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소(黃巢)는 왜 실패했는가?
글: 청풍명월소요객(淸風明月逍遙客)
안사의 난(安史之亂)이후 당의종(唐懿宗)은 황음사치(荒淫奢侈)하고, 지취금미(紙醉金迷)하며, 환관이 권력을 농단하고 ,번진이 지방에 할거했으며, 탐관오리가 횡행하여 각지에서는 반란이 여기저기서 일어났고, 결국 대규모의 황소의 난(黃巢起義)이 일어난다.
황소는 875년에 거사하여, 884년 죽을 때까지 전후로 10년간 활약했다. 이 십년간은 881년 황소가 장안에서 황제를 칭한 시점을 기준으로 나눌 수 있다. 앞의 6년간은 황소의 반란군이 기본적으로 파죽지세로 연전연승을 거두었지만, 뒤의 4년간은 황소의 반란군이 병패여산도(兵敗如山倒), 즉 산사태가 난 것처럼 무너져서, 궤불성군(潰不成軍), 궤멸하여 제대로 싸울 수 있는 군대가 아니었다.
<신당서>와 <자치통감>의 기록을 보면, 황소는 교육을 받았으며, 소금판매업에 종사했다. 집안이 넉넉하여, 전형적인 중소상인지주였다. 즉 권력을 장악하지 못한 하층지주계급이라고 할 수 있었다.
황소는 남정북벌(南征北伐), 동진서살(東進西殺)하면서 여러번 흥성했다 쇠락하는 기복이 있었다. 황소군은 산동(山東)에서 거병하여 회남(淮南), 형양(荊襄)을 전전한 후 대규모의 유격전을 전개한다. 먼저 장강을 건너 강서(江西)로 들어가고, 절강동부(浙東)에 이르렀으며, 선하령(仙霞嶺)을 넘어 복건(福建)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광주(廣州)를 점령한다. 그후 다시 강서(江西)를 전전하며 채석(采石)에서 북으로 장강을 건너 회(淮)로 들어간다. 먼저 낙(洛陽)을 점령하고, 다시 장안(長安)을 점령하여, 당희종(唐僖宗)을 성도(成都)로 도망치게 만들었다.
황소는 원래 독서인(讀書人)이다. 여러번 과거에 실패한 후, 분노에 차서 그 유명한 <불제후부국(不第後賦菊)>(과거에 급제하지 못한 후 국화꽃을 읊다)을 짓는다:
대도추래구월팔(待到秋來九月八) 가을이 오고 중양절이 가까워지길 기다리겠다.
아화개후백화살(我花開後百花殺) 그때가 되어 내 꽃(국화)이 피면 다른 꽃들은 모두 시들어버릴 것이다.
충천향진투장안(沖天香陣透長安) 하늘까지 가득찬 내 꽃의 향기로 진을 이루어 장안으로 스며들어가면
만성진대황금갑(滿城盡帶黃金甲) 온 장안성은 황금갑옷을 입은 내 꽃(병사)들로 가득하게 될 것이다.
비록 과거시험에 낙방하여 마음 속으로 울분을 가지고 있다고 하지만, 황소는 그 후에도 계속하여 관리가 되는 꿈을 꾼다. 그리하여 일찌감치 조정에 귀순하려고도 했었다. 황소의 반군이 광주에서 포위되어 있을 때 그는 당나라에 천평절도사(天平節度使)로 임명해줄 것을 요구했으나, 당나라조정에서 받아들이지 않았다. 나아가 운주절도사(鄆州節度使)를 요구했지만 당나라조정은 여전히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는 계속하여 안남도호(安南都護), 광주절도사(廣州節度使)를 요구했으나 당나라조정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만일 당나라조정에서 황소의 요구를 받아들였다면 당희종 이현(李儇)은 아마도 장안에서 도망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880년 십이월 오일 오후, 황소의 선봉부대가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으면서 장안으로 진입한다. 8일후, 황소는 함원전(含元殿)에서 황제로 등극하고, 국호를 '대제(大齊)'라 하고, 연호를 금통(金統)이라 한다. '만성진대황금갑'의 꿈이 드디어 실현된 것이다.
황소는 장안에서 여러가지 큰 일을 저지른다. 그 중 가장 특이한 일이라면 당고종 이치와 무측천의 건릉(乾陵)을 발굴한 것이다.
섬서의 무측천과 당고종 이치를 합장한 건릉의 서쪽부분에는 깊은 구멍이 파여져 있는데 "황소구(黃巢溝)"라고 불린다. 전설에 따르면, 당시 황소가 병력을 보내 건릉을 팔 때에 남은 유적이라고 한다.
황소가 황제를 칭하려면, 고대의 예제에 따라 반드시 등기대전(登基大典)을 행해야 하고, 곤룡포와 면류관을 쓰며, 전국옥새를 찍어 전국에 조서를 내려야 했다. 곤룡포와 면류관, 그리고 전국옥새는 황실에서 전승되는 보물이다. 당희종 이현이 이미 그것을 가지고 사천으로 도망쳤다. 그래서, 황소가 생각한 것이 무측천이었다. 무측천은 일찌기 대주(大周) 황제로 등극했고, 그녀의 면류관, 곤룡포와 대주의 전국옥새가 건릉에 묻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황소는 사십만의 군대를 동원하여 건릉을 발굴하려 한 것이다. 그러나, 대제가 패퇴하고, 큰 비가 계속 내리는 등의 원인으로 건릉을 발굴하는 작업을 완성할 수 없었다.
그러나, 황소가 건릉을 발굴한 데에는 아마도 또 다른 중요한 원인이 있었던 것같다. 즉 이당(李唐)의 황가풍수를 파괴하는 것이다. 고대인들은 묘장풍수를 미신했고, 조상의 묘를 잘 쓰고 아니고가 후손들에게 영향을 미친다고 여겼다. 건릉은 당나라때의 감여가(堪輿家, 풍수가)인 이순풍(李淳風)과 원천강(袁天罡)이 공동으로 선정한 곳으로 풍수가 극히 뛰어나다고 했다. 황소가 군대를 보내 건릉을 발굴하게 한 것은 바로 이씨의 용맥(龍脈)을 잘라버리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투계불성식파미(偸鷄不成蝕把米). 그는 성공하지 못했고, 오히려 나중에 당희종이 주온(朱溫)을 보내 황소의 조상묘를 파헤치게 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도박계에 이런 명언이 있다: 빨리 따면, 빨리 잃는다. 황소가 장안에서 대제정권을 건립했지만, 곧 정권을 잃고, 태산 자락의 낭호곡(狼虎谷)에서 패배한다. 무서운 기세로 뻗어가던 농민반란군은 결국 실패한 것이다. 황소가 실패한 원인은 세 가지가 있다:
첫째, 심각한 유구주의(流寇主義)
황소는 반란을 일으킨 후 주원장(朱元璋, 명태조)처럼 '고축장(高築墻)'의 혁명근거지 대본영(大本營)을 건립하겠다는 의식이 없었다. 시종일관 이리저리 흘러다니면서 전투를 벌인다. 유동작전의 장점은 피실격허(避實擊虛), 즉 적의 강한 곳을 피하고 적의 약한 곳을 공격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상대방이 대비하지 않는 틈을 타서 공격하여 신속히 성채를 점령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파죽지세로 승기를 이어갈 수 있다. 다만 약점도 아주 치명적이다. 장기간 유동작전을 계속하게 되면, 반란군은 공고한 근거지를 확보하지 못하게 된다. 공성하여 점령한 후에 다시 버린다. 심지어 동도 낙양조차도 병사를 주둔시켜 지켜지 않았다. 일단 당군이 반격하면, 거점이 전혀 없어져 버리는 것이다. 동시에 군대는 물자공급도 제대로 받을 수 없고, 충분히 휴식을 취할 수도 없다. 그저 계속하여 전투만 해야 하는 것이다. 이런 유구주의로는 대사를 이루기 힘들다.
황소는 남북으로 10년간 전투를 벌이면서, 전국의 12개성을 휘젓는다. 행군거리만 수만리에 이른다. 그러나 성 하나를 점령하고 나면 바로 버린다. 그러다보니, 장안을 점령한 후에 조운(漕運)이 단절되어, 대제정권은 가장 먼저 양식난에 부닥치게 된다. 그리하여 그들은 장안에서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을 수가 없었다. 또한 장안에서 물러나고나서도 근거지가 없어 조정관군과 대치할 힘이 없었다.
둘째, 계급대립이 두드러졌다.
안사의 난 이후, 당왕조는 이미 붕괴,와해의 길로 접어들었다. 하북사진(河北四鎭)부터 내지까지, 여러 진(鎭)들이 난립하면서 전횡발호했다. 그들은 해당 진의 재정대권을 장악하여, 중앙정부와 대립했을 뿐아니라, 강력한 병사들도 갖추고 있었다. 이들은 재정과 병력을 갖추고 있어서 전혀 당나라조정의 명령을 듣지 않았다. 그리고 당나라조정내부에서는 환관이 득세하여, 붕당이 다투어서, 당왕조는 이미 일박서산(日薄西山)이어서, 이들 지방을 돌볼 겨를도 없었다.
황소가 칭제한 후, 장안에는 엄청난 바람이 분다. 종실, 제후, 관리, 부호를 탄압하고, 관료지주와 문벌세족의 재산을 몰수하여, 철저히 당나라의 통치기반이 흔들리고, 봉건질서가 무너져버린다.
아랍상인 슐레이만이 말했던 것처럼, "황소는 이미 중국을 망가뜨렸다. 이미 그 법률을 없애고, 이미 그 권위를 부숴버렸다." 위진이래 형성된 문벌(門閥)제도, 문제(門第)관념은 철저히 무너진다. 오대십국과 북송시기, 중국사회구조에는 심각한 변화가 일어나는데, 그 근원을 따져보면 황소의 난때 철저히 소멸되었기 때문이다.
이때의 종실제후, 관리지주귀족들은 어떻게 하더라도 황소의 반란군 편에 설 수가 없게 되었다. 결국 그들을 당나라조정과 힘을 합쳐서 공동으로 농민반란군에 대항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 것이다.
그래서, 황소의 반란군이 장안을 점령한 후, '대제'정권을 건립하였지만, 도망가던 당희종이 반격을 꾀하며 천하의 번진에 격문을 보내고, 사타족(沙陀族)귀족 이극용(李克用), 당항족(黨項族) 척발사공(拓拔思恭)과 함께 황소군에 대항할 수 있었다. 결국 황소군은 장안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게 된다.
셋째, 강호의리(江湖義氣)가 일을 그르치다.
장안에서 물러나 산동으로 패주하는 과정에서, 황소는 대제군대를 이끌고 진주자사(陳州刺史) 조주(趙犨)와 진주(陳州, 지금의 하남 淮陽)에서 시간과 병력을 소모하는 잘못된 공성전을 벌이게 된다.
황소가 아끼는 부하인 맹해(孟楷)는 진주성을 공격하는 와중에 조주에게 생포되어 참살당했다. 당시의 형세로 보자면, 황소는 당연히 자신의 장점을 발휘하여 피실격허하는 유동작전을 펼쳐야 했다. 당군이 엄밀하게 방어하는 진주를 우회하여 실력을 보존하고 다른 지역으로 발전을 도모해야 했다. 그러나, 황소는 중요한 순간에 '형제의 의리'를 따지고, 감정대로 일처리를 한다. 진주성 아래에 병력을 주둔시키고, 맹해의 복수를 다짐한다. 황소는 진주를 300일이나 포위해서 공격한다. 그동안 크고 작은 전투가 수백회 벌어진다. 진주성을 함락시키지 못했을 뿐아니라, 오히려 공성전은 교착상태에 빠져 전략적인 기회를 놓지게 된다. 그러다보니, 황소농민군의 배반자인 주온(朱溫), 사타귀족 이극용이 신속히 병력을 모아, 황소를 공격할 수 있게 된다. 황소는 정예병사를 모두 잃고, 할 수 없이 포위를 풀고 동쪽으로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병패여산도. 결국 태산의 낭호곡에서 그의 비장한 최후가 연출된다.
<구당서>와 <신당서>는 모두 황소의 전(傳)이 있고, 둘 다 황소는 태산 자락 아래에서 죽었다고 명확히 적었다.
<신당서>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황소는 낭호곡에 포위되어 어쩔 도리가 없게 된다. 그리하여 외조카인 임언(林言)에게 이렇게 말한다. 네가 내 수급을 가지고 당나라조정에 바치고, 부귀를 누려라. 외인이 그 이득을 가져가게 하지 말라. 임언은 차마 황소를 죽이지 못하고, 결국 황소는 스스로 자살한다. 그러나 황소가 아직 죽지 않았을 때, 임언은 황소의 목을 베어 시부(時溥)에게 바치러 간다. 그러나 도중에 태원군(太原軍), 박야군(博野軍)에게 살해된다. 그들은 황소와 임언의 수급을 시부에게 바치고 다시 조정에 바친다.
<구당서.황소전>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낭호곡에서 임언이 황소, 황업(黃鄴), 황규(黃揆)등 7명을 죽이고, 그들의 수급을 서주(徐州)로 보낸다.
그러나, 민간전설에 다르면, 황소는 그때 죽지 않았고, 출가하여 화상(和尙)이 되었다고 한다.
기실 황소가 출가했다는 설의 진위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당시의 사회심리를 반영한다는 것이다. 백성들은 그들이 충심으로 떠받들던 황소가 죽지 않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가 수급이 잘리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지 않았기를 바랐던 것이다.
황소의 실패는 다시 한번 증명한다: 강력한 적에 포위된 상황하에서 농민군은 반드시 자신의 근거지를 건립해야 한다. 이 근거지에서 가능한 그리고 반드시 해야할 일체의 경제방면의 건설을 진행하고, 경제력을 집중하여 군대에 물자를 조달해주어야 한다. 동시에 민중의 생활도 적극적으로 개선시켜주어야 한다. 그렇게 하여 적을 공격하는 기지로 삼아야 한다. 성공한 사례는 바로 유방, 주원장이고, 실패한 사례는 바로 황소, 이자성, 장헌충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