게 일체의 비방어적인 군사행동은 정지할 것을 요구했다. 

 

이어서, <천진조약>의 비준문건 교환의식이 있었다. 공친왕은 자세히 조약내용과 문건중 프랑스 국새를 살펴보았다. Gros는 프랑스국왕의 두상과 옥새의 인기(印記)를 소개했다. 프랑스의 동전지폐에서도 볼 수 있다고 설명하며, 그 자리에서 공친왕에게 시가100프랑의 금화부터 천분의 10의 구리로 만든 프랑스동전까지의 세트 및 2장의 프랑스국왕, 왕후의 사진을 기념으로 주었다. Gros는 말하기를, "전체 의식기간 나는 최대한 예의에 부합하게 하고 친왕을 존중하려고 애썼다. 듣기로 같은 장소 같은 행사에서 어떤 사람은 그에게 아주 냉막하고 무섭게 대했다고 들었다!" 다른 한편으로 쌍방이 조약을 체결한 후, 공친왕이 Gros에게 말한다. 만일 내가 북경에 며칠 더 머물 수 있다면, 그는 흠차대신으로서가 아니라 나를 방문하고 싶다고 말했다. 프랑스인들이 떠날 때, 공친왕은 가마 곁까지 배웅을 나왔고, 쌍방은 우호적인 분위기 속에서 인사를 나누었다. 영국측은 나중에 프랑스와 청나라간의 조약체결시 분위기가 화기애애했다는 말을 들었다. 이는 그들로 하여금 이후 태도를 바꾸게 만들었다. 아마 어느 정도 그들도 깨달은 것이 아닌가 싶다.

 

중국과 영국, 중국과 프랑스간에 체결된 <북경조약>의 내용에는 청나라조정이 영국에 30만냥백은, 프랑스에 20만냥백은을 배상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 Gros는 이에 대하여 이렇게 해석했다: "공친왕에 대한 관용을 표시하기 위하여 나와 Elgin은 모두 동의했다. 중국정부에 징벌로서 지급을 요구한 배상금은 이미 지급완료되었으므로, 더 이상 중국과 영국/프랑스간의 평화를 회복하는 정식문건에 넣지 않기로 했다. 그래서 조약에 그 내용이 빠진 것이다." 즉, 조약체결전에 중국은 실제로 50만냥백은을 지급완료했기 때문에, <북경조약>에 들어가지 않았던 것이다. 이 점은 과거에 언급하는 사람이 없었다. 체결의식이 끝난 후, Montauban은 육군대신에게 서신을 보내어 당일 상황을 보고했고, 전체 체결의식에 '아주 만족한다'고 표시했다. 그리고 21발의 예포를 쏘아 경축을 표시했다고 했다.

 

유육남도 중국-프랑스 조약체결상황에 대하여 간략하게 기록하고 있다: "십이일 진각(辰刻), 프랑스공사 Gros(噶羅), 애가락맹(愛家樂孟)장군, 통사 매례등(梅禮登), 이매(李梅)등이 현량사에서 안정문밖으로 갔다. 오각(午刻), 기병대 천여명, 여군 3명을 데리고 떠났다. 4명이 앉는 가마 3대가 예부로 향했다. 공친왕과 화약을 교환했다. 신각(申刻), 교환을 마치고 현량사로 돌아온다." 중국측의 기록에 따르면, 이날 중국측의 참석자는 전날만큼 많지 않았다.

 

중국-영국, 중국-프랑스간의 조약체결의식을 보면, 중국프랑스간의 현장은 분위기가 비교적 화기애애했다. 중국영국은 서로 냉막하게 대했다. 영국이 원명원을 불태운 것에 대하여 중국측이 원한을 품은 것 외에도, Elgin 본인의 오만무례함도 관련이 있었던 것같다. 이런 차이로 인하여 프랑스인들은 당시에 이미 느꼈다: "Lord Elgin의 강경함과 차가움과는 달리 Baron Gros는 공친왕에게 최대한 예의를 갖추고 존중해주었다. 공친왕도 그에게 감사를 표시했다. 원명원이 훼멸된 후, 확실히 두 특사는 의견과 발언등에서 더 이상 의견일치를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 각자의 태도는 서로 반대되는 것은 아니지만, 확실히 같지는 않았다. 외교동맹을 유지하는 것은 공동의 이익을 유지하기 위함이었을 뿐이다; 다만 형식상으로Gros는 자연스럽게 나오는 친절과 온건함으로 영국인들의 오만함과 선명하게 비교되었다. Elgin의 강경한 태도는 일종의 능욕이었다."  Gros가 북경을 떠날 때, 공친왕이 약속도 없이 찾아가서 배웅을 한다. 그리고 프랑스군이 원명원을 불태우는데 참가하지 않은 점에 재삼 감사했다. 이는 청나라조정의 영국과 프랑스에 대한 전혀 다른 태도를 보여준다. 그러나, 전후 Montauban은 전쟁결과를 검토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이번 전투에서 얻은 이익이 너무 적다. 이는 Baron Gros와 나 사이의 유일한 그림자이다." 이를 보면 프랑스측에서는 이번 전쟁으로 얻은 이익에 대하여 만족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내심의 불만은 아마도 이후 중국프랑스전쟁의 화근이 된 것인지도 모른다.

 

아편전쟁의 '조약위반'기억때문인지, 영국측은 청나라조정에 <북경조약>체결을 요구한 후, 반드시 천하에 고시할 것을 요구했다. 그리고 새로 체결한 화약을 공표하는 것을 철군의 조건으로 삼았다. 이는 영국특사 Elgin이 제기하고 견지한 하나의 요구사항이었다. 프랑스측은 그럴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Montauban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Lord Elgin이 천진에 늦게 돌아오려는 진정한 목적이 뭔지를 모르겠다. 그는 중국황제가 조약을 공표할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말한다. Baron Gros는 나에게 서신을 보내어 말하기를 그의 생각에 그것때문에 기다리고 있을 필요는 없다고 여긴다고 말했다. 다만, Lord Elgin이 북경에 남아 있는 한, 그도 떠나긴 곤란하다고 말했다. 동시에 그는 나에게 약간의 부대를 남겨서 그를 보호해달라고 요구했다. 나는 기꺼이 동의했다." 청나라조정이 영국측의 요구에 따라, 북경에서 체결한 화약을 포고하자, Elgin은 공친왕에게 서신을 보내어 "당신이 약속을 지켜서, 황제에게 명을 내리도록 말해주고, 전국에 조약을 공표하도록 해준데 감사하다. 그리고 보충하여 말하기를 영국군대는 조약에서 약정한대로 신속히 북경을 떠나겠다"고 말한다. Elgin은 원래 11월 8일에 북경을 떠날 생각이었는데, 신임공사 Frederick Bruce가 하루 늦게 도착해서, 하루를 늦추게 된다.

 

4. 선교사와 영불연합군의 협력

 

프랑스는 중국선교사업에 특수한 흥취를 보였다. 18세기 중국으로 온 프랑스 예수회 선교사들은 서방선교사들의 주력이었다. 아편전쟁후 1844년 중국프랑스간 <황포조약(黃埔條約)>에 체결되는데, 제22조에 이렇게 규정되어 있다: "프랑스천주교는 통상항구에서 자유롭게 선교할 수 있고, 묘지를 지을 수 있다; 청나라지방정부는 책임지고  교회와 묘지를 보호한다." 1858년 중국프랑스간 <천진조약> 제13조에도 프랑스인이 내지로 가서 자유롭게 선교할 수 있다고 규정한다. 이는 선교범위를 확대한 것이다.

 

서방선교사들의 유적은 1698년 마테오리치(利瑪竇)가 처음 북경으로 들어온 후 아편전쟁 이전까지 중국과 서방의 문화교류의 역사적 증인이었다. 1860년이전에 북경에 남아 있는 서양유적은 주로 3가지 유형이다: 천주교성당, 선교사묘지 및 흠천감관상대. 프랑스군이 북경성에 도착하기전에 이런 상황을 손바닥 들여다보듯이 잘 알고 있었다. 10월 5일 Gros가 Montauban에게 보낸 서신에서 이렇게 언급한다: 북당: 훼손된 북쪽성당. 여전히 황성에 존재하고, 황궁의 서북에 있다. 남당: 중국도성안에 훼손된 성당. 동당: 동쪽성당도 이미 불에 탔고, 소재지는 이미 폐허가 되었다. 서당: 서당도 이미 파괴되었다. 프랑스공묘: 천주교묘지. 러시아인이 점령했다. 다만 그들은 돌려줄 것이다. 동당과 서당묘지: 교회는 특별히 북당, 남당과 그들의 공묘를 돌려받을 것을 요구하고 있다." 1860년 10월 영불연합군이 북경으로 진입할 때, 이들 역사유적지는 다시 연합군을 환기시킨다. 특히 프랑스군의 역사기억을.

 

프랑스군이 북경으로 진입할 때, 특별히 선교사들의 원래 교회재산의 반환에 주목했다. 10월 6일 Gros는 Montauban에게 보낸 서신에서 이렇게 표시한다: "내가 장군께 일깨워드리는 것을 허락해주십시오. 이 대도시 안에, 몇 곳의 종교건축물은 과거 프랑스정부가 자금을 출자하여 건설한 것입니다. 다만 천주교가 중국에서 여러차례 박해를 받으면서, 이들 건축물은 일찌감치 중국정부에 몰수되었습니다." "만일 중국인이 투항하면, 우리는 투항조건에 이들 건축물이 반드시 우리에게 반환되어야 한다고 넣을 수 있겠습니까? 외성에도 여러 같은 류의 건축물이 몰수되었습니다; 아마도, 한꺼번에 도광제의 칙령에 따라, 역대정부가 몰수한 모든 천주교건축물을 반환한다고 해야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만일 위가 무력으로 북경성에 강제로 진입한다면 즉시 성안의 이런 건축물을 점령하는 것이 당연한 일입니다. 다만 우리는 이 귀환을 합법화해야합니다. 그래야 향후 문제가 발생하지 않을 것입니다." Gros의 말은 실제로 프랑스의 중국에서의 특수한 이익에 대한 관심이었다.

 

영국군이 돌려받은 인질유해를 처리하기 위해, 러시아공사 이그나티예프(Nikolay Ignatyev)는 공묘를 제공하기로 약속하고, 10월 17일에 안장하기로 한다. 장례식은 영국군의 종군목사 무지(姆吉)이 주재하고, 영국군과 사절관의 대부분관리, Montauban장군과 몇명의 프랑스장교, 러시아선교단의 성직자들이 장례식에 참가했다. 프랑스특사 Gros는 참석하지 않았다. 대등원칙에 따라, 나중에 Elgin도 프랑스인질유해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는다. 이 일을 보면 당시 Gros와 Elgin간에는 감정상의 앙금이 남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돌려받은 인질의 유해를 매장하기 위해, 프랑스군은 원래의 천주교묘지를 찾는다. Joseph-Martial Mouly(孟振生)가 이 일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Mouly주교는 연합군이 북경에 있을 때 중요한 중개인이었다. 1846년 4월 28일 북경교구대리를 맡았고, 1856년 1월 3일 북경교구 주교가 된다. 같은 해 5월 30일 직예북경대목구 종좌대목(宗座代牧)이 된다. 다만 여러가지 이유로 북경으로 가서 취임하지는 못했다. 1860년 10월 21일 Mouly주교는 북경으로 Montauban을 찾아간다. 그리고 프랑스측에게 조약에 대한 의견을 듣는다. 10월 26일 Mouly주교는 Montauban에게 서신을 보내 프랑스군유해를 천주교 원래의 묘지에 안장할 수 있다고 말한다. Montauban은 그러나 "천주교성당 앞의 마당"에 묻을 수 있으면 좋겠고, 28일 장례식을 거행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Mouly는 27일의 회신에서 "그근 중국의 습속에 위배되며, 여하한 관도 북경성내로 들여올 수 없다. 그렇지 앟으면 가장 악독한 저주를 받게 될 것이다"라고 말한다. 프랑스군은 주교의 뜻에 따라, 천주교묘지 부작림(傅作霖), 남회인(南懷仁)의 묘 뒷쪽의 묘지를 선정한다. 10월 28일, 오전 11시 전체 유해호송인원이 연합군사령부에 집합한다. 그후 천주교묘지로 간다. Montauban은 이에 만족을 표시한다. 관에는 6구의 프랑스군 장교와 사병의 시신이 들어 있었다. 그들은 포병 대령 푸룽 더 그량샹(富隆 德 格朗尙), 군수보조관 두비(杜比), 행정관 아다이르(阿代爾), 경기병 오주프(奧祖夫), 병사 가오디세(高蒂歇)와 부랑카이(布朗凱)이다. 교외지역에서, 행렬이 2킬로미터를 행진한다. 많은 만주인, 한인들이 둘러싸고 보고 있었다. 천주교묘지에 도착하자, Gros와 사절단의 인원, 이그나티예프와 그의 수행원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장례식인 Mouly주교가 주재했고, 그를 보조한 사람은 프랑스군 종군목사 트레이자로(特雷加羅)와 드사이레이(德塞雷), 영국군천주교 신부 Saint-Matré(馬特雷), 신부 드 라마르(德拉馬爾) 및 산동교구 주교 Jean-Baptiste Anouilh, C.M.(董若翰)였다. 그후 전후로 신부 트레이자로가 현장에서 연설하고, 번츠만(本茨曼) 대령이 추도사를 하고, Montauban이 발언했다.

 

Montauban은 조약체결후, 성대한 '프랑스의 종교의식' 미사를 거행하고자 했었다. 이 일을 그는 종군신부 트레이자로에게 맡긴다. 예수회가 창건한 남당은 북경성에서 현존하는 성당이었다. 그러나 일찌감치 버려져서 쓰지 않고 있었다. 성당의 내부도 부서져서 엉망진창이었다. 프랑스군은 10월 29일 이곳에서 제사를 거행하기로 결정하고 즉시 성당에 대한 수리에 들어간다. 10월 27일, 성당을 참관한 후, Montauban은 공병중령 두부아이(杜布埃)에게 성당수리를 명령한다. 20일 새로운 축성의식을 진행할 수 있도록. 공병대위 베이치야(貝齊亞)는 특별히 중임을 맡았다. 그는 성당의 원래 남겨진 폐허를 회복시켰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300명의 병사 및 같은 수의 중국신도들이 이에 참여했다고 한다. Mouly와 Jean-Baptiste Anouilh도 도움을 준다. 이번 수리공사에 대하여 프랑스군은 여러 기록을 남겼다. 부룽다이르(布隆戴爾)는 러시아공사의 도움을 받았다고 한다. L.F.주이야(朱以亞)는 프랑스공병이 수리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다. 챨시 더 무트레이시는 남당수리전의 상황과 영국, 러시아인사의 수리참여를 보고한다. Irisson은 중국신도가 성당수리에 참여했다는 내용도 언급한다.

 

10월 29일 오전 미사가 예정대로 남당에서 거행된다. Montauban, Gros와 초청을 받아온 러시아송사의 수석비서가 참석했다. 적지 않은 중국 천주교신도들도 참석했다. 종군신부 드사이레이는 전날 안장한 프랑스 장병을 위해 미사를 주재했고, Jean-Baptiste Anouilh는 성당의 중앙영구대에서 추모기도를 올린다. 감사기도후 악단과 합창단이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세계>를 합창했다. 미사가 끝난 후, 숙소로 돌아가 철군을 준비한다. Mouly는 Montauban에게 몇명의 중국신도를 소개시켜준다. 그리고 "공친왕이 보낸 홍목갑을 가져왔다. 그 안에는 부채가 들어 있었는데, 그중 몇 개의 부채에는 북경성을 그린 것이었다." 그리고 "6장의 커다란 북경지도도 있었다. 그 지도는 모두 아주 장교하고 질좋은 종이에 그려져 있었다."

 

흠천감 관상대도 연합군이 남긴 기록중 한 곳에 나타난다. 10월 28일, 프랑스 사절단의 수행원 조르주 드 크루러는 북경시내거리를 다니다가 무의식중에 관상대를 발견한다. 그는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당시 관상대의 서양천문기구들은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었다.

 

이를 보면, 영불연합군은 북경에 진입한 후, 프랑스 선교사들의 적극적인 협조로 외교협상과 유체안장등의 활동을 진행하였다. 이에 대하여 Montauban은 높이 평가했다: "군사행동과정에서 우리의 선교사들은 게속하여 우리를 안내해주었다. 그들은 공친왕과 일련의 외교활동을 전개해주었다." 선교사들과 영불연합군의 이런 협력은 근대천주교의 중국에서의 선례가 된다. 그들은 더 이상 단순한 종교인사가 아니었고, 서방열강이 중국을 군사적으로 침략하는데 협조자가 된다. 중서관계는 이로 인해 극히 복잡해진다. 그리하여 근대 서양선교사들이 근대중서문화교류에서이 역할에 대하여 새로운 변수가 추가되게 되었다.

 

5. 여론(餘論): 제2차아편전쟁에 대한 반성을 다시 검토한다.

 

제2차아편전쟁의 결말은 중국에 있어서 침통하고 굴욕적이었다. 영불연합군이 먼거리를 원정와서, 보급선도 길고, 물자공급도 제대로 보장되지 않았다. 대고구에서 북경까지는 약 350여리에 이른다. 이렇게 긴 육상운송선을 유지하려면 곤란이 많았다. 중국이 만일 후방보급선을 끊었더라면, 싸우지 않고도 적을 물리치는 효과를 거둘 수 있었을 터였다. 청군은 이에 대하여 아무런 대책이 없었던 것같다. 9월 23일 팔리교전투이후, 청군이 계속하여 유격전을 전개하여, 후방의 퇴로를 차단했더라면, 연합군은 11월 1일 엄동설한이 닥치기 전에 전쟁을 끝낼 수 없었을 것이고, 연합군은 기후가 불리해지면 자동으로 철군할 수밖에 없었다. 프랑스군은 나폴레옹이 모스크바에서의 전투에서 패전한 기억이 새롭다. 일찌감치 11월 1일의 철군계획이 세워져 있었다. 한 프랑스장교는 이렇게 의문을 표시한 바 있다: "이 청군장수는 설마 연합군의 소재위치를 잘못 알고 있는게 아닌가? 그는 설마 북경, 천진과 대해의 세 곳간에 대량의 북방의 차가운 기후에 익숙한 청병을 배치할 생각을 왜 하지 못했는가? 그는 설마 우리와 주요작전기지 및 해양간의 연결을 끊으면 우리는 점령한 도시안에 완전히 고립된다는 것을 몰랐단 말인가?" 10월 13일 연합군은 안정문을 점거한 후, 프랑스군관 F 카스타노가 기뻐하면서 말했다: "연합군의 물자와 탄약이 기실 아주 부족해서, 그 구름까지 솟는 높이에 20미터의 두께를 가진 성벽을 깨부술 수 없었는데, 위협과 협박이 다행히 성과를 거두었다. 왜냐하면 일단 실패하면 연합군은 열악한 계절을 맞게 될 것이고, 나머지 군대 및 강의 함대와의 연결도 단절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 소규모의 영불연합군은 아마도 전멸하게 될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승격림신, 승보(勝保)등 청군의 장수들은 확실히 그런 것까지 생각지 못했다. 청군은 마치 앞을 막겠다는 생각만 했지, 뒤를 끊겠다는 생각은 하지 못한 것같다. 운동전에 습관이 된 몽골기병은 팔리교전투에서 대패한 후, 거의 마비되었고, 완전히 전투의지를 상실해버린다. 그후 취한 방법은 협상에서 밀고당기면서 시간을 끄는 것이었다. 이같은 방어전략의 실수는 처참한 패전을 불러왔다. 청나라는 이미 쇠약해져서 구할 방법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외에 안타까움에 장탄식만 흘러나오게 만든다.

 

청군의 약점은 해군이 없다는 점에 있었다. 연합군은 강력한 해군을 가지고 장거리를 직진하여 달려왔고, 중국영해를 무인지경으로 밀고 들어와 대고구에 이른다. 청군의 또 다른 곤란은 전선이 두 개라는 것이었다. 남쪽에는 태평천국과 싸워야 했고, 북쪽에는 외래강적의 침입을 막아야 했다. 양면에서 적을 맞이하게 되고, 군사력은 장기간 태평천국과의 전투로 소모되어 버려 이미 예전같지 않았다. 그러나 영불연합군의 군사역량은 아편전쟁시기보다 강력해졌다. 쌍방의 무기장비차이는 극심해졌다. 영국군은 세계에서 가장 강대한 해군을 보유하고 있고, 프랑스는 유럽제일의 육군강국이었다. 영불연합군은 강강연합이다. 이는 제1차아편전쟁때 단지 영국군만 단독으로 작전을 벌인 것과 크게 차이난다. 사실상, 결정적인 의미를 지닌 팔리교전투에서 Montauban이 지휘하는 프랑스군이 주력이었다. Montauban은 이로 인해 나폴레옹3세에 의해 "팔리교백작"이라는 칭호를 받는다. 영불연합군은 결국 소수로 다수를 이겼고, 기적적인 승리를 거둔다. 전쟁은 청나라조정의 상하에 큰 상처를 주었고, 주화파인 공친왕 혁흔이 전후에 도주적으로 자강운동을 일으켰지만, 그 내심의 굴욕감은 충분히 상상이 갈 것이다.

 

전쟁과 기후는 밀접한 관계가 있다. 1812년 10월 나폴레옹은 대군을 이끌고 러시아원정에 나선다. 모스크바성 아래까지 도착하지만, 엄동설한으로 어쩔 수 없이 퇴각해야 했고, 결국 일패도지한다. 이는 프랑스군에게는 역사적 교훈이다. "북경은 북위39도, 동경 114도이며 기후조건으로 볼 때, 다른 지방과 비교할 수 없다." 프랑스군의 종군군의관 아돌프 아르망포는 지나는 지역의 기후, 동물, 식물, 곽물, 수문, 의학등 방면의 지식을 기록했다. 그의 <중국과 교지지나출정에서 온 서신>에는 여러 곳에 지나간 지역의 기후를 기록해 두었다. 그중 1860년 9월의 매일 날씨상황을 거의 모두 기록으로 남겼다. 영국군 장교 죠지 올굿은 심지어 <1855-1859년 북경에서 진행한 겨울기상관측표>를 만들기도 했다. 이 5년간 1,2,3,11,12월의 매일 최저, 최고기온을 모두 기록으로 남겼다. 이를 보면 연합군이 북경의 가을 겨울환절기에 대한 연구가 아주 세밀했음을 알 수 있다. 

 

북경의 가을은 통상적으로 추고기상(秋高氣爽)으로 날씨가 좋다. 다만 1860년 10월의 북경날씨는 이상했다. 비가 많이 내렸다고, 돌연 추워졌다. 연합군이 통주에 주둔하고 있을 때인 9월 27일 저녁에는 거대한 황사폭풍이 몰려와서 연합군이 거의 질식할 뻔한다. 10월 2일에는 "날씨가 완전히 변했다. 겨울에 아주 춥다" 황사는 사람들을 견디기 힘들게 했다. 연합군이 원명원을 약탈한 후, 10월 9일, 아침에 놀랍게도 "9월 22일이래 계속 좋았던 날씨가 돌연 급변했다" "차가운 동북풍과 더불어 하늘에서는 비가 내렸다." 10월 10일부터 날씨변화는 분명했다. 저녁에는 아주 추웠다. 설사 낮이라 하더라도, 뼈를 시리게 만드는 한풍으로 텐트속에서도 편안하지 않았다. "그래서 현지인들은 모두 말하기를 11월초, 강물이 얼기 시작한다고 말했다. 우리는 강으로 대량의 물자를 운송해야 하기 때문에 만일 우리가 북경에 머무는 시간이 11월8일을 넘기게 되면 아주 위험해질 것이다." 날씨가 갑자기 차가워지자 연합군은 전투에 긴박감을 느낀다. 그래서 Montauban은 결정을 내리게 된다: "우리는 겨울이 오기전에 경성을 탈취해야 한다. 그후 천진과 상해로 돌아간다. 그곳에 동계숙영지를 둔다." 그렇지 않으면 군사행동이 곤란에 빠질 것이다. 영국군 사령관 Grant도 공감했다. 그들은 부대를 북경에서 철수시키는 날짜를 11월 1일로 잡았다. 10월 14일오전 Montauban은 Gros에게 서신을 보내어, 하루빨리 조약을 체결하도록 촉구한다: "우리는 북경 주변지역의 주민들로부터 들었는데, 이곳은 곧 추운겨울이 닥친다고 한다. 러시아특사 이그나티예프 장군도 중국북방의 겨울은 모스크바처럼 춥다고 했다. 경성에는 난방설비가 없다. 모스크바라는 말은 나에게 침통한 기억이다. 내가 우리 특사에게 서신을 쓰는 것은 국면이 어떠하든지간에 나는 절대로 우리부대를 11월 1일이후 여전히 북경성밖에 주둔시키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다." Gros는 그날 회신을 보낸다: "나는 장군과 부대가 북경에서 겨울을 지내지 않겠다는 것과 11월 1일 북경을 떠나겠다는 뜻을 Elgin에게도 전달했다. 나는 당신께 보증하겠다. 나의 영국동료와 우리는 마찬가지로 외교문제를 하루빨리 해결하기를 바라고 있다." 그는 또한 이런 말도 추가한다: "나는 Lord Elgin에 보낸 서신에서 당신이 북경에서 겨울을 보낼 수 없다고 생각하고, 군대는 11월 1일 이전에 이 도시에서 철수해야 한다고 말했다." 프랑스군 통역관 Irisson도 Montauban장군이 11월 1일 북경을 철수하려는 방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Montauban은 계속하여 혼자 걱정하고 있었다. 우리가 이전에 이미 언급했지만 그건 겨울이다. 도로, 하거(河渠) 그리고 백하가 모두 얼어버릴 것이다. 그래서 Montauban은 북경이 오래 머물 곳이 아니라고 여긴다. 그리하여 그는 영국 동료에게도 통지했다. 만일 15일후에도 일이 완료되지 않으면, 그는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천진으로 돌아가겠다고. 11월 1일 이후에 그는 북경의 성문밖에 남아있을 아무런 이유가 없다고." 확실히, 프랑스군내부에는 이미 북경에 머무르는 최후시한을 11월 1일이라고 정해놓고 있었다.

 

10월 중하순 북경의 날씨는 계속 추워진다. 연합군은 이에 대하여 여러 기록을 남겼다. 10월 15일 "저녁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다음 날 아침, 서산의 산꼭대기에는 흰눈이 덮였다." 17일, "그날 차가운 날씨는 나는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산꼭대기는 흰눈이 쌓여 있고, 동북풍은 거세게 불어온다." 26일, "오후, 하늘에서 작은 비가 내렸다." 27일, "구름끼고 비오는 날씨, 기온이 차갑다. 우리는 두터운 외투를 입었고, 진흙탕 속에서 부대를 이끌고 북경으로 돌아갔다." "날씨가 정말 춥다. 우리는 온몸에 한겹 서리가 낀 것같다. 밝고 영롱한 얼음바늘이 가득하다." 29일, "오전 9시, 차가운 비가 내린다." 30일, "오전, 서산의 해발 1,200야드이상의 부분은 모두 흰눈으로 덮였다." 이날 Elgin은 독감을 앓아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그는 일기에 이렇게 썼다: "이상의 기록으로 보면, 10월 9일, 17일, 26일, 27일, 28일, 29일 북경은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리며 날끼가 갑자기 추워졌다. 이런 가을의 북경날씨는 아주 빨리 추워지는 것같다. 이것이 프랑스군이 11월 1일에 반드시 철수해야 한다고 말했던 바로 그 이유이다. 유감스럽게도 날씨요소는 한번도 청군의 전략에 고려되지 않았었다.

 

러시아인은 영불연합군의 협력자였다. 또한 이번 전쟁의 수혜자였다. 연합군을 옹화궁에 주둔하도록 인도하는데서부터, 연합군에 북경지도를 주고, 연합군의 시신을 안장할 묘지를 찾아주고 마지막으로 거중조정하는데까지 러시아의 주북경공사관은 거의 모든 중요한 시기마다 연합군에게 도움을 주고, 지극히 영광스럽지 못한 역할을 행한다. 단지 몇년전에 러시아는 영국, 프랑스와 크리미아에서 전쟁을 벌였었다. 지금 그들은 상호 이용하는 친구가 되어, 반갑게 악수하고 얘기를 나눈다. 연합군이 북경성 부근에 도착했을 때, 일찌기 옹화궁을 정찰했다. "현지상황을 잘 아는 러시아군 대령 드 바루사이크 선생이 우리를 데리고 이 화려한 사원으로 간 후 우리에게 이곳에 머물 것을 건의했다." 이그나티예프와 연합군의 협력은 아주 밀접했고, 연합군에 적지 않은 도움이 되었다. 프랑스군은 심지어 "중국황제진영의 방조자 러시아장군 이그나티예프와 우리의 관계는 영국인과의 관계보다 훨씬 좋았다." "이 러시아장군은 중국인의 성격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우리의 어느 외교관보다 우리가 중국에게서 무엇을 얻어낼 수 있는지 잘 알고 있었고, 그는 아주 명확하게 말했었다. 만일 중국인들에게 우리의 요구조건을 받아들이게 하려면, 아주 명확하고 정확하게 제출해야 한다고." 영국군에서도 러시아인들이 제공한 도움을 마찬가지로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재삼 표시했다: "러시아공사관은 매우 우호적이다. 우리에게 묘지를 제공하여 중국의 배신과 야만으로 죽은 피해자들을 묻을 수 있게 해주었다. 여기에서 나는 기꺼이 증인이 될 것이다. 러시아는 전체 전투과정에서 우리에게 우호적이었고 은혜를 베풀었다. 그들이 어떤 정보를 가지고 있었던지간에, 항상 언제든지 우리에게 제공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매번, 그들은 우리에게 열정적이고 우호적이었다." "전체 전투과정에서 한두 명이 아닌 러시아의 고위장군, 장교가 우리에게 말해주었다. 우리때문에 그들이 많이 편리해졌다고. 의문의 여지없이 그들의 여러가지 표현은 이런 견해를 증명한다." 과연 나중에 프랑스작가 베르나 부리사이가 이에 대하여 이렇게 평가했다: "이그나티예프와 프랑스인이 자주 왕래한 것은 그가 프랑스어에 유창하고, 그가 중국과 중국인, 타타르군대, 방어공사 및 병영에 관한 정보를 제공해주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중국의 고위관료와 조정상황도 제공해주었고, 고귀한 건의도 내놓았다. 그리하여 프랑스인들에게 도움이 적지 않았다." 다른 한편으로, 러시아인도 영불연합군의 손을 빌어 자신의 목적을 달성했다. 연합군이 원명원을 점령한 후, 이그나티예프는 연합군에 "황제 여름궁전에서 발견한 러시아국 자료는 자신에게 넘겨달라"고 부탁한다. 이그나티예프는 영국특사와 공친왕의 사이를 오거면서 거중조정했고 아주 활발했다. "그는 공친왕에게 평화조약에 합의할 것을 강력하게 요구했다." 이를 통해 중간에서 이익을 챙긴다. 영불측에서도 "러시아인의 목적을 잘 알고 있었다." 불가사의하게도, 청나라조정방면에서는 러시아사절단과 영불연합군과의 밀접한 협력관계를 비록 알고 있으면서도, 전혀 경계심을 갖지 않고 오히려 감사했다는 점이다. 러시아 공사단에서 거중조정하고 영불연합군을 몰아낸 공을 내세워 댓가를 요구할 때도 청나라조정은 아무런 망설임없이 러시아가 요구한 사항들을 받아준다. 11월 14일 쌍방은 <북경조약>을 체결한다. 러시아는 중국의 많은 영토를 가져가서 그들이 오랫동안 노렸던 영토확장의 야심을 만족시킨다. 제정러시아는 이렇게 이번 전쟁의 진정한 최대승리자가 되었다.

 

제2차아편전쟁이 끝난 후, 천도의 목소리가 조야에서 터져나온다. 이는 청왕조때 처음으로 나온 천도의 목소리였다. 그후 청일전쟁이후 다시 한번 서안으로 천도하자는 목소리가 나온다. 이는 청나라의 근본이 이미 흔들린다는 것을 말해준다. 모해건(茅海建)은 "천조의 붕괴"라는 말로 아편전쟁의 청나라에 대한 침중한 타격을 묘사했다. 당시 유럽인의 관점도 아마 그랬던 것같다. 만일 전후 중국에 대한 실제영향을 보면, 제1차아편전쟁은 기껏해야 천조의 방어체계의 외곽에 하나의 구멍을 낸 것이라면, 제2차아편전쟁은 영불연합군이 북경으로 직접 쳐들어오고, 원명원을 불태우고, <북경조약>을 체결하여, 청나라조정에 헤아릴 수 없는 고통과 놀라움을 안겨주었다. 중서관계는 이로 인하여 근본적으로 변화한다. 영불연합군이 북경으로 진입한 것은 제2차아편전쟁의 종곡(終曲)이지만, 근대화에는 서곡(序曲)이었다. 전쟁이 끝난 후, 청나라조정은 즉시 총리각국사무아문을 설치하고, 양무운동을 시작한다. 북경에 다시 성당을 열고, 서방각국이 북경으로 들어와 공사관, 병원, 은행, 학교등 기구를 설치하도록 허용한다. 진정 식민지화 근대화의 이중궤도로 들어선 것이다. 이 각도에서 보자면, 제2차아편전쟁이야말로 중국근대사에서 실질적인 의미를 지니는 역사적 전환점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