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일항전시기 3차례의 위기순간
글: 양천석(楊天石)
첫번째 위기순간은 송호(淞滬)전투에서 패배하고 남경(南京)이 함락된 때였다. 국민당 고위층의 대다수가 주화파(主和派)였다. 송호항전은 1937년 8월 13일부터 시작한다. 국민정부는 75만의 군대를 모아서 3개월간 전투를 벌인다. 국민정부로서는 당시에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역량을 동원한 것이다. 전국각지에서 군대를 상해로 보내 일본군과 혈전을 벌인다. 그러나 결정이 성급하게 이루어졌고, 지휘가 체계적이지 못하여 결국 패전하고 만다. 일본군은 군사상식을 뛰어넘어 혈전을 벌인 후, 전혀 쉬지 않고, 빠른 속도로 남경으로 진격한다. 12월 13일 남경을 점령하여, 국민정부는 수도가 함락된다.
12월 15일, 국민정부는 고급간부회의를 소집한다. 회의에서는 주화파와 주전파가 격렬하게 논쟁을 벌인다. 대부분 국민당고위간부는 주화파였다. 왕정위(王精衛)는 원래 항전에 자신이 없었는데, 이때 들고 일어나 제3자의 신분으로 새로운 정부를 조직하여 일본과 평화협상을 하자고 주장한다. 거정(居正), 우우임(于右任)등 국민당원로들도 속속 장개석(蔣介石)을 비판하며, 평화협상을 요구한다. 거정은 심지어 장개석에게 이런 말까지 했다: 당신이 조약에 서명하지 않겠다면 내가 정부를 대표하여 서명하겠다. 장개석은 이를 거절하고 수도를 중경(重慶)으로 옮겨 계속 항전하겠다고 결정한다. 이것이 중국대일항전의 첫번째 위기순간이었다.
두번째 위기순간은 1938년 무한(武漢) 함락이다. 남경이 함락된 후, 국민정부는 주요 행정기구와 군사기구를 무한으로 이전하고, 중경으로 천도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왕정위는 항전에 대한 자신감을 잃고, 1938년말 중경에서 곤명(昆明)으로 도망친다. 곤명에 도착한 왕정위는 운남성주석 용운(龍雲)에게 말한다. "나는 제3세력을 조직하겠다." 그 말은 바로 운남, 사천, 광서, 귀주등 서남의 각성과 연락하여 왕정위를 수반으로 하는 신정부를 구성한 후, 일본인과 담판하겠다는 것이다.
당시 왕정위는 운남의 용운, 서강(西康)의 유문휘(劉文輝), 그리고 광서, 광동의 군사지도자, 예를 들어 장발규(張發奎)에게 연락했다. 왕정위의 도망은 단순히 국민당 부총재의 배반이 아니라, 운남, 광동, 광서, 사천, 귀주등 5개성을 모아서 일본에 투항하겠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당시 산서의 염석산(閻錫山)도 동요하여 사람을 보내 일본과 비밀리에 접촉하기도 했다. 이들 군사지도자들은 비록 동요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항전의 진영에 섰다. 그들의 결정은 항전의 상황을 보면서 나중에 결정하겠다는 것이었다. 1938년말에서 1939년초까지 왕정위의 도망, 광주, 무한의 함락으로 중국의 대일항전은 두번째로 가장 위험하고 가장 어려운 순간을 맞이하였다.
세번째 위기순간은 1944년 일본군이 귀주(貴州) 독산(獨山)으로 진격한 때였다. 1944년, 일본인은 중국대륙의 교통선을 열기 위하여, 1호작전을 개시한다. 1호작전은 중국근대사에서 예상계(豫湘桂, 하남, 호남, 귀주)전투라고 불리는 것인데, 중국군대가 궤멸하고, 일본군은 대륙교통선을 열어 귀주의 독산까지 밀고 들어왔다. 미국, 영국, 소련등 대국의 중경주재대사관은 모두 긴장했다. 소련대사관은 철수를 준비했고, 미국, 영국, 소련대사관은 모두 교민을 중경에서 철수시키는 것을 준비했다. 중경은 사상유례없는 긴장, 혼란국면을 맞이했다.
미국의 웨더마이어장군은 국민정부에게 다시 한번 천도할 것을 건의했다. 중경에서 곤명으로 옮기라는 것이다. 그러나 국민정부는 중경과 존망을 함께 하겠다면서, 더 이상 천도건은 고려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국민정부는 한편으로 외국대사관을 안심시키면서 다른 한편으로 부대를 끌어모아 오강(烏江)을 전선으로 하여 중경을 보위할 준비를 한다. 이것이 중국대일항전의 세번째 위기순간이었다.
그외에 "9.18"사변이후 중일양국의 국력을 비교해보면 다음과 같다:
전쟁발발전, 일본의 공업생산액은 60억달러인데, 중국은 겨우 13.6억달러였다. 철강생산량에서 일본의 연간생산량은 580만톤인데, 중국은 겨우 4만톤이었다. 석유생산량에서 일본의 연간생산량은 169만톤인데, 중국은 겨우 1.31만톤이었다. 그외에 일본은 1년에 비행기 1,580대, 대구경대포 744문, 탱크 330대, 자동차 9,500대, 선박건조능력 52,422만톤이었다. 그러나 당시 중국은 아직 비행기, 대구경대표, 탱크, 자동차의 생산능력을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일본의 전쟁전 총병력은 448만명이고, 중국의 총병력은 200여만명이었다. 일본의 당시 전투기는 1,600대였고, 중국은 겨우 223대였다. 일본의 전함은 285척인데, 중국은 겨우 60여척이었다. 중국과 일본 사이에는 이처럼 커다란 군사력차이가 존재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