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명원(圓明園): 중국이 감추는 나머지 절반의 이야기
글: 사로(思蘆)
원명원유적지는 중국의 애국주의교육기지이다. 중국이 열강으로부터 침략받은 굴육사를 증명하는. 다만, 중국의 역사교과서는 단지 절반만 얘기하고 있다. 그리고 나머지 절반의 이야기는 꺼내지 않는다. 샤오펀홍들이 걸핏하면 원명원을 가지고 서방에 대한 원한을 표시하는데, 나머지 절반의 이야기도 해야할 필요가 있다. 원명원을 불태운 사건은 소위 제2차아편전쟁때 일어났다.
1. 전쟁의 원인과 과정
제2차아편전쟁이라는 명칭은 오인시킬 수 있다. 제2차아편전쟁은 아편과 완전히 무관하다. 오히려 남경조약에 규정한 입성, 조약수정등 요구를 청나라정부가 온갖 방법으로 제지하고, 또한 홍콩에 등록된 애로우호(亞羅號)선박이 청나라수군에 수색을 당하고, 프랑스 선교사가 광서에서 지방관리에게 피살당하는 사건이 벌어졌기 때문에, 영국과 프랑스가 사과와 배상을 요구했으나 양광총독(兩廣總督) 섭명침(葉名琛)이 거절하게 되자, 영국프랑스연합군이 광주를 점령하게 된다. 그후, 영국과 프랑스는 청나라조정에 공사의 북경주재를 요구하고, 통상항구를 추가로 개방할 것을 요구하고, 외국인이 자유롭게 내지를 여행하고, 장사하고 선교할 수 있도록 해줄 것을 요구하며, 관세를 수정할 것도 요구하고, 교민을 보호하며 전비를 배상해줄 것등을 요구했다. 당시 청나라조정이 가장 받아들이기 싫어한 것은 공사의 북경주재였다. 그리고 오날날 국가주권에 해당한다고 취급되는 나머지 요구사항은 모두 사소한 일로 여겨 영국프랑스의 요구를 받아준다. 또한 관세를 완전면제해주는 것으로(청나라 재정수입의 1/3에 해당하였음), '공사의 북경주재'요구를 막고자 했다. 함풍제가 공사의 북경주재를 거부한 것은 체면때문이었다. 중국황제는 중국이 세계의 중심이라고 생각하고, 나머지 국가는 모두 중국의 번속국이라 여겼다. 외국사절이 황제를 배알하려면 반드시 삼궤구고의 예를 행해야 했다. 그러나, 외국공사들은 각국은 평등하다고 여겨서 삼궤구고를 거절했다. 이는 황제의 체면을 크게 손상시키는 일이었다. 그래서 황제는 자리를 피해서 외국공사를 만나지 않는다. 그리하여 함풍제는 계속하여 미루면서 공사들이 북경에 주재하지 못하게 했다. 역사학자 장정불(蔣廷黻)은 이렇게 말한다: "한마디로 말해서, 외인은 들어올 수 없다는 것이다. 그들은 조약을 수정하려면, 전쟁밖에 없다고 여기게 된다." 영국프랑스함대는 상해에서 담판요구를 거절당하자, 북상하여 대고구(大沽口)에 도착한다. 청군이 패전한 후 천진조약을 체결한다. 중국은 영불연합군의 모든 조건을 받아들인다. 다음해에 북경에서 조약을 교환한 후, 연합군은 남으로 철수하기로 했다. 다만 함풍제는 조약체결을 완병지계(緩兵之計)로 여겼고, 이를 준수할 준비는 하지 않았다. 다음 해 영국, 프랑스, 러시아, 미국 4개국의 공사가 군함의 호송하에 대고구에 도착한 후 북경으로 향한다. 청나라대신이 접대하러 나오지 않고, 항로를 막는 것을 보게 된다. 그리고 상륙하자 민단(民團)으로 변장한 청군이 가로막았다. 연합군은 배에서 내려 하도를 정리했다. 그러나 계속 숨겨놓았던 대고구포대에서 돌연 습격하여, 연합군은 약 400명의 사상자를 내고 철수한다. 영국과 프랑스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1860년 6월 26일, 연합군은 청나라에 선전포고를 하고, 군비배상, 공사북경주재등 요구조건을 내거나, 청나라조정에 의해 거부당한다. 대고구, 팔리장(八里莊)에서 청군을 격패시킨다. 함풍제는 급히 승덕으로 피신간다. 그리고 북경조약을 체결하여, 연합군이 요구하는 모든 조건과 배상에 동의한다.
이 전쟁은 아편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실질은 영국프랑스가 국제공리에 부합하는 정당한 무역권과 외교권을 요구한 것인데, 청나라는 전쟁목적은 인민을 위하거나 주권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함풍제의 천하공주라는 체면과 천조상국이라는 심리를 보호하려는 것이었다. 함풍제는 체결한 조약을 지킬 생각이 아예 없었다. 그것이 제2차아편전쟁이 발생한 원인이다. 그는 이런 말을 남긴다: "자고이래로 맹약이라는 것은 믿을 수 없다. 그저 임시변통에 속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는 "조약위반전쟁"이다. 여러번 위약, 패전, 새로운 조약체결, 다시 위약, 다시 패전, 다시 새로운 조약체결이라는 순환에 빠져든다. 패전은 갈수록 참혹했고, 조약은 갈수록 가혹했다. 제2차아편전쟁은 설명한다. 낙후했다고 하여 반드시 얻어맞는 것은 아니지만, 규칙을 지키지 않고, 국제공리에 따라 행동하지 않으면 얻어맞게 되는 것이다.
2. 누가 먼저 원명원을 빼앗았는가?
영국프랑스연합군은 처음에 북경을 점령할 계획이 없었다. 그들은 중국정부를 무너뜨리게 되면, 중국이 대혼란에 빠질 것을 우려했다. 태평군이 상해로 진군했을 때, 연합군은 천진의 전선에서 1,500여명의 병사를 보내어 청나라가 상해를 방어하도록 도와주었다. 통주에서 담판할 때, 중국은 영국프랑스공사가 황제를 접견해서 국서를 전달하겠다는 것을 죽어라 거부한다. 그리하여 담판이 결렬된다. 미리 모의한 바에 따라, 청나라측에서는 해리 스미스 파크스(중국명 巴夏禮)를 위시한 영국프랑스의 협상사절단 39명을 억류시키고, 반역죄로 감옥에 투옥한다. 그들은 다른 나라들은 모두 청나라의 번속국이라고 여겼기 때문이, 청나라에 복종하지 않는 것은 바로 반역이라고 취급한 것이다. 이 국가는 너무 야만적이었다. 만국공법을 지키지 않았을 뿐아니라, 중국 자신의 "양국이 전투를 할 때도, 사신은 참하지 않는다"는 전통을 어긴 것이다. 야만적일 뿐아니라, 우둔하기도 했다. 만일 사절을 납치하려면, 먼저 상대방을 이길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결과는 더욱 참혹하다. 함풍제때의 군신은 모두 손자병법, 삼십육계를 너무 많이 읽었다. 무슨 병불염사(兵不厭詐, 병법은 속이는 것을 꺼리지 않는다), 금적선금왕(擒賊先擒王, 적을 잡으려면 먼저 적의 왕을 잡아야 한다)등을 믿었지, 야만적인 행동은 영국프랑스연합군을 더욱 분노하게 만들어 용맹하게 싸우게 만들 것은 생각지 못했다. 영불연합군은 팔리장에서 승거린친(僧格林沁)의 군대를 전멸시킨다. 9월 25일, 영국프랑스연합군은 3일내에 모든 억류사절을 풀어줄 것을 요구한다. 그렇지 않으면 북경을 공격하겠다고 선언한다. 청나라측은 계속 대답을 미루어, 10월 5일까지 미룬다. 연합군은 북경으로 진군하면서, 만일 여하한 사절이라도 죽임을 당했다면, 북경을 훼멸시키고 왕조를 전복시키겠다고 선언한다. 10월 6일 아침, 영국프랑스연합군이 덕승문, 안정문 일대로 밀려온다. 공친왕(恭親王) 혁흔(奕訢)은 상황이 좋지 않다고 보고 즉시 조회(照會)를 작성하여 2일후에 해리 스미스 파크스를 석방하겠다고 명확히 답변한다. 다만, 조회를 보낼 사람을 찾지 못한다. 영국프랑스연합군은 흩어졌고, 프랑스군이 잠에 원명원으로 진입한다. 원명원을 수비하던 청나라병사들은 이미 도망친 상태였고, 몇몇 환관들만 남아 있었다. 당시 북경에 있던 왕개운(王闓運)은 이렇게 적었다: "이인(夷人, 오랑캐, 즉 영국프랑스군을 가리킴)이 북경으로 들어와 마침내 원궁(園宮, 원명원)에 도착한다. 건물과 설비가 화려한 것을 보고 진입하지 않았다. 나중에 잃어버린 물건이 있으면 자신들에게 배상하라고 할 것을 우려한 것이다. 이인들이 떠나자, 귀족중 가난한 자들이 간사한 백성들을 이끌고 이인들이 했다고 얘기하면서, 앞장서서 불을 질렀다. 이인들이 되돌아와서 크게 약탈했다." 진대경(陳代卿)은 <경신기보기변(庚申畿輔紀變)>에서 이렇게 적었다: "간사한 자들이 기회를 틈타서 불을 지르고 약탈했다. 경성의 9개문이 모두 닫혀있는데, 서북쪽에서 연기가 하늘을 뒤덮었다. 아무도 가서 살펴보지 않았다. 서양인들은 원명원내에 변고가 있다는 것을 알고, 뒤이어 도착한다. 각원은 모두 불이 붙었고, 삼일밤동안 꺼지지 않았다." 서수구(徐樹鉤)의 <원명원사서(圓明園詞序)>에는 이렇게 적고 있다: "간사한 자들이 기회를 틈타서 불을 질렀고, 궁으로 들어가서 약탈했다. 이인들도 따라서 각 원에 모두 불이 붙었고, 삼일 밤낮동안 꺼지지 않았다." 이자명(李慈銘)의 일기에도 이렇게 적었다: "1860년 10월 7일, 이인이 원명원 바깥의 관민방(官民房, 관리들과 백성의 집)만을 불태웠다고 들었다; 10월 8일, 해전(海澱)의 중국인들이 원명원으로 들어갔다; 10월 9일, 영국프랑스연합군이 정식으로 총을 쏘기 시작했다; 10월 10일, 중국인들이 다시 원명원으로 들어가서 물건을 약탈한다." 이 모든 것들은 당시 중국인들이 앞장서서 불을 지르고 약탈했으며, 그후 영국프랑스연합군이 총을 쏜 후 다시 중국인들이 원명원으로 들어가서 약탈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여기서 지적할 점은, 연합군은 군기가 아주 엄명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군수보급에서 주로 현지 평민들에게 구매했다. 그들은 중국정부와 보통민중은 구분했고, 백성들은 전혀 괴롭히지 않았다. 연합군은 청나라정부에게 배상을 요구했지만, 민간의 재산은 전혀 건드리지 않았다. 천진을 점령한 후, 현지의 대염상(大鹽商) 장금문(張錦文)이 나서서 대응했다. 무상으로 점령군의 먹고 마시는 일용품을 제공했다. 철군하기 전에, 연합군은 대금지급을 고집했고, 장금문은 여러번 거절했지만, 결국 할 수 없이 받아야 했다. 통주에서 승거린친이 패전한 후, 정부는 토끼보다 빠르게 도망친다. 백성들은 할 수 없이 스스로 나서서 자신들의 안전을 보호해야 했다. 동인당(同仁堂)의 주인인 악평천(樂平泉)이 앞장서서, 연합군에 주기 위해 500마리 양과 50마리의 소 그리고 과일등을 가지고 갔다. 영국군 총사령관 엘긴 백작은 받지 않았다. 우리 군대는 조금도 일반백성들의 물건을 건드리지 않으며, 선물로 받을 수도 없다고 말했다. 그저 공정한 가격으로 거래할 수는 있다고 했다. 상인들은 할 수 없이 소와 양을 끌고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러나 도중에 청나라병사들에게 약탈당한다. 당시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다: "이병(夷兵)이 도착하는 곳에는 시장사람들이 많이 따랐다. 전 몇 개를 은 1병과 바꾸었다. 그러나 우리 군대의 병사들은 굶어서 도처에서 약탈을 자행했다." 동란시기에 탄압이 사라지면, 약탈의 전염력은 극히 강하다. 서양병사들도 사람이다. 많은 진귀한 보물을 보고서 결국 버티지 못했다. 처음에 프랑스인이 약탈하기 시작했고, 그후 영국인들도 따라서 약탈에 가담한다. 연합군은 천시지리를 확보하고 있으므로, 그들이 빼앗은 보물이 더욱 많았다.
3. 원명원이 불에 타게 된 진정한 원인
연합군이 원명원을 불태운 것은 청나라가 억류한 사절이 학대받아 사망한 것에 대한 보복이었다. 10월 8일, 해리 스미스 파크스등이 석방된다. 나머지 사람들은 13일에서 16일이 되어서야 석방된다. 39명 중에서 살아서 돌아온 사람은 18명이었고, 21명이 학대받아 사망했다. 어떤 사람의 시신은 이미 썩어서 누구인지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였고,어떤 사람은 아예 시신을 찾을 수가 없었다. 인질들을 물에 적신 가죽끈으로 손목을 묶어서, 갈수록 조였고, 며칠 후에는 부패되기 시작하여 구 더기가 생겼다. 가장 참혹한 것은 원명원에 갇혀 있던 사절이었다. 황제가 이곳에서 그들을 심문했는데, 가죽끈에 묶여서 하루종일 무릎꿇고 있어야 했으며, 먹고 마시지도 못했다. <타임>지 기자 볼비가 4일째 되는 날 사망한다. 시신은 감옥에 3일동안 방치되어 있었다. 그리고 들판에 버려서 개에게 먹인다. 앤더슨 중위는 손발이 묶여서 구더기가 생기기 시작한다. 그는 손의 구더기가 온몸으로 번져가는 것을 보고 정신착란을 일으켜 3일동안 소리치다가 죽는다. 한 프랑스인은 구더기가 입, 귀, 코로 들어갔고, 결국 미치고 만다. 연합군은 고문을 받아 겨우 목숨만 남은 사절들을 보고, 극히 놀라고 분노한다. 그리하여 청나라를 징벌해야겠다고 결정한다. 만국공법에 따르면, 사신이 피살당하면, 성이 함락된 후 중벌을 가하게 되어 있다. 연합군은 이전에 만일 사절이 죽으면, 북경을 훼멸시키고 왕조를 전복시키겠다고 공언한 바 있다. 영국인은 포로가 원명원에서 학대를 당했으므로 반드시 원명원을 파괴하여 평지로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프랑스인은 고궁을 불태워버리자고 제안한다. 영국인은 북경인민들은 우리에게 잘못한 것이 없으니 황성을 불태우는 것은 북경을 불태우는 것과 같고, 우리는 북경으로 진입하면서 백성들을 괴롭히거나 약탈방화를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는데, 이제 황궁을 불태우게 되면, 우리가 신용을 지키지 않는 것이 된다고 했다. 원명원은 단지 황제의 사가원림(私家園林)이니 원명원을 불태우는 것이 황제에 대한 최대의 징벌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서방인의 가치관에서 생명이 가장 고귀하다. 황가원림이야 수십명의 생명과 비교하면 그다지 귀중할 것도 없다. 10월 17일, 연합군은 청나라측에 사절을 학대치사한데 대한 배상을 요구하고, 원명원 궁전을 불태워 훼멸시켜 버리겠다고 한다. 10월 18일, 연합군은 방화를 시작했고, 3일 밤낮을 불탄다.
4. 왜 중국은 제2차아편전쟁의 최대손실을 언급하지 않는가?
원명원은 예술과 건축학의 각도에서 보자면 그다지 높지도 않고, 독특하거나 유일하지도 않다. "만원지원(萬園之園)"이라고 과장하지만 실제로는 그 정도가 아니다. 기실 그것은 이화원(頤和園), 피서산장과 로코코 유럽식건축의 혼합체이다. 그리고 일부 강남원림의 복제품이다. 심미적인 취미가 뒤떨어졌던 황가궁전스타일과 자잘하고 복자한 로코로스타일로 그다지 큰 가치는 없다. 제2차아편전쟁때 중국의 가장 큰 손실은 러시아에 속아서 "이이제이(以夷制夷)" 한답시고 러시아에 할양한 150만평방킬로미터의 영토이다. 이는 중국근대사상 중국에 있어서 최대의 손실이다. 그리고 최대의 불평등조약이다. 중국은 오늘날 영토의 15분의 1을 잃었다. 티벳과 운남을 합친 면적이다. 그리고 러시아인들이 중국에서 이러한 이익을 얻어간 것은 아무런 정당한 근거도 없다. 순전히 기망과 중국인의 우둔함때문에 일어난 것이다.
국제법의 각도에서 보자면, 영불연합군이 제2차아편전쟁중에 벌인 행위는 권리보호를 위한 것이고, 쟁취한 이익도 그다지 지나치지 않다. 그리고 그것을 쟁취한 다음에는 철군했다. 결국 중국은 제2차아편전쟁때 전혀 정당성이 없었다. 그래서 얻어맞더라도 억울할 것이 없었다. 정치적 목적에서, 중국은 제2차아편전쟁에서의 최대손실을 감추고 말하지 않는다. 그리고 최대의 강도 러시아를 언급하지 않는다. 또한 제2차아편전쟁에서 중국에 굴욕을 준 것을 이 전쟁과정에서 가장 이성적이고, 국제공법을 근거로 행동한 영불연합군에 돌린다. 황제의 굴욕을 인민의 굴욕으로 선전한다. 불태워진 원명원을 인민과 국가굴욕의 상징이라고 말한다. 이는 말도 안되는 코미디이다. 낙후되면 얻어맞는다. 그러나 이 낙후는 무기장비의 낙후가 아니라, 문명의 낙후, 관념의 낙후, 도의의 위배와 규칙불준수였다. 후자의 낙후와 규칙불준수는 제2차아편전쟁때 중국이 얻어맞은 가장 근본적인 원인이다. 설사 오늘날이라 하더라도, 중국이 비록 경제와 군사상으로 청나라보다 더 강대해졌지만, 문명과 관념에서는 청나라보다 그다지 나아진 것이 없다. 여전히 국제규칙을 지키지 않고, 곳곳에서 루프홀을 찾아서 이익을 보려하며, 잔머리를 굴리고 계약을 위반한다. 멀거니 눈뜨고서 거짓말을 해댄다. 북경말에 망나니짓을 하면서 이치를 따지지 않고 야만스럽고 우둔하게 행동하는 것을 "조추(找抽, 얻어맞을 짓을 한다)"라고 한다. 곳곳에서 얻어맞을 짓을 하고 다니면 너를 때리지 않고 어떻게 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