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화행정(共和行政)": 사마천의 <사기> 기록은 믿을 수 있을까?
글: 호연문사(浩然文史)
기원전841년, 서주(西周) 공화원년(共和元年)은 중국에서 확실한 연호의 시작이다. 이 해를 전후하여 발생한 사건으로 "공화"라는 중요한 단어를 탄생시켰다. 그 전에, 주여왕(周厲王)은 포악한 행정으로 백성에 의해 축출되어 "체(彘)"로 도망친다. 주여왕이 도망친 후, 태자는 나이가 어렸고, 조정에는 14년에 걸쳐 국군이 없는 국면이 나타난다. 그동안 대신들이 공동으로 행정을 하며, 정치질서의 안정을 유지했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공화행정"이다.
다만 이렇게 유명한 사건에 대하여 크게 충돌되는 사서의 기록이 있어, 의문점 투성이가 되었고, 천년의 수수께끼로 남았다.
1. 공화행정의 3가지 버전
오늘날 우리가 "공화행정"을 알게 된 것은 주로 두 권의 대표적인 사서때문이다. 하나는 사마천의 <사기>이고 다른 하나는 진(晋), 위(魏)의 관수사서(官修史書)인 고본(古本) <죽서기년(竹書紀年)>이다. 그러나 두 권의 역사서는 이 사건에 대하여 전혀 다르게 기록하고 있다.
먼저 <사기>의 기록을 보자. 이 정치사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사람은 오직 소공(召公), 주공(周公) 두 사람이다. 태자가 포위공격을 받을 때, 소공은 자신의 아들로 태자와 바꿔치기 하여, 태자는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후 14년간, 계속하여 소공과 주공이 공동으로 행정을 한다. 14년후, 주여왕이 "체(彘)"라는 지방에서 사망하고, 태자 희정(姬靜)이 주공, 소공 두 재상에 의해 다시 주왕(周王)에 옹립된다. 간단히 말해서, 사마천은 공화행정을 소공, 주공의 "이상공화(二相
共和)"로 보는 것이다.
그럼, 고본 <죽서기년>을 보자. <사기>의 소공, 주공 "이상(二相)"외에 다시 제3자가 끼어든다. 바로 공백화(共伯和)이다.
진상은 더욱 오리무중이다.
먼저, <사기색인(史記索引)>에서 인용된 <죽서기년>에는 "공백화간왕위(共伯和干王位)". 즉, 공백화가 왕위를 찬탈했다는 것이다. <청화간(淸華簡)>에도 유사한 기록이 있다. "공백화립(共伯和立)". 14년후, 희정이 성년이 되자 공백화는 여러 사람들의 압박을 받아 왕위를 희정에게 넘겨주게 된 것이다.
진(晋)나라 사람 속석(束晳)은 <죽서기년>을 인용할 때 또 다른 주장도 싣는다. "공백화는 단지 '섭행천자사(攝行天子事)'했다"는 것이다. 전국(戰國)시대의 문헌 <노련자(魯連子)>에도 유사한 기록이 있다. "제후들이 화를 받들어 천자의 일을 대행하게 했다(諸侯奉和以行天子事)" 여기서 "섭천자사"는 왕위찬탈과는 크게 다르다. 주선왕(周宣王) 희정을 옹립한 것도 공백화의 공로이다. 이를 보면 후세에 <죽서기년>의 글을 인용할 때, 비교적 큰 차이를 보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원본의 내용이 어떠했는지는 지금으로서 이미 알 수가 없게 되었다.
동일한 사건에 대하여, 3가지 버전이 나오게 되었다: 첫째는 <사기>의 기록과 마찬가지로 공화행정이라는 것은 주공, 소공의 두 재상이 행정을 했다는 것이고, 둘째는 공백화가 기회를 틈타 주여왕의 왕위를 찬탈한 것이라는 것이고, 셋째는 공백화가 잠시 섭행(攝行)한 것이고 왕에 오른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사기>의 기록은 거의 '고증(孤證, 유일한 기록으로 방증되는 기록이 없음)'으로 보인다. '공화'라는 두 글자는 도저히 해석할 수가 없다. 그래서 대중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다만 군주가 자리를 비웠을 때, 공경(公卿)이 집정한 것은 선례가 있었다. 예를 들어, 이윤(伊尹)이 태갑(太甲)을 축출한 후 집정한 것이나, 노소공(魯召公)이 도망친 후 삼환(三桓)이 공동으로 집정한 것같은 경우이다.
두번째 왕위를 찬탈했다는 주장은 비록 그것을 기록한 문헌이 비교적 많기는 하나, 자세히 분석해보면 타당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주(周)나라때는 엄격한 계승제도가 있었고, 공백화는 왕위의 승계자가 아니다. 그런 그가 어찌 왕위를 찬탈할 수 있겠는가? 주공, 소공이 태자를 보호하고 있는데 어찌 그런 찬역(纂逆)을 저지하지 않았겠는가? 정리를 보더라도 두번째 주장은 성립되기 힘들다.
세번째 주장도 아주 기괴하다. 공백화가 왕정을 섭행하였다면 연호를 '공화(共和)'로 바꿀 수 있단 말인가? 삼환의 집정때에도 노소공의 연호는 바꾸지 않았다. 만일 공백화가 단지 왕정을 섭행했을 뿐이라면 연호를 새로 만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시기의 역사를 왜 '공화행정'이라고 칭하는 것일까?
세 가지 주장은 각각 이치에 맞는 점도 있지만, 또한 의문점도 있어서 그 어느 것도 절대적인 설득력을 갖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면, 진상은 무엇일까?
2. 공백화는 누구인가?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려면 먼저 공백화가 누구인지를 알아야 한다. '공화행정'과 마찬가지로, 공백화의 신분에 대하여도 두 가지 버전이 있어, 마찬가지로 의문투성이이다.
첫번째 버전은 공백화가 바로 위무공(衛武公)이라는 것이다. 먼저 위무공의 이름이 화(和)이다. 다음으로, 위무공의 형이 "공백여(共伯餘)"이다. 마지막으로, <노련자>에서 "공백화는 위나라로 복귀했다(共伯和復歸國於衛)"라고 적고 있어, 더욱 공백화는 바로 위무공이라는 것을 증명해주는 것같다.
그러나, 자세히 분석해보면, 위무공과 공백화가 같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위무공은 95세까지 살았고, 사망시기는 주평왕(周平王)13년(기원전758년)이다. 즉, 공화원년(기원전841년)때, 위무공은 겨우 12,3세의 나이였던 것이다. 이렇게 중요한 정치사건에 어찌 어린아이가 끼어들 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 위무공의 형은 확실히 '공백여'라고 불렸다. 다만, '공백(共伯)'은 그의 시호(諡號)이다. 형제 두 사람이 하나의 시호를 나누어쓴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이렇게 단정할 수 있다. 공백화와 위무공은 다른 사람이다.
또 하나의 주장에 따르면 공백화는 바로 공백국(共伯國)의 국군(國君)이라는 것이다. "백(伯)"은 그의 작위이고, "화(和)"는 그의 이름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공백국은 어디에 있었을까? 그 국가는 바로 하남성(河南省) 휘현(輝縣)에 있었다. 한(漢), 당(唐)이래로 계속 '공현(共縣)'으로 불렸다. 오늘날에도 이곳에는 공성(共城)의 성벽유적지가 남아 있다. 공백국은 원래 주왕실의 기내국(畿內國)이다. 다만 위(衛)나라와 가까이 붙어 있고, 주왕실이 점차 쇠락하면서, 나중에 위나라에 병합되어 위나라의 별읍(別邑)이 된다.
공백국의 국군에 대한 기록은 비교적 적다. 그렇다면 그는 왜 이렇게 중요한 정치사건에 참여할 수 있었을까? 주로 인품이다. 공백화는 수양있는 국군이고, 명망이 있었다. 주여왕의 폭정은 더더욱 그의 인의도덕을 두드러지게 했다. 주여왕은 백성들의 폭동으로 체라는 곳으로 도망치게 된다. 공백국은 기내의 제후국이다. 그래서 백성들은 국내의 어르신(長者)을 찾아가서 집정해줄 것을 청했다. 이렇게 보는 것이 순리일 것이다. 하물며 다른 제후국들도 모두 공백화의 인품을 인정하고 그의 집정을 지지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공백국의 실력으로 주나라조정의 일에 참여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3. 진상은 무엇일까?
주여왕은 영이공(榮夷公), 위무(衛巫)등을 중용하여, 그의 시정은 백성들의 불만을 산다. 백성들의 폭동에 공경대부도 참여한다. 강력한 정치적 압박으로 주여왕은 부득이 "체"로 도망치게 된다. 국내에 군주가 없고, 태자는 나이가 어렸다. 마침 공백화는 내외에 명성을 떨치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를 삼공중에서 수석집정관으로 모셔서 왕정을 대행하게 한다.
그 기간동안, 주여왕의 지위와 명호는 민감한 문제였다. 비록 여전히 주여왕의 연호를 사용하고 있었지만, 정치적 명령은 이미 주여왕에게서 나오지 않았다. 당시의 청동기에 쓰인 책명반포는 모두 "유왕원년(唯王元年)" "백화보(伯龢父, 즉 공백화)약왈(若曰)"등으로 시작한다.
14년후, 주여왕이 사망하고, 태자 희정도 이미 성년이 되었다. 공백화가 왕정을 대행한 기초가 이미 사라진 것이다. 그래서 여러 신하들을 이끌고 태자 희정을 옹립하여 왕에 앉힌다. 그리고 자신은 공백국으로 돌아갔다. 14년에 걸친 공화행정은 평화로운 정권이양으로 막을 내린 것이다.
공백화가 조정에 들어와 수석집정관이 된 것은 백성들과 제후의 의견에 부응하는 미봉책이었다. 공백화가 한 역할은 온화한 중립적인 것이었다. 그의 권력은 아마도 주공, 소공만 못했을 것이다. 단지 그의 명망이 높아서 왕정대행의 지위를 얻었던 것일 뿐이다.
그렇다면, 사마천은 왜 <사기>에 삼경이 공동으로 집정했다고 적지 않았을까?
사마천은 공화행정의 본질을 꿰뚫어 본 것이다. 그는 주왕조를 떠받드는 입장에서 삼경공동집정을 주공, 소공 이상공동집정으로 대체해버린 것이다. 이에 상응하여, 주여왕이 "체"로 유배간 것을 그가 스스로 "쳬"로 도망친 것으로 고친 것이다. 이것은 사마천의 판단과 취사선택이었던 것이다.
반대로 고본 <죽서기년>의 기록은 훨씬 간단하다. 한마디 "공백화간왕위"이다. 여기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죽서기녀니의 가치관이다. '배신집국명(陪臣執國命)', 권력이 이미 공경에게 넘어간 전국시대에 신하가 왕정을 섭행한 일을 왕위를 찬탈한 것이라고 확대하여 기록해놓은 것이다. <죽서기년>은 위나라의 관방사서이고, 조, 위, 한의 삼가분진의 역사가 바로 직전에 있었다. 주왕실의 내정에 대한 이런 묘사는 자신에 대한 일종의 변호이기도 하다. 그래서 제자백가중 <노련자>가 말한 "행천자사(行天子事)"라는 것이 아마도 더욱 진상에 근접한 기록일 것이다.
역사는 객관과 주관의 통일이다. 우리가 보는 역사는 모두 우리가 보고자 하는 역사이다. 재연되지 않는 역사를 탐색할 때 우리는 항상 선택해야 하고, 경향을 가지게 된다. 역사사건은 복잡다단한 것이어서, 서로 다른 기록이 있다. 모두 역사의 일면을 보여주는 것이다. 비록 '일체의 역사는 모두 당대사이다'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오늘날 보는 역사는 모두 이전사람과 오늘날의 사람이 취사선택하고 판단하고 기술한 결과이다. 이런 복잡한 주장들 간에서 자세히 비교하고 분석해보면 최대한 역사의 진상에 접근할 수가 있다. 이것이 바로 역사가의 책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