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선진)

황하(黃河) vs 이수(伊水): 대우치수(大禹治水)는 어느 강일까?

중은우시 2023. 5. 24. 10:57

글: 지도제(地道帝)

 

비록 이미 4천여년이 흘렀지만, 고대 중화대지의 대홍수는 지금까지도 후손들 사이에 지워지지 않는 기억으로 남아 있다. 그리고 대대손손 구술로 이어져 내려오면서 신화가 되었다. 황당무계한 신화적인 요소를 배제하면, 우(禹)가 홍수를 다스리는 과정에서 "공주(共主)"의 지위를 확립하게 된 것은 다툼없는 사실이다. 비록 하(夏)왕조의 창시자가 우인지 계(啓)인지에 대하여는 지금까지도 논쟁이 남아 있지만, 요순우(堯舜禹)가 번갈아가면서 우두머리가 되었던 선양제(禪讓制)에서 부사자계(父死子繼)의 방식으로 바뀐 것은 우와 계 부자사이에서 이루어졌다. 우의 권위는 치수에서 왔는데, 다만 그가 도대체 어느 강을 다스렸던가? 어떤 방식으로 다스렸던가? 이에 대하여는 지금까지도 정설이 없다.

우가 치수를 주재하기 전에 곤(鯀)이 채용한 주요 방식은 "도(堵)"였다. 그러나 효과를 내지 못해서 순임금에게 처형당한다. 곤은 유숭(有崇)부락의 수령이었고, 숭백곤(崇伯鯀)이라고도 불렸다. 치수방법은 강변에 둑을 쌓는 것이다. 비록 단기간에 강물이 넘치는 것은 막을 수 있었지만, 수위는 계속하여 올라갔고, 9년동안 치수사업을 진행했지만 결국 실패로 돌아가고 만다. 곤이 죽은 후, 순임금은 곤의 아들 우를 보내 치수업무를 맡게 한다. 우의 방법은 주로 "소(疏)"였다. 지리적으로 보면, 황하는 진섬(晋陝, 산서성과 섬서성)의 사이를 지나간 후에는 대형산맥이 막는 곳이 없어서 황하의 하류(下流)는 불안정했다. 황하가 북선(北線)으로 가면 해하(海河)의 하도를 빼앗아 발해(渤海)로 들어갈 수 있고, 남선(南線)으로 가면 회하(淮河)를 거쳐 황해(黃海)로 들어갈 수 있다. 오늘날 우리가 보는 황하는 중선(中線)이다.

대우치수가 성공한 이후 "봉태산(封泰山), 선회계(禪會稽)"한 기록을 보면, 당시의 국면은 황하가 "탈회입해(奪淮入海, 회하의 물길을 빼앗아 바다로 들어가다)"였고, 그리하여 황회평원(黃淮平原)은 홍수로 피해를 입고 있었다. 대우는 명을 받아, 동남을 구한 것이다. 만일 이렇게 말하면, 대우가 황하의 물길을 바꾸어 남선을 북선으로 변경시킨 것같다. 북선의 하도는 이로 인하여 후인들이 "우하고도(禹河故道)"로 불리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공사를 실현하려면, 대우는 최소한 두 단계의 작업을 해야 한다. 첫째, 황하와 해하의 어느 지류를 관통시켜야 한다. 둘째, 황하와 회하의 연결점을 막아야 한다. 바꾸어 말하면, 대우의 방법은 단순히 "소"가 아니라, "소도(疏堵)결합"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고인들의 당시 기술수준을 감안하면, 석기시대인 상고부락이 이런 대형공사를 감당했다는 것에는 큰 의문이 남는다.

또 다른 가능성이 있다. 동남에 해를 끼치는 근본은 황하가 아니라, 황하의 지류인 이수(伊水)였다. 이수와 낙수(洛水)는 낙양분지(洛陽盆地)에서 만나 이락하(伊洛河)가 된다. 그후에 황하(黃河)로 들어간다. 이수의 상류에서는 이천분지(伊川盆地)를 지나간다. 그런데, 이천분지와 낙양분지의 사이에는 웅이산(熊耳山)과 숭산(嵩山)이 있다. 웅이산과 숭산이 만나는 곳이 바로 용문(龍門)이다. 그 유명한 용문석굴(龍門石窟)이 바로 이 곳에 있는 것이며, 전설에 따르면, 대우가 용문의 수환(水患)을 다스렸다는 곳이 아마도 이 곳일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용문은 고대에 또 다른 이름이 있었다. 바로 이궐(伊闕)이다. 이궐은 더더욱 공사논리의 각도에서 4천년전에 발생한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다.

 고문에서 "궐(闕)"이라는 것은 "결(缺)"과 같은 뜻이다. 이궐은 실제로 이수상의 결구(缺口)이다. 이 결구는 웅이산과 숭산이 만나지만 합쳐지지 않는 위치에 놓여 있다. 이수는 이천분지에서 이궐을 거쳐 낙양분지로 들어서게 된다. 만일 니사(泥沙, 진흙모래)가 이궐을 막아버리면, 강물은 이천분지에서 빠져나오지 못해 이천분지를 호수로 만들어 버릴 것이다. 아마도 오늘날의 각도에서 보자면, 이수의 수량은 전혀 수재를 일으킬만한 정도가 아니다. 다만 당시는 전세계가 홍수로 골머리를 앓던 때이다. 이수가 이천분지를 채운 후에는 동남쪽으로 흘러넘쳤을 것이다. 이천분지의 동남쪽은 바로 회하(淮河)의 지류인 여수(汝水)이다. 흘러넘친 강물이 여수를 거쳐 회하로 들어간다면 황회평원에서 홍수가 발생하게 될 것이다.

이때 대우에 있어서, 치수의 관건은 이궐을 막고 있는 진흙모래를 파내어, 제거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면 이수는 순조롭게 하류로 흘러내려가 황하와 만나게 될 것이다. 그러면 회하가 받는 압력도 경감될 수 있다. 아마도 이것이야말로 대우가 "이소위주(以疏爲主)"의 치수방식이 아니었을까? 이궐을 막고 있던 진흙모래를 파내는 것이 산을 뚫는 것보다는 훨씬 쉬웠을 테니까.

하왕조와 상왕조의 도성

 대우가 치수한 것이 황하이건 이수이건, 대우는 치수를 통하여 소재하는 부락이 황하회수일대의 명맥을 장악하게 되었고, 상류를 소통시킴으로써 하류에 사는 사람들에게 혜택을 주었다. 마찬가지로 상류를 막고 뚫는 것으로 하류를 견제할 수 있는 힘을 갖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대우는 "가천하(家天下)"의 기반을 닦은 것이다. 그리고 우와 계는 하왕조를 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