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선진)

중국에서 왜 하왕조(夏王朝)의 유적을 발견할 수 없을까?

중은우시 2022. 6. 9. 14:42

: 미언천담(薇言淺談)

 

수십만년전의 베이징인도 이미 발견했다. 그런데 왜 하왕조는 발견하지 못하는가? 수십만년전의 유적은 단지 연대만 판정하면 된다. 그러나 하왕조의 유적은 그것이 ()”로 판정되어야 한다. 현실에서 일부 유적은 발견했다. 그러나 그것이 하왕조의 것인지는 모른다(혹은 서방에서 인정하지 않는다).

 

예를 들면, 만일 문명이 있어, 흙으로 집을 짓고, 기반을 다지지 않고, 지붕에는 식물로 뒤덮여 있었다면, 그것은 아무 것도 남기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또 그 문명의 모든 물품이 후속자가 모두 받아들여서 후속자의 이름을 써놓았다면, 그것은 후속자의 문물로 인식될 것이다. 예를 들어 지난 세기의 물건을 네가 금세기에 쓰면서 금세기의 기술로 칠해버리면, 그것은 후인들이 아마도 금세기의 물건이라고 인식하게 될 것이다.

 

국외를 보면 하나라는 마치 아틀란티스대륙전설과 유사하다. 아틀란티스와 동시대의 문명은 분명히 있다. 그러나 그것이 반드시 아틀란티스라고 할 수는 없다. ()왕조의 전설에 따르면 자신의 조상이 하()라는 적을 무찔렀다고 한다. 그러나, 이 하가 반드시 이리두(二里頭)문화라고 할 수는 없다. 이리두의 역사도 반드시 전설상의 하나라의 역사라고 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하의 보계와 이리두가 일치한다는 아무런 증거도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아마도 역사상 우연의 일치일 수도 있다.

 

기실 이리두문화유적은 기실 상왕조 초기의 유적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하왕조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목소리가 계속 나오는 것은 바로 상나라사람들이 하왕조에 대하여 기록을 남겨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리두유적이 발굴된 후, 그것이 하왕조의 것이고 상왕조의 것이 아니라고 확정할 수 없었던 것이다. 더욱 이른 용산문화에도 하왕조의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다. 심지어 용산문화와 황제(黃帝)중 누가 더 이른지에 대하여도 결론이 나지 않았다. 그리고 황제가 도대체 진정한 우두머리였는지도 확실히 말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삼황오제와 하왕조는 모두 주()왕조의 사람들이 한 말이기 때문이다.

 

이리두문화유적은 하왕조말기의 도성유적지에 해당할 수 있을 뿐이다. 역사기록에 따르면, 하왕조는 400여년간 존속했다고 한다. 왜 하왕조의 세계와 하나라도성의 변천을 연구하는가? 그것은 바로 초기 하왕조의 도성과 이리두가 전승관계에 있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함이다. 가만 고고학적으로 더욱 이른 하왕조의 도성이라는 지위에 부합하는 도시유적은 발견되지 않았다(이리두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규모가 협소하다). 이런 문화의 전승관계는 명확하지 않다. 그래서 하왕조와 초기상왕조의 이견은 비교적 크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이리두의 연대측정은 개략 기원전1,800년을 전후한 때로부터 기원전 1,600년이다. 다만 하왕조는 역사기록상 개략 기원전 2,000년부터 기원전 1,600년까지이다.

 

그래서, 현재 이리두가 하왕조라고 결론내리는 것은 엄정하지 못한 것이다. 가장 합리적인 설명은 하왕조에 문자가 없었다고 보는 것이다. 즉 사전문명(史前文明)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엄격한 의미에서 관방의 정식명칭인 국호는 없다. 그저 다른 사람들이 취한 대칭(代稱)이 있을 뿐이다. 예를 들어 이리두문화”. 그 시대는 교통수단의 제한으로, 동시에 몇 개의 정권이 존재했을 가능성도 있다. 하나라가 반드시 영토가 광활한 통일왕조일 수는 없다. 어쨌든 그 시대는 근본적으로 도로와 편리한 교통도구가 없었고, 소국과민(小國寡民)이 기본적인 모습이었다.

 

그 시대에 누구도 쉽게 수백리 바깥의 무리를 효과적으로 지배할 수 없었다. 만일 확실한 증거가 있어서 이리두가 하나의 부락이 아니고, 하나의 왕권집중의 문명국가라는 것이 증명되고, 또한 연대가 상왕조보다 이르다면, 그것은 상왕조역사의 일부분이 아닐 것이다. 상왕조와 구분되는 별도의 왕조일 것이다. 그 왕조가 스스로 붙인 이름이 ()”이든 ()”이든. 그것이 바로 사서에 기록된 하왕조일 것이다.

 

하왕조는 문자도 전해지지 않고, 사료에 기록도 없다. 기본적으로 전설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생산력은 아주 낮았을 것이고, 시간의 흐름에도 사라지지 않을 유적 같은 것을 남기지도 않았을 것이다. 개인의 추측으로 하는 그저 하나의 부락이었을 것이다. 그저 큰 부락이었을 것이다. 동시대에 유일한 것이 아니었고, 아마도 다른 부락보다 선진적인 생산력을 보유했을 것이며, 집도 지었을 것이다. 농사도 지었을 것이고, 목축수렵도 했을 것이며, 소금도 만들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 부족은 인구도 많고 생산력도 커서 주변의 부락들중에서 발언권이 컸으며 다른 부락들로부터 인정을 받았을 것이다. 그리하여 공주(共主)’로 추대되었을 것이다. 다만 그것은 나중의 국가처럼 각종 기구를 가지고 각 부락을 관리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상왕조는 아마도 어느 부락의 생산력이 두드러지게 발전하였을 것이다. 예를 들어, 도구를 만들어 하부락과 맞서싸울 실력을 보유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한걸음 한걸음 성장하여 공주가 된다. 그래서 어떻게 하문화를 판별할 것인지에 대한 논쟁의 논점도 추가적으로 연구되어야 한다. 왜 아무런 증거기록도 없고, 증명도 되지 않는지. 아마도 그것은 하의 청동기기술이 너무 낙후되었고, 문자를 오랫동안 남길 매개체도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지금 증거를 찾을 수 없는 것이다.

 

상왕조가 중원으로 진입하기 전에, 중원에는 확실히 어느 세력이 있었을 것이다. 이는 의고파(擬古派)와 신고파(信古派)파가 모두 동의하는 내용이다. 또한 지하의 발굴물로도 확인된다. 다만 견해차이는 그것을 하로 보느냐 아니냐에 있다. 비록 그것은 4기의 연대상으로 초기상왕조와 겹치지만, 그것은 분명 상이 아니다. 최대의 구분은 바로 족속이고, 생활방식이다. 도기, 그릇의 형상도 초기상왕조와 다르다. 용산문화말기의 특징을 지니고 있다.

 

이전에 ()”왕조가 있었다는 주장도 있다. 더 이전에는 당요(唐堯)” 즉 요임금이 개창한 , 순임금이 개창한 가 있었다는 것이다. 고대인들의 요순우에 관한 전설기록은 주로 마구잡이 추측에 의한 것이다. 군주 한명이 어떻게 수십년 백년이상 재위할 수 있단 말인가? 관건은 그것이 개별적이 아니고, 다수의 재위자들이 모두 그렇게 길게 재위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진실한 역사는 아마도 그들이 각자 하나의 조대(朝代)를 대표하는 것일 것이다. 다만 가 가장 시기가 가까워서 비교적 상세히 기록한 것이고, 그 이전은 그저 하나의 대표만을 남겼을 것이다.

 

문명과 문화는 고고학과 역사학에서 완전히 서로 다른 개념이다. 도구의 사용을 증명해야만 그것은 문화라고 부를 수 있다. 예를 들어, 수십만년전의 원시인류는 이미 불을 사용하고 일부 석기제작을 했다. 그래서 모두 문화라고 부른다. 다만 문명의 조건은 보다 까다롭다. 반드시 대규모의 사회집단조직이 있어야 하고, 다음으로 대규모의 문명실체의 표현물이 있어야 한다. 가장 전형적인 것은 건축이다. 그 다음으로 일정한 사회분업이 이루어져야 한다. 마지막으로 동시애의 문자형식의 기록이 있어야 한다. 이 몇가지중 넷째의 문자는 가장 관건적인 문명의 요소이다. 왜냐하면 최초의 문자는 사유제와 잉여제품의 대량출현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사유제와 잉여재산은 인류문명탄생의 가장 중요한 조건이다. 원시문화의 저급생산력과 모호한 사유제는 문자발명의 내재적 동력이 없다.

 

현재 중국의 각지역에는 모두 고문명이 발견되고 있다. 모두 7,8천년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래서 상왕조이전에 분명히 어느 왕조가 있었을 것이다. 단지 그것을 반드시 하라고 부르지 않았을 수 있다. 하왕조를 증명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문자이다. 예를 들어 어느 유적지에서 출토된 자가 쓰여진 기물이다. 인명이 포함된 기물이 나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람이 사서에 분명하게 하왕조의 사람이라고 쓰여 있다면 예를 들어 어느 국왕 혹은 귀족이라면 하왕조의 존재는 의심의 여지가 없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