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청의 전남편 당납(唐納): 신비한 신분의 수수께끼 (1)
글: 하월명(賀越明)
2012년 8월 23일은 당납 선생의 기일이다. 그가 세상을 떠난지 꼬박 24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당납"이라는 이름은 알고 있는 사람이 적지 않을 것이다. "사인방"이 타도되면서, 나라를 떠난지 오래되고 이름없이 살아가던 그가 다시 중국인들의 시야에 들어왔고, 보통민중들이 화제로 올리는 인물이 되었다.
일찌기 "사랑때문에 목숨을 버리려 했다"
1970년대말부터 현재까지, 신문잡지에는 당납을 소개하는 글이 적지 않았다. 수가 많아서 일일이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다. 총괄해서 말하자면, 이들 글 중에서 이전에 당납과 함께 일한 적이 있는 몇몇 언론종사자들의 회고한 내용을 제외한 나머지 글들은 대부분 포풍착영(捕風捉影)하거나 다른 사람의 글을 베낀 수준이었고, 적지 않은 글들은 날조한 것이었다. 더욱 심한 경우는 항간에 '다큐멘터리수법'으로 쓴 <당납부침록(唐納浮沉錄)>으로 그의 주요 인생경력을 거의 애정부침사로 묘사했다. 이야기의 내용이나, 인물관계가 대부분 허구이다.
와전되기도 하고, 거기에 양념이 더해지면서, 당납의 이미지는 본래 면목을 전혀 찾아볼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표면적인 진실조차도 점점 더 거리가 멀어져갔다. 당납은 생전에 이에 대해서 예사로운 일로 넘겼다. 비록 원통하고 분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어쩔 도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국내의 어느 간행물에 당납의 1930년대 혼인사에 관한 글을 실은 적이 있다. 그는 읽어본 후에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 이렇게 썼다: "내가 이십여년동안 이런 류의 글을 너무 많이 보아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다지 놀랍지도 않다. 이제 봐도 이상하지 않고, 놔두면 스스로 무너질 것이다. 그저 계속 그냥 표절하라고 해라. 나는 신경쓰지 않겠다....이처럼 돈에 눈독을 들이고, 이익만 추구하는 '작가'를 나는 그동안 너무나 많이 보아왔다. 그런 자들을 중시할 필요는 없다."
그렇다면, 이 강청의 '전남편'은 도대체 어떤 사람일까?
당납의 부인 진윤경(陳潤瓊)이 편찬한 <마계량문집(馬季良文集)>(화동사범대학출판사 1993년판)에는 저자의 평생사적에 대한 간략한 소개글이 있다: 본명은 마계종(馬繼宗)이고, 1914년 5월 7일 소주(蘇州)에서 태어났다. 부친 마배보(馬培甫)는 당시 진포철로국(津浦鐵路局)의 통역원이었고, 모친은 비문영(費文英)이다. 2살때 큰아버지인 마함손(馬含蓀)의 양자로 보내어진다. 어려서부터 시문(詩文)을 좋아했다. 오려서 소주사립수덕초급중학을 다니고, 졸업후에는 성립 소주중학에 입학한다. 1930년부터, 그는 거옥(巨鈺), 구각(瞿覺)등의 필명으로 <오현일보>에 산문, 단시를 발표한다. "918"사변후인 1931년 11월 그는 오현공청단위(吳縣共靑團委)와 소주의 진보청년들이 발기한 "사회과학자연맹"에 가입하여 적극적으로 항일운동에 참가한다. 그리고 진보청년 사증도(佘增濤, 史枚), 항지적(項志逖, 胡繩), 오대곤(吳大琨), 원수박(袁水拍)등과 교류하며 자주 국사를 논하고 구국의 길을 탐색한다. 1932년 3월, 중공오현현위와 공청단조직이 파괴되고, 마계종은 당국의 추적을 피해 상해로 도망친다. 거기서 이름을 마계량(馬繼良)으로 고쳤다가, 다시 마계량으로 개명한다. 그후에 다시 계량(季良), 기량(驥良)등의 이름을 쓴다. 같은 해 여름 성요한대학에 합격한다. 1933년, 당납, 나평(羅平), 진타(陳陀)등의 필명으로 <신보(晨報)>의 "매일전영(每日電影)", <신보(申報)>의 "전영전간(電影專刊)", <신문보(新聞報)>의 "예해(藝海)"등 부간(副刊)에 영화평론을 발표하는데, 항상 견해가 독보적이어서 독자들의 사랑을 받는다. 다음 해 가을, 화예(華藝)영화회사에 들어가 편극(編劇)을 맡아, 항일영화 <도망(逃亡)>의 주제가 <자위가(自衛歌)>와 삽입곡 <새외촌녀(塞外村女)>의 가사를 쓴다. 거기에 섭이(聶耳)가 곡을 붙여 널리 알려진다. 나중에 전통(電通)영화회사에 들어가 편극, 선전주임이 되고, 명성(明星)영화회사에서 편도위원회(編導委員會) 부주임이 된다...
당납은 외모가 준수하여 전통의 감독들 눈에 든다. 그리하여 희극영화 <도시풍광>에서 남자주인공 이몽화(李夢華)역을 맡게 된다. 그는 비록 은막에 처음 데뷔하는 것이지만, 연기가 상당히 좋았다. 전통에서 <도시풍광>을 찍을 대 당납은 산동 청도에서 온 본명이 이운학(李雲鶴)인 남평(藍萍)을 만나게 되고, 둘은 사랑에 빠진다. 얼마 후 그들의 혼인풍파는 신문과 잡지들의 가십난의 남녀주인공이 된다.
전기작가 섭영렬(葉永烈)이 쓴 <강청전>(작가출판사 1993년판)에는 풍파를 전후한 이야기를 아주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다: 1936년 4월 26일 오전, 당납과 남평은 같은 배우인 조단(趙丹)과 섭로천(葉露茜), 고이이(顧而已)와 두소견(杜小鵑)과 함께 항주의 육화탑(六和塔) 아래에서 집단결혼식을 올린다. 감독 정군리(鄭君里)가 사회를 보고, 상해법학원 원장인 심균유(沈鈞儒)가 증혼인이 되어 당시의 아름다운 이야기로 전해진다. 5월말, 남평은 제남으로 병든 부친을 문안하러 가겠다고 떠나서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리고 서신을 보내 관계를 끊겠다고 말한다. 날벼락을 맞은 것같은 당납은 6월하순 제남으로 가서 그녀를 찾아보았으나 찾을 수가 없었다. 절망에 빠진 그는 여관에서 성냥머리부분을 먹고 자결하려 하나 다행히 차방(茶房)에게 발견되어 적시에 병원으로 보내어져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사실은 천진으로 가서 전남자친구 유계위(兪啓威)를 만나러간 남평은 그 소식을 듣고 제남으로 달려온다. 정군리가 중간에서 설득하여 두 사람이 함께 상해로 돌아간다. 그러나 두 사람이 함께 생활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싸우고 별거한다. 1937년 5월 22일 당납은 남평이 이미 가정이 있는 감독 장민(章泯)과 관계를 맺은 것을 보고는 비분한 나머지 절망하여 오송강으로 가서 장강에 몸을 던진다. 다행히 지나가던 사람이 구해주어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다만, 혼인풍파는 전체 인생의 일부분이었다. 이 각도에서만 한 사람을 인식하고 평가한다면 그것은 너무나 부분적이고 쉽게 편면적이 될 수 있다. 유의해야할 것은 남평이 상해에서 당납을 알기 전에, 전 남자친구 유계위의 설득과 도움으로 이미 1933년 2월 청도에서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는 것이다. 한동안 조직과의 관계가 끊어졌기 때문에, 상해에서 청년단에 가입한다. 영화계에 들어간 후에, 그녀는 절대적으로 좌익문예여청년이었다. 1937년, 그녀는 자신의 정치적 이상을 위하여, 상해의 비교적 편안한 생활을 버리고, 조건이 극히 열악했던 연안으로 간다. 상해에서 남평을 위해 처자식을 버렸던 감독 장민은 더더욱 일찌기 1926년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그후 계속하여 좌익희극(戱劇)업무에 종사한다. 남평도 좋고 장민도 좋다. 비록 사생활에서는 옛사람을 버리고 새사람을 찾은 경력이 있지만, 정치적으로는 평범한 인물들이 아니었다. 남평과 한때 동거하고 결혼한 바 있는 당납은 그때 어떤 정치적 입장이었을까? 그는 나중에 '강청'으로 개명한 남평과 같은 정치적 지향을 가지고 있었을까?
경시된 정치적 신분: 공산당원
1930,40년대에 상해, 무한, 중경에서 다시 상해로 옮기면서, 당납은 영화계, 신문계를 넘나들며 크게 활약한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상해에서 그는 <대공보(大公報)>의 "희극과영화" 전간(專刊)의 편집을 맡고, 희극영화의 주인공으로 출연하고, 종군기자를 하기도 했다. 무한으로 가서는 항일화극(話劇) <중국만세>를 창작, 기획 및 연출하여 무한삼진으에서 화제가 되었다; 중경으로 가서는 영국신문처에 들어가 통역원으로 지내면서 진보희극활동을 조직했다; 다시 상해로 돌아와서는 먼저 <시사신보>의 주필을 맡고, 다시 <문회보>의 총편집인이 된다. 당납은 중국어, 영어를 모두 잘했다. 공인된 다재다능한 인물이다. 그에게 남다른 명성을 안겨준 짧았던 혼인사를 제외하고 그의 영화와 신문분야에서의 업적을 보면 발군의 문화인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당납은 배우, 신문인이라는 직업적인 신분을 제외하고 또 하나의 당시에 아는 사람이 드물었고 나중에도 경시되는 정치적 신분이 있다. 바로 중공당원이라는 것이다.
<강청전>에서는 "요란했던 육화탑혼례"라는 부분에 이런 각주가 붙어 있다: 당납이 남평을 알았을 때, '기실 이미 공청단에 가입했다. 나중에 그도 중국공산당에 가입한다' 또 다른 곳에는 하기언(夏其言)이 인터뷰할 때 회고한 내용을 소개하였는데, 그는 일찌감치 한 은행의 실습생이 되었다고 한다. 거기서 동료 마기선(馬驥善)과 친구가 되었고, 그후 마기선의 형인 마기량(馬驥良)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마기량은 바로 당납이다. 그때 마기량은 C.Y. 즉 공청단에 가입해 있었다. 그러나 당납이 언제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는지에 대하여는 이 책에서 명확하게 언급하지 않고 있다.
하기언은 당납의 청년시대의 친구로서, 일찌기 싱가포르 <연합조보>의 요청으로 <당납과 나>라는 글을 쓴 바 있다. 그는 당납과 1936년에 만났으며, 공동의 우국지심과 구국지심을 가지고 있어 가까운 친구가 될 수 있었다고 한다. 하루는 당납이 친구중에 직업혁명가가 있는데, 국민당 반성원(反省院, 특별감옥)에서 도망쳐 나왔는데, 현재 당국에 체포하기 위해 뒤쫓고 있다. 몸을 숨길만한 곳을 찾고 있는데, 하기언에게 그를 받아줄 수 있겠는지 물어보았다. 하기언은 진보인사이며 전설적인 인물이라는 말을 듣자 기꺼이 그러겠다고 대답한다.
당납의 그 친구는 이름이 사매(史枚, 본명은 사증도)이고, 나중에 하기언과 함께 정자간(亭子間)에서 지낸다. 사매는 학문이 뛰어나 문사철경, 고금중외, 모르는 것이 없었다. 하기언은 그를 선배로 존중한다. 당납은 거의 매일 하기언의 집을 찾았고, 사매에게 바깥 소식을 많이 전해주었다. 두 사람은 함께 형세를 논하고, 구국을 논하며, 문예를 논했다. 얘기하다보면 평론글 한편을 바로 쓸 수 있을 정도였다. 당납은 당시 <대공보>에서 "희극과영화"전간의 편집을 맡았는데, 거기에 국방영화를 고취하고, 구국을 선양하는 글을 많이 썼는데, 바로 하가언 집의 정자간에서 쓴 작품이다. 하기언은 그때 그냥 옆에서 듣고 있어야 했다. 그들의 대화를 듣고 다시 사매가 추천해준 진보서적을 읽어본 후에 많은 혁명의 이치를 깨닫게 된다.
하기언은 글에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혁명의 길로 들어설 수 있었던 것은 만일 사매가 가장 먼저 계몽시킨 사람이라고 한다면, 당납은 가장 먼저 나를 이끌어준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하기언 본인은 1937년 중국공산당에 가입한다. 당납이 그를 '이끌어준 사람'이라면 당연히 당납은 그보다 먼저 중공에 가입했다고 할 것이다.
이 점에서 또 하나의 문자기록을 증거로 삼을 수 있다. 2005년 10월호 <상해탄> 월간에 <신문계노전사 하기언>이라는 글이 실렸다. 소제목 "당납이 그를 혁명의 길로 인도했다'는 부분에 이렇게 쓰여 있다: "1936년, 그(하기언)은 공산당원 당납을 알게 된다...." 이 글의 작자인 거흔여(居欣如)는 일찌기 중공화동국 선전부, 상해시위선전부에서 일한 바 있다. 그리고 하기언은 소속기관보 <해방일보>에서 전후로 경리, 정문부 주임, 부총편집을 맡다가 은퇴한다. 그들은 서로 알고 있었고, 글에서 이렇게 썼다는 것은 분명 아무런 근거없이 쓴 것은 아닐 것이다.
이 문제에 있어서 아직 확정되지 못한 것은: 당납이 도대체 언제 정식으로 공산당원이 되었느냐이다. 1920-30년대에 공청단에서 공산당으로 전환하는 것은 비교적 보편적인 방식이었다. 즉 공청단에 입단한 후 어느 정도 시간동안 시험을 거친 후 직접 공산당원으로 전환되는 것이다. 아마도 하기언은 당납이 "C.Y"일 때, 실제로 그는 금방 "C.P"(공산당)가 되었을 것이다. 이 추단이 성립한다면, 당납의 당령(黨齡)은 1936년 혹은 그 이전부터일 것이다. 이를 보면, 비록 당납과 남평이 빠른 시일내에 헤어졌지만, 처음에 함께 할 수 있었던 것이 우연만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들은 정치사상면에서 같은 진영에 속해있었던 것이다.
중공 조직부문이 1937년 77사변으로 항전이 전면적으로 발발한 때를 시기를 나누는 기준으로 삼는 원칙으로 삼는다. 그에 따르면, 당납은 그 이전에 혁명에 투신하여 입당하였으므로, '홍군시기'의 간부에 속한다. 명실상부한 노혁명가이다. 만일 배우, 신문인이 모두 당납의 직업적 신분이라면, 공산당원은 이 문화인의 정치적 신분이다. 그리하여, 그의 사상의 바탕은 그가 하기언에게 전수해준 혁명이론과 마찬가지로, 구국, 노동대중의 해방, 평등, 자유의 신중국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중공당원이라는 정치적 신분은 당납의 '인생비밀'을 푸는 관건적인 열쇠이다.
'잠복'한 신문인
1949년 10월 1일 중공이 정식으로 집정당이 되기 이전(심지어 그후 한동안), 대다수의 중공당원들은 비밀상태였다. 심지어 홍색근거지 혹은 혁명대오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리하여, 1948년 홍콩으로 건너간지 얼마 되지 않아 멀리 해외로 나간 당납은 당원신분을 공개할 기회가 없었다. 일부 당납에 관련된 회고글을 보면 그의 정치적 면목이 명확하지 않다. 그러나 공산당원만이 할 수 있는 일들을 했고, 아주 독특한 역할을 수행했다.
해방전에 부녀운동에 참가한 바 있는 동례연(童禮娟)은 <허광평(許廣平)과 함께 한 나날>이라는 글을 썼는데, 1946년 춘절(구정)이 지난 후 얼마되지 않아, 중공지하당위의 영도하에 그녀와 몇몇 동지들은 상해부녀연의회(聯誼會)를 조직하는데 참가한다. 허광평, 호자영(胡子嬰)등이 상무이사로 선임된다.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하여, 부녀연의회는 간행물을 발행하려고 하는데, 경비가 없어서 처음에는 등사기를 이용하여 2기를 발행하다보니 뭔가 부족했다. 허광평이 나서서 <시사신보>에 연락했고, 당조직에서 그녀를 보내 허광평을 도와 구체적인 업무를 진행하도록 했다. 한번은 그녀가 허광평의 집에서 마계량(당납)을 만난다. "그날 나는 약속한 시간보다 조금 일찍 도착했는데, 조금 후에 마계량이 왔다. 그는 중간키에 회색양복을 입고 있으며 학자의 풍모였다. 우리는 앞쪽 방의 창문에 가까이 있는 원탁에 둘러앉았다. 주로 허광평과 마계량이 얘기를 나누었고, 나는 곁에서 주로 들었다. 허광평은 아주 겸손하게 계속 나의 의견을 물어보았고, 나는 계속 고개만 끄덕였다. 마지막에 합의가 이루어져 부간(副刊)의 반개 판면(版面)에 일주일에 한번 <부녀생활>이라는 이름으로 부간을 내기로 했다. 왜냐하면, 이미 <학생생활> <공인(工人)생활>이라는 부간이 있어 명칭을 일치시킬 수 있기때문이다. 글에는 다음과 같은 말도 있었다. <시사신보>는 국민당 4대가족중 하나인 공상희(孔祥熙)가 발행하는 것이고, 이 부간의 원고료는 무료였다. 판본이 나오면 모양을 정리하는 등의 업무를 모두 그녀가 처리했다. 그녀는 또한 이런 말도 했다: "<부녀생활>이 몇 회 간행된 후, 허광평은 다시 <연합만보>와 연락했고, 이번에 허광평은 쪽지를 써서 나에게 직접 연합만보사의 주편 풍빈부(馮賓符)를 찾아가도록 했다. 풍빈부는 나와 구체적인 이야기를 나누었고, 부간명칭은 <부신(婦訊)>으로 했다." 그리고 이런 말도 한다. "<연합만보는 상해지하당이 영도하는 민영의 면목으로 출판하는 신문이었다. 만보이므로 모두 오전에 신문사로 가서 일했다. 허광평은 평화, 민주쟁취와 독재, 내전반대의 편집방침을 견지했기 때문에 이 두 개의 부간은 많은 부녀독자들을 단결시키고 교육시켰다."
<연합만보>는 원래 중공지하당의 신문이었다. 그러나, <시사만보>는 국민당재벌 공상희가 장악한 신문이다. 그러나 당납은 <시사만보>의 주필이었고, 어떤 판면은 중공의 신문과 거의 같은 선전역할을 했다. 노신(魯迅)의 부인 허광평은 부녀계의 좌익지도자였다. 그녀의 배후에는 중국공산당이 있다. 당납과 그녀의 협력은 당연히 개인적인 행위가 아니다. 전술한 거흔여의 글에서도 당납이 <시사신보>에 들어간 일을 언급했다: "당납이 주필이 된 것은 완전히 당에서 보낸 것이었다. 그의 직속 상사는 문위의 책임자인 하연(夏衍)이었다. 하연은 당납에게 국민당내부의 파벌갈등을 이용하여, 이 신문을 아주 좋은 진지로 삼아 진보적인 주장을 선전하도록 했다." 당납이 이 신문의 주필이 된 것은 공상희의 아들 공령간(孔令侃)과 성요한대학의 동문이라는 관계때문이었다. 이 신문은 한때 군인과 경찰이 희원(戱院)에서 서로 싸운 스캔들을 보도했는데, 군인과 경찰 모두 신문사를 때려부수겠다고 큰소리쳤는데, 당납이 바로 공령간에게 나서서 주선해줄 것을 부탁하고나서 가라앉았다. 이는 공산당원이 국민당문화선전기구에 '잠복'한 사례인데, 유사한 사례가 적지 않다.
당납이 <시사신보>에 있었던 기간은 길지 않았다. 일부 글이나, 판면이 너무나 홍색을 띄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윗선의 주목을 끌어 쫓겨난 것이다. 그는 <문회보>의 총편집을 맡는다. 총주필 서주성(徐鑄成), 부총주필 진우손(陳虞蓀), 환향(宦鄕) 및 취재주임 맹추강(孟秋江)등과 함께 좌익성격의 이 신문을 주재한다. 여기서도 뛰어난 실력을 드러낸다. 가장 의미심장한 것은 국공평화회담이 철저히 결렬된 후, 중공대표단이 남경을 떠나 연안으로 가기 전날인 1946년 11월 19일, 당납은 돌연 기차를 타고 상해에서 남경으로 가서, 문회보 남경주재기자인 정영흔(鄭永欣)을 데리고 매원신촌(梅園新村)으로 가서 주공대표단 주은래를 인터뷰한 것이다. 정영흔의 회고글인 <석두고성'축록'기>에 기재된 바에 따르면, 전체 과정이 반시간이 되지 않았고, 당납은 오직 한 가지 문제만을 물었다고 한다: "주선생, 당신이 연안으로 돌아가면, 국공파열은 불가피하다. <문회보>는 어떻게 해야할까요?" 주은래가 대답한다: "당신들은 평소에 하던대로 계속 일하면서, 임기응변이 필요합니다. 어쨌든 복잡한 문제입니다." 정영흔이 이어서 물었다: "주선생 이번에 가면 언제 돌아오시나요. 평화회담이 다시 재개될 희망이 있나요?" 주은래의 대답은 이러했다: "우리는 빨리오면 올수록 좋다고 생각한다. 국민당이 정협결의를 실현할 성의가 있느냐에 달렸다. 전장의 형세변화를 보면, 대체로 내년 봄, 반년여이후에 아마도 당신들과 남경에서 다시 만날 수 있을 것같다." 당납은 이 일 때문에 왔기 때문에, 그날 저녁 밤기차를 타고 상해로 돌아간다. 그리고 이 일에 관해서는 보도하지 않고 기밀을 유지한다. 이건 보통의 취재나 방문이 아니다. 당납이 급히 오고간 것을 보면, 주은래에게 대면보고를 한 것으로 보인다. 환경이 악화되었을 때 국민당당국과 어떻게 투쟁할 거인지에 대한 전략을 나눈 것이고 서로 마음으로 이해하고 묵계가 형성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나중에 통계를 보면, 당시 <문회보> 편집부내에 16,7명의 지하당원이 있었고, 3,4개의 서로 다른 계통에서 왔다. 어떤 사람은 조직내의 상하관계이지만, 신문사에 출근할 때는 서로 모르는 사람인 것처럼 가장했다. 예를 들어, 진우손과 하기언은 서로 잘 알고 있었지만, 같은 계통도 아니고 조직관계도 없었다. 하기언과 당납과 같았다. 당연히 <문회보>는 특수한 신문이므로, 당납은 특수한 신분의 신문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