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록산(安祿山)의 종족과 종교배경은...? (상)
글: 영신강(榮新江)
1. 안록산의 소그드(粟特)종족 특징
안록산, 사사명(史思明)등이 반란을 일으킨 종교적 배경을 설명하려면, 먼저 그들의 종족 및 성장배경 즉 그들이 살았던 소그드족 취락의 상황을 명확히 해야 한다.
안록산의 종족에 관하여 일찌감치 1925년, 쿠와바라 지츠조우(桑原騭藏)가 요여능(姚汝能)의 <안록산사적(安祿山事迹)>에 근거하여, 강국(康國)출신의 소그드인이라고 하였다. 향달(向達)도 이 견해에 찬동했다. 진인각(陳寅恪)은 한걸음 더 나아가, 안사의 난(安史之亂)때 당나라사람들이 말하는 "잡종호(雜種胡)"는 대다수의 경우 아홉성의 소그드인(九姓粟特人)을 가리킨다고 하였다. 1955년, Edwin G. Pulleyblank(중국명 蒲立本)는 성명, 내원(來源)등 방면에서 상세히 안록산이 막북 돌궐칸국내부에서 생활한 소그드인 안연언(安延偃)의 아들이라고 논증했다. 그는 안록산의 원래 성이 "강(康)"이라는 주장에 반대했고, 그는 아마도 육호주(六胡州)에서 막북(漠北)으로 진입한 소그드인일 것이라고 강조했다. 개원(開元, 당현종의 연호)초기 돌궐에 내란이 일어나, 부친이 죽고, 숙부 안파주(安波注)의 두 아들과 도망쳐 당나라로 왔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안록산이 소그드인이라는 것은 거의 정설로 굳어진 듯했다.
40년후, Antonino Forte(중국명 福安敦)은 Pulleyblank의 견해를 반박했다. 당시 사람들이 안록산의 원래 성은 "강"이라고 말했다는데 의문의 여지가 없다는 것이다. 다만 그는 안파주와 안연언이 모두 돌궐인이라고 보았다. 그들은 안정절(安貞節)에게 투항한 후, 성을 안씨로 바꾸었다고 본다.
안록산이 모친을 따라 안연언의 부락에 있을 때가, 바로 그의 문화속성과 가치관념이 형성되는 시기였다. 그렇다면 그는 도대체 소그드인이 되었을까, 돌궐인이 되었을까? 이는 아주 중요한 문제이다. 그러므로, 안록산의 초년생활과 종족귀속문제는 고증이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안록산의 출신에 관하여, 중당(中唐)때의 사람인 요여능이 편찬한 <안록산사적>의 기록이 가장 상세하다:
"안록산. 영주(營州) 잡종호(雜種胡)이다. 아명은 알락산(軋犖山)이다. 모친은 아사덕씨(阿史德氏)로 돌궐의 무당이다(突厥巫). 자식이 없자, 알락산신에게 기도하여 그를 낳았다. 그를 낳는 날 밤에 붉은 빛이 비추고, 여러 짐승들이 사방에서 울었다. 하늘의 기운을 바라보는 자는 요성(妖星)의 빛이 그녀의 집으로 내려비치는 것을 보았다. 괴이한 징조가 수도 없이 많았다. 그녀의 모친은 그가 신이라 여겨 '알락산'이라고 이름지었다.(주: 돌궐은 전투의 신을 알락산이라고 부른다). 어려서 고아로 모친을 따라 돌궐족들 사이에서 자란다. 모친은 나중에 호장군(胡將軍) 안파주의 형 연언에게 시집간다.
개원초, 연언의 부족이 멸망한다. 호장군 안도매(安道買)의 아들 효절(孝節), 그리고 안파주의 아들 사순(思順), 문정(文貞)은 함께 돌궐에서 도망쳐 나온다. 안도매의 차남 정절(貞節)애 남주별가(嵐州別駕)로 있었는데, 그들을 거두어 주었다. 안록산은 나이가 십여세여서, 안정절과 그의 형 효절이 데리고 갔다. 그리하여 안록산은 사순과 형제로 지내며 성을 안씨로 하게 된다(원주: 안, 곽분양 <청설안사순표>에 따르면, 본래 성이 '강'이라고 하였는데, 본말은 적혀 있지 않다). 그리고 이름은 '록산'으로 한다."
안록산은 당나라에는 반란을 일으킨 역적이지만, 하북지구에서는 그래도 단명황제였고, 계속 성인(聖人)으로 받들어졌다. 역사상 모든 황제나 성인들처럼, 안록산의 출생에도 신화적인 색채가 덧씌워졌다. 그러나 신화를 살펴보면 약간의 역사적 진상을 엿볼 수 있다.
<안록산사적>에서 안록산의 어머니가 아사덕씨이며, 돌궐의 무당이라고 했다. 아사덕은 돌궐칸국에서 칸가족인 아사나씨(阿史那氏)에 바로 다음가는 족성(族姓)이다. 역대 칸이 취한 가돈(可敦)은 다수가 아사덕씨였다. 우리는 안록산의 돌궐모친이 정말 아사덕씨집안출신인지는 확정할 수 없다. 아마도 신화를 만든 사람은 안록산에게 왕가의 혈통을 부여하고 싶었던 것가탇. 그리하여 그의 모친의 성을 아사덕씨라고 한 것일 것이다. 돌궐족속의 아사덕씨와 강성의 소그드인이 함께 이 아이를 낳았고, 이름을 "알락산"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자치통감>에는 "아락산(阿犖山)"이라고 적었다. 이란어전문가인 W. B. Henning의 고찰에 따르면, 한어에서 r음의 외족단어를 음역할 때 왕왕 r의 앞에 원음을 넣는다고 한다. 그렇게 보면 소그드어 루산의 음역이고 록산은 '광명, 명량(明亮)'을 의미하는 단어인데, 중원에 들어온 후에 "록산"이라는 한자를 쓴 것이라고 본다. 그러므로, 안록산의 소그드부친은 그에게 소그드어이름을 지어주었다는 것이다. 돌궐이름이 아니라. 이런 견해는 요여능의 주석에서 언급한 <대곽령공청설안사순표>에서 말한 안록산의 '본래성은 강이다'라는 것과 일치한다. Forte의 견해도 인정할 점이 있다. 즉 안록산의 생부는 강성의 소그드인이다. 그래서, 안록산은 소그드와 돌궐의 혼혈아이고, 한인들이 보기에는 '잡종호'이다. 천보7년(748년)에 건립된 <대당박릉군북악항산봉안천왕지명>에는 안록산이 '상락(常樂)'을 자신의 군망(郡望, 일족이 살던 고향)이라고 적었다. 상락은 하서주랑(河西走廊)의 서부에 있고, 돈황과 이웃해 있다. 이곳은 확실히 중국으로 들어온 강성의 소그드인들의 집성촌이다. 다만 <안록산사적>의 작자인 요여능에 따르면, 안록산의 이름은 돌궐모친이 지어준 것이고, "알락산"은 돌궐어로 전투의 신을 가리킨다.
어찌 되었건, 종족으로 보면, 안록산은 잡종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안록산의 출생신화를 보면, 특히 그의 소그드어이름으로 보면, 그에게는 소그드족의 특징이 더욱 많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시 당나라사회 상층의 관념 속에서 돌궐 아사덕씨는 확실히 구성호인(九姓胡人)보다 지위가 높다. 그래서 안록산 본인은 자신의 모친이 돌궐종족이라는 점을 이용하여 돌궐인인 가서한(哥舒翰)과 가까워진다. <안록산사적> 권상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가서한의 모친 위지씨(尉遲氏)는 우전(于闐)사람이다.....안록산은 가서한에게 말하기를, "나의 부친은 호(胡)이고, 나의 모친은 돌궐녀이다. 그대의 부친은 돌궐인이고 모친은 호이니, 종족이 서로 많이 비슷하다. 어찌 서로 가까이 지내지 않겠는가?"
우리는 알고 있다. 가서한은 돌궐족 돌기시(突騎施) 부하인 가서(哥舒) 부락 사람이라는 것을. 그의 부친 가서도원(哥舒道元)은 일찌기 당나라의 안서부도호(安西副都護)를 지냈고, 우전에 주둔했다. 거기서 우전의 왕녀(王女)를 처로 취한다. 그래서 그의 모친은 우전왕족인 위지씨이다. 안록산은 원래 하서주랑의 상락군(瓜州)에서 돌궐지구로 이주해온 강성 소그드인일 것이다. 그의 부친은 돌궐 아사덕씨를 처로 취해, 안록산을 낳는다. 확실히 안록산 본인의 눈에, 우전인과 소그드인은 모두 "호(胡)"이고, 돌궐인은 "호"가 아니다. 호와 돌궐은 비록 종족으로 보면 같은 점이 많지만, 어쨌던 다르다는 것이다. 안록산 본인은 "영주잡종호(營州雜種胡)"이고 어쨌든 "호"에 속한다. 오늘날의 민족이라는 관점으로 보면, 이것은 안록산이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다. 20세기이래, 돈황과 중앙아시아의 일부지구에서 출토되는 우전어와 소그드어 문헌을 보면, 양자는 모두 인도유럽어계 이란어족의 동이란어갈래에 속한다. 이를 보면, 안록산은 소그드계 이란인종임을 알 수 있다. 돈황에서 출토된 한번사회표(漢蕃詞匯表)를 보면 "호(胡)"자에 대응하는 것은 "Sog(티벳어의 소그드)"이라는 것도 그 점을 증명한다. 전술한 진인각이 "잡종호"를 소그드로 본 것외에, Edward H Schafer는 이렇게 얘기했다. 광의의 호인은 서북지구의 외국인이다. 협의로는 주로 이란계통의 호인을 가리킨다. 모리야스 타카오(森安孝夫)가 최근에 발표한 <당대(唐代)의 호와 불교의 세계지리>라는 글을 보면, <범어잡명>, 일본에서 보존하고 있는 티벳어와 한어 명칭대조가 있는 서역지도등의 자료에 근거하여, "호"는 바로 소그드인을 가리킨다고 강조했다. '호희(胡姬)'는 바로 젊은 소그드여자라는 것이다.
위에서 인용한 <안록산사적>에는 이런 말도 있다. 그의 모친은 나중에 호인 안연언에게 시집갔고, 안연언의 부락이 무너진 후, 알락산은 호장군 안도매, 안파주의 아들들과 함께 당으로 들어간다. 알락산은 "안씨 성을 쓰면서 이름을 '록산'이라 했다." 안록산의 진짜부모가 누구이든지간에, 위의 인용문을 보면 그는 어려서부터 안연언의 부락에 들어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부족의 수령은 호장군 안파주의 형인 안연언이다. 우리는 사료에서 이 부락이 Forte가 말한 것처럼 돌궐부락이라는 것은 찾아볼 수가 없고, 실제로는 막북돌궐칸국내에서 비교적 독립적인 성겨의 "호부(胡部)"이다. 이때부터, 안록산은 완전히 소그드인의 집단내에서 살았다. 그는 안연언을 그의 부친으로 받아들인다. 그의 언어, 문화는 당연히 소그드계이다. 만일 우리가 문화의 각도에서 한 사람의 종족을 판별한다면, 마땅히 안록산은 소그드인이라 해야 한다. 그가 다른 안씨성의 형제들을 따라 당나라영토내로 들어왔을 때도 역시 다른 소그드인들과 함께 들어왔고, 한식(漢式) 이름을 취한다. 그리하여 성을 안으로 하고, "알락산"을 같은 음의 중국어 뜻이 더욱 좋은 "록산"으로 고친 것이다. 내 생각에 소그드인들 사이에서는 여전히 소그드식의 이름으로 불렸을 것이다.
<안록산사적>은 안록산이 성인으로 점점 자라는 상황도 기록한다:
"자라면서 간적(奸賊, 안록산)은 잔인하고, 지모가 많고, 구번어(九蕃語)를 할 줄 알며, 여러 번(蕃)들과 호시(互市)에서 중개상역할을 했다."
소그드인은 원래 상업민족이다. 그들의 족적은 고대유라시아의 상업도로에 남아 있다. 위진에서 수당까지, 대량의 소그드인이 동쪽으로 오가면서 소그드본토, 서역의 오아시스 여러 나라들, 초원유목칸국과 중원왕조를 섭렵한다. 그들이 대대로 이어지는 재능은 각 민족들 사이에서 중개업무를 하는 것이므로 소그드인들은 여러 언어를 다 할 줄 알았다. 소위 "구번어"라는 것은 신,구당서에서는 "육번어(六蕃語)"라고 되어 있는데, 여러가지 언어를 가리킨다고 할 것이다. 소그드인의 이런 능력으로 인하여, 소그드어는 당시 비단길의 서로 다른 민족간의 교류시 사용하는 혼합어가 된다. 당나라정부는 일찌감치 그 점을 잘 알았고, 그래서 당나라중앙정부가 소재한 양경(장안과 낙양)이든 아니면 변방무역이 빈번했던 주군이건 모두 소그드인을 통역으로 썼다. <당회요(唐會要)> 권육일탄핵조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연휘원년(650년) 십일월 이십사일, 중서령 저수량(褚遂良)이 중서(中書)의 역어인(譯語人) 사가담(史訶擔)의 집을 사서, 감찰어서 위인약(韋仁約)이 저수량을 탄핵했다." 사가담은 사국(史國) 출신의 소그드인이다. 그의 이름은 사가탐(史訶耽)이라고 쓰기도 한다. 그의 묘는 이미 고원(固原)에서 발견되었다. 투루판에서 발견된 문서는 서주(西州)의 역어인(통역)도 소무구성호(昭武九姓胡)라는 것을 증명한다.
장사는 소그드인이 가장 잘 하는 분야이다. 이 점은 마찬가지로 당나라정부에서도 중시되었다. 돈황에서 발견된 천보10년(751년) 돈황군 돈황현의 <차과부(差科簿)>를 보면, 시벽사(市壁師)같은 류의 시장의 상업을 관리하는 직은 종화향(從化鄕)의 소그드인이 맡았다. 그리고 변방 각족들과의 호시에서의 무역에서 소그드인은 언어의 장점을 가지고,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투루판에서 출토된 당나라 서주관부와 삼성갈라록(三姓葛邏祿) 혹은 돌기시(突騎施)와의 마필거래문서를 보면, 서주의 호시에서도 소그드인이 중개인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안록산도 마찬가지로 당나라의 변방도시인 영주에서 '호시의 중개인'을 지냈다. 이건 그의 소그드인 성격을 가장 잘 반영해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외에 안록산은 "호선무(胡旋舞)를 추는데 그 빠르기가 바람과 같았다." 호선무와 호등무(胡騰舞)는 소그드인의 장기이다. 사적과 당나라사람들의 시문에도 많이 묘사되어 있다. 최근 들어 발견된 우홍(虞弘), 안가(安伽), 사군(史君)등의 묘장도상에도 그런 모습이 그려져 있다.
만일 우리가 진인각 선생의 "종족의 구분은 많은 경우 그가 받은 문화에 따르지, 그가 이어받은 혈통에 따르지 않는다"는 견해로 안록산을 본다면 그는 의심의 여지없이 토종 소그드인이라 할 수 있다.
2. 유성(柳城)호인취락에서 유주(幽州)군사집단으로
<안록산사적>에서는 첫부분에 "안록산, 영주잡종호이다"라고 썼는데, <신당서>본전에는 "영주유성호(營州柳城胡)이다"라고 적었다. 안록산은 어려서 고아가 되었지만, 안씨성의 소그드가족을 따라갔는데, 바로 유성(柳城)의 딸이다. 소그드호인들이 적지 않게 살았다. 비록 지금 남아있는 사료에 이 변방도시에 대한 기록이 많지 않지만, 우리는 그래도 최소한 4개의 증거는 찾아낼 수 있다:
(1) 안사의 난으로 안록산과 나란히 이름이 거명되는 사사명에 대하여 <안록산사적> 권하의 원주(原注)에 이런 말이 있다:
"사사명, 영주잡종호이다. 본명은 "솔간(窣干)"인데, 당현종이 "사명(思明)"으로 고쳤다. 마르고 키가 작으며, 수염이 적었다. 눈은 깊고 어깨가 솟았으며, 성격은 강경하고 급했다. 안록산과는 같은 고향사람이다. 안록산보다 하루 먼저 태어났다. 사사명은 섣달그믐밤에 태어나고, 안록산은 새해첫날낮에 태어난다. 자라면서 서로 친해지고, 모두 말을 잘 타고 용맹하기로 이름을 떨친다. 육번어를 할 줄 알았으며 같이 시장중개인으로 일한다."
안사의 난의 또 다른 주인공인 사사명도 영주잡종호이다. 소위 '동향'이라는 것은 당나라에 들어와 관적을 가진 소그드인들이 관적을 가지게 된 이후에 같은 관적이라는 것을 말한다. 만일 그들이 막북돌궐칸국에 있었던 시기를 말한다면, 같은 부락출신이라는 뜻이 될 것이다. 사사명의 본명은 '솔간'인데, 아마도 "알락산"과 마찬가지로 소그드어의 음역일 것이다. 그 뜻은 아마도 당현종이 개명해준 "사명(思明)"이라는 뜻일 것이다. 사사명은 출생부터 성장까지 안록산과 같은 점이 있다. "육번어를 할 줄 알았으며 같이 시장중개인으로 일한다" 이는 그도 토종 소그드인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구당서>본전에서 말하는 것처럼 '돌궐잡종호인'은 아닌 것이다.
(2) 안사의 난에서 또 다른 중요인물인 이회선(李懷仙)에 관한 내용이다. <구당서>권143 <이회선전>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이회선, 유성호인(柳城胡人)이다. 대대로 거란을 모셨는데, 당에 투항한 장군으로, 영주를 수비했다. 안록산의 반란때, 이회선은 비장(裨將)으로 하락을 함락시킨다. 안경서(安慶緖)가 패배하자, 다시 사사명을 모신다. 말타기와 활쏘기에 능했고, 지모가 있었다. 연경유수(燕京留守), 범양윤(范陽尹)의 관직을 받는다. 보응원년(762년), 천하병마대원수 옹왕 이적(李適)이 회흘의 여러 병사를 모아 동군(東郡)을 수복하고, 사조의(史朝義, 사사명의 아들)가 패배하여 황하를 건너 도주한다. 부원수 복고회은(僕固懷恩)이 병력을 이끌고 추격한다. 당시 여러 무리들이 와해되고, 당나라가 위신을 떨쳤다. 적들은 회은이 온다는 말을 듣자 투항한다. 사조의는 잔여병력 수천을 이끌고 범양으로 간다. 이회선은 사조의를 유인하여 붙잡은 후, 목을 베어 바친다."
이회선은 호인인데 '이'씨성을 쓰는 것은 그가 이당왕조의 황실 성씨를 가져다 쓴 것일 것이다. 이는 아마도 그가 일찌감치 성을 고쳤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역사가들도 그의 본래 성씨가 무엇인지를 알지 못했다. "유성호"는 당나라때 거의 안록산계통의 호인을 가리키는 전용용어이므로, 우리는 이회선도 소그드호족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사적에는 그가 '대대로 거란을 섬겼다'고 되어 있는데, 이 가족이 원래 거란족은 아니라는 것을 말해준다.
(3) 또 다른 참고할만한 인물은 "강아의굴달간(康阿義屈達干)"이다. <안로공문집> 권6에 <특진행좌금오위대장군상주국청하군개국공증개부의동삼사겸하주도독강공신도비>가 실려 있는데, 거기에 이렇게 적혀 있다:
"공의 휘(諱, 이름)는 아의굴달간이고 성은 강씨(康氏)이며, 유성인(柳城人)이다. 그의 선대는 북번십이성(北蕃十二姓)중 귀족성이며, 증조부 힐리(頡利)는 부락의 도독이었다. 조부 염(染)은 칸의 부마이며, 도지병마사(都知兵馬使)였다. 부친 힐리발(頡利發)은 묵철칸(默啜可汗)의 위아관(衛衙官), 지부락도독(知部落都督)이었다. 모두 공헌이 있어, 북수(北陲, 북방변경지역)에서 유명했다..... 천보원년(742) 당나라에 귀순한다. 삭방절도사(朔方節度使) 왕곡사(王斛斯)가 글을 올린다.....범양절도사 안록산은 다른 뜻을 품고 그를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당현종에게 밀주(密奏)를 올려 공을 부락도독에 앉히고, 그를 선봉사로 삼는다."
비문의 뒤쪽은 안록산이 반란을 일으킨 후, 강아의굴달간은 네 아들을 데리고 당나라에 귀순한 내용을 적고 있다.
강이라는 성을 보면, 강아의굴달간은 막북에 들어간 강국의 소그드인이다. 비록 북번십이성중 귀족이지만, 증조부때부터 "힐리"와 같은 순수한 돌궐어이름을 쓰기 시작한다. 그 본인의 이름은 "굴달간"도 돌궐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는 것을 말해준다. 다만 그의 조상은 여러 대에 걸쳐 계속 "부락도독"을 맡았기 때문에, 여전히 부락의 형태로 소그드인의 본래면모를 유지할 수 있었다. "아의"는 그의 본명으로 마땅히 소그드의 이름일 것이다. 이 소그드부락은 강아의 이전에 계속하여 북번에 있었다. 즉 막북돌궐칸국에 있었다. 그들을 "유성인"이라고 칭하는데 이는 강아의가 당나라에 귀순한 후 유성을 관적으로 삼았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건 아마도 안록산이 안배한 것일 것이다. 안록산의 유성호인과 세력을 합류시키기 편리하도록. 그렇게 하여 안록산의 사람이 될 수 있도록. 여기서 주목할 점은 강아의가 당나라에 들어온 후에도 여전히 "부락도독"이라는 것이다. 이는 유성지역에 상당한 일부분의 소그드인은 자신의 부락 안에서 생활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는 바로 우리가 안록산과 사사명이 동향이라는 말이 실제는 같은 부락이라고 말한 이유이다.
<강공신도비>에는 이런 기록도 있다. 강아의의 처는 성이 석(石)이고, 부친의 이름은 석삼노(石三奴)이다. Henning은 "삼노"라는 것이 중고페르시아어의 음역으로 "삼신(여러 신)이 구해주다"라는 의미라고 한다. 이렇게 해석하면 석삼노는 소그드의 석국(石國)에서 온 것이라는 증거이다. 소그드인은 상호 통혼하는 것이 자신의 부락형태를 유지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기 때문이다. 안록산의 첫번째 부인의 성은 강씨(康氏)인데, 역시 강국이 소그드인이라 할 수 있다.
(4) 1998년 12월 9일, 북경연경자동차제조공장내에서 당나라때의 묘 2개가 발견된다. 고고학보고서는 아직 나오지 않았다. 묘지의 기록에 따르면, 이 합장묘의 남자주인공은 성이 하(何)이고, 이름이 수(數)이며, 자는 연본(延本), 유성인(柳城人)이다. 개원9년(721년) 범양에서 죽었다. 여주인은 강씨(康氏)이며, 사사명의 순천원년(759년)에 죽었다. 같은 해 그의 아들 하령장(何令璋)이 두 사람을 합장한다. 이를 보면, 안사의 유주군사집단에는 적지 않은 유성에서 온 소그드인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하수와 부인 강씨는 바로 전형적인 유성의 소그드호인이다.
영주 혹은 유성은 개원, 천보를 전후하여, 상당한 규모의 소그드취락이 있었다. 돈황, 투루판의 문서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사주(沙州)와 서주(西州)의 소그드인들은 당나라에 의해 향(鄕)에 편입되었고, 사주는 종화향, 서주는 숭화향(崇化鄕)이 된다. 다만 영주 유성의 소그드인취락은 약간 다른 것같다. 그때 당나라는 이곳에 대한 통제력이 강하지 못하여, 그들은 많은 경우 소그드취락에서 생활했다.
유성의 소그드호의 내력이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무주(武周, 무측천의 주나라) 만세등봉원년(696년) 여름이다. "거란이 영주를 함락시키고, 측천무후는 하동도, 육호주, 수, 연, 단, 습등 주의 계(稽), 호(胡) 정예병을 모조리 영주로 보냈다." 이는 대량의 육호주 등지의 소그드인이 영주지구로 들어갔다는 것을 말해준다. 개원초(713년이후) 안록산등이 유성으로 온다. 천보원년(742년), 강아의가 부락을 이끌고 유성에 도착한다. 고적(高適)의 <영주가>라는 시에서는 개략 이때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읊고 있다:
영주소년만원야(營州少年滿原野) 영주의 소년들이 들판에 가득 모여서
호구몽용엽성하(狐裘蒙茸獵城下) 여우가죽옷의 털을 휘날리며 성밖에서 사냥을 한다
노주천종불취인(虜酒千鍾不醉人) 이들은 술을 천 배 마셔도 취하지 않으며
호아십세능기마(胡兒十歲能騎馬) 열살이면 말을 탈 줄 안다.
유성의 소그드취락은 사주, 서주와는 상황이 달랐다. 그 기원은 여러번의 비교적 규모가 큰 이주로 형성된 것이다. 그리고 모두 동돌궐칸국내에서 이주해 온 것이다. 말타고 활쏘기를 잘 해서, 전투력이 강했다. 당나라의 입장에서 보면 영주는 거란과 해(奚)라는 두 동북의 강번(强蕃)을 마주하는 곳이어서 전쟁이 끊이지 않았다. 당나라는 전투를 잘하는 소그드인을 활용하여 거란과 해를 상대한 것이다. 그리하여 당나라는 상당한 기간동안 소그드부락을 해산시키지 않았고, 이들 번병번장을 이용하여 해와 거란의 침입을 막아낸 것이다. 사실은 표명한다. 안록산과 사사명등은 바로 동북의 양번과의 전투과정에서 성장한 것이다.
당나라의 방식은 객관적으로 안록산이 반란을 일으키는데 역량을 준비하게 해주었다. 안사의 난때, 반군내부에는 많은 소그드호인이 있었다. 역사기록상 안록산 사사명의 부하장수들 중에 소그드출신이 적지 않다. 관련인물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안경서(安慶緖), 안록산의 셋째아들. 천보11년 범양절도부사, 홍려경동정겸광양태수(鴻臚卿同正兼廣陽太守)를 맡는다. 지덕2년 안록산을 죽이고, 대연황제로 즉위한다. 연호는 천화(天和)라 한다.
안록산에게는 11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그중 경종(慶宗)은 경사에 있으면서, 안록산의 경사에 심어놓은 이목이 된다. 나머지 아들들은 안록산의 곁에서 장수로 있었다고 봐야할 것이다.
안충신(安忠臣), 안록산의 양자
안충순(安忠順), 나중에 수충(守忠)으로 개명한다. 천보10년 안록산의 장수중 으뜸으로 열거된다; 안록산이 장안을 점령한 후, 그에게 병력을 이끌고 서경에 주둔하게 한다.
하천년(何千年), 천보10년 안록산의 장수중 한명으로 기록된다; 14년 안록산의 부장(副將)이 된다. 조정에 들어가 안록산을 대신하여 번장 32명으로 한장(漢將)을 대체하게 해달라고 청한다. 안록산이 거병한 후, 장사 수천명을 이끌고 하양교(河陽橋)에 매복한다.
하사덕(何思德), 안록산 수하의 대장, 용모가 안록산과 유사했다고 한다. 천보10년 가을 거란을 토벌할 때 선봉장이었다.
사정방(史定方), 평로절도사 안록산의 수하 기병장수, 천보10년 안록산이 거란에 포위되었을 때 구해준다.
안사의(安思義), 안록산의 부장(部將), 진정(眞定)에 주둔한다. 나중에 이광필(李光弼)에 투항한다.
안대(安岱), 안록산이 경사에 주둔시킨 심복, 천보14년 오월 양국충(楊國忠)에게 피살된다.
강걸(康傑), 천보8년 <대당박릉군북악항산봉안천왕지명>의 작성자.
강아의굴달간, 안록산의 선봉사(先鋒使), 천보4년 범양경략부사, 5년 절도부사가 된다.
강절(康節), 안록산 사사명의 부장(部將), 운휘장군수좌금오위대장군, 나중에 당에 귀순한다.
하원천(何元辿), 천보13년 이월 상곡군수정부절충이 된다. 안록산을 위해 <대반야바라밀다경>을 만들다.
안신위(安神威), 손효철(孫孝哲)과 함께 안록산의 명을 받아 장안을 공격한다.
안태청(安太淸), 원래 안록산의 부장(部將), 나중에 사사명을 도와 안경서를 죽인다. 사사명의 수하주요대장으로 회주(懷州)에 주둔하며 나중에 이광필에게 생포된다.
안무신(安武臣), 안경서의 부장(部將), 지덕2년(757) 칠월 무리를 이끌고 섬군(陝郡)을 함락시킨다.
안웅준(安雄俊), 안경서의 부장(部將), 채희덕(蔡希德), 안태청과 함께 하북을 함락시킨다.
사사명, 영주잡종호, 안록산과 동향, 육번어를 할 줄 알며 안록산과 함께 장사중개인으로 지낸다. 나중에 같이 범양절도사 장수규(張守珪)의 수하로 지낸다. 안록산이 거병한 후 평주자사가 된다. 안경서가 안록산을 죽이고 사사명에게 안(安)씨성을 하사하며 이름을 영국(榮國)으로 내리며, 규천왕(嬀川王)에 봉한다. 간원2년(759년) 사사명은 위주에서 연왕을 칭한다. 연호는 순천이라 한다. 상주(相州)를 구하기 위해 아홉 절도사의 포위를 깨버리며, 안경서형제를 죽이고 스스로 황제에 오른다.
사조의, 사사명의 장남, 회왕(懷王)에 봉해진다. 상원2년(761) 사사명을 죽이고 스스로 황제에 오른다. 연호는 현성(顯聖)이라 한다.
강몰야파(康沒野波), 사사명의 부장(部將), 선봉이 되어 평원군을 공격한다. 안진경(顔眞卿)이 평원군을 버리고 황하를 건너 남으로 도망친다.
강문경(康文景), 사사명의 부장(部將)
조장군(曹將軍), 사사명의 심복, 나중에 사조의등의 사주를 받아, 사사명을 해치려 한다. 사사명은 "이 호(胡)가 나를 죽이려 한다"고 말한다. 이를 보면 그가 호인임을 알 수 있다.
하수(何數), 사사명떄 북평노룡부의 별장(別將)이다.
하령장, 하수의 아들, 사사명때 유격장군, 행우위상곡군수성부 별장, 경거도위, 도지항호사판관을 지낸다.
석제정(石帝廷), 안록산 사사명의 부장(部將)
강효충(康孝忠), 사조의의 호부상서
강모(康某), 안남도호 강겸(康謙)의 사위, 안사의 반란군에서 강겸에 연루되어 피살당한다.
이상은 당나라의 사관들이 당군의 전공을 기록할 때 우연히 언급된 안록산, 사사명반군의 장수들이다. 그러므로, 이들은 단지 안사반군내의 일부 구성원들이다. 이들 유주의 장수들이 반드시 유성출신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사사명등의 행적을 보면, 특히 그들의 최고수령인 안록산이 유성에서 왔다는 것을 보면, 그중 적지 않은 사람은 유성출신일 것이다. 유성의 소그드취락 성원이 유주군사집단의 주력이었다. 즉 안록산의 반란을 일으킬 때 의지한 주요 군사역량이 이들인 것이다. 혹은 어떤 사람은 이렇게 강조한다. 안록산의 반군중에 주모자는 모두 한인이었다고.
당시 사람들의 안록산 장수에 대한 전체적인 견해를 보기로 하자. 당숙종 지덕원년(756) 십이월, "황상이 이필(李泌)에게 묻는다. "지금 적이 이처럼 강한데, 언제나 평정할 수 있겠는가?" 대답하여 말하기를, "신이 보기에 적은 인원이나 금은보화 비단등을 얻으면 모조리 범양으로 보내고 있습니다. 이게 어찌 사해에 웅거하겠다는 뜻을 가진 자들의 행동이겠습니까? 지금 오랑캐장수들이 기용되고, 중국인은 겨우 고상(高尙)등 수인에 불과합니다. 나머지는 모두 협박받아 따르는 자들입니다. 신이 생각하건데, 2년을 넘기지 못할 것이며, 그때는 천하에 반란군이 없을 것입니다." 황상이 말하기를 "왜 그런가?" 대답하여 말하기를, "적중에 용맹한 자는 사사명, 안수충, 전간진(田干進), 장충지(張忠志), 아사나승경(阿史那承慶)등 수명에 불과합니다." 이를 보면, 안록산의 수하들중 가장 중요한 장수는 마땅히 소그드호인임을 알 수 있다. 이것이 정확한 관찰이다.
안사의 부하병사들중 호인의 비중이 비교적 컸을 것이다. 지덕원년(756년), 이광필이 상산에서 상산단련병 3천명으로 호병을 죽이고, 안사의에게 나와서 투항한다. 이광필이 그에게 당군이 어떻게 해야 사사명의 구원부대를 막아낼 수 있을지 물어본다. 그러자 안사의는 이렇게 대답한다: "호기(胡騎)는 비록 날카롭지만, 무거운 것을 태우지 못합니다. 만일 이익이 없으면 그들은 사기가 떨어지고 마음이 떠날 겁니다." 이는 소그드인 호인장수가 안록산사사명반군에 대한 묘사이다. 한편으로 호인은 말을 잘 타고 활을 잘 쏘는 특징을 지니고 있으면서, 또 다른 한편으로 상인의 이익추구특성도 남아 있다. 이를 간명하게 묘사한 것이다. 이를 보면 안사의 부하 호인장병들의 기본적인 상황을 알 수 있다고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