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선진)

중산국(中山國): 춘추전국시대에 어떤 존재였을까?

중은우시 2022. 8. 24. 14:32

글: 소중옥(笑中屋)

 

춘추전국시대에 전국칠웅외에 또 하나의 제후국이 특수한 역사를 남겼다: 중산국. 중산국은 존재기간이 길지는 않다. 존속기간동안 중산국은 화하문화에 융합하고자 노력했다. 비록 전국칠웅의 시대에 살아남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위(魏), 조(趙)등의 나라에 골치거리였고, 여러번 곤란을 겪게 만들었다. 그렇다면, 중산국은 도대체 어떤 존재였을까?

 

중산국은 기원전507년에 건립되며, 중산무공(中山武公)이 건립했으며, 최초로 중원문화를 대거 흡수한 융적제후국(戎狄)제후국이다. 그리고 중산국 내부에서는 계속 이런 인식이 있었다: 그들은 주왕실(周王室)의 한 갈래이다. 심지어 국성(國姓)도 주왕실과 같은 희(姬)성이었다. 영지도 중원에 위치하여, 조, 위, 제(齊)와 연결되어 있다. 당연히 또 다른 견해도 있다. 중산국은 백적(白狄)의 한 갈래인 선우(鮮虞)가 세운 것이며, 그후 계속 중원과 융합하는 중에 주왕실의 예의와 제도등을 받아들여, 주왕실의 분봉국(分封國)이 되며, 정략결혼을 했다. 시간이 흐르다보니, 갈수록 중원문화의 색채를 띄게 된다. 중산국내부에서도 점점 이귀위존(以貴爲尊)의 개념이 생겨, 점점 주왕실에 가까워지고, 나중에 국성도 희성으로 되게 된다.

 

다만, 전국시대에 다른 중원각국들은 중산국을 그다지 대접해주지 않았다. 일찌기 중산국이 제후국으로 건립되기 전에, 중산무왕의 부친인 중산문공(中山文公)은 조나라, 위나라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다. 중산문공의 처인 공자경(公子傾)은 위문후(魏文侯)의 딸이다. 그래서 위나라는 중산국의 부국(父國)이라 할 수 있다. 게다가 위문후 시대에 위나라는 잘나갔고, 전체 전국시기에 발언권이 컸다. 누구든 치고 싶으면 쳤다. 나중에 강대국이 되는 진(秦)나라도 이때는 위나라에게 얻어맞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어느 정도 중산국은 위나라 앞에서는 별로 지위가 없었다. 동시에 조(趙)나라도 확장하고자 했고, 중산국을 병합하려 한다. 중산무공은 중산문공이 위나라와 조나라의 사이에 끼어 계속 통제받는 상태로 성장하는 것을 보아왔기 때문에, 중산무공은 이런 국면을 변경시켜야겠다고 마음먹는다. 조나라가 내란에 빠진 틈을 타서 전투를 벌여 중산국을 정식으로 건립한다.  

중산국의 국력은 어떠했길래, 당시의 조나라 위나라도 곤란을 겪어야 했을까? 중산무공이후 중산국의 군주는 중산환공(中山桓公)이다. 중산환공은 즉위후 별로 진취적이지 못했고, 내정도 약간 불안했다. 위나라가 제1차로 중산국을 공격했을 때, 병력을 지휘한 장수는 오기(吳起)이다. 중산국은 무공시기때부터 내려온 저력을 가지고 완강하게 저항하여 버텨낸다. 제2차 공격했을 때 지휘한 장수는 악양(樂羊)이었다. 3년의 시간이 걸려서 중산국을 함락시킨다. 환공은 도망친다. 이전까지는 평안하게 세월을 보내느라 아무런 느낌이 없었지만, 이제 망국노가 되고나지 환공은 대오각성한다. 열심히 노력하며 복국을 꿈꾼다. 그 결과 정말 복국에 성공한다. 당시 전성기를 구가하던 위나라를 격패시키고 나라를 다시 세운 것이다. 조나라는 중산국이 아직 안정되지 못한 틈을 타서, 중산국을 병합하려 한다. 그러나 오히려 중산국에 격패당한다. 나중에 중산국은 천도하고 장성을 만든다. 민생을 돌본 다음에 다시 조나라를 공격하고, 조나라의 많은 영토을 차지한다. 그렇게 서서히 북방의 강대한 존재로 성장한다. 전성기때는 심지어 전차 구천승(九千乘)에 이른다. 명실상부한 대국이다.

그러나, 나중에 계속 시간이 흐르면서 결국 조나라에 멸망당한다. 첫째로 중산국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주천자가 분봉한 제후국이 아니어서 중원각국의 범주에 들어가지 못했고, 둘째로 중산국은 마치 조나라의 국토위에 꽂힌 날카로운 칼날과 같아서, 조나라는 방법이 없었다. 중산국을 없애는 것밖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