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당)

두보(杜甫)의 집안내력은...?

중은우시 2023. 5. 22. 12:00

글: 풍지(馮至)

 

두보는 진(晋)나라의 명장 두예(杜預, 222-284)의 제13대손이다. 두예는 경조(京兆) 두릉(杜陵) 사람이다. 두예의 막내아들 두탐(杜耽)은 진(晋)의 양주자사(凉州刺史, 양주는 지금의 감숙성 무위)였고, 두탐의 손자 두손(杜遜)은 동진(東晋)초기 남으로 이주하여 양양(襄陽)으로 갔고, 위흥태수(魏興太守, 위흥은 섬서 안강 서북)를 지낸다. 그는 양양두씨(襄陽杜氏)의 시조이다. 두손의 아들 두건광(杜乾光)의 현손(玄孫)인 두숙비(杜叔毗)는 북주(北周)에서 협주자사(硤州刺史, 협주는 호북성 의창 서북쪽)를 지낸다. 두숙비의 아들 두어석(杜魚石)은 수(隋)나라때 획가현령(獲嘉縣令, 획가는 하남성에 있음)을 지낸다. 두어석은 두의예(杜依藝)를 낳으니 그는 공현령(巩縣令)이었다. 두의예는 두심언(杜審言)을 낳는데, 그는 선부원외랑(繕部員外郞)을 지낸다. 두심언은 두한(杜閑)을 낳는데, 그는 봉천현령(奉天縣令, 봉천은 섬서성 건현)을 지내며, 바로 두보의 부친이다. 두보의 먼 조상은 경조 두릉 사람이어서, 두보는 자칭 '경조두보(京兆杜甫)'라 했다. 그는 또한 양양두씨의 지파에 속하므로 사서에서는 그를 양주(襄州) 양양(襄陽)사람이라고 적었다. 또한 그가 출생한 곳은 하남성 공현이다.

 

두보가 자신의 둘째고모를 위해 쓴 묘지명(墓誌銘)에 자신의 집안내력을 적어놓았다: "멀리는 주나라때부터, 성대(聖代, 당나라)에 이르기까지,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을 전하고, 공후백자남(公侯伯子男)에 올랐다." 그는 <진조부표(進雕賦表)>에서는 이렇게 적었다. 자신의 조상은 두예로부터 왔으며, "봉유수관(奉儒守官), 미추소업(未墜素業)"(유학을 받들고 관직을 맡아왔으며, 관직에 오르지 못한 적이 없었다). 우리는 두보가 쓴 이 두 마디 말을 보면서 다시 앞에서 언급한 조상을 보자. 그의 조상은 대부분 태수, 자사, 현령같은 관리를 지냈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두보가 유구한 전통을 지닌 관료집안에서 태어났다는 것이다. 이런 가정은 보유한 전답에 세금을 납부할 필요가 없고, 사내는 군대에 가서 병역을 부담할 의무가 없었다. 사회내에서 많은 봉건적 특권을 누리는 집안인 것이다. 그들은 명문선비집안들과 통혼하고, 유가의 예교를 지키면서, 제왕을 보좌하며, 백성을 다스렸다. 두보가 태어난 이후, 그의 가정상황은 예전만 못했고, 점점 쇠락해갔다. 그러나 설날의 모임에는 여전히 주변 사람들이 몰려들어서 찬양했고, 매번 혼례나 장례가 있을 때면, 가깝고 먼 곳에서 친척이나 친지들이 찾아오곤 했다. 이를 통해 우리는 두보의 용속(庸俗)적인 일면을 엿볼 수 있다. 그가 중년때 오랫동안 장안에서 머물면서 그렇게 적극적으로 관직을 얻으려 했던 이유를. 권력을 가진 사람들에게 모두 손을 내밀면서. 이런 것은 그의 집안전통과 무관하지 않다고 할 수 있다.

 

그외에 그는 조상에게서 무엇을 승계받았을까? 아래에서 추가로 분석해보기로 하자.

 

두보는 그의 시에서 자주 두예(杜預)와 두심언(杜審言)을 언급했다. 두예는 그의 업적으로, 두심언은 그의 시로. 두예는 전투를 잘했으며 사람들에게 '두무고(杜武庫)'로 불렸다. 동오(東吳)와 전투할 때, 전략에 정통하여, 민간에서는 그에 대하여 "이계대전일당만(以計代戰一當萬)"(전투 대신 계책을 쓰는데 혼자서 만명을 상대할 수 있었다)이라는 노래까지 나왔다. 그후 중원의 문화가 강한(江漢)에 전파되는데도 일정한 작용을 한다. 그는 법률, 경제, 천문, 공정을 알았고, <좌전>을 연구했다. 두보는 일찌기 두예의 묘소가 있는 수양산(首陽山) 아래에 거주한 바 있는데, 그때 <제원조당양군문(祭遠祖當陽君文)>을 쓴 바 있다. 그는 말년에 형초(荊楚)지방을 떠돌아다녔는데 자주 두예를 생각했다: 그가 형남(荊南)에서 위백옥(衛伯玉)을 칭송하면서 말하기를 위백옥이 형주를 지킨 것은 두예의 사업을 승계한 것이라고 했다; 나중에 그는 형주(衡州)에서 북으로 양양(襄陽)을 가려고 생각하면서 즉시 생각한다. "오가비불매(吾家碑不昧)". 그 의미는 두예가 당시 명예심으로 인하여 자신의 공적을 두 개의 석비에 적어서 세웠는데, "하나는 만산의 아래에 가라앉았고, 하나는 현산(峴山)의 위에 서 있다"는 것을 가리킨다.

 

두심언(648?-708)은 두씨집안에 '봉유수관'하는 외에 또 하나의 전통을 세운 인물이다 바로 "시(詩)". 두심언은 어렸을 때, 이교(李嶠), 최융(崔融), 소미도(蘇味道)와 함께 "문장사우(文章四友)"로 불렸다. 그의 시는 그보다 조금 뒤의 송지문(宋之問), 심전기(沈佺期)와 나란히 이름을 떨친다. 왜냐하면 그들은 오언율시(五言律詩)형식의 기초를 다진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제량(齊梁, 남조의 송제양진중 제와 양을 가리킴)이래, 시인들은 현실을 벗어나, 형식을 숭상하고, 격률을 중시했다. 초당에 이르러 이미 율시(律詩)가 형성되어, 궁정에서의 법도에 따라 통치자의 공덕을 칭송하는 것으로 이런 시체는 발전했다. 그러나, 심전기, 송지문의 율시는 길어야 6운, 8운이고 10운이상인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리고 두심언의 <화이대부사진(和李大夫嗣眞)>은 그러나 40운에 달한다. 당시에 명작으로 불렸다. 배율이 두보에 이르러서는 더욱 크게 발전하여, 원진(元稹)은 일찌기 두보의 배율을 이렇게 칭찬한 바 있다: "포진종시(鋪陳終始), 배비성운(排比聲韵), 대혹천언(大或千言), 차유수백(次猶數百)" 우리가 지금 보면, 두보의 위대한 의의는 절대로 배율의 성공에 있지 않다. 배율은 두보의 시에서 오히려 창조성이 비교적 빈약한 부분이다; 다만 이런 시는 두보에게 있어서 가학(家學)의 연원(淵源)이다. 이 점에 관하여 북송때부터 계속 사람들이 언급해왔다. 두보 본인도 "오조시관고(吾祖詩冠古)"(나의 할아버지의 시는 예전에 으뜸이었다)라고 자랑스러워했다. 그리고 그의 아들 두종무(杜宗武)의 생일때 그는 이렇게 훈계한다: "시시오가사(詩是吾家事)" 시는 우리 집안에서 해야할 일이다.

 

송지문과 심전기는 모두 "회기성병(回氣聲病), 약구준편(約句準篇)"하고 형식을 숭상하는 시인들이다. 동시에 무측천의 총애를 받는 신하들로, 그들은 장역지(張易之)형제에 빌붙어 아부를 했다. 두심언은 비록 악행을 그다지 저지르지는 않았지만, 그도 무측천의 앞에서 <환희시(歡喜詩)>를 짓고 장역지형제와 결탁한 점을 보면, 인품이 고상한 시인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리고 그는 스스로를 높고, 크게 보았고, 실질보다 과장하는 것이 심했다. 당시에 그의 오만한 언행에 대하여 몇 가지 전해지는 이야기도 있다: 그는 자주 말했다고 한다. 자신의 문장이 굴원(屈原), 송옥(宋玉)을 넘어서고, 그의 서예는 왕희지(王羲之)를 뛰어넘었다고. 이런 스스로를 과장하는 성격은 두보도 어느 정도 영향을 받은 듯하다. 두보가 장년때, 정치적으로 자신을 직설(稷契, 후임금의 신하인 후직, 설)에 비유하며 요순(堯舜)같은 임금을 섬기고 싶다고 하였다. 문학적으로 그는 굴원, 가의(賈誼), 조식(曹植), 유정(劉楨)등을 자신의 눈아래 두지 않았다. 이렇게 스스로를 높이는 것은 당나라때 문인들의 일반적인 기풍이기는 했지만, 그가 조부에게 물려받은 유풍이 어느 정도 있다고 할 수밖에 없다.

 

당시는 가족관념이 사람의 모든 행동을 지배했다. 만일 누군가 자신의 부친, 형의 불행을 위하여 여하한 희생을 치르고서라도 복수를 한다면, 그것은 숭고한 덕행이라고 칭송받았다. 두보의 부계에도 그런 사람이 있다. 두심언의 증조부인 두숙비는 모친을 잘 모시는 효자였다. 그가 형의 복수를 한 것은 한때 미담으로 전해져 내려왔다. 그러나 연대가 오래 지나다보니, 두보에게는 그다지 큰 영향을 주지 못한 것같다. 다만 유사한 사건이 두보의 숙부인 두심언의 차남 두병(杜幷, 649-699)에게 일어난다. 무측천때 두심언은 길주사호참군(吉州司戶參軍, 길주는 강서성 길안)으로 좌천된다. 거기서 동료와 불화하여, 사마(司馬)인 주계중(周季重)이 사호(司戶)인 곽약눌(郭若訥)이 모함하는 말을 듣고 두심언을 감옥에 가두어버린다. 두병은 당시 나이 16살이었다. 부친이 그렇게 억울하게 감옥에 갇힌 것을 보자, 그는 식사도 하지 못하고 형색이 초췌해져 간다. 그는 최대한 내심의 분노를 억누르고 있었다. 어느 날, 주계중이 집안에서 연회를 베풀었는데, 두병은 경계가 소홀한 틈을 타서, 비수를 가지고 들어가 주계중을 찔러 주계중에게 중상을 입힌다. 두병은 그 자리에서 맞아죽는다. 주계중은 상처를 치료하지 못하고 죽을 때, 참회하며 말한다: "나는 두심언에게 이런 효자가 있는 줄 몰랐다. 곽약눌이 나를 이 지경으로 망쳤구나!" 두심언은 이로 인하여 풀려나 낙양으로 되돌아온다. 낙양의 친구들은 그 이야기를 듣고 모두 감동하며 두병은 효자라고 칭송한다. 소정(蘇頲)은 두병을 위해 묘지명을 써주고, 유윤제(劉允濟)는 제문(祭文)을 써준다. 나중에 두보도 자신이 효자의 조카라는 것을 자랑한다.

 

우리는 두보연구자들이 그동안 주목하지 않았던, 그의 모계(母係)를 살펴보기로 하자. 두모의 모친은 청하최씨(淸河崔氏)이다. 그녀는 두보가 어렸을 때 사망한다. 그리하여 두보에게 그다지 인상을 남기지 못했다. 두보가 자신의 시에서 모친을 언급한 적은 없다. 그러나 그가 외삼촌을 언급한 것은 아주 많다. 당연히 이들 외삼촌은 모친의 친형제는 아닐 것이다; 백수(白水)에서, 재주(梓州)에서, 낭주(閬州)에서, 기주(夔州), 마지막으로 담주(潭州)ㅇ[서. 그는 최씨집안의 외삼촌 혹은 외사촌형제들과 만났고, 그들에게 시를 지어 주었다. 그가 기주에서 사촌동생 최공보(崔公輔)에게는 이렇게 썼다: "구씨다인물(舅氏多人物)"(외가쪽에는 인물이 많다). 담주에서는 외숙부 최위(崔偉)에게 이렇게 말했다: "현량귀성족(賢良歸盛族), 오구진지명(吾舅盡知名)". 이 싯구에서 그의 외가는 성대한 가족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성대한 가족, 특히 그의 모친의 직계혈통에서는 농후한 비극적인 색채가 있다.

 

당태종(이세민)의 제10자 이신(李愼)는 기왕(紀王)에 봉해지고, 양주자사(襄州刺史)가 된다. 그는 비록 개명한 귀족으로 월왕(越王) 이정(李貞)과 나란히 이름을 떨쳤다. 당시 사람들은 이들 형제를 합쳐서 "기월(紀越)"이라고 불렀다. 무측천이 집권했을 때, 통치계급내부에서는 큰 마찰과 갈등이 발생한다. 많은 당고조(이연)와 당태종의 자손들이 무측천에게 살륙당한다. 이정이 거병하여 무측천을 토벌하려다 실패한 후, 이신도 연루되어 감옥에 갇힌다. 그리고 성을 "훼(虺, 살무사라는 뜻)"로 바꾸게 한 후 영외(嶺外)로 유배보낸다. 그는 유배가는 도중에 사망한다. 이신의 차남 의양왕(義陽王) 이종(李琮)도 붙잡혀 하남의 감옥에 갇힌다. 그의 딸은 최씨에게 시집갔는데, 매일 초혜포의(草鞋布衣, 짚신과 베옷)를 입고, 초췌한 얼굴로 감옥을 드나들며 입을 것과 먹을 것을 가져다 주었다. 낙양의 길거리를 오가는 그녀를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감동을 받았고, 사람들은 그녀를 "근효(勤孝)"라고 말했다. 나중에 이종과 두 동생이 계림(桂林)으로 귀양갔다가 모두 혹리(酷吏)에게 죽임을 당한다. 이종의 아들 이행원(李行遠), 이행방(李行芳)은 전주(嶲州, 서강 서창)로 유배갔다. 형을 내릴 때, 이행원은 이미 성인이어서 피살되어야 했고, 동생 행방은 아직 어려서 죽음을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행방은 형인 이행원을 끌어안고 자신이 형을 대신해서 죽겠다고 호소한다. 결국 형제 둘이 모두 죽는다. 서남일대의 사람들은 이행방을 칭송하여 "사제(死悌)"라고 불렀다. "근효"와 "사졔" 이런 비극적인 이야기는 모두 이종의 자녀들에게서 일어났다. 그의 딸이 바로 두보의 외할머니이고, 이행원, 이행방은 두보 모친의 외숙들이다. 

 

두보의 외할머니의 모친은 서왕(舒王) 이원명(李元名)의 딸이다. 이원명은 당고조 이연의 제18자이고, 당태종의 동생이다. 무측천 영창연간에 내준신(來俊臣)의 일당인 구신(丘神)에게 모함을 받아 이주(利州, 사천성 광원)로 귀양갔다가 얼마 후에 피살당한다. 나중에 두보는 기주에서 당고조의 제16자 도왕(道王) 이원경(李元慶)의 현손 이의(李義)와 만난다. 헤어질 때 그에게 이런 시를 지어서 건넸다:

 

신요십팔자(神堯十八子)

십칠왕기문(十七王其門)

도국급서국(道國及舒國)

실유친제곤(實維親弟昆)

중외귀천수(中外貴賤殊)

여역첨제손(余亦忝諸孫)

 

두보의 외할머니지반은 비록 성대한 사족(士族)이고, 최상층의 통치자와 통혼했지만, 그 집안이 계승한 것은 귀족의 호화루움이 아니나, 비절인륜(悲絶人倫)의 참극이었다. 그래서 두보와 그의 사촌형제인 정굉지(鄭宏之)와 낙양의 북망산에서 그들의 외조부모에게 제사를 지낼 때 그는 비애가 충만한 제문을 지어 이 참극을 서술한다. 시작부분에 바로 이렇게 적었다:

 

면유숙석(緬維夙昔)

추사간구(追思艱窶)

당태후병병(當太后秉柄)

내종여루(內宗如縷)

기국즉부인지문(紀國則夫人之門)

서국즉부군지외부(舒國則府君之外父)...

 

불충분한 사료들 속에서 우리는 두보의 부계와 모계의 사회에서의 지위와 관계를 찾아낼 수 있었다. 여기에 적은 것은 불완전한 것인데, 사실상 완전하게 정리하기는 불가능하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이런 것들이 두보의 위대한 성취에 무슨 적극적인역할을 하지는 못한다. 역대조상의 '봉유수관'은 그저 두보가 관직에 나가는 것에 열정적이게 만들었고, 두예는 그에게 실현될 수 없는 사업의 환상을 심어주었고, 두심언은 오만하고 스스로를 과장하는 성격을 주었다. 이런 것들은 두보에 있어서 유리하다고 할 수도 있지만, 유해한 점도 있었다. 혈족을 위한 복수와 효제의 가풍은 단지 두보의 가족관념을 더욱 강화시켜줄 뿐이었다. 모계조상의 억울한 사건들은 그저 두보의 시에서 비극적인 분위기를 더할 뿐이다.

 

이런 것들은 두보의 성장발전에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았을 뿐아니라, 오히려 제약하는 작용을 했다. 진정 그의 발전을 돕고 그의 성취를 결정하게 된 것은 그의 집안출신과는 그다지 관계가 없다. 오히려 개원시기 사회번영으로 인한 고도의 문화와 천보이후 당나라의 정치경제에서 발생한 거대한 변화이다. 그가 초기에 '독서파만권(讀書破萬卷)"의 노력과 중년이후 백성들과 가까워지고, 백성의 감정과 생활을 느끼게 되면서 적지 않은 백성들의 언어를 흡수한 때문이다. 바꾸어 말하면, 그가 어느 시기에 자신의 신분계급이라는 속박을 벗어나, 그가 자신의 신분계급이외의 사물을 보게 되었다는 것이다. 비록 그는 말년까지도 자신의 집안과 출신이 그에게 주는 소극적인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