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퇴(三星堆)문화": 정치적으로 왜곡되고 있다.
글: 양위(楊威)
최근 들어, 삼성퇴가 다시 주목을 받고 있다. 삼성퇴문화유적지에서는 계속하여 새로운 문물이 발굴되어 세계를 놀라게 만들고, 계속하여 사람들의 인식을 뒤집어버리고 있다. 이런 인기는 중국이나 세계에 모두 좋은 일이다. 아마도 역사화 세계의 진상에 인류는 한발 더 가까이 다가간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최근의 삼성퇴 인기는 중공의 정치선전에 기인한다. 그리고 직접 정치국의 명의까지 끌고 들어왔다. 삼성퇴문화의 진상은 여전히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인데, 중공의 정치선전은 조급하게 역사를 왜곡하려는 것이어서 우려를 금치 않을 수 없다.
삼성퇴를 정치국에서 집단학습하다.
6월 14일, CCTV는 대형프로그램 <삼성퇴기환지려(三星堆奇幻之旅)>를 방송했다. 소개하는 첫머리에 이렇게 말한다: "시진핑은 중공중앙정치국 제39차 집단학습때 이렇게 강조했다: 중화문명은 원류가 오래되고, 박대정심하다" "중화문명 오천여년의 발전사를 깊이있게 이해하려면, 중국문명역사연구를 심도있게 하고, 전당 전사회의 역사자각을 증강하고, 문화자신을 굳건히 하도록 추진해야 한다."
이 말은 5월 27일 중공정치국 집단학습에서 나온 말이고, 당시 학습주제는 중화문명 원류탐사공정을 심화하는 것이었다. 중공 당매체는 이에 영합하는 선전을 벌인 것이고, 삼성퇴와 정치국학습을 연결시켜버린 것이다. 대다수의 중국인들은 이에 대하여 익숙하게 여길 것이다. 그러나 당매체는 무형중에 삼성퇴문화를 "중화문명"의 범주에 집어넣고 말았다. 그리고 이를 통해 "당"의 자신감을 증강시켜야 한다고 했다. 실제로 중원문화이든 삼성퇴문화이든 100년역사의 중공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보편적으로 중원문화의 기원은 황하유역의 중원지구에서 일어난 중원문화로 '한문화(漢文化)'를 주체로 하여, 점진적으로 다른 민족의 문화를 융합한 것이라고 본ㄴ다; 다만, 장강유역에 위치한 쓰촨의 삼성퇴문화는 전혀 기록이 되어 있지 않았고, 직접적인 관련도 찾아볼 수 없다. 삼성퇴는 사람들의 인식을 뒤집어버렸고, 발견된 대량의 문물이 중원문화와는 전혀 다르다. 여러 청동기 조상의 모양은 서아시아, 고대이집트, 유럽등의 나라 혹은 민족으로 보인다.
그러나, CCTV는 사실을 무시하고 "시진핑 총서기의 지시정신을 심도있게 학습하고, 문화의 뿌리와 맥을 찾아 자신감의 기반을 다진다" "대중 특히 청소년이 중화문명을 더욱 잘 인식하고 일체감을 갖도록 해야 한다."고 말한다.
CCTV는 자칭 쓰촨성문물고고연구원, 삼성퇴유적지고고발굴대, 삼성퇴박물관, 북경대학, 사천대학, 상해대학, 북경이공대학디지틸시연실험실등 대학, 기관과 연합하여 이 프로그램을 제작했고, "고촉왕국(古蜀王國)의 재현"이라고 말했다.
삼성퇴문화를 억지로 '중화문명'에 끼워넣는 것은 중공지도자로 하여금 자신감을 증강시킬 수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삼성퇴문화의 진상은 사람들에게서 더욱 멀어지게 될 것이다.
CCTV프로그램은 스스로 삼성퇴문화 고고학의 "유일한 입구"라고 말했다.
CCTV의 <삼성퇴기환지려> 프로그램에서는 삼성퇴에서 출토된 문물사진, 영상을 보여주고 또한 컴퓨터그래픽으로 보여주면서 "신비한 고촉왕국을 감상"할 수 있고, "디지탈공간에서 삼성퇴의 과거, 현재와 미래를 재구성했다"고 말했다.
이는 사람들에게 컴퓨터그래픽으로 만든 SF영화를 떠올리고, 괴상망칙한 온라인게임영상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삼성퇴문화는 아직 진상이 드러나지 않았다. CCTV 프로그램에서는 그러나 '고촉문화가 도대체 어떠했는가? 삼성퇴에는 성이 있는가? 삼천년전의 고촉 원주민은 어떤 곳에서 생활했는가? 신비한 제사의식은 어떻게 거행되었는가? 청관산 대지의 대형건축기반위에 도대체 어떤 건축이 있었는가?" 심지어 "세계지도에 개방하는 삼성퇴 고성을 재현한다"고까지 말했다.
간단한 사진, 영상짜집기, 그리고 주로 상상에 의존한 컴퓨터그래픽화면을 가지고 CCTV는 삼성퇴 고고학으로 "들어가는 유일한 입구"라고 주장했다. 중공당매체는 가짜과학을 만든다는 것이 확실하다. 더욱 확실하게 말하자면, 중공은 현재 자신을 삼성퇴문화의 '유일한 권위자'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역대이래로 신을 믿지 않는다고 말하는 중공정권은 수시로 '미신'을 상대방을 공격하는 무기로 삼아왔다. 그런데 지금 급박하게 모든 사람들이 '미신'을 믿게 만들려 한다. 중공만이 삼성퇴문화의 원류를 해석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중공은 어떻게 문물중의 신상(神像)을 해석할 것이며, 또 어떻게 소위 "유물사관"에 따라 신을 체현했다고 말할 것인가?
고고학계의 서로 다른 예측에 따르면, 삼성퇴문화는 5년년 내지 3천년전에 발생했다. 즉 역사교과서의 하(夏), 상(商)시기이다. 그때 중원문명은 막 일어나고 있었다. 그런데 쓰촨의 삼성퇴지구에서는 이미 뛰어난 문화수준과 문명을 보여주고 있다. 중공이 만일 삼성퇴문화를 '중화문명'에 억지로 집어넣는다면, 그야말로 중국오천년역사를 새로 써야한다는 것이 아닌가?
CCTV도 부득이 인정하긴 했다. "삼성퇴에 관하여, 3천2백년전에 관하여, 현재 우리는 아무도 분명한 결론과 판단을 내릴 수는 없다" 다만 CCTV는 여전히 자신의 역량은 고려하지 않은채 삼성퇴 고고학의 "유일한 입구"라고 말했다.
CCTV는 단지 "3천2백년전"이라고 말했느데 ,고의로 삼성퇴문화의 시간선을 5천년이내로 들어오게 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 않다면 5천년이전은 신석기, 구석기시대라는 결론이 철저히 뒤집혀버리기 때문이다. 마르크스 엥겔스, 유물사관, 진화론으로는 도저히 설명이 불가능하다. 이것이 아마도 중공이 삼성퇴문화의 "유일한 권위"가 되어야 하는 핵심이유중 하나일 것이다.
삼성퇴에서 출토된 금기(金器)는 상(商)문화의 영향을 받았다?
6월 16일, CCTV는 다시 <다채로운 삼성퇴! 고촉금기사용은 상왕조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 실증되었다>고 보도한다. 보도에 따르면, "고고학전문가는 삼성퇴의 황금사용은 기실 상왕조의 영향을 받은 지역이라는 특징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CCTV는 직접 장강유역의 삼성퇴문화를 중원문화인 상나라시기에 집어넣었다. 양자는 원래 아무런 관계가 없다. CCTV는 그러나 금기를 가지고 양자를 연결시켜버린 것이다. 그리고 "삼성퇴 금기는 모두 공통된 특징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바로 황금을 박편(薄片)으로 만들어, 기물의 표면을 감싸는 것이고, 작용은 장식을 위한 것이다." "전문가의 소개에 따르면, 기실, 정저우 상성, 후베이 판룽과 안양의 은허등의 유적지에서 출토된 문물중에서 이런 장식방법이 모두 발견된다." "황금으로 기물의 표면을 장식하는 것은 상왕조 및 상왕조의 영향을 받은 지역의 일대특징이다."
이런 억지논리대에 따라 CCTV는 삼성퇴문화가 중원의 상왕조영향을 받았다고 단정한다. 상왕조가 만일 진정으로 삼성퇴문화의 발생에 영향을 주었다면, 왜 상응한 역사기록이 없을까? 그리고 섬성퇴문화에는 왜 중원문화보다 빠르게 흥기했을까? 출토된 문물도 상당히 정교하고 선진적인 공법을 썼다. 만일 쓰촨의 삼성퇴문화가 중원의 상왕조문화에 영향을 끼쳤다고 말한다면 그게 더 합리적일 것이다.
CCTV는 보도에서 어쩔 수 없이 인정했다. "삼성퇴에는 북방초원지구의 귀걸이, 코걸이같이 직접 인체에 사용하는 황금장식물은 발견되지 않는다."
황금박편장식만을 가지고, CCTV는 삼성퇴문화가 "상왕조의 영향을 받았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다른 증거와 논리는 찾아내지 못했다. 당매체는 일관되게 중공정치국의 "중화문명원류탐사"라는 지시에 따라, 모든 것을 '중화문명'에 끼워넣었다. 아마도 화하의 조상들은 등에 식은 땀을 흘리고 있을 것이다.
황금의 모양은 괴상(壞狀, 덩어리모양), 조상(條狀, 막대기모양), 편상(片狀, 조각모양) 혹은 소상(塑像)등 전세계의 누구도 채용할 수 있다. 다른 여하한 국가에서도 모두 유사한 점이 나타날 것이다. 그런 것들까지 모두 "상왕조의 영향을 받았다"고 말할 것인가?
만일 삼성퇴문화와 중원문화간에 모종의 연결이 있다면, 삼성퇴문화가 신비롭게 사라지기 전에, 왜 중원지역에서는 전혀 모르고 있었을까? 많은 삼성퇴문화의 문물들이 지하에서 3천년이상이나 잠들게 놔두었을까?
2천년전의 삼국시대에 제갈량은 유비를 보좌하여 촉을 정복했고, 천하를 삼분했다. 그는 천문지리에 능통했지만, 삼성퇴문화를 발견하지 못했다. '고촉왕국'과 연결이 있는지 여부도 아무런 단서가 없다.
삼성퇴의 진상은 멀어지고 있는가?
삼성퇴문화는 신비롭게 일어나서, 또한 신비롭게 사라졌다. 그리고 중원문화의 기원이 되지 않았다. 화하민족의 탄생, 발전은 삼성퇴와 관계가 크지 않은 것같다. 삼성퇴 유적지는 어쨌든 지금 중국경내에 있고, 중공의 당매체는 부족한 자신감을 채워줄 것으로 보고 중공고위층에 아부하기 위하여 삼성퇴문화를 억지로 '중화문명의 원류탐색'에 집어넣고 있다. 이렇게 왜곡된 정치선전은 아마도 삼성퇴문화의 고찰을 잘못된 길로 인도하게 될 것이다.
삼성퇴에서 출토된 대량의 문물중에서, 종교, 제사와 관련이 있다고 여겨지거나 혹은 신과 관련이 있다고 여거지는 것은 분명 다시 한번 중공의 이데올로기에 중대한 충격을 가할 것이다. 중공은 권력을 잡은 후, 체계적으로 중국5천년전통문화를 망가뜨리고 다시 썼다. 소위 봉건우매문화라는 개념으로 여러 대의 중국인을 속여왔다. 지금, 삼성퇴문화가 갑자기 등장했으니 중공으로서는 어찌해야할지를 모르게 되었다. 다시 한번 거짓말로 백성을 우롱할하고자 하지만, 도대체 어떻게 해야할지 맥락을 잡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적지 않은 전문가들은 발견했다. 삼성퇴문화는 <산해경(山海經)>의 기재와 부합하고, 신화는 원래 '신화'가 아니었고 진실로 존재했던 것이다. 확실히 중공은 고고학자들이 이런 방향으로 연구해나가는 것을 허용치 않을 것이다. 바람에 따라 키를 돌리고, 아부하고 영합하며 윗사람의 뜻을 받드는 소위 '전문가', '학자'들은 삼성퇴문화의 '권위자'로 포장되고, 결국 삼성퇴문화를 억지로 '중화문명'의 갈래중 하나로 해석할 것이다.
대다수의 중국인들은 이렇게 편협하지 않다. 반드시 삼성퇴문화에 '중화문명'이라는 레테르를 붙여야 민족자부심이 오른다고 생각지도 않는다. 다만 많은 사람들은 중국전통문화에 대하여 그다지 많이 알지도 못하고, 고고학은 더욱 구경하는 수준이다. 그래서 쉽게 중공의 선전에 속아넘어가게 된다. 중공치하에서 삼성퇴문화는 아마도 진정으로 본모습을 찾기는 어려울 것이다.
중공이 삼성퇴문화에 '중화문명'의 레테르를 붙인 후, 다른 국가의 고고학자들은 자연스럽게 배제된다. 전세계는 중공이 공개한 문물 그리고 약간의 사진과 영상외에는 관련된 해석이 모두 중공의 선전에서만 나온다. 그래서 CCTV는 자칭 "유일한 입구"라고 말한 것이다.
중공의 체계적인 오도선전
6월 17일, 중앙기율검사위 웹사이트에서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문물설사(文物說史): 섬성퇴가 다시 새롭게 올라온다>라는 글을 싣는다. 글에서는 일부 문물을 묘사한 후, 마찬가지로 "중화문명의 박대정심에 감탄한다" "삼천여년전의 고촉인의 선물이다" 그리고 "신중국성립후, 삼성퇴는 비로소 진정하게 깊이 묻혀 있던 땅속의 무궁한 보물을 토해냈다." 그리고 신비막측하게도 "고대남방실크로드"라는 말까지 덧붙였다.
중앙기율검서위는 더욱 정치선전을 잘하고, CCTV보다도 더 나갔다. 글에서는 이렇게 단언한다: "삼성퇴에서 출토된 문물은 선명한 현지특색을 드러낼 뿐아니라, 중원등지문화에서 온 영향도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중화문명의 다원일체국면의 형성에 유력한 증거를 제공했다."
확실히, 중공의 내부는 삼성퇴문화를 어떻게 선전할 것인가를 놓고 상응한 조치를 취한 것같다. 단순히 어느 한 당매체의 독자적인 움직임은 아니다. "청령(제로코로나)" 정책이 실패하고, 경제는 심각하게 문제가 발생하고, 국제적인 지위도 위태롭게 되었으니, 중공으로서는 시선을 급히 돌려야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좋은 소식이 필요하게 된 것이다. 이를 통해 "대국자신" "제도우세"를 선전할 수 있도록.
6월 18일, 신화사가 등장한다. 웹사이트의 첫페이지에 <삼성퇴 조족곡신정존신상(鳥足曲身頂尊神像) 3천년후의 '합벽(合璧)'>이라는 보도를 올린다. 신화사는 당연히 신상을 해석하고자 하지는 않았다. 중점을 '중국청동문명의 '최고봉'의 작품'이라는데 두었다.
중국의 청동문명의 기원은 중원지구일 것이다. 현재의 하남성 낙양시 언사구 적진 이리두촌 유억지이다. 기원전 1920년에서 1520년으로 신석기시대말기와 청동기시대초기에 걸쳐 있다고 인정된다. 그리고 이리두문화라고 불린다. 그후 이리강문화는 하남 정주의 이리강유적지로 인해 명명되었고, 개략 기원전1500년에서 1300년 사이이다. 동기의 사용범위가 점점 더 광범위해진 것이다.
삼성퇴문화는 기원전2800년에서 1100년전이다. 그 문물은 신화사에서 정의하기로 "중국청동문명의 최고봉"이다. 당매체는 계속하여 전문가들이 오랫동안 정립해온 역사적 결론을 뒤집어 버리고 있다. 고고학자들을 대신하여 삼성퇴문화에 대하여 정치적인 결론부터 내리고 있다.
중공은 한편으로 삼성퇴문화를 가지고 자신의 얼굴에 금칠을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삼성퇴문화에 대한 두려움도 드러내고 있다. 중공은 신을 믿지 않는다고 하면서 극력 신을 멸시한다. 그러나 삼성퇴문화는 강렬하게 세상사람들에게 신의 존재를 드러내주고 있다.
결론
중공은 삼성퇴문화에 대하여 오도와 왜곡을 하고 있다. 사람들은 큰 경계심을 가져야 한다. 여러 천재지변의 고난과 어려움 속에서 진정 사람들을 최후의 희망으로 인도하는 것은 기실 신이다.
신은 삼성퇴문화을 도래와 퇴장을 장악하고 있었고, 중원문화와 병존하게 하였다. 그리고 양자간에 교집이 없게 하였다. 신은 최종적으로 중원문화를 남겼고, 삼성퇴문화는 물러나게 했다. 중원문화는 중공에 파괴된 후, 신이 다시 홀연 인류에 삼성퇴문화를 보여준다. 그러면서 신의 존재를 드러낸다. 이는 명확하게 사람들에게 얘기해주는 것이 아닐까? 신에 위배되고, 신을 모멸하는 중공정권의 말로가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을. 사람들은 스스로 최종적인 판단과 선택을 해야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만일 사람이 진정 신의 계시를 깨닫는다면, 그리고 진정 진상을 인식하는 올바른 길로 들어선다면 신이 사람들에게 준비해준 재생의 길이 열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