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선진)

"봉화희제후(烽火戱諸侯)"의 역사진상

중은우시 2022. 5. 12. 23:51

글: 양광요(楊光耀)

 

"봉화희제후"라는 고사는 2천여년간 전해져 내려왔다. 이 이야기가 가장 먼저 나타난 것은 <여씨춘추(呂氏春秋).신행론(愼行論)>과 <사기(史記).주본기(周本記)>이다. 나중에 명나라때의 소설가 풍몽룡(馮夢龍)이 쓴 <동주열국지(東周列國誌)>에서 이를 윤색하여 소설에 넣는다. 그리하여 이 고사는 더욱 널리 알려지게 되고, 후인들이 주유왕(周幽王)의 호색혼용(好色昏庸)을 비웃는 근거가 된다. 

 

<사기.주본기>의 기재에 따르면, 포사(褒姒)는 아름다움으로 주유왕의 총애를 얻는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포사는 아름답지만 웃지를 않았다. 주유왕은 미인의 웃음을 얻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한다. 마지막으로 생각해낸 것이 '제후들을 놀리는' 것이었다. 그는 포사를 데리고 봉화대에 올라가서 봉화를 피워 제후들에게 병사를 이끌고 와서 왕을 보호하도록 요구한 것이다. 제후들은 봉화가 오른 것을 보자 천자가 위험에 처했다고 생각하여 급히 병력을 이끌고 구하러 달려왔다. 그런데 도착해보니 아무 일도 없었다. 그리하여, 불평불만을 품고 되돌아간다. 포사는 이 광경을 보고 웃었다. 그러자 주유왕은 자신의 방법이 통했다고 생각하여 여러번 봉화를 올려 제후들이 달려오게 한다. 그렇게 하여 포사의 웃음을 보고 만족한다. 제후들은 그런 모욕과 장난을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점점 오지 않게 된다. 주유왕 11년에 이르러, 신후(申侯)와 견융(犬戎)이 연합하여 주나라의 수도인 호경(鎬京)으로 쳐들어온다. 주유왕은 다시 봉화를 피워 제후들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제후들은 주유왕이 다시 장난친다고 여겨 달려오지 않았다. 결국 외부의 지원군이 없는 주유왕은 견융에게 패배하여 여산(驪山)의 아래에서 피살당한다.

 

이 이야기가 바로 '봉화희제후'이다. 기실 이 이야기를 자세히 살펴보면 근본적으로 소설가의 허구라는 것을 알 수 있고, 믿을만한 것이 못된다. 사학자인 전목(錢穆)은 <국사대강>에서 이렇게 반박한다:

 

"제후들의 병사는 봉화를 올린다고 동시에 도착하지도 않는다. 그리고 적군이 오지 않았다는 것을 들으면 분명 멈추고 되돌아갈 것이다. 봉화를 올려 경고를 하는 것은 한인들이 흉노를 대비한 것이었다."

 

진(晋)나라때 출토된 <급총기년>(일명 <죽서기년>)과 몇년전에 발견된 "청화간(淸華簡)"에는 이런 황당무계한 이야기가 담겨 있지 않다. 이를 보면 이 일은 실제로 발생한 일이 아니다.

 

실제로, 주유왕이 죽고 나라가 멸망한 것은 '봉화희제후'와는 전혀 관련이 없다. 이 황당한 이야기의 배후에는 20여년에 걸친 왕실의 내부투쟁이 숨어 있다.

 

주유왕 3년, 포국(褒國)은 경성경국의 미녀를 주천자에게 바친다. 그 미녀가 바로 나중에 '홍안화수(紅顔禍水)'의 대명사로 불리는 포사이다. 주유왕은 포사를 보자마자 사랑에 빠진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함께 붙어다녔다. 그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삼천총애재일신(三千寵愛在一身)"의 포사는 주유왕을 위해 아들을 낳는다. 그 아들의 이름은 백반(伯盤)이다. <사기>에는 '백복(伯服)'이라고 되어 있으나, <죽서기년>과 <청화간>에는 모두 '백반'으로 되어 있다. 주유왕은 애옥급오(愛屋及烏)로 이 아들도 총애한다. 포사는 황후에 오르고 싶다는 야심을 갖게 된다. 주유왕의 정실왕후인 신왕후(申王后)와 주유왕과 신왕후사이에 태어난 장남인 태자 의구(宜臼, <사기>에는 宜咎라고 적었다)는 바로 포사가 제거하려는 목표가 된다.

 

이후는 대체로 포사와 신후 사이의 궁중투쟁이다. 포사는 총애를 받고 있어 매일 주유왕의 곁에서 백반을 칭찬하고 의구를 폄하한다. 주유왕도 점점 의구를 폐위시키고 백반을 태자에 앉힐 생각을 갖게 된다. 몇년이 지나지 않아 포사는 순조롭게 왕후에 오르고, 아들 백반도 태자에 오른다. 그리고 폐위된 전태자 의구는 호경에서 쫓겨나 모친의 나라인 신국(申國)으로 도망친다. 주유왕은 자신이 아끼는 후비와 아끼는 아들을 왕후와 태자로 삼았고, 포사의 야망도 실현되었다. 그러나 그들이 생각지 못했던 것은 이 일이 화근을 심었다는 것이다.

 

주나라때의 종실제도를 약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모두 알고 있을 것이다. "적장자계승제(嫡長子繼承制)"는 '주례'의 근봉예법이다. 주유왕이 아무런 이유없이 신후와 의구를 폐위시키고, 포사, 백반을 세운 것은 주례에 심각하게 어긋나는 행동이다. 이는 주천자의 위신에 대한 치명적인 타격이었다. 그리하여 이후, 제후들은 왕실에 점차 냉담해지고, 결국 나중에 주유왕이 위기에 처해도 아무도 도와주지 않게 된다.

 

"주유왕은 포사를 왕후로 삼고, 태자를 폐위시키며, 포사의 아들을 태자로 세운다. 그리고 여러번 제후들을 무시한다. 그리하여 제후들이 반란을 일으켰다."(<사기.진본기>)

 

신국으로 도망친 폐태자 의구는 부왕과 포사에 대한 원한이 컸다. 왕위를 차지하기 위하여, 그는 외삼촌 신후와 반란을 일으키기로 결심한다. 주유왕9년, 신후는 증국(繒國), 허국(許國) 및 견융과 연합하여 조카 의구를 '천왕(天王)'으로 세운다. 그가 바로 나중의 주평왕(周平王)이다.

 

"유왕구년, 신후가 서융과 증을 청했다." <금본죽서기년>

 

"먼저 신후, 노후(魯侯, 繒侯의 오자일 것이다) 및 허문공(許文公)과 평왕(주평왕 즉 의구)을 신에서 옹립한다. 원래 태자였으므로 천왕이라 부른다." <좌전. 소공26년> <급총죽서기년>

 

주유왕은 아들이 신국에서 왕위에 올랐다는 말을 듣고는 대노한다. 자신의 '주천자'로서의 합법적 지위를 드러내기 위하여, 즉시 태실산(太室山)에서 회맹을 거행하고, 병력을 일으켜 신국을 친다. 전쟁초기, 주유왕의 군대가 약간 우세를 점했고, 계속 치고 들어가 한때 신국의 국도를 포위한다. 그러나 바로 이 때, 신국의 동맹국인 증국과 견융의 군대가 도착하여, 주유왕의 군대의 배후를 친다. 주유왕은 대패하고, 신국, 증국, 견융은 그 기회를 틈타 주유왕을 역으로 공격한다. 결국 주유왕, 백반을 여산의 아래에서 죽이고, 포사는 포로로 잡아 끌고가는데, 그 행방은 알려지지 않았다.

 

"유왕이 병사를 일으켜, 평왕을 서신에서 포위한다. 신나라사람들은 주평왕을 내놓지 않았다. 증나라사람과 견융이 주유왕을 공격한다. 유왕과 백반이 피살된다." <청화간. 계년> 

 

"신후가 노하여, 증국, 서이 견융과 유왕을 공격한다....마침내 주유왕을 여산의 아래에서 죽이고, 포사를 포로로 잡았다." <사기.주본기>

 

유왕이 죽은 후 그의 옛신하들은 왕자 여신(余臣)을 왕으로 세우니, 그가 주휴왕(周携王)이다. 

 

"유왕이 죽고, 괵공한(虢公翰)은 다시 왕자 여신을 휴에서 세운다." <고본죽서기년>

 

"방군(邦君), 제정(諸正)은 주유왕의 동생 여신을 휴에서 세우니 그가 주휴왕이다." <청화간.계년>

 

이때의 주나라는 "이왕병립(二王幷立)의 국면이 나타났다. 법통과 정의에서 보면 주휴왕이 즉위한 것은 주평왕정권에 거대한 타격이었다. 어쨌든 주평왕은 '시군시부(弑君弑父)'의 죄명을 뒤집어 쓸 수밖에 없다. 만일 주휴왕이 자리를 안정적으로 잡고, 위신을 세워서 천하의 제후들에게 거병하여 '역적을 토벌하자'고 호소하면, 주평왕정권은 무너지게 될 것이다. 이런 불리한 형세를 뒤집기 위해, 주평왕은 먼저 '시군'의 죄명을 견융에게 뒤집어 씌운다. 그후 각종 수단으로 주변의 제후들을 매수하여 지지를 얻어낸다. 그중에는 진문후(晋文侯)가 있다. 그는 많은 토지를 하사받는다. 정무공(鄭武公)은 신후와 정략결혼을 시킨다. 동시에 사도(司徒)의 관직을 세습하게 된다; 위무공(衛武公)은 작위가 올라간다; 진양공(秦襄公)은 제후로 책봉되고, 동시에 주나라왕실의 '용흥지지'를 봉토로 받게 된다.

 

"진(秦), 진(晋)에 기(岐), 빈(邠)의 땅을 하사한다" <금본죽서기년>

 

"평왕은 정무공을 사도로 삼고, 대대로 그 직을 세습하게 한다." <역사.주실동천>

 

"무공십년, 신후의 딸을 부인으로 취하다." <사기.정세가>

 

"평왕은 양공을 제후로 삼고, 기의 서쪽 땅을 하사했다." <사기.진본기>

 

"주평왕은 무공을 공으로 명한다" <사기.위강숙세가>

 

그리하여, 최초의 "이왕병립"에서 관망하던 태도를 취하던 진, 정, 위, 진의 4곳의 제후들이 주평왕을 지지하게 된다. 주평왕에 의해 '시군'의 죄를 뒤집어쓰게 된 견융은 보복으로 기, 빈의 땅을 공격한다. 그러나 진, 진의 두 나라가 병사를 일으켜 견융을 격퇴하고, 당초 주평왕과의 약속에 따라 그 땅을 차지한다. 기주(岐周)의 옛땅을 상실한 주평왕은 할 수 없이, 진, 진, 정 삼국의 호송하에 성주(成周)로 이전한다. 즉 낙읍(雒邑)이다. 다시 몇년이 지나, 진문후는 영토확장과 자신의 이익을 공고히하려는 목적에서 병력을 이끌고 주휴왕정권을 멸망시킨다. 그리하여 주평왕은 '천하독존'의 지위를 갖게 된다.

 

"이십하고 일년, 진문후는 주휴왕을 휴에서 죽인다." <청화간.계년>

 

"이십일년, 휴왕은 진문공에게 살해당한다." <고본죽서기년>

 

주왕실의 20여년에 걸친 내전은 이렇게 끝난다. 주평왕은 바라던데로 '천하공주(天下共主)'의 지위에 오른다. 그러나 그는 '시군시부'의 죄책을 벗어날 수 없었다. 제후들은 비록 주평왕을 명확하게 반대하지 않았지만, 사적으로는 그를 무시했다. 천자의 위신은 땅바닥에 떨어진 셈이다. 여러 제후들은 각자 자신이 하고 싶은대로 했고, 마음대로 다스렸으며, 주왕실은 무시한다. 그리고 왕실이 동쪽으로 옮겨간 후에는 자주 큰 제후들에게 끌려다녔다. 주왕실은 이런 상황을 벗어나고자 노력했지만, 효과는 없었다. 심지어 "주정교질(周鄭交質, 주왕실과 정나라가 상호 인질을 교환하다)"의 국면까지 나타난다. 비교적 왕실에 가까운 신국과 괵국이 초(楚)와 진(晋)에게 차례로 멸망당한 후, 주왕실은 더욱 쇠락한다. 그후 제환공, 진문공등은 비록 '존왕(尊王)'의 기치를 내걸고 칭패했지만, 실제로 주천자를 그다지 존경하지 않았다. 진문공은 심지어 주양왕을 불러서 '천토지맹(踐土之盟)'에 참석하게 한다. (<춘추>에서는 이를 '천왕수하양(天王狩河陽)'이라고 보기좋게 말했지만). 전국시대에 이르러, 큰 제후들이 연이어 왕을 칭하고, 주왕실의 지위는 더욱 낮아진다. 결국 날로 쇠락하던 주왕실은 기원전256년 진(秦)에 의해 멸망한다.

 

주왕실이 점차 쇠락하면서, 제, 진, 송, 초, 진, 오, 월등 실력이 비교적 강한 제후국들이 차례로 칭패한다.(초, 오, 월 삼국의 국군은 심지어 왕을 칭한다). 그중 '이왕병립'기간동안 거대한 정치적이익과 거대한 영토를 챙긴 진(晋)나라의 실력이 가장 강했고, 중원을 백여년간 칭패한다. 주천자는 이들 큰 나라들을 견제할 도리가 없었다. 그리하여 그들에게 '방백(方伯)'이라는 칭호를 내리고, 그들의 패주지위를 인정했다. 그리하여 '정유방백(政由方伯, 정치는 방백이 한다)'의 국면이 형성된다.

 

장기적으로 보면, 서주,동주의 사이의 난국에서 이익을 가장 많이 얻은 사람은 진양공(秦襄公)이다. 그는 꿈에도 그리던 제후의 작위를 얻었을 뿐아니라, 주왕실이 탄생한 땅인 기풍(岐豊)의 땅을 얻었다. 비록 주평왕이 당초 그에게 준 '기풍의 땅'은 거의 공수표였지만(왜냐하면 그곳은 견융에게 점령당해있었다), 진나라 국군의 몇대에 걸친 노력으로 이곳을 완전히 점령할 수 있었고, 견융을 몰아낼 수 있었다.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은 진나라는 사방으로 확장하여 진목공에 이르러 서방의 패자가 된다. 기원전356년 진효공이 상앙변법을 채택한 후 진나라는 더욱 부강해지며 점차 천하통일의 길을 걷는다. 진양공이 나라를 세운지 오백년후에 진나라의 제33대 국군 진왕정, 즉 진시황은 육국을 평정하고, 천하를 통일한다. 역사는 새로운 페이지를 열게 된 것이다.