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청의 흠차대신(欽差大臣)이 어린 버트란드 러셀(Bertrand Russell)을 만나다.
글: 왕정(王丁)
1877년 초여름의 어느 일요일 오후, 청나라의 주영공사관(駐英公使館)의 일행 4명이 러셀 공작의 집을 방문한다. 나중에 이 방문에 참가했던 사람중 3명이 기록을 남기는데, 각각 정부(正副) 흠차대신인 곽숭도(郭嵩燾),유석홍(劉錫鴻)과 통역관 장덕이(張德彛)이다. 어린 러셀이라 함은 바로 나중에 대철학가로 1950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영국인 버트런드 러셀(1872-1970)이다. 그는 일찌기 2차례에 걸쳐 영국수상을 맡은 John Russell 공작의 둘째손자이다. 중문으로 번역된 외국사람의 이름이 기이하기 때문에 지금까지 어린 버트런드 러셀을 만난 내용을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것같다. 그래서, 이 글을 통하여 그 이야기를 알리고 근대대외교류과정에서 러셀과 중국의 인연에 대하여 하나의 얘깃거리를 던지고자 한다.
광서3년 이월 십일일(1877년 3월 25일), 영중의 주북경공사 Thomas Wade의 도움으로 대청의 주영공사 곽숭도가 부사 유석홍 및 통역 장덕이, 마격리(馬格里) 일행 4명이 차를 몰고 20여리를 가서 영국의 귀족저택을 방문한다.
"(광서3년 이월 십일일) 일요일. 라이사(羅爾斯) 륵사(勒斯) 부인과 다회(茶會) 약속을 잡았다. 륵사는 30년전 재상으로 국정을 맡았던 사람이고, 나이는 팔십오세이다. 이등문(里登門)지방에 거주한다. 거주하는 집은 포락득질(布洛得叱)이라고 부른다. 작은 구조로 수목이 둘러싸고 천백년자리 고수가 다수 있다. 배석한 사람은 라이사(羅爾斯) 불득사리(佛得思里)이다. 륵사가 말하기를 약이극해구(約爾克海口)에 대성당이 있는데 영국에서 가장 유명한 곳이니 반드시 가보아야 한다고 했다. 인정이 있었고, 스스로 오늘 라틴어 고문자를 읽었다고 한다. 나이가 들어서도 여전히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 손자 두명은 모두 우수했다. 어린 손자는 4살이다. 나이를 물어보았더니, 말하기를 "불이이질(佛爾珥叱)"이라고 했다. 불이라는 것은 4(four)라는 뜻이고, 이질이라는 것은 해(age)라는 뜻이다. 그의 이름을 물어보았더니, 말하기를, "백이사란아극위림석(白爾思蘭阿克威林石)"이라고 했다. 그에게 이름이 왜 이렇게 긴지 물어보았더니, 비로소 그것은 3개의 이름을 합친 것이라는 알았고, 개략 백이사란이라는 이름이 그의 바른 이름이다(白爾思蘭名,其正名)."(곽숭도. <런던과파리일기>권5, 악록서사 2008년판 141페이지)
"륵사(勒斯, 중국발음 러쓰)는 30년전 재상으로 국정을 맡았던 사람이고, 나이는 팔십오세이다."라는 말을 보면 곽숭도가 방문한 사람은 바로 존 러셀(John Russell, 1st Earl Russell, 1792-1878)임을 알 수 있다. 1877년은 바로 그가 만 85세되는 해이다. 그는 1846년부터 1952년까지, 1865년부터 1866년까지 두 차례에 걸쳐 수상이 되어 대영제국의 국정을 장악한 적이 있다. 그는 전후로 두번 결혼했으며, 첫번째 부인 Adelaide는 1838년 병사했고 둘 사이에는 쌍동이딸이 있었다. 3년후인 1841년 Frances(애칭 Fanny)와 재혼했고, 그녀와 공작과의 사이에 3남1녀를 낳는다. '다회를 약속한' 사람은 당연히 Fanny 노부인이다. 즉 어린 러셀의 할머니이다.
"이등문(里登門)"지방은 곽숭도가 번역한 음을 정확하게 적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아니면, 齊로 적어야할 것을 登으로 잘못 적은 것같다). 아래의 내용과 합쳐서 보면 러셀의 저택이 소재한 곳은 Richmond Park이다. 오늘날의 중국어 표현은 이사만공원(里士滿公園)으로, 런던의 어원(御苑)중 하나이다. 러셀의 저택을 "포락득질"이라고 부른다고 했는데, 그것은 "Pembroke Lodge"이고 지금의 중국어표현은 "팽포라극산장(彭布羅克山莊)"으로, Richmond Park의 10대건축물중 하나이다. 일찌기 1857년 빅토리아여왕이 당시 수상으로 있던 존 러셀에게 하사한 집으로 그의 일가가 평생 거주할 수 있게 했던 곳이다. (Pamela F. Jones, Richmond park: Portrait of a Royal Playground. London, 1972, p. 41)
이 저택은 언덕위에 세워져 있고 여기에서 테임즈강과 윈저궁을 내려다볼 수 있다. 수상의 장남부부는 불행히도 요절했고 2남1녀를 남겨서, 이들 손자손녀를 할아버지, 할머니가 길렀다. 어린 러셀은 1876년부터 1894년까지 이곳에서 동년과 소년시절을 보낸다. 22살이 될 때까지. 이런 환경 속에서 자랐기 때문에 러셀은 나중에 회고록에서 이렇게 적었다: "오랫동안 넓은 지평선, 아무런 가리는 것없는 일출과 일몰이 나에게는 당연한 일로 여겨졌었다."(The Autobiography of Bertrand Russell, 1872-1914, Boston/Toronto, 1951, p.13)
곽숭도의 일기에서 언급한 두 명의 손자는 바로 러셀의 장남이 남긴 아들 둘로 각각 스탠리 러셀(John Francis Stanley Russell)과 본문의 주인공인 버트란드 러셀이다. 장손은 당시 12살로 이미 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평소에는 기숙학교에 있지만, 주말에는 할머니 할아버지의 장원으로 돌아왔다. <러셀자서전>에 형에 대한 내용이 일부 있다. 곽숭도의 일기를 보면, 그는 특별히 그중 가장 어리고 가장 활발한 구성원인 4살짜리 어린 친구를 주목했던 것같다. 그에게 나이와 이름을 물어봤다. 어린아이는 부끄러움 없이 묻는대로 대답한다. 그리하여 흠차대신은 아주 기뻤고, 좋은 인상이 남았다. 곽숭도와 어린 러셀의 대화부분은 뒷부분에서 분석해 보기로 한다.
곽숭도를 모시고 전수상 러셀일가를 방문한 사람중에 통역관 장덕이가 있다. 그의 일기에는 당일의 일정과 견문 그리고 러셀조손에 대한 묘사가 들어 있다:
"(광서3년 이월) 십일일 정유. 맑음. 서늘함. 신초(申初), 마청신(馬淸臣, 위에서 언급한 마격리)과 이성사(二星使, 곽숭도와 유석홍)을 따라 마차를 타고 태목사강(泰木斯江, 테임즈강) 장교(長橋)를 건너, 서쪽으로 삼십여리를 가서, 입지만촌(立墀滿村) 큰동산 옆에 도착하여, 공작 륵색라(勒色喇)를 방문했다. 집은 산머리에 세워져 있고, 사방이 트여 있으며 크고 작은 수목이 있고, 화훼가 번성했다. 안으로 들어가서 그 부인을 만났는데 칠순의 할머니였다. 그의 차남 륵자(勒慈), 그리고 그의 장남 륵살(勒薩)이 남긴 자녀 각 한명 각각 8,9세였다. 내실로 들어가서 륵공(勒公)을 만났다, 나이는 팔십하고 다섯이다. 학발동안이며 쇼파머리에 단정하게 앉아 있고, 말은 부드러웠다. 그 자리에는 남녀 6,7명이 왔는데, 모두 좌우의 이웃이었다. 각각 차를 한잔씩 마시고, 빵 몇 조각을 먹었다. 헤어질 때, 그의 손녀 륵아사(勒阿姒)가 방명록에 서명을 해달라고 청했다."(장덕이 <수사영아기(隨使英俄記)>, 악록서사 2008년판 363페이지)
러셀의 저택소재지인 Richmond를 그는 "입지만촌"이라고 적었다. 음은 곽숭도의 "이등문"보다 정확하다. "공작륵색라"는 바로 "Earl Russell"이다. 그 자리에 있었다는 "차남륵자"는 바로 윌리엄 러셀(George Gilbert William Russell, 1848-1933)이다. "장자륵살"은 바로 앰벌리 자작(John Russell, Viscount Amberley, 1842-1876)이다. 1877년 중국손님들이 러셀의 저택을 방문했을 대, 그는 이미 죽은지 1년여가 지났다. 그의 처는 더 일찍 죽었다. 이상의 정보는 러셀집안의 구성원상황과 부합한다. 다만, 장덕이는 "남긴 자녀 각 한명"이라고 했는데, 이건 사실이 아니다. 실제 상황은 부부둘이 2남1녀를 낳았고, 2남은 이미 위의 곽숭도의 글에 나온다. 딸은 루크레티아(Rachel Lucretia, 1868-1874)로 이미 3년전에 병으로 사망했다. 그리고 첫째부인과의 사이에 낳은 쌍둥이딸은 출생하자마자 요절했다. 그래서, 장덕이가 볼 수 있었던 것 어린아이는 그저 Francis, Bertrand 두 형제이고, 1877년에는 각각 12살, 4살 8개월이다. 그러므로, 장덕이가 말한 '모두 8,9세'라는 것은 정확하지 않은 것이다. 딸의 이름 '륵아사'라는 이름은 확실히 장덕이식의 외국인 이름 표기법이다. 성의 첫번째 음인 륵을 먼저 쓴다. 다만 아사(阿姒, 중국어발음으로 아쓰)는 뭘 가리키는지 불명확하다. 아마도 수상의 또 다른 손녀일지 모르겠는데, 러셀집안의 어느 갈래인지는 알 수가 없다. 앞에서 언급한 곽숭도가 기록한 "손자 2명"에 손녀는 언급되지 않았다. 확실히 당시 러셀집안에는 단지 손자2명만 있었다. 같이 사는 여성구성원중에는 아주 활발한 아가사고모(Aunt Agaths)가 있었다. 그녀는 러셀의 고모이고, 수상이 딸이다. '그 손녀'라는 말과는 맞지 않는다.
"삼십년전의 재상은 전륵사(專勒士)라는 사람이다. 나이는 팔십오이다. 집은 이지문(李志門)(지명)의 편포록라지(偏布祿羅址)(마을이름)에 있고, 서로 24리가 떨어져 있다. 위타마(威妥瑪, 주중공사 Wade를 가리킴)에게 말해서 날짜를 정해 방문했다. 그의 나이가 많아서 그에게 움직이도록 할 수 없어, 십일일 가서 만났다. 그는 걸음 걷는 것은 힘들어했지만, 눈빛이 형형하고 아직도 책을 읽으며 매일 글을 쓰고 있었다. 스스로 다행히 오래 살아서, 중국의 명사를 만날 수 있는 행운을 얻었다고 말했다. 헤어질때는 매우 아쉬워했다."(유석홍 <영초사기(英軺私記)> 악록서사 2008년판, 135페이지)
이것은 이번 방문에 관한 세번째 기술이다. 작자는 주영부사 유석홍이다. 그의 마음 속에 이번 방문의 주요인물은 오직 85세의 전 수상 "전륵사" 즉 John Russell이다. 그를 보는 것이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다. 같은 날 만났던 다른 가족구성원에 대하여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이를 보면, 공무를 처리하는데, 중국사람을 만나서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어린아이나 그와 곽숭도 정사와의 대화는 더더욱 언급할 가치가 없다고 보았던 것이다. 이는 유석홍의 냉담한 성격의 특징을 보여주고, 또한 곽숭도와 불화한 것도 엿볼 수 있다. 그의 기술에서 이전 두 기록과 비교하여 유일하게 칭찬할 만한 점이라면, 이번 방문을 주선한 사람이 위타마라고 언급해준 것이다. 그가 만남을 가질 것을 권했고, 러셀 공작이 먼저 대청사신이 찾아와주면 좋겠다고 얘기하고, 청나라공사관에서도 방문하겠다고 대답하여 곽숭도가 언급한 러셀부인의 가정다회에 초청받은 것이다.
버트란드 러셀은 79세가 되던 해에 자서전 제1권을 출판하였다. 쓴 내용은 자신의 인생중 앞의 3분의 1이다: 1872년부터 1914년까지. 출생부터 이름을 떨치기까지이다. 할아버지 할머니와 보낸 동년, 소년시대, 유년기에 전후로 어머니와 아버지를 잃은 경력은 러셀의 마음 속에 씻을 수 없는 흔적을 남긴다. '고독'은 그가 자주 언급한 말이다. 그러나 그의 동년시절 전체적인 기조는 행복하고 즐거워하는 것이었다. <자서전>의 첫번째 문구는 "내가 태어난 이후 가장 선명한 첫 기억은 내가 1876년 2월 Pembroke Lodge에 도착했을 때의 광경이다"(The Autography of Bertrand Russell, 1872-1914, p.7).
1877년 중국에서 온 손님들은 러셀에게 그다지 큰 인상을 심어주지 못했던 것같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의 중국에 대한 애정으로 볼 때(<러셀자서전>에는 '중국'이라는 장을 따로 두어 그가 중국에서 강의한 것을 적었음), 분명 이 특이한 복장의 만청대인이 그의 집에 나타났던 이야기를 적었을 것이다. 장덕이가 기록한 바에 따르면 방문과정에 남여6,7명이 있었는데 모두 이웃들이었다라고 되어 있었다. 이들은 분명 호기심을 가지고 참석했을 것이다.
당시 네살짜리 어린아이였던 버트란드 러셀은 나중에 수학논리로 철학을 개조하여 기호논리학을 주창하여 국제적인 명성을 떨치는 대철학가가 되고, 그의 저작은 중국에도 알려져서 추종자가 적지 않았다. 1920년부터 1921년 그는 캠브리지대학에서 안식년을 받아 여자친구인 Dora Black과 함게 중국을 1년여 방문한다. 북경대학에서 논리, 철학 강의와 연구를 하는 외에 중국의 역사와 현실문제에 큰 흥미를 나타낸다. 그리하여 <중국문제>라는 책을 써낸다. 거기에서 이렇게 적었다: "내가 중국에 간 것은 원래 제자들에게 강의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중국에 머물면 머물수록 내가 그들의 선생이 되는 점은 적고, 중국인에게 가르침을 받아야하는 부분이 많다는 것을 갈수록 느꼈다." 이런 말은 그의 개인적인 겸손의 말이기도 하지만, 실제적으로 더 큰 의의는 서방문명의 주류지위, 강세입장에 대한 수정에 있다고 볼 수 있다. 당시는 1차대전이 막 끝난 뒤여서 유럽의 지식인들이 혼란기였다. 러셀은 중국문제에서 서방이 귀감으로 삼을 부분이 중국에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지금까지 공개적으로 출판된 서양문서에는 중국외교관이 존러셀을 방문한 것에 대하여 남긴 문자기록이 없다. 존러셀 본인도 회고록을 쓴 바 있는데(Recollections and Suggestions 1813-1873), 1875년에 출판되어 중국손님들이 방문하기 전이었다.
당시 러셀의 집을 방문한 4명 가운데 서양인통역 마격리(馬格里, Halliday MaCartney, 1833-1906)은 회고록을 남기지 않았다. 1908년에 출판된 <D.C. Boulger & J Crichton-Browne, The Life of Sir Halliday MaCartney, London, 1908>에도 이에 대하여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나머지 3명 정사 곽숭도, 부사 유석홍, 통역 장덕이는 각각 기록을 남겼다. 내용의 상세함이나 취사선택에서 서로 다른 점이 많다. 그리고 모두 독특한 정보를 제공하여 상호보완이 된다. 이렇게 어느 일요일 영국귀족의 집에서 애프터눈티모임은 비교적 상세하게 복원해볼 수 있다. 사건, 장소, 광경, 건축, 가족구성원관계, 찾아온 이웃, 간략한 다식, 떠날 때 방명록에 서명한 것등등.
성씨 Russell을 한자로 쓰면서 3명은 각각 다르게 적었다: 곽숭도는 :"륵사(勒斯)", 유석홍은 "전륵사(專勒士)", 장덕이는 가장 복잡한 방식으로 적었다. 일가족을 같은 성으로 쓰면서 3명의 이름을 각각 "륵색라(勒色喇)" "륵살(勒薩)" "륵자(勒慈)"로 적은 것이다. 이는 그에게서 자주 볼 수 있는 방식이다. 외국인의 이름을 한자화하는데서 그 나름대로의 방식을 만들어낸 것이며 신경을 많이 쓴 것이라고 할 수 있다.
Russell이라는 성씨는 영어세계에서 보기 드문 것은 아니다. 청나라말기에 중국에서 활약한 미국회사 "기창양행(旗昌洋行)"의 영문이름은 "Russell & Co."이고 오너는 Samuel Ressell이었다. 당시에 중국명으로 "랄소(剌素)"라고 적었다. 본문의 주인공인 버트란드 러셀의 할아버지인 영국정치가 John Russell의 이름은 마르크스의 글에 나온 적이 있는데, 번역국에서는 "약한루소훈작(約翰羅素勳爵)"으로 번역했다. 그의 조카인 레오폴드 러셀(Odo William Leopold Russell, 1825-1884)는 영국외교관으로 주독일대사를 지냈는데, 이봉포(李鳳苞)의 <사덕일기(使德日記)>에 주베를린외교계의 지도자급인물로서 열심히 영국과 중국관계를 이어주려고 노력하는 모습으로 여러번 나타난다. 그때는 "노새이(盧賽爾)"라고 적었다.
곽숭도가 이번 방문에서 가장 상세하게 적었다. 일기속의 "라이사(羅爾斯)"는 영어의 Lord의 부정확한 음역이라 할 수 있다. '일기'에서 곽숭도는 더 많은 경우에 "라이득(羅爾得)"이라고 적었다. "불이(佛爾)는 번역하면 4이다. 이질(珥叱)은 해이다" 여기에 쓴 것은 어린 러셀이 몇살인지 대답하는 거이다. 정상적인 영어에서 '4살'이라고 대답하려면 "four years old"이다. 절대로 "four ages"라는 말은 하지 않느다. '이질'을 '해'라고 적었는데, 이는 age를 말하는데, four age라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곽숭도 자신 혹은 영어를 잘 모르는 그의 부하가 만들어낸 것일 것이다. 어린 러셀은 절대로 그런 실수를 범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러셀의 이름에 대한 발음을 :"백이사란아극위림석(白爾思蘭阿克威林石)"이라고 했는데, 원래 이름인 Bertrand Arthur William과는 차이가 크다. 음절을 하나하나 대응시키기는 어렵다. 사(四)는 특(忒)이 더 나을 것같고, '극(克)자는 색(色)/슬(瑟)이 나을 것같으며 석(石)자는 불필요하다. 그의 이름은 William이지 Williams가 아니기 때문이다. "백이사란명, 기정명(白爾思蘭名, 其正名)"도 문장이 부드럽지 못하다. 친구인 애준천(艾俊川)은 "백이사란위기정명(白爾思蘭爲其正名)"(백이사란이 그의 바른 이름이다)이라고 보아야 한다고 본다. 이런 잘못은 영어를 잘 모르고, 자신의 사투리인 호광화(湖廣話)가 뿌리깊이 박혀 있었던 곽숭도가 외국이름을 한자로 적을 때 나타날 수 있는 정상적인 상황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877년의 곽숭도일행이 Pembroke Lodge로 전수상 존 러셀을 방문한 것은 중국과 영국의 외교사상 그다지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버트란드 러셀 본인은 당시 너무 어려서 기억에 남아 있지도 않았다. 다만 이번 만남은 사실상 그와 중국과의 인연의 시작이었다.
2021년 9월 19일 상해형문공우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